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 프랑크

 



<colcolor=#fff><colbgcolor=#000> '''안네 프랑크
Anne Fr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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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기를 쓰기 시작할 무렵의 안네(13세). 안네가 1942년에 유대인 학교에서 찍은 사진으로, 이 사진이 가장 유명하고 널리 쓰이고 있다.
'''본명'''
아넬리스 "안네"[1] 마리 프랑크
Annelies "Anne" Marie Frank
'''시민권'''
독일인(~1941)
무국적(1941~)[2]
'''언어'''
네덜란드어
'''출생'''
1929년 6월 12일
바이마르 공화국 프랑크푸르트
'''사망'''
1945년 3월 12일 (향년 15세)
나치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강제수용소 베르겐 벨젠[3]
'''신체'''
163cm
'''대표작'''
안네의 일기
'''가족'''
오토 프랑크 (父), 에디트 프랑크 (母), 마르고 프랑크 (언니)
'''서명'''
[image]
'''링크'''

1. 개요
2. 생애
3. 작가로서 안네 프랑크
4. 기타
5.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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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ondanks alles, omdat ik nog steeds aan de innerlijke goedheid van den mens geloof.'''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는 것은 사람들의 진심은 정말 착하다는 것이다.'''

-안네의 일기中

'''내 소망은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 것.'''[4]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자행한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이자, 전쟁 당시 유대인의 일상을 담아낸 안네의 일기의 저자이다.

