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대군

 


'''조선 태조의 왕자'''
'''진안대군
鎭安大君'''

'''군호'''
진안대군(鎭安大君)
'''시호'''
경효(敬孝) · 정의(靖懿) · 진한 정효공(辰韓 定孝公)
'''본관'''
전주(全州)
'''이름'''
방우(芳雨)
'''부왕'''
조선 태조
'''모후'''
신의고황후 한씨(神懿高皇后 韓氏)
'''부인'''
삼한국대부인 충주 지씨(忠州 池氏)
'''자녀'''
2남 2녀
'''생몰
기간
'''
'''음력'''
1354년 ~ 1393년 12월 13일
'''양력'''
1354년 ~ 1394년 1월 15일
1. 개요
2. 고려의 충신이었는가?
2.1. 부정설
2.2. 소극적 긍정설
3.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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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말선초의 인물로 조선 전기의 왕족. 태조 이성계의 장남이며 이름은 방우(芳雨)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섬기는 것으로 효자로 이름이 났고 형제들과도 우애가 두터웠으며, 자라서는 시, 서가 깊었고 검약을 몸소 행했다.
지윤의 장녀와 결혼했고 관직에 나아가 예의판서(고려 초기식으로 표현하면 예부상서, 조선식으로 표현하면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1388년에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자 이방과, 이화상, 유용생, 최고시첩목아와 함께 이성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11월에 밀직부사를 지내면서 강회백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이후 철원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다만 이에 대해서 진안군이 과거에 붙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장인인 지윤과 아버지 이성계의 후광으로 음서를 통해 관직에 나간 것으로 보인다.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자 진안군에 봉해졌고[1] 4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향을 피우면서 신주를 효사관에 안치했으며, 성질이 술을 좋아해 날마다 많이 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다가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1393년에 사망했다. 그가 죽자 3일 동안 조회를 멈췄으며, 시호는 경효(敬孝).
슬하에 2남 2녀가 있었으나 그의 아들들은 방우 사후 정계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대신에 그의 장남인 봉녕군(奉寧君) 이복근은 이후 1차 왕자의 난 때 숙부 이방원을 지지하였고 태종은 즉위한 후에 큰형님의 자식들을 우대해줬다. 물론 복근은 '봉녕부원군'이란 작위까지 받아 별다른 사건 없이 천수를 누렸다. 차남(서자)인 순녕군(順寧君)[2] 이덕근은 1차·2차 왕자의 난에 역시 숙부인 이방원 측에 가담했다. 하지만 그는 주색이 심하고 게다가 백성들에게 약탈질을 일삼았지만, 태종의 배려로 아무일도 없이 넘어갔다.
진안대군의 장손인 원윤(元尹) 이석에 대해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의문점이 있다. 첫째, 계유정난으로 인한 순절(殉節)설이고, 두번째는 세종 시기에 정착된 조선 왕족 5등작 제도인 군(君)·정(正)·수(守)·령(令)·감(監) 지위를 왜 받지 못한 이유로 나뉠수 있다. 진안대군 파종회 측에서는 이석에게 두 아들 맏이인 송현정(松峴正) 이견신과 가음정(嘉音正)[3] 이은생이 있는데, 계유정난 때 태조의 종손(宗孫) 이견신을 옹립하려다가 실패해서 살해되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약간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먼저 이석의 사망시기가 1429년이다. 당연히 계유정난 이전에 사망했으므로 순절설하고 맞지 않는다. 다음으로 이견신의 경우를 들어보면, 이견신은 계유정난으로 인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야 하지만 세조는 오히려 그를 왕족으로서 예우했다는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다. 이석의 차남인 이은생의 경우, 조선왕조실록에 두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더군다나 계유정난과 관련한 기사도 없다. 다만 이은생의 장남이었던 이우(李瑀)가 계유정난에 항의하다가 출사하지 않았다는 선원속보 1902년판에서만 짧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어쩌면 이석이 계유정난으로 인해 희생되어서 고종 때까지도 작위를 받지 못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맞지 않은 게 고종 재위 시기에 태조의 4대조의 자손들에게 4세봉군을 내려서 군(君)이라는 작위를 추증한 것은 사실이나, 유독 이석에게만 군으로 추증했다는 기록이 없다.

