도이 다카코

 

'''일본 중의원 의장'''
'''제67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제68대
도이 다카코'''

'''제69대'''
이토 소이치로


'''일본 중의원 (효고 7구)'''
''선거제도 개편''

'''제41~42대
도이 다카코'''

'''제43~44대'''
오마에 시게오
'''제2대 사회민주당 당수'''
'''도이 다카코
土井 たか子(どい たかこ'''

<colbgcolor=#01A8EC><colcolor=#fff> '''출생'''
1928년 11월 30일
일본 효고현 고베시
'''사망'''
2014년 9월 20일 (85세)
'''임기'''
제68대 중의원 의장
1993년 8월 6일 ~ 1996년 9월 27일
'''본명'''
도이 다카코 (土井 多賀子)[1]
'''학력'''
교토여자전문학교[2] (졸업)
도시샤대학 (법학부 / 학사)
도시샤대학 대학원 (법학부 / 석사)
'''직업'''
대학 강사, 정치인
'''의원 선수'''
'''12'''
'''의원 대수'''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지역구'''
효고현 제7구
'''소속 정당'''

'''약력'''
일본사회당 부위원장
일본사회당 위원장
제68대 중의원 의장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부의장
사회민주당 위원장
사회민주당 명예 위원장
1. 개요
2. 일생
3. 정치 성향
4. 논란과 비판
4.1. 친북 성향 논란
4.2. 독단적인 당 운영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7.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정치인이자 교육인이다. 사회당의 제10대 위원장과 사회민주당의 제2대 위원장을 역임했다. 12선 의원을 지냈으며 여성이자 혁신(진보)계열로는 헌정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중의원 의장을 역임했다. 2005년 총선에서 패배한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2014년 작고했다. 전성기 때의 별명이 마돈나였다.

2. 일생


1928년 11월 30일 고베시에서 의사의 딸로 태어났다. 1945년까지 교토부에서 살았다가, 일본 본토 공습을 피해 고베 외곽으로 피신했다. 교토여자전문학교를 거쳐 도시샤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후, 도시샤대학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받아 1967년부터 2년간 칸사이가쿠인대학의 법학부 강사로 일했다.[3] 미군의 공습으로 유복했던 집안의 재산이 잿더미가 될번한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자연스레 진보쪽으로 성향이 기울었고, 대학생 시절 헌법학자 시노부 타바타의 반전 연설에 감동받아 호헌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중 일본사회당의 공천을 받아 정계에 입문하고 1969년 중의원 선거에서 효고현 제2구에 출마, 당선된다. 1980년 정부를 상대로 남녀고용차별과 부계밖에 인정하지 않는 국적법을 맹공하여 유명세를 탔고, 3년만에 다나카 스미코의 후임으로 당내 제2인자 자리인 부위원장에 취임했다. 1986년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참패해 마사시 이시바시 위원장이 사퇴하자 여성으로는 일본사회당 역사상 최초로 위원장직에 취임했다. 도이 다카코의 명료한 말투, 좌우대립 정리 및 민사당과의 협력, 국민정당으로의 전환 등이 합쳐졌다. 또한 1987년 지방선거에서 '''도이붐'''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회당의 지지율이 폭등했다. 자연스레 도이 다카코는 차기 총리감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경제 정책을 맹공하였으며, 이후 다케시타 노보루가 총리직에 오르자 리쿠르트 사건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다케시타를 내각총리대신직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동시에 이와테 재보선에서 승리했고 사회당 주도의 정권 교체 확률을 높였다. 1989년 15회 참의원 선거에서 ''' 3당 연합체'''이 대부분의 지역구에서 단일 후보를 냈고 사회당은 개선 의석의 두배 이상을 얻으며 55년 체제 이후로 최초로 자민당을 누르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때 '''마돈나 선풍'''이라고 불렸다. '산이 움직였다.'는 말도 이 때 나온 말이다. 그래서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될것이라는 전망이 있었지만 후보자를 많이 늘리지 못하여 149명 정도 내는데 그쳤다. 사회당이 136석을 차지하여 1967년 총선 이래 최대의석수를 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민당이 275석을 확보하여 여전히 정권을 유지한데다가 공명당은 부진하고 민사당은 참패하여 사회당 내부에서의 돌풍에만 그치고 다른 야당에 수혜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비판론이 제기되었고,[4] 평화주의 등 사회당의 정책이 구시대적이며 경제위기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도이 무용론'도 제기되었다. 정권교체의 기대감이 적어진 상태에서 치러진 1991년 지방선거에서 사회당이 패배하면서 결국 도이 다카코는 당수직을 사임한다. 그러나 그 이후로 사회당은 1992년 참의원 선거에서 PKO법 갈등으로 조직이 갈라지면서 참패했고 1993년 총선에서는 신당열풍으로 상당수의 표가 타 야당으로 넘어가면서 참패했다. 다만 정권교체의 보은으로 자유민주당의 과반 붕괴로 도이 다카코는 역사상 최초로 여성+진보계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1994년 자민당과 연합해 정권을 잡기도 했지만 무라야마 내각의 지지율이 부진한데다가 당내 지지기반도 신진당이나 공산당으로 휩쓸려나가며 사회당의 의석수는 급속히 줄어들어 상당수의 당원과 의원들이 민주당으로 탈당했고 민주당에서 구세대 정치인 이미지였던 도이와 무라야마의 입당요청을 거부하는 수를 썼기에 잔류했다. 1996년 중의원선거에서 사민당은 15석으로 참패했다. 도이 다카코는 무라야마 도미이치에 이어 사회민주당의 제2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96년 실시한 제41회 중의원 선거에서 사민당의 의석은 15석으로 망했어요 상태가 되었지만 오히려 도이 다카코 중심 체제가 성립되어 독단적인 당 운영을 한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신사회당오카자키 히로미는 아예 <창문 없는 당 운영 도이 다카코와의 결별>(...)이라는 저격 책을 쓰기도 했다. 1998년 사민당은 연립여당에서 이탈했고 졸지에 도이 다카코만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만다. 2000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부의장이 되기도 했고 2000년 총선에서 20석을 건졌지만 2003년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에게 표가 휩쓸린 영향으로 자민당 의원에게 처음으로 패하며 당수직에서 물러난다. 당수는 후쿠시마 미즈호가 이어받았다. 2005년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는 석패율 구제도 받지 못하면서 결국 정계를 완전히 은퇴했고, 2014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3. 정치 성향