2. 생애


안네는 1929년 독일의 상업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유대인 사업가 오토 프랑크(Otto Frank)와 어머니 에디트 프랑크(Edith Holländer Frank)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에디트 프랑크는 개혁파 유대교(진보성향의 유대교) 신자여서 개혁파 유대교 신자로 자랐다. 나치 치하에서 독일의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1933년 프랑크 가족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민을 떠났고, 안네는 네덜란드에서 자랐다. 뒤에 나치 독일이 유럽 전체로 동맹국이나 점령국을 확대해 가며 네덜란드도 나치 치하가 되어 프랑크 일가는 미국 또는 캐나다로 망명을 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자, 홀로코스트를 피해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암스테르담의 은신처에서 또 다른 유대인 가족인 판 단 가족, 그리고 유대인 치과의사 알베르트 뒤셀과 함께 숨어 지냈다.[5]
안네의 일기는 안네가 13세 생일선물로 일기장을 받은 1942년 6월부터 은신처가 게슈타포에게 발각되어 수용소로 전원 압송된 1944년 8월까지 약 2년 2개월 동안 쓰였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 박물관에 일기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일기는 안네가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던 시기에 쓰였지만, 독일에서 태어나고 어렸을 때 독일어를 써와서 그런지 안네의 일기 대부분은 독일어로 작성되었다고 한다. 다만 안네 본인은 네덜란드어에 능통하였고, 독일에서 쫓겨난 이후에는 자신을 네덜란드인으로 규정하며 독일에 대한 반감과 네덜란드에 대한 호감을 일기에 남기기도 하였다.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 중 일부는 안네가 일기를 은신처에 있을 때부터 쓴 것으로 잘못 아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은 은신처로 가기 약 2달 전 생일 선물로 일기를 받은 직후부터 쓰기 시작했다. 안네는 책을 굉장히 좋아하여 14살 때 읽은 책이 '그리스 로마 신화' 와 '두 도시 이야기'이다. 수학 과목은 유급을 면하는 정도였지만, 언어 점수는 늘 만점이었다. 본인이 쓴 글을 반 전체 앞에서 발표할 정도였다. 필력과 문체가 유려한 이유는 엄청난 다독 덕분이었다.
안네 본인이 독서나 글쓰기를 좋아했던 것은 맞지만, '일기'로 워낙 유명해서 뭔가 내성적문학소녀일 것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은신처에 가기 전 학교에 다닐 때는 수학 빼고는 공부도 잘하고 인기가 많아 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가 많고 소위 '''잘 나가는 여자아이였던 것.''' 안네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많아서 안네 본인은 그런 남자애들을 '추종자'라고 불렀다. 정말 키 크고 잘생기고 수줍은 남자아이와 가까워질 때도 좋아하는 남자아이와 적당히 잘 지낼 남자를 구분해서 사귀는 똑부러지는 면이 있어서 '남자친구 여러 명 두는 게 뭐 어떻죠?'라며 열린 연애관을 가지고 있어 에디트와 늘 충돌했다. 한창 감수성이 풍부할 때에 은신처에서 보내면서 자신의 상황과 성장을 겪는 고뇌를 겪으면서 성장한다.[6]
은신처로 사용하던 회사에는 8명의 유대인들이 그곳에 숨어 있는 걸 모르는 직원들도 있었고, 손님들도 자주 오는 곳이었기 때문에 낮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소리가 들릴까봐 제대로 대화를 나누거나 일상생활을 하기도 어려웠으며,[7] 공간이 좁아서 여러 명이 방을 같이 사용해야 했다. 은신처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물품은 늘 부족하여 작은 속옷을 억지로 입어야 하거나, 개인 물건을 가질 수도 없었으며, 청결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졌다. 누구라도 견디기 어려운 답답한 환경이었으므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해외로 휴가를 다녀올 정도로 유복했던 가정에서 자란 안네에게는 특히나 힘들었을 것이다. 안네는 은신처의 열악한 환경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들에 비하면[8] 천국같은 곳이라며 견뎌내는 성숙한 모습도 보여준다.
속이 깊고 생각이 조숙한 데다 일기 후반엔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게 어떤 건지, 성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면서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였으며, 여자에게 성적인 감정을 느꼈던 일화 등 자신의 성 지향성이나 다양한 피임 방법 등 여성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어른들은 애들한테서 성에 관한 얘기를 쉬쉬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되면 자기들 끼리 올바르지 않은 정보만 갖게 된다. 아들뿐만 아니라 딸에게도 성교육을 해야 한다.’라는 통찰력 있는 말도 했다. 그래서일까, 안네 프랑크의 아버지는 딸의 일기를 출판할때 성에 대한 얘기 등 대체적으로 자신과 맞지 않는 일부는 쏙 빼놓아 후에 비판받았다.
사이가 가장 안 좋았던 건 어머니 에디트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건 상상해도,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건 상상할 수 없다"라고 적기도 했다.(무삭제판에만 수록) 에디트는 마르고가 잘못한 일들까지 안네를 혼낸 것 때문에, 어머니에 대해 가족으로써의 정조차 느끼지 못하기도 했다. 물론 에디트의 보수적인 성격이 진보적인 작은딸 안네와 충돌을 불러일으켰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을 듯하다. 양쪽 부모님과 다른 어른들이 명랑하고 수다스런 안네보다 얌전하고 공부를 잘 했던 언니 마르고를 편애했던(마르고만 칭찬하고 우대해준 것 등) 것도 영향이 크다. 마르고가 잘못하면 주의를 주는 것에 그치는 반면, 안네가 잘못한 것은 온 가족이 나서서 혼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에디트 때문에 나온 안네의 일기 중 유명한 문구가 '''"나는 친구 같은 엄마는 필요 없고, 엄마 같은 엄마가 필요하다."'''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아버지에게도 실망하고, 어머니에 대해 극렬한 증오심을 가진 것에 대해 조금 반성한다.[9]
일기를 읽어보면 안네의 성격은 크게 1942년 말과 1943년, 1944년 이렇게 구분할 수 있다. 1942년 말 은신처로 옮기기 전에는 굉장히 활발하고 항상 행복하지만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1942년 말 은신처로 옮기게 되면서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해 절망과 희망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가, 1943년 말기에 접어들면서 한층 성숙해진 모습을 보인다. 1944년에는 본인의 1942년 전쟁 이전 모습을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성장한 면모와 여성의 삶, 왜 전쟁이 일어나는지, 사람들 모두가 친하게 지낼 수 없는지 등에 대해 고민하는 굉장히 생각이 깊은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10]
역사를 너무 좋아한다고 일기에 여러 번 썼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푹 빠져 뮤즈 9명의 이름을 외우고, 헤라클레스 이전 애인 이름들도 줄줄이 읊었다.[11] 유럽 왕실의 계보도를 신문이나 책에서 발견하는 즉시 종이에 적어두고 외웠다.[12]
후에는 누군가의 밀고로 게슈타포에게 발각되어[13] 가족들과 흩어져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에 끌려갔지만, 당시 안네와 함께 있었던 수용소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대 희망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다행히 아우슈비츠의 의사들 중 한 명이 오토 프랑크의 친구였던지라, 안네 자매는 진료를 받고 오후 노동은 면제되는 등 아우슈비츠에서도 비교적 혹독한 생활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판 단 부인과 마르고와 안네 셋이 수용소에서 제일 건강한 여성 3명으로 뽑혀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 수용소 상황은 너무나도 열악했고[14], 이미 뼛속까지 쇠약해져 있던 안네의 언니 마르고는 베르겐-벨젠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장티푸스를 앓다가 결국 사망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안네 또한 1945년 2월 말 혹은 3월 초에 장티푸스로 결국 사망했다.[15]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인 1945년 4월 15일, 영국군이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해방시키고 피수감자들을 구출했다. 그러나 해방 당시 피수감자들의 상황이 어찌나 심각했는지, 휴 글린 준장의 지도 아래 영국군이 이들을 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음에도 약 6만여 명의 생존자들 중에서 정확히''' 13994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해방 이후 두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숨졌다. 만약 안네가 수용소에서 딱 한 달만 더 버텼다면 영국군이 그녀를 구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독자들과 수많은 역사의 증인들의 아쉬움을 자아내고 있다. 안네와 마르고를 비롯한 수많은 포로들을 학대하고 죽음으로 내몬 요제프 크라머 수용소장, 프리츠 클라인 수용소 담당의 등 베르겐-벨젠 수용소의 주요 관리 인원들은 영국군에게 전원 체포됐으며, 이들 중 많은 수가 교수대에 매달렸다. 벨젠 전범 재판에 대한 영문 위키의 설명.