2. 고려의 충신이었는가?


정사인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선 고려의 충신으로 볼 여지가 전혀 없다. 그저 후계구도에서 배제된 후 과음하다 죽었을 뿐 이다.
이지란의 《청해백집》에 따르면 그가 위화도 회군 당시부터 아버지에 반대하고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고 하며, 조선이 건국되자 철원 보개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다고 한다. 소주를 마시다 죽은 것도 망국의 설움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술로 매일을 지내다 병이 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버지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열었지만 아들, 그것도 다음 왕위가 약속된 장남이 고려에 충절을 다했다는 극적인 요소로 인해 창작물에선 《청해백집》의 묘사를 따라 그를 고려의 충신으로 묘사하는 일이 절대 다수다.

2.1. 부정설


그러나 정사를 통해 여말선초 이방우의 행적을 살펴보면 고려에 충절을 지켰다는 《청해백집》의 기록에 많은 의문점이 생긴다. 고려사를 보면 이방우는 위화도 회군때 우왕 진영을 탈출해 신속하게 이성계 측에 합류했으며,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이 즉위하자 명의 인정을 받기위해 명에 사신으로가 조현(朝見)을 요청했다. 즉, 조선 건국의 결정적 계기인 위화도 회군 전후로 아버지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움직였다. 회군 당시부터 아버지에게 반대했다는 서술은 고려사 펴자마자 깨진다.
일단 여기까진 이성계가 아직 고려의 중흥공신이었기에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 건국 후에는 이성계의 명으로 사대(四代) 선조를 제향(祭享)하고, 신주(神主) 안치하는 등 맏이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방우 사후 그가 이끌던 군사들을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3남 이조에게 맡아서 이끌게 했다는 기록(태조실록 3년 3월 11일)을 통해 군권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4] '''야사에서 고려의 충신으로 은거했다는 사람이 실록에선 맏이로서 당당히 제를 지내고 군사까지 거느렸다.''' 또한 이방우가 실권에서 밀려나는 시점은 조선 건국 후가 아니라 이성계가 아직 고려의 중흥공신이었던 공양왕 시점이다. 공양왕 즉위를 기점으로 방우의 활동이 공식기록에서 사라지고 방과가 지혜부윤, 판밀직사사, 삼사우사를 거치며 아버지를 받치는 조정중신으로 자리잡는다. 방우가 거느렸던 병력을 아들 이복근에게 물려주지 않은 것은 방우가 가졌던 맏이로서의 위상을 그 후손들에까지 내려가게 하진 않겠다는(즉, 정치적 면에서 완전히 내치겠다는) 의도였고 이후 방과가 신의왕후 소생의 살아있는 왕자들 중 장자로서 그 위상을 공고히 한다. 이점은 무인정사 직후 태조가 방과에게 내린 교서에서 대놓고 장자라 못박은 걸로 잘 드러난다.
그렇기에 그의 세자위 탈락 원인은 고려에 대한 충절이 아니라, 공양왕 조카사위인 이방번과 마찬가지로 지윤의 딸과 결혼하고 이색의 손자 이숙묘를 사위로 들여 (조선건국에 저항한) 고려의 구세력 핵심과 인척관계로 엮인 그의 배경, 신돈의 후손이 된 창왕의 옹립에 기여했던 것으로 인한 정치적인 문제에서 기인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이성계는 고려 정계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이미 장성한 한씨 소생 다섯 아들들로 중앙정계 인사들과 혼맥을 꾸렸다. 이로 인해 한씨 소생 다섯 왕자와 나중에 정창군 왕요의 조카딸과 혼인한 방번까지 여섯 왕자는 고려 구세력과 깊게 이어져 있었다. 이는 변방 무장 출신인 태조가 순조롭게 중앙 정계에 안착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나, 신왕조 건국 후 후계자 선정에선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한 것이다. 태조의 선택은 자연히 어려서 고려 구세력과 별 접점이 없고 무엇보다 중전의 자식인 방석에게 향했다.[5]
또한 온건파 사대부들의 스승으로 조선 건국에 끝까지 저항한 이색이 정도전, 조준 등 강경파 사대부들에게 공격받은 가장 큰 명분이 신씨를 왕으로 옹립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성계의 맏아들이 명에 창왕의 조현(朝見)을 요청해 신씨 옹립에 공을 세웠다는 사실은 조선 건국세력에게 커다란 약점이 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공양왕 즉위를 기점으로 정계에서 밀려났고 조선 건국의 정통성을 위해 '우창 비왕씨설'이 절대 부정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로 후계 구도에서도 밀려버린 것이다.[6]
이와 비슷한 예로 서진 창업의 기틀을 다진 사마의의 아우 사마부가 있다. 그는 군권을 쥔 형을 보좌해 국가 재정을 책임지며 사마씨가 위의 최고 세력으로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고평릉 사변이나 조모 시해 때도 언제나 형을 지지했다. 즉 그는 실질적으로 조씨 황실을 위해 기여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황제가 시해되었을 때나 위나라가 멸망했을 때 통곡했다는 기록 하나만으로 그는 위의 충신이 되어 '위의 마지막 충신은 사마씨에게 나왔다' 는 미담을 만들었다.
조선 건국 후 술로 시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는 그의 기록은 고려에 대한 충정이 아니라 맏이로서 인정은 받고 있으면서도 정치적 이유로 후계 구도에서도, 실권에서도 완전히 배제될 수밖에 없었던 데 대한 울분으로 볼 수 있다.
임용한 박사와 인문채널 휴 에서 역사학 강의를 하는 윤훈표 교수도 이방우의 고려 충신설은 부정하고, 여말선초 연구자 임용한 박사 또한 조선초까지는 유교윤리에도 불구하고 적장자 계승이 왕실은 물론 사회윤리로 정착되지 않았다고 역시 부정했다.