여성 인권의 증진과 사회 복지의 확대를 주장한 전형적인 사회주의자이며, 특히나 인권운동 / 평화헌법 수호에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보여 호소카와 모리히로, 무라야마 도미이치 두 전직 총리와 함께 대표적인 친한파로 분류된다.

4. 논란과 비판



4.1. 친북 성향 논란


비록 '북한에 속았다'라는 발언을 한적도 있던 그녀였지만, 1989년 재일한국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납북 범죄자(...)[5]의 석방까지 요구하는 바람에 엄청난 비판을 받아야했다. 이게 한번이 아니라 친분이 있었던 김대중 대통령에게 한국에 체포되어있는 일본인 납치범 신광수[6]를 석방하도록 탄원했고, 이에 김대중 대통령이 '''정말 신광수를 석방하고 북한에 송환하면서''' 납북 일본인 문제 해결이 한층 꼬여버렸다. 납치피해자 가족들은 분개해서 도이를 성토했고, 이는 사민당이 폭망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꾸준히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의혹이 있었으며, 한반도 정책을 놓고 '친북'의 입장을 관철했다는 주장이 있다. 일본 공산당마저 도이 다카코의 친북 성향을 비판했다고 한다. 2002년 아베 신조 내각관방장관은 도이 다카코의 이런 행보를 두고 '지극히 멍청한 의원'이라고 비난했고, 이 사건이 2000년대 이후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결국 사민당과 도이 다카코가 영원히 재기하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다만 상술한 내용은 일본어 위키백과의 내용을 참조했기에 내용이 편파적일 수도 있다. 당장 일본어 위키백과의 해당 문서에 '도이 다카코가 위안부 소녀상 설치 운동 당시 한국에게 돈을 받았다'(...)라는 다소 수상한 내용이 같이 실려있다. 다만 김대중 대통령 집권기에 신광수가 석방된 것은 사실이긴 하다.

