힉슨 그레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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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힉슨 그레이시
(Rickson Gracie)
국적
브라질
생년월일
1958년 11월 20일 (65세)
종합격투기 전적
11전 11승

11SUB

없음
체격
178cm / 84kg
주요 타이틀
VTJ 1994 무제한급 토너먼트 우승
VTJ 1995 무제한급 토너먼트 우승
1. 개요
2. 전적
3. 파이팅 스타일
4. 기타


1. 개요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달인으로 NHB, 발리 투도 시절 그레이시 전설의 한복판에 있던 인물이며 그레이시 가문의 히든 보스.

2. 전적


  • 주요 승 : 레이 줄루(2), 버드 스미스, 나카이 유키, 타카다 노부히코(2), 후나기 마사카즈
  • 주요 패 : 없음
브라질의 각종 대회에서 600전이 넘는 승부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지만 셔독이나 기타 MMA 커뮤니티에서는 전적에 포함시키지 않고 레이 줄루[1]와의 2전만을 인정한다. 각각 1980년 4월과 1984년 1월의 기록인데 2차전에는 무려 '''2만명의 관중'''이 모였다고 한다.
1993년 힉슨의 동생호이스 그레이시UFC 1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거두자, UWF 인터내셔널의 안조 요지가 미국에 있는 도장으로 도장 깨기를 시도하러 오기도 했다. 이 대결은 도장의 문을 잠근채 행해졌는데, 힉슨이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안조를 두들겨 팼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은 그레이시 일족과 U-계열 프로레슬링 사이의 갈등의 시발점이 되며, 훗날 PRIDE 출범의 계기가 된다.
무패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론 트립에게 삼보 경기에서 매치기로 패배한 경험이 있다. 당시 힉슨은 룰을 잘못 이해했다는 이유를 댔다.
1994년과 1995년에는 2차례에 걸쳐 일본에서 열린 발리투도 재팬의 우승을 차지했다.
1997년 10월 11일 PRIDE 첫번째 흥행인 PRIDE 1에서 UWF 인터내셔널의 수장인 타카다 노부히코와 자존심을 건 대결을 벌였다. 5만명의 관중들이 운집한 도쿄 돔에서 힉슨은 경기 시작 4분만에 타카다의 팔을 비틀어 암바를 완성시키며 관광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998년 10월 11일 PRIDE 4에서 벌인 타카다와의 2차전에서도 암바로 승리하여 UFC 토너먼트 3관왕에 오른 호이스 그레이시와 함께 ''''그레이시 주짓수 = 세계 최강''''이라는 전설을 써내려갔다.
2000년 5월 24일에는 C2K - Closseum[2][3]에서 Pancrase의 수장격인 후나키 마사카츠[4]를 리어 네이키드 초크로 꺾었다.[5]
그 이후로는 나이 때문인지 더이상의 경기를 가지지 않았다.[6]

3. 파이팅 스타일


6세에 주짓수 훈련을 시작했고 15세에 수련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8세에 블랙벨트를 수여받았다. 주짓수 외에도 유도, 삼보, 레슬링 등 그래플링 전반에 걸쳐 두각을 나타냈으며 대외적인 활동도 활발했다. 브라질의 자유형 레슬링 대회에서 2회에 걸쳐 우승했으며, 삼보 금메달을 획득했고 세계 주짓수 선수권 대회에서는 거의 20년에 걸쳐 미들-헤비급과 무제한급에서 정상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NHB에서도 패한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전성기를 지나도 한참 지났고, 그 사이 격투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했으므로 00년대에 들어서도 최강으로 평가받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80~90년대의 발리 투도의 홍보 영상을 보면 의외로 기술적으로는 지금에 비해 투박하고 단순한 점이 많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물론 힉슨도 트레이닝을 계속 했겠지만 현대 MMA에서도 그가 통할지는 미지수.
그래도 히카르도 아로나, 파울로 필리오, 데미안 마이아같은 현대의 일류 MMA 주짓떼로, 초 일류 주짓떼로들이 직접 만나서 주짓수로 붙어보고 스스로 자신들이 상대가 안된다고 말하는 걸로 보아 주짓수 테크닉만큼은 현대에도 통할 정도로 발전했고, 상대적으로도 봐도 실력은 여전히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의 테크닉을 그대로 전수받은 그의 아들, 크론 그레이시가 유명 그래플링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걸로 보아, 일단 그래플링 테크닉은 확실히 지금도 통할 수 있을 정도로 더욱 발전한 듯 하다. 크론 그레이시는 힉슨이 사용하던 클래식한 주짓수를 베이스로, 세부적으로 보다 섬세해진 형태의 주짓수를 사용한다.
주짓수적인 측면을 봤을 때는 무게의 배분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똑같은 자세를 취하더라도 몸의 어디에 무게를 실느냐에 따라서 상대방을 훨씬 더 강하게 압박하거나 자신보다 강한 상대방의 힘에 버틸 수 있음을 강조한다.