안네의 사망 1달 후 영국군에 의해 해방되는 베르겐-벨젠 수용소. 그 열악한 수용 시설을 잘 보여준다. 19세 미만 시청 불가.

1945년, 철거되는 베르겐-벨젠 수용소

벨젠 재판
안네의 일기는 프랑크 가족의 친구이자 은신처 삶을 도왔던 네덜란드 여성 미프 히스(Miep Gies)[16]가 가지고 있었다가, 은신처 사람들 가운데 홀로 살아남은 오토 프랑크[17]가 네덜란드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 전하여 책으로 펴낼 수 있었다. 안네는 일기에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고 쓴 적이 있는데, 그 말대로 안네는 비록 수용소에서 15세의 나이로 죽었지만 그녀의 일기는 전 세계에서 스테디셀러가 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라 영원히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한 때 유튜브에서 화제가 된 이 영상은 1941년 7월 22일 네덜란드에서 촬영되었으며, 12살의 안네가 발코니로 얼굴을 내밀고 당일 결혼식을 치른 신랑 신부를 바라보는 모습이 수 초간 나왔다.
최근 연구에서 암스테르담의 배식권 암거래를 단속하던 나치방첩대(SD)가 건물을 수색하던 중에 우연히 안네의 은신처를 발견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밝혔다.#

