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고쿠 요시토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변호사. 도쿠시마현 제1구 중의원,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내각관방장관, 법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2. 생애 및 정치 활동
도쿠시마현 도쿠시마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법원 직원, 어머니는 교사였다. 도쿠시마현립 조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대학에 진학한다. 대학 동기로 다니가키 사다카즈 전 자민당 총재가 있다. 대학 재학 중에는 신좌익 학생운동가로 활동했으며, 재학 중에 사법시험에 합격하면서 대학을 중퇴한 후 사법연수원을 수료해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로 근무했을 당시 소속 사무소의 부하 변호사로 후쿠시마 미즈호가 있었다.
1990년 제39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구 도쿠시마현 전현구에 일본 사회당 공천을 받아 출마해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한다. 그러나 1993년 제40회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낙선한다. 사회당이 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한 이후 사회민주당을 탈당해 민주당에 합류한다. 합류 후 1996년 제41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도쿠시마현 제1구에 출마해 당선되어 원내로 복귀한다. 이후 도쿠시마현 제1구에서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때까지 4연속 당선된다. 민주당 내에서는 정책조사회장, 간사장 대리 등을 맡았다. 또한 마에하라 세이지, 에다노 유키오 등과 함께 ‘료운카이(凌雲会)’라는 파벌을 만든다.
민주당 정권 출범 후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에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을 맡게 되면서 입각한다. 이후 간 나오토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을 맡는다. 관방장관 역임 당시 간 내각의 ‘그림자 총리’라고 불릴 정도로 내각의 실력자로 평가되었다. 특히 2010년 요코하마에서 열렸던 APEC 회의 중 한일 정상회담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 간 나오토 총리와 함께 배석했다. 관방장관 임기 중후반 무렵부터는 실언 논란으로 사퇴한 야나기다 미노루 법무대신의 후임으로 법무대신직을 겸임했다.[1] 그러다가 센카쿠 열도 중국 어선 충돌 사건 당시의 미흡한 대응 등의 이유로 중의원에서 불신임결의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불신임결의안은 부결됐지만 참의원에서 발의한 문책결의안은 통과되었다. 하지만 센고쿠는 법적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며 끝까지 버티다가 2011년 1월 개각으로 관방장관과 법무대신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민주당 대표 대행을 맡았다. 노다 요시히코 내각 당시에는 민주당 정책조사회장 대행 등의 당직을 맡았으며 내각관방 부장관을 맡기도 했다.
이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지역구인 도쿠시마현 제1구에서 자민당 신인 후보에게 밀려 낙선해 국회를 떠나게 되었다.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출마하지 않았다.
2018년 10월 11일 22시 30분에 도쿄의 자택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3. 지한파
지한파로 꼽혔던 정치인이다. 센고쿠는 외교 정책에 대해 아시아를 중시하는 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말하면서 중국, 대한민국 등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1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모임을 주도했었다. 당시 센고쿠는 '''“나는 매년 8월 15일에 한국 대구를 방문해 사할린 강제 징용 이산가족들의 총회를 방문해 유족들의 규탄의 목소리를 듣기로 했다. 21세기가 되었는데도 고이즈미가 야스쿠니에 가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위다. 일본을 위해서라도, 상대방을 위해서라도 그만둬야 한다.”'''라고 발언했다.
2006년 8월 경 방한해 한국의 여야 정치인들과 만나 “한일관계 악화는 고이즈미 탓”이라고 말하며 북한 문제에 관해 한일 협력을 호소했다.
2010년 7월, 외국 특파원들과의 기자회견에서는 한국과의 전후 보상 문제에 대해 “기존 정부의 대응은 미흡했다. 전체적으로 이 문제를 다시 매듭 짓겠다는 일본의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한일기본조약,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자금 공여, 차관 상환으로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 '''“법률적으로 정당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좋은 것인가”'''라고 발언했다. 또한 2010년에는 한일합병 100년 째를 맞아 한국 측을 배려해 '''독도의 일본 영유권 주장에 관한 내용을 방위 백서에 기재하지 않도록 촉구해 최종적으로 관련 내용이 기재되지 않게 되었다.'''
그 외에도 중의원 재직 당시에는 ‘재일 한국인을 포함한 영주 외국인의 법적 지위 향상을 추진하는 의원 연맹’, ‘조선 통신사 교류 의원 모임’, ‘민주당 한일 의원 교류 위원회’ 등의 모임에 참여했었다.
4. 논란
- 2010년 3월 3일, 참의원 예산 위원회에서 하라구치 가즈히로 총무대신, 마에하라 세이지 국토교통대신과 함께 지각을 한 전적이 있었다. 이거 때문에 위원회 개회가 15분 늦게 시작하게 되는 메이와쿠를 저질렀고, 히라노 히로후미 내각관방장관이 사죄하는 일이 벌어졌었다.
- 2010년 11월, 참의원 예산 위원회에서 자위대를 폭력 장치라고 표현해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 이에 자민당에서 거세게 항의하자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상황이 심각했는지 당시 총리였던 간 나오토도 센고쿠에게 주의를 주었다. 의외인 것은 자민당 소속인 이시바 시게루 전 방위대신은 센고쿠의 발언에 대해 타당한 표현이라고 말하며 옹호했다. 그리고 센고쿠는 이시바의 발언을 인용해 국회에서 다른 자민당 의원들과 논쟁을 벌였다.
- 2011년에는 여기자 성희롱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 당시 주간문춘의 보도로 밝혀졌는데, 당사자인 센고쿠는 부인하며 관련 내용을 보도한 주간문춘을 고소했으나, 재판 당시 해당 여기자의 증언을 통해 성희롱 발언이 사실임이 드러나 패소했다. 센고쿠가 여기자에게 말한 성희롱 발언은 “65세라 이제 안 선다.”였다.
5. 소속 정당
6. 기타
- 동일본 대지진 당시 계획 정전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도쿄전력에 문의했으나, 도쿄전력은 불확실한 점은 고객센터에 물어보라는 황당한 답변을 팩스로 보냈다. 이에 빡친 센고쿠는 바로 도쿄전력 담당자를 소환해 “내가 누군지 아냐!”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 산케이신문에서 센고쿠를 적대시 했다. 심지어 신문에다가 “센고쿠 요시토 연구”라는 제목의 기사를 연재하기도 했다.
- 공명당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 공명당의 이노우에 요시히사 간사장의 친족을 변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