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Night at the Opera
1. 개요
1975년에 발매된 퀸의 정규 4집 앨범. 음악성과 상업성을 고루 갖춘 초기 퀸의 명반이며 퀸을 지금의 위치로 올려놓은 앨범이다.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퀸의 앨범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퀸의 음악적 색깔이 이 앨범에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작의 성공에 고무받은 퀸 멤버들은 좀 더 실험적인 시도를 하면서 동시에 대중성도 잃지 않는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이 앨범이 성공하면서 퀸의 멤버들은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고, 덕분에 이후 발매된 앨범들은 녹음 환경이 좋아져 전작들에 비해 녹음 상태가 확연히 깔끔해진다.
그만큼 퀸의 멤버들은 이 앨범을 만들면서 상당히 고생했다고 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때까지 노래를 불러서 녹음을 끝냈으며 코러스를 위해 다른 멤버들도 목에서 피가 나도록 노래를 불렀다. 어느 정도냐면, 이 앨범에 실린 퀸의 대표곡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 녹음을 위해 퀸의 멤버들은 '''70시간이 넘는 동안 180번이 넘는 오버 더빙을 해야만 했다.''' 이 노력 덕분에 결국 3명의 멤버만으로 흡사 합창단이 부르는 듯한 오페라 파트가 완성되었다고.[1] 그렇게 완성된 명곡 'Bohemian Rhapsody'는 무려 9주 동안 영국차트 1위에 오른다.[2]
앨범 표지는 프레디의 솜씨다. 멤버들의 별자리[3] 를 나타낸 이 로고는 이 앨범에서 처음 등장한후 5집 표지를 장식하는 등 다방면으로 쓰이게 된다. 또한 앨범의 이름은 '마르크스 형제'의 영화 이름에서 그대로 따온 것인데, 5집도 마찬가지. 이 두 앨범을 '쌍둥이 앨범'이라 부르는 이유들이다.
음악이 굉장히 실험적인 느낌이 나는데, 다큐멘터리 '우리들의 나날'에서 브라이언은 앨범 작업때 걱정을 많이 했다고 회고했다. 이전 앨범들은 성공은 했지만 소속사(트라이던트)와의 계약 문제때문에[4] 돈도 못 받고 같이 일한 사람들에게 보수도 주지 못한데다가 빚까지 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앨범이 실패하면 해체는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으로 더 실험적이고 더 어렵고 더 퀸스러운 음악을 만들어 냈으니 그야말로 배수진을 쳐서 승리한 것이 다름 없다. 제작비 절감을 위해서 애비 로드 스튜디오같은 1군급 스튜디오가 아닌 록필드 스튜디오를 비롯한 상대적으로 열악한 장비의 7개 스튜디오를 4개월간 돌아가며 제작했다. 이렇게 예산 절감을 위해 노력했지만 앨범에 사용된 다양한 악기 값과 예의 퀸 특유의 테이프 오버더빙 때문에 앨범의 제작비는 약 40,000파운드[5] 로, 당대 발매된 앨범 중에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간 앨범이 되었다.
이렇게 성공을 거뒀음에도 초기 퀸의 음반들이 다 그렇듯이 평론가들은 혹평을 쏟아냈다.[6] [7] 그러나 앨범을 알아본 일부 평론가들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고, 어쨌든 이 앨범으로 인해 퀸은 세계적인 밴드로 발돋움 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도 명곡은 많지만 명반은 적다고 평가절하받는 퀸이지만 이 앨범만은 어느 리스트든 명반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퀸과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한 롤링 스톤에서도 2012년 명반 리스트에선 231위, 2020년엔 128위에 선정하면서 점점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유럽 등지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앨범이었으나, 미국에서는 생각보다 히트를 하지 못했는데, 이는 이 앨범이 다분히 유럽적인 감성의 음악을 담고있어 그랬으리라 추측한다. 사실 '퀸' 하면 생각나는 스타일의의 음악은 미국에서 그다지 히트하지 못했다. 게다가 퀸과 미국은 그다지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8] 하지만 프레디 사후 미국에서의 인기를 다시 회복하고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의 영향으로 2018년에는 그래미 명예의 전당 앨범 부문에 헌액되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는 'Bohemian Rhapsody'와 'You're My Best Friend'가 싱글컷 되었는데, 원래 B사이드로 'The Prophet's Song'을 넣으려다가 싱글이 너무 대곡들로만 채워지면 잘 안 팔릴까봐 좀 더 대중적인 'I'm in Love With My Car'를 선택했다고 한다. 만약 B사이드에 'The Prophet's Song'이 들어갔다면 러닝타임이 무려 14분이나 되는 엄청난 싱글이 탄생했을 수도...