3. 작가로서 안네 프랑크


안네의 꿈은 작가 또는 저널리스트였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다. 난 죽어서도 영원히 기억되고 싶다.' 라는 문구가 있다. 미프 히스 덕에 안네의 일기가 알려지게 되었고, 미프의 회고에 따르면 안네가 글을 쓰는 모습을 우연히 미프가 보게 되었는데, 안네가 당황하며 글을 감추자 안네의 어머니 에디트는 미프에게 '보다시피, 우리 딸은 작가랍니다.'라고 하며 딸의 재주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실제로도 안네의 글재주는 매우 뛰어났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안네의 일기는 단순히 전쟁 상황에서 어린 청소년이 쓴 일기를 넘어서는 가치를 가졌다. 유대인 박해나 전쟁, 은신처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과 두려움, 그 안에서도 느낄 수 있는 작은 즐거움들을 사실 그대로 자세하게 묘사했으며, 안네 자신의 생각이나 성장과정 같은 풍부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안네의 나이나 학교를 다니지 못한 것보다 문장 수준이 높아서 일기의 진위 여부가 논란이 되었으나[18], 원본이 알려지고 전문가들의 필체 감정으로 정말로 안네의 필체가 맞다고 판단됐다. 누군가는 그것을 두고 장래에 뛰어난 작가가 되어 더욱 많은 작품을 남길 수도 있었을 소녀가 나치의 인종 학살로 안타깝게 희생됐다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 일기가 책으로 출판되며 '나의 소망은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 것.' 이라는 소망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안네는 소설 2~3개를 집필 중이었고[19], 그 외로도 은신처 생활 중에서도 간간이 동화 등을 써서 은신처 식구들에게 들려주어서, 은신처 식구들도 재밌게 들었다고 한다.

4. 기타


  • 안네 프랑크는 네덜란드 정부가 지정한 네덜란드 역사 캐논의 주제 중 하나로 포함되어 있는데, 이 주제는 프리츠 판 오스트롬(Frits van Oostrom)이 위원장을 맡고 2006년 교육문화과학부 장관 마리아 반 데르 호벤(Maria van der Hoeven)에게 제출되었다. 네덜란드에 있는 메리 스쿨과 처음 2년간의 중등 학교들. 2007년 10월 3일 네덜란드 정부에 그녀가 여전히 주제 중 하나로 포함된 개정판이 제시되었다.
  • 안네의 은신처 생활 비밀문 복원 모습. 참고로 저기 있는 파일철들은 '밀가루 맛있게 만드는 법', '잼 보관법' 등에 대해 정리해 둔 것들이라고 한다.
  • 안네의 이름은 밤하늘에도 남아있다. 1995년 2차대전 종전과 안네의 50주기에 명명된 소행성 5535 Annefrank가 그것. 이 소행성은 NASA의 혜성 탐사선 스타더스트 프로브가 목적지 81P/빌트 혜성으로 향하면서 플라이바이를 실시하기도 했다.
  • 생몰년을 보면 알겠지만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제14대 대통령인 김영삼(1927~2015),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1929~1968) 목사, 영국의 대배우 오드리 햅번(1929~1993) 등과 동갑이거나 동년배이다. 만일 그녀가 무사히 종전 이후까지 살아남았다면 충분히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있었기에 안타까움을 더한다.