2.2. 소극적 긍정설


은거설은 후대의 역사나 야사에 언급된 것이고 위에서 언급한 기록은 정사에서 나온 것이니, 은거설이 신빙성이 떨어질 수는 있다. 하지만 고려 충신설 자체가 완전히 허구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일단 창왕 대까지 이성계에게 동조하다가 공양왕 대에 이르러 가장 큰 정적이 된 정몽주 같은 사례도 있으며, 그 외에도 변안열을 비롯해 위화도 회군까지는 이성계의 편이었다가 그가 왕위를 찬탈하려 하자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 많다. 특히나 이성계의 형인 이원계 같은 경우도 회군 이후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다 죽었다고 하는데,[7] 이성계의 형도 이랬을진대 아들이 고려의 충신이었다 하더라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위화도 회군의 경우도 요동 정벌이 시작되기 전부터 많은 반발이 있었던 만큼 이성계와 평소에 친분이 깊지 않은 인물들까지도 어쩔 수 없이 동조했었으며, 우왕을 지지한다고 떠벌렸다가는 인질로 잡히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마당이었으니 회군에 참여했다는 것이 곧 그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는 근거까지는 되지 않는다.
사신으로 파견된 것 역시 세자가 되지 못했던 이유가 아니었을 수 있는데, 이색과 이성계 간의 갈등이 시작되고 있던 시점이었으므로 강제적으로 사신으로 선발되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비록 목적은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이방원도 이색의 '요청' 에 따라 이색, 이숭인과 더불어 서장관으로서 파견되었으니, 이방우 역시 이러한 경우였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공양왕 이후의 기록이 전무하다는 것은, 창왕의 조현을 청하기 위해 간 사신이라서 정치적으로 배제되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정몽주라는 예도 있는 만큼, 그 역시도 공양왕 대에 이르러서야 아버지와 그를 따르는 이들의 본심을 알고 것처럼 관직을 내려놓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가령 최영은 이성계 집안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던 인물이고 정몽주는 이성계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이는 이들이 진안대군과도 어느 정도 친밀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으며 자신과도 잘 아는 사이였던 어르신들을 모두 제거해 가면서까지 역성혁명을 시도한다는 것은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은거할 만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조선 건국 이후에 사대 선조를 제향한 것이나 신주를 안치한 경우도, 당시 세자였던 이방석의 나이가 어렸기에 장자로서 그 임무를 맡았을 수도 있다. 게다가 이는 조상을 모시는 일이니, 개인적으로 조선 건국을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거부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두문동 72현 전설이나 양녕대군 왕위 양보설이 한낱 야사로만 치부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당대의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안 나오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인데, 진안대군이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는 이야기는 바로 당대에. 그것도 이성계를 최측근에서 보필했던 의동생 이지란이 쓴 《청해백집》에 나온다.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이성계의 집안 일을 깊이 알고 있었을 사람이 남긴 기록이므로, 공식 기록에는 차마 실을 수 없었던 내용을 남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8]
끝으로 오랜 세월동안 집안의 장손 역할을 했다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적장자 계승론은 그 자체로 강력한 명분이었으며, 특히나 조선과 같은 유교 국가에서는 더욱 힘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폐세자가 될 만큼 심각한 문제도 없고 과실도 저지르지 않은 장손을 막후 공작으로 폐한다는 것은 일단 국시에 어긋날 뿐더러 왕실 종친들에게서도 공감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진안대군 다음 가는 둘째이자 부왕을 보필한 공로가 매우 큰 영안대군 이방과가 특별한 사유도 없이 이복동생들에게 밀려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자 그 동복동생들이 형을 국왕으로 추대한 사건이 바로 1차 왕자의 난이다. 즉 당시 진안대군은 심각한 결함이나 과실이 없는 적장손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원한다면 세자가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자가 되지 않았고 친동생들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본인 스스로가 강력하게 거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고려에 충절을 바쳤다는 것은 과장이라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왕위를 찬탈한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정치에 대한 환멸로 인해 스스로 정치적 활동을 거부했을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