국내에서는 1989년에 Bohemian Rhapsody가 금지곡에서 해제되자 같은 해에 EMI/계몽사를 통해 금지곡 없는 온전한 상태로 이 앨범이 발매되었다.[9]
2. 트랙 리스트
01. Death On Two Legs
앨범을 여는 곡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욕설과 디스로만 이루어져 있다. 디스 대상은 전 매니저인 노먼 셰필드.[11][12] 하드 록 성향의 곡으로 화려하다 못해 찰진 욕이 돋보이는 곡이다.[13] 또 반주가 1분 10초라서 퀸 노래 중 반주가 가장 긴 노래다. [14] 한때 한국에서는 비속어가 많이 들어갔다고 금지곡이었다.
02. Lazing On A Sunday Afternoon
프레디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생기발랄하고 명랑한 곡. 게을러지고 싶은 일요일 오후의 느낌이 인상적이다. 퀸의 다른 곡들에서는 듣기 힘든 굵직한 창법과 효과로 인해 한 평론가는 '18세기 영국의 뮤직홀 느낌을 자아내는 곡'이라 평하기도 했다. 국내 CF에서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15] 여담으로 곡이 엄청 짧다. (1분 8초...)
03. I'm In Love With My Car
로저 특유의 허스키 창법이 돋보이는 노래로, 콘서트에서 유일하게 프레디가 연주만 하는 노래이다.[16] 로저의 자동차 사랑을 물씬 느낄 수 있다. 멤버들이 이 노래를 앨범에 넣는 걸 반대해서 로저 테일러가 옷장 안에 들어가 시위를 했었다고 한다. 앨범을 살펴보면 'Dedicated to Johnathan Harris, boy racer to the end' 라고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Johnathan Harris는 퀸의 로디이자 자동차 애호가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여러 차례 디스 당한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05. '39
천문학에 대한 브라이언 메이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곡으로, 가사가 상당히 아름다우면서도 서글프다. 실제로 유튜브 상에서도 가사 비디오 중 유독 조회수가 높으며 'Brilliant Song' 등으로 호평받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데뷔앨범부터 차례대로 수록곡을 세다 보면 이 곡이 딱 '39번째' 수록곡이다! 이 곡은 이후 프레디 사후 추모콘서트에서 팝 가수 조지 마이클이 객원 보컬로 참여해 연주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06. Sweet Lady
메이가 작곡한, 비교적 간단한 구성의 하드락 곡.
07. Seaside Rendezvous
07. Seaside Rendezvous
프레디가 만든 곡임을 단번에 알 수 있는 경쾌하고 고풍스런 노래. 사랑하는 연인과 바닷가를 산책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숨겨진 명곡. 락밴드의 사운드답지 않은 클래시컬함 때문인지 테너그룹이나 아카펠라 그룹 등이 커버하는 경우가 꽤 있다. 참고로 간주 부분에 나오는 기묘한 브라스 음의 정체는 다름아닌 로저의 목소리다. 심지어 탭 댄스 소리도 로저와 프레디가 손가락으로 두드린 소리다. 브라이언 메이는 불참.
08. The Prophet's Song
무려 8분이 넘어가는 대곡. 장르는 보통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상당히 많은 시도를 했다. 잔잔하고 주술적인 분위기의 인트로부터 악기 연주 없이 오직 아카펠라 코러스로만 이루어지는 중반, 그리고 엔딩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기묘한 느낌을 준다.[17][18] 당연히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지만 이 노래를 좋아하는 팬들은 '처음 듣기는 힘들지만 들을수록 빠져들게 되는 마성의 곡'이라는 평. 모두 두 번씩은 들어보자.
09. Love of My Life
퀸의 발라드 계열 명곡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노래이자, 싱글로 발매되지 않은 퀸 노래 중 가장 유명한 곡이다. 앨범이 나온지 4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면 이해가 안되겠지만, 이 노래는 싱글컷되지 않은 단순한 앨범 수록곡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10. Good Company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삶이 담긴 이야기. 가사에 나오는 'Company'는 '친구', 그리고 '회사'라는 뜻의 이중적인 의미. 브라이언은 이 곡에서 벤조와 우쿨렐레의 합성인 우쿨렐레 벤조라는 악기를 사용했다.[19] 곡을 들어보면 브람스 밴드 비슷한 소리가 나는데 사실 브라이언의 기타인 레드 스페셜이 내는 소리다. 퀸이 초기에 왜 'No Synthesizer' 라고 한지 알수있는 곡이다.
1975년 10월 31일에 싱글로 발매된 이 앨범의 타이틀 곡이다. 이 노래는 말할 것도 없이 퀸 커리어 사상 최대 히트곡이자 그들을 대표하는 곡이다. 락 역사상 최고의 곡 중 하나이자, 프레디 인생의 역작. 그리고 20세기 통틀어 최고의 곡 중 하나이다. 싱글로만 월드 와이드 600만장 이상, 영국에서 통산 14주 1위(발매 당시 9주 1위, 프레디 사후 5주 1위)에 250만장 이상을 팔아치우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곡은 단순히 퀸의 역사 또는 락의 역사를 논할 때 뿐 아니라 음악의 역사를 논할 때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항목참조. 프레디 사후 추모콘서트에서 엘튼 존과 건즈 앤 로지스의 액슬 로즈가 불렀다.