5. 바깥 고리



[1] 네덜란드어독일어 발음은 '아널리스 아느(네덜란드어: /ɑnəˈlis ˈɑnə/, 독일어: /anəliːs ˈanə/)'에 가깝다. '안네'는 관용으로 인정된 표기다.[2] 홀로코스트 실시 후 유대인들은 독일 국적을 박탈당한 듯하다.[3] 사망일자는 수용소의 기록이나 베르겐-벨젠 수용소에 수감됐던 생존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사망 시점이 1945년 2월 말 또는 3월 초 정도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애석하게도 본인이 태어난 도시로 다시 돌아와 죽음을 맞이한 셈이다.[4] 비록 안타깝게 요절했으나, 일기장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이 소망만은 영원히 이루어지게 되었다.[5] 은신처로 사용한 곳은 안네의 아버지가 일을 하는 회사 건물이었고, 창고와 기타 업무 공간들을 제외한 방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은신처로 적격인 곳이었다.[6] '문학소녀=내성적'이라는 것은 편견임을 보여주는 예로도 들 수 있다.[7] 안네가 일기에 쓴 바로는, 외부소식을 들을 수 있는 수단은 라디오 한 대뿐, 심지어 밥을 먹으라고 내려오라고 말하는 것조차도 문을 열고 바닥을 건드려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대체해야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요리할 때 연기가 나면 곤란하기 때문에 밤에만 요리를 해야 하거나, 화장실 변깃물을 내리면 1층 창고까지 물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밤에만 화장실 물을 내려야 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마르고가 은신처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감기에 걸리자, 낮에는 기침소리가 나서도 안 되기 때문에 기침약을 많이 먹어야 했다.[8] 실제로도 안네 가족은 아버지 오토 프랑크의 재산과 준비성 덕에 당시 나치 점령 하의 유대인들 중에서는 굉장히 좋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었다. 수용소로 간 유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숨어살던 유대인들이 대부분의 거처로 사용한 곳들은 잠도 자기 어려운 헛간이나 가정집 창고 같은 곳이 고작이었다.[9] 그러나 크게 바뀌진 않는다. 안네는 끝끝내 어머니 에디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0] 이건 대단한 건데, 안네 프랑크는 당시 겨우 14살이었다. 십대 중반의 소녀가 이런 진지한 고민을 깊이 한 거다.[11] 하지만 안네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 말하면 은신처 식구들은 애가 별걸 다 아냐면서 비웃을 뿐이었다.[12] 한 번은 깨진 꽃병의 물 때문에 이 계보도들이 젖어버린 적이 있었다. 때문에 안네가 네덜란드, 프랑스, 러시아 등의 왕실 계보를 다락방에서 말리는 걸 보고 판 단 씨가 '민족 전쟁났구나' 라며 농담하기도 했다.[13] 그 밀고자가 누군지는 여전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심지어는 밀고자 없이 그냥 우연히 들킨 거라는 의견도 있다.[14] 베르겐-벨젠 수용소는 나치 독일의 세력권 밖에 있는 독일인 포로들들을 데려오기 위한 교환 포로들을 수용하는 수용소이자, 독일군이 포로들을 이송할 때 포로들을 잠시 머무르게 하려는 임시 수용소였다. 처음에는 1만 명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졌으나, 전쟁 말기에는 무려 4만 1000여명에 달하는 포로들이 이곳에 수감되었다. 가스실은 없었으나 여러 독일 수용소 가운데 가장 비참하고 지저분했던 곳으로, 대부분의 포로들이 전염병으로 인해 사망했다.[15] 영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안네 프랑크의 사망 시점과 사망 원인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고, 1945년 2~3월 경 쇠약해진 몸과 마음이 버티지 못해 결국 명을 달리했다는 것만 확인된 것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보인다.[16] 안네가 나치에게 잡혀가게 된 원인은 이 인물의 친지가 밀고했기 때문이라는 학설도 있다. 그 진위 여부와는 상관 없이, 미프 히스는 목숨을 걸고 은신처 가족들을 숨겨준 의인이다. 안네 일가가 체포될 때 남편 행크와 함께 천운으로 끌려가지 않고 목숨을 건졌다. 사실 은신처 사람들을 체포한 비밀 경찰인 실베르바우어는 미프가 자신과 같은 빈 출신이었기 때문에 잡아가지 않는 대신 사무실에 남게 해주었다.[17] 수용소에서 소련군에게 구출되었다.[18] 이 논란에는 안네의 일기가 유대인이 지어낸 가짜라고 주장한 나치 옹호자들도 끼어들었다.[19] 일기에는 이 집필 중인 소설에 대해 떠오르는 생각은 많은데 진도나 결말을 어떻게 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예술가적 고뇌도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