4.2. 독단적인 당 운영


앞서 언급한 제41회 중원선 전후로 사민당을 사유화하고 독단적으로 운영했다는 비판이 있다. 신사회당이 이에 반발해 창당된 정당이기도 하며, 오카자키 히로미 현 신사회당 위원장 또한 동향에 성향도 비슷한 도이 다카코를 '창문 없는 당 운영' 이라며 맹비난한적 있다.

5.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기간'''
'''비고'''

1969 - 1996
정계 입문

1996 - 2014
당명 변경

6.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선거구'''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락'''
'''비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효고현 제2구

'''69,395표(10.5%)'''
'''당선(5위)'''
'''초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9,341표(14.9%)'''
'''당선(4위)'''
'''재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6,725표(13.6%)'''
'''당선(4위)'''
'''3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3,954표(13.1%)'''
'''당선(4위)'''
'''4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3,338표(15.1%)'''
'''당선(3위)'''
'''5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1,219표(12.9%)'''
'''당선(3위)'''
'''6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1,594표(15.1%)'''
'''당선(3위)'''
'''7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225,540표(24.8%)'''
'''당선(1위)'''
'''8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220,972표(24.1%)'''
'''당선(1위)'''
'''9선'''[7]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효고현 제7구

'''102,684표(46.6%)'''
'''당선(1위)'''
'''10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4,168표(62.8%)'''
'''당선(1위)'''
'''11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6,404표(40.8%)
'''석패율 당선(2위)'''
'''12선'''
200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2,684표(40.4%)
낙선(2위)


7. 여담


  •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일본 정부/한국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을 정도로 친한 성향이며,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도 적극적이었다. [8]
  • '이제, 하나의 산이 다시 움직이지 않아서는 안됩니다'라는 선거 슬로건이 유명하다.
  • 이외에도 '산이 움직였다.', '안되는 것은 안된다.' 등의 명언으로도 유명하다.
  • 현 사회민주당 위원장인 후쿠시마 미즈호는 도이 다카코가 발탁한 인사이다.
  • 취미는 가라오케파칭코(...)였다고 한다. 오죽 좋아했으면 15회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기자들을 모아서 서민스러움을 어필하려고 파칭코를 하는 모습을 찍게 했을 정도였다.
  • 생전에 찍은 사민당 광고 중에는 막과자집 주인 역할을 한 적도 있었다. #
  • 한신 타이거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 발성이 좋고, 여성 합창단에 소속되어있을 정도로 노래를 꽤 잘했다.
  • 중의원에서 의원을 칭할때 ~~씨(氏)라고 지칭하게 된 것은 도이 다카코가 중의원 의장으로 재임하면서부터이다.
  • 쓰지모토 기요미의 비서 급여 횡령 사건 당시 도이의 비서도 연관되어 있어서 도이도 덩달아 욕 먹었었다.
  • 햐쿠타 나오키는 도이의 사후 8일 후 트위터에 도이를 "그녀는 납치 같은 건 없다!라고 단언했을 뿐만 아니라 납북자 가족의 정보를 북한에 흘린 의혹도 있다"고 한 후 "매국노였다고 단언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참고로 햐쿠타도 도시샤대학 출신이라서 그녀와 동문이다.

[1] 후일 뒷부분의 한자를 히라가나로 개명했다.[2]교토여자대학[3] 당시에는 여성이 대학은 커녕 학교를 졸업하는것도 어려운 일이었다.[4] 단, 이건 어쩔수 없던 문제였던것이 연합정당인 곰명당과 민사당도 같이 리쿠르트 사건에 휘말려서 조직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또한 가이후 도시키가 어느정도 이미지를 만회한 상태였고, 또한 사회당이 후보자를 많이 늘리지 않았다는것도 감안해야된다.[5] 그것도 한두명이 아니라 29명이나 되었다고 한다.[6] 요코타 메구미를 납치한 장본인이다.[7] 일본의 마지막 중선거구제 중의원 선거.[8] 취소선 쳐져있지만 정말 농담이 아니다. 일본의 좌파계열 정당의 몰락의 원인은 국제연대에만 집중하며 자국의 이익에 무신경했다는 것이 가장 주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