4. 기타


BJJ의 전설과도 같은 인물. 80 ~ 90년대에는 그야말로 세계 최강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포스를 보였다. 특히 UFC 1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호이스 그레이시가 '''"내 형 힉슨은 나보다 10배는 강하다!"'''라는 코멘트를 날림과 동시에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호이스는 북미에서, 힉슨은 일본에서 활약하며 그레이시 일족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의 떠오르는 강자들과의 대전을 피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사실 90년대까지만해도 대부분의 상대는 호이스, 호일러선에서 정리가 가능했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레이시 헌터"''' 사쿠라바 카즈시가 나타난 후로는 그 위치가 꽤나 흔들리게 되었다. 결국 사쿠라바와의 대결을 거절하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대해서는 설왕설래가 많은데 자기보다 작은 상대와 싸우지 않겠다며 거절했다는 설, 아들의 죽음으로 거절했다는 설 등등이 있다.
사실 58년생으로 이미 90년대 후반에 이미 40대에 접어든, 스포츠계에선 그야말로 '''어르신'''급인 나이 대의 격투가에게 더이상을 바라는 것이 무리인 것도 있다. 40대에 복귀하여 42세에 챔피언 자리를 탈환한 조지 포먼의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외중의 예외라고 할수 있다. UFC 초대 헤비급 챔피언인 마크 콜먼 조차도 힉슨보다 '''6살이나 어리다.'''
이후로는 공식 무대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잊을만 하면 튀어나와 정상급의 MMA 파이터들을 상대로 독설을 날렸다.
표도르 예멜리아넨코
"기술적으로는 그저 그런 수준이다. 내가 100% 이길 수 있다."[7]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가드[8]가 없다."
브록 레스너
"가드에서의 디펜스가 형편없다."
쉐인 카윈
"황소처럼 힘은 세지만 종이 호랑이다."
순수 그래플링만을 놓고 본다면 아예 틀린 말도 아니지만[9] 종합과 그래플링은 엄연히 다르고 현대 MMA도 그래플링만 가지고 해먹을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어쨌든 이런 관계로 00년대의 MMA 팬들에게는 별로 이미지가 좋지 못하다. 물론 레전드로서 충분히 예우받고 있으나 미묘하게 꼰대 취급. 반달레이 실바는 힉슨의 이런 독설을 두고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또한 반달레이 실바는 힉슨의 전적에 의구심을 보이며, 힉슨의 "요즘 파이터들은 수준이 낮다."는 말에 프라이드 챔피언 벨트를 걸테니 한번 붙어보자며 인터뷰에서 도전장을 던지기도 하였다.
다만 '주짓수는 게이들이나 하는 짓이다'라던 탱크 애봇이 "나는 힉슨만은 존경한다."라고 말하거나, 파울로 필리오가 "그의 기술은 아직까지도 비교가 불가하다."라고 말하는 등 많은 선수들과 팬들로부터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몸값이 비싸기로 유명한데 PRIDE 1에서 그를 부르려고 '''2억엔'''이 들었다 카더라.
젊은 시절에도 상당한 미남이었는데 50세가 넘은 지금의 사진을 보면 멋지게 늙었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슬슬 미노년 테크를 준비 중
일본의 창작물에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데, 이유인즉 90~00년대에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이 어린 시절 힉슨과 그레이시의 전설을 경험했던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래플러 바키 시리즈나 수라의 문 등 많은 매체에서 힉슨과 그레이시 일족들을 모티브로 한 듯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엘리오 그레이시의 아들UFC 공동설립자인 호리온의 동생이다. 호이스, 호일러와는 이복형제 사이.