3. 창작물에서


'이성계의 장자지만 고려의 충신'이란 묘사가 야사이지만 극적이고, 방석의 세자 책봉과 1차 왕자의 난으로 이어지는 갈등의 시발점으로 쓰기도 좋기 때문에, 사극에서는 여전히 초야에 묻혀 고려에 충성을 다하다 죽는 것으로 나온다. 정사에 충실한 편인 정도전(드라마)도 마찬가지.
'''그러나 이방우의 실권 배제는 신의왕후가 살아있는 이상 신의왕후 소생 다른 왕자들과의 위신과는 상관없는 문제다.''' 어디까지나 태조의 후계자 계승에서 배제되었을 뿐이지 이성계 4대조에게 올리는 제사를 주관했던 것처럼 사적으로 큰아들의 위상은 가지고 있었다. 태조의 적장자라는 위치가 역시 신의왕후 소생인 방과로 내려갔을 뿐 이다. 그러다 조선 건국 직전 신의왕후가 사망하는 바람에 조선의 첫왕비가 신덕왕후 1인으로 굳어지면서 차기 후계구도가 통째로 뒤집히고, 사병혁파로 대표되는 자기 밥그릇 깨기가 본격화되면서 방계 왕족들이 똘똘 뭉친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말선초의 복잡한 정쟁과 명분을 제대로 묘사할 능력이 있는 작가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냥 야사 속 내용을 그대로 따서 설정하는 것.
  • 용의 눈물 / 임정하 - 고려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고려의 신하로서 지내지만, 아버지가 위화도 회군 이후 본격적으로 찬탈을 도모하자 효보다 충이라며 끝까지 고려에 대한 지조를 지키려 한다. 그러다 신의왕후의 사후에는 이성계와 그 갈등이 격해지기 시작했고, 아버지를 따르는 신의왕후의 다른 자녀들과도 그 갈등이 커졌다.[9] 조선이 건국되자 모든 걸 버리고 아내와 함께 함경도의 어느 산으로 은거한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것에 이성계는 화를 많이 냈으며, 이성계가 "다른 어떤 자식들도 그보다도 나은 이가 없거늘!" 라고 말을 할 정도로 뛰어난 재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0]
  • 정도전(드라마) / 강주상[11] - 고려에 대한 무한 사랑을 드러낸다. 선위를 도모하는 정도전조준 등에게 분기탱천하여 달려들며 자신의 아버지를 왕으로 세우려는 시도를 중단하라고 외치고, 정몽주를 죽이려는 동생 이방원에게 수정펀치를 날리기도 했지만, 약발이 먹히지 않고 정몽주는 끔살당한다. 결국 아버지가 조선 건국이라는 대업을 이루자 초야에 묻혀 살아가다 술만 먹다가 죽는다.
자세한 것은 이방우(정도전) 문서 참고.
  • 육룡이 나르샤 / 이승효 - 기존의 매체와 마찬가지로 정도전 등이 시행하는 개혁 중엔 역성혁명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자 '역적 모의'라고 칭하고 노발대발한다. 다만 역성혁명을 반대하는 이유가 기존의 작품들과는 조금 다른 게,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가문이 원과 고려를 번갈아 배신해온 역사를 자신의 대에서 끝내고 싶어서이다. 가히 포은최 만호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해야될 면모이다(…)
여기에 더불어 보통 다른 이방우를 묘사하는 드라마에 비해[12] 상당한 무예가 추가 되었다. 자객들의 습격을 받을때 이미 무관으로 알려진 이방과와 무휼과 함께 빠져나가는가 하면 여러 사람들에게 이방우의 무력이 상당하다고 인정받는다. 길선미, 길태미, 척사광 등을 제외하면 거의 최고 수준이다. 나중에는 성장한 이방지가 더 강해진 묘사가 나오지만. 도화전에서 조민수가 숨겨놓은 자객들과 싸울때도 꽤나 실력을 발휘하며 도끼를 맞고도 살아남는 무력을 발휘. 아무래도 기존 창작물들에 등장한 이방과의 이미지가 무관과 여러모로 맞지 않는 것도 있고[13] 배역도 배역이다보니[14] 무관의 이미지가 강조된다.