항목 참조영국의 국가로, 브라이언 메이가 편곡해서 연주한 버전이다. 이 곡을 편곡 및 녹음하게 된 계기는 1974년 Queen II 투어 때로, 한 공연에서 앙코르 요청을 하던 팬들이 이 곡을 떼창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 곡은 4집 세션 때가 아니라 3집 투어 시작 3일 전인 10월 27일 따로 녹음되었고, 3집 투어 때부터 틀기 시작해 이후 퀸의 콘서트는 항상 이 노래가 나오면서 끝마친다. 영국 국가인 만큼 본국에서 라이브할 경우, 이 노래가 흘러나올 때 관객들이 따라 불러주는 것을 볼 수도 있다. 이 모습은 1986년 'Magic Tour'의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에서 확인 가능하다. #
후일 메이는 이 곡을 여왕 즉위 50주년 기념식 날 버킹엄 궁전 옥상(!)에서 직접 연주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1] 존 디콘은 이 엄청난 오버 더빙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노래뿐만 아니라 어떤 노래든 간에 노래를 못 부른다며 코러스 녹음에서 빠졌다. 유일하게 앨범에서 부른 곡은 5집의 Tie your mother down이다.[2] 프레디 사후 재발매되어 또다시 5주 동안 1위에 머무른다.[3] 각각 프레디 - 처녀자리, 메이 - 게자리, 로저와 디콘 - 사자자리.[4] 퀸의 음악에 대한 권리는 소속사가 일절 소유한다는 계약내용때문에 뭐라 따지지도 못했고 퀸 앨범수익으로 회사에서 차를 샀는데 롤스로이스를 구매한걸 보고 프레디는 엄청 화를 내며 음악작업을 그만두고 로저는 드럼스틱을 계속해서 부쉈다고 한다.(로저가 드럼스틱을 망가뜨릴 때 소속사에서 돈이 없으니 부수지말라는 어이없는 이유를 댔다고.)[5] 1975년 당시 40000파운드의 가치는 2020년 기준으로 약 £337,757로, 한화로 '''5억727만8,382.99원'''이다. [6] 성공하면 모자를 먹겠다는 등...[7] 퀸의 음악이 평론가들에게까지 제대로 인정받은 것은 훨씬 지난 뒤의 일이었다.[8] 그 예로 84년작 The Works의 'I Want to Break Free'라는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의 뮤비에서 멤버들은 영국의 유명한 시트콤을 패러디해 여장을 하였으나 미국인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해 결국 MTV에서 금지를 먹은 적이 있다. 로저가 신랄하게 비판했음은 물론이다.[9] 발매 초기의 더블자켓 디자인을 그대로 살려서 발매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10] 퀸 커리어 사상 최고 히트곡, 최다 1위, 최다 싱글 판매량[11] 1939~2014. 3집까지 소속되었던 'Trident'(트라이던트)의 매니저로, 그 소속사에서 퀸은 불공정한 계약으로 인해 여러모로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 예로 인터뷰를 하러 온 기자가 먹을 것을 사줄 정도로 멤버들은 가난했는데 오히려 노먼은 새 차를 뽑고 몰고 다녔다고 하니... 셰필드는 퀀과 연장계약을 강제로 하려고 했고 열터진 귄은 법정 대결 끝에 헤어져서 비로소 EMI와 계약하며 수익을 제대로 얻게 되었다. 퀸이 떠나도 셰필드는 부자로 잘 살아갔고 죽기 1년전에 써댄 자서전 제목부터가 아예 "Death On Two Legs" 이 노래 제목이라 이걸 듣은 로저와 브라이언은 개자식이 죽기 전에 참 잘한다라고 어이를 날렸음은 물론이다.[12] 브라이언 메이는 이 곡에 상대방을 비방하는 내용이 너무 많아 코러스를 넣을 때 힘들어했다고 전해진다. 이후에도 이 노래를 부를 때면 나쁜 짓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도 했다. 욕을 자주 쓰는(...) 프레디나 로저에 비하면 메이는 신사였다. [13] 오죽하면 첫 가사가 "네놈은 거머리처럼 내 피나 빨아먹지."이다. [14] 사실 노래가 노래여서 그런지 본 멜로디가 시작될 때 프레디가 다른 곡에 비해서 유독 피아노 건반을 세게 누르는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15] [16] 다만 노래를 아예 안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1977년, 1978년 NOTW 투어에서는 로저와 프레디가 함께 고음 부분을 부르기도 하고 1979년 12월 1일 크레이지 투어 글래스고 공연에서 로저가 가사를 까먹어서 프레디가 대신 부르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17] 일본 방문 당시 들은 음악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18] 여담으로 브라이언은 이 곡에서 장난감 고토(악기)를 연주했다고 한다.[19] 훗날 인터뷰에서 브라이언은 딕시랜드의 느낌을 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방법을 강구하다, 밴조렐레와 가공된 레드 스페셜의 사운드가 그 해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