2008년에 개봉한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초반에 주인공 브루스 배너를 훈련시키다가 주인공의 '''싸대기를 후려갈기는''' 역할로[10] 짤막하게 등장하신다. 일부 격투기 팬들은 이 영화를 관람하던 도중 힉슨 그레이시의 예상치 못한 출현으로 살짝 놀랐다는 후문이 있다.
[1] 줄루징요아버지이다. [2] 힉슨의 경기를 메인이벤트로 했던 일본의 단발성 MMA 이벤트. 이 경기의 일화로는 당시 주최사였던 Sammy(FEG 전신)가 일회성 이벤트였던 만큼 흥행을 위해 힉슨의 경기 출전을 상대가 정해지지 않은 채 미리 계약지었으며, 도쿄돔으로 장소를 미리 정한 상태였다. 또한 지상파 중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힉슨의 상대로 스타급 선수가 필요했는데, PRIDE에서는 계약 문제와 경쟁사를 의식했기에 선수 출전을 불허한 상태였다. 따라서 판크라스, 슈토, Rings 선수들에게 오퍼를 했고, 그 중 자국 선수이면서 판크라스의 최강자로 인지도가 높았던 후나키가 상대로 가장 적합했다. 다른 선수들은 주최 측의 뻔한 의도 때문에 상당히 좋은 조건(메인이벤터였던 만큼 거액의 대전료)을 제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했으나, 후나키는 이 제안에 기꺼이 응했다. 경기에 응한 이유가 꽤나 간단했는데, 단지 힉슨과 시합이라면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임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 대회는 일본 내에서 TV 중계로만 3천만명이 시청할 정도로 대흥행을 이루었다. [3] 힉슨의 경기 섭외를 놓치게 되자 PRIDE 측은 호이스 그레이시를 무차별급 그랑프리 토너먼트 출전을 하도록 움직였다. 일본 격투기 내에 그레이시 가문의 인지도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이 과정에서 힉슨은 지속적으로 이 점을 이용해 대전료 인상을 계속 요구해왔었다.[4] 후나키는 사실상 경기 전 언급이 없었으나 부상이 누적되어 있어 1년 가까이 경기를 쉬었을 정도로 몸상태가 안 좋아 이른 나이에도 불구하고 은퇴를 고려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단 후 판크라스까지 대략 15년 동안 꾸준히 경기를 뛴 여파가 컸기 때문이다. 은퇴에 대한 복선은 어느 정도 있었던게 경기 입장 당시 사무라이 복장을 입고 등장하여 경기에 임했기 때문이다. 후나키는 힉슨 그레이시한테 안와골절 부상을 만들 정도로 선전했으나 결국 경기는 패하고 말았다. 이 경기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고, 2007년 K-1 Dynamite로 잠시 복귀했다가 다시 은퇴했다.[5] 3주전 같은 장소에서 동생 호이스 그레이시사쿠라바 카즈시한테 패했다. (2000년 5월 1일, 프라이드 무차별급 그랑프리 2000 8강)[6] PRIDE 측에서 사쿠라바 카즈시와의 경기가 성사 직전까지 갔으나, 힉슨의 장남이 미국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경기 추진이 취소됐다.[7] 히카르도 아로나전의 판정을 문제삼기도 했다. [8] 주짓수의 그것. [9] 주짓수부심이라고 하기도 뭐한 게 마크 콜먼이 챔프가 되었을 당시에는 수족관상어를 풀어놨다고 말한 양반이다.[10] 브루스에게 화가 나서 그런게 아니라, 헐크로 변신하지 않으려면 브루스 자신이 분노를 억제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분노하게 만들고 곧바로 그걸 억제하는 호흡법을 가르쳐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