[1] 조선에서 왕의 적자에게 '군'이 아니라 '대군'이 붙게 된 것은 태종이 즉위한 이후부터라고 한다. 태조의 적자들은 당시 대부분 '군'을 받았지만, 태종이 즉위한 후에 다 '대군'으로 바뀌었다.[2] 1681년에 편찬된 선원록(璿源錄)에서는 봉작명이 나타나지 않고, 고종 재위시기에 추증(追贈)된 걸로 판단된다.[3] 강음령(江陰令)이라고도 함[4] 다만 개국 직후 왕자들의 군호를 지정하고 절제사를 임명하며 이방과, 이방번, 이제 3명을 중심으로 군권을 재편했기에 죽기 직전 거느렸던 군사력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5] 세자 책봉 논의 당시 이성계는 한씨 소생의 아들들보다는 당시 중전이던 강씨의 소생을 세우려고 하였다. 이에 처음에는 방번을 이야기했으나, 방번은 태조가 끌어네린 공양왕의 조카사위라 자질과 상관없이 세자가 될 수 없었다. 왕과 신료들이 이를 모를리 없으니 장자가 우선이라는 명분상 의례적으로 꺼낸 말이었을 뿐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1년 8월 20일 기사[6] 윤정, <정종의 즉위과정과 즉위 명분>, 진단학보, 2013년[7] 구체적인 근거까지는 없으나, 위화도 회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았서 죽었으며(고려 충신 주장 측에서는 음독 자살로 표현한다), 위화도 회군 공신으로는 책록되었으나 조선 개국공신에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 등이 정황 근거로 제시된다.[8] 다만 위에서 언급한 사마부의 경우처럼 이지란을 위시한 조선 왕실에서 적장자를 구 왕조의 충신으로 포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방번만해도 혼인관계 때문에 후계자 선정에서 배제된 게 명백하지만 그걸 공적인 자리에서 언급한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가장인 태조의 의중으로 이뤄진 혼사니까.[9] 갈등이 커졌다는 것보다는 형을 이해하는 동생들이기에 별 수 없이 받아들였던 것뿐이며, 드라마 상에서는 이방과만이 그 부분에 대해서 계속 신경써주고 있었다.[10] 다만 신덕왕후는 그에 대해서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삼겠다는 욕심을 가지게 된다.[11] 공교롭게도 태조 왕건에서는 견훤의 셋째 아들 용검 역할을 맡아서 두 작품 모두에서 한 왕조의 창업주였던 아버지와 대립각을 세운 아들 역할을 맡았다.[12] 보통 문관으로 묘사된다.[13] 역사적으로 이방과는 이성계의 무골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인물이다.[14] 이 작가의 세계관의 첫번째 작품인 선덕여왕에서 이승효는 문노 / 칠숙을 포함시킨 순위에도 Top 7안에 들어가는 알천의 배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