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마이클
1. 개요
영국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그리스계 영국인[2] 으로, 본명은 게오르기오스 키리아코스 파나요투(Georgios Kyriacos Panayiotou)다.
'''1980년대를 상징하는 음악가''' 중 한 명이며, 다른 아티스트들은 한번도 하기 힘든 빌보드 연말차트 1위를 '''2번'''이나 한 전설적인 인물이다.[3] 한번은 WHAM!으로, 한번은 솔로로 달성했다. 개인 최고기록은 폴 매카트니의 3회[4] 이며, 그 다음 기록이 바로 조지 마이클의 2회임을 감안하면 조지 마이클이 마이클 잭슨-마돈나-프린스 3인방 못지않은 인기를 얻었음을 보여준다.
1980년대 최고의 듀오 Wham! 출신으로, 대부분 히트곡의 메인 보컬뿐 아니라 작곡과 프로듀싱까지 거의 도맡았다. Careless Whisper, Last Christmas, Wake Me Up Before You Go-Go 등의 히트곡으로 Wham! 활동만으로 이미 세계적인 슈퍼스타 반열에 올랐는데, 솔로로는 그것 또한 초월하는 엄청난 활약을 보였다. 1집 《Faith》가 미국 등 세계 5개국[5] 에서 1위에 올랐고 판매량은 2천5백만 장 이상으로 집계됐으며,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 등 대중음악계 주요 상까지 석권했다. 이 앨범 안에서 빌보드 1위 곡만 4개가 나왔다.[6] 특히 동명의 수록곡 〈Faith〉는 1988년 빌보드 싱글차트 '''연말결산 1위'''[7] 에 오르는 등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980년대에 보여준 퍼포먼스만으로도 충분히 슈퍼스타로 기억될 만한 사람이지만,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재능의 반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고 끝났다'''고 아쉽게 생각한다.[8][9] 소니 뮤직과의 긴 법정 싸움과 동성애자임을 밝힌 후 받은 부정적인 시선으로 어려움을 겪은 데다, 말년에는 약물에 의존하며 건강관리에 실패했다. 사실상 제대로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시기는 솔로 3집 《Older》까지고,[10] 그 후로는 음악 활동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콘서트는 말년까지도 상당한 티켓 파워를 자랑했다. 실황 영상만 봐도 공연장이 꽉 차 있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배철수도 배캠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그의 라이브를 언급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2. 상세
서양인들의 발음, 특히 영어 발음은 비성을 자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11] "Easy to listen, Hard to sing"이라 요약되는 조지 마이클의 보컬은 비성과 높은 피치에서 터져나오는 미성이 혼합된 특유의 창법과 자신만의 곡 해석력, 미칠 듯한 그루브함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의 곡들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레퍼토리로 선곡되는 경우가 많은데, 막상 불러보면 굉장히 어려워서 노래를 좀 불렀다는 사람이라면 두말 할 나위 없이 모창이 힘든 가수로 손꼽는다. 조지 마이클은 보컬 면에서 엘튼 존[12] , 아레사 프랭클린[13] , 스티비 원더, 프레디 머큐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14] 싱어송라이터로도 유명한데, 그가 작곡한 노래들은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고 시대가 지나서도 촌스럽지 않다.
비록 요즘 10, 20대들은 조지 마이클 하면 "누구지?" 하겠지만, 왬 활동 도중 발표한 Last Christmas뿐 아니라 Wake Me Up Before You Go-Go, 왬 활동 막바지에 솔로로 발표한 Careless Whisper[15] 나 왬 해체 이후 솔로 데뷔 싱글 Faith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 없을 것이다. 실제로 솔로 데뷔 앨범에서만 빌보드 1위 곡을 4개나 터트려서 1980년대 마이클 잭슨, 프린스, 마돈나와 함께 슈퍼스타급 인기를 얻었다. 당시를 두고 "백의 마이클과 흑의 마이클이 경쟁을 하는 시대"라는 표현이 있었을 정도. 물론 언론이 마이클 잭슨과 프린스를 라이벌 관계로 몰아간 것과 비슷하게[16] 이도 언론 플레이 중 하나였다.
조지 마이클의 솔로 데뷔곡이자, 명실상부한 조지 마이클의 베스트 곡인 'Faith'. 일부 록 리스너들에게는 1998년 림프 비즈킷이 커버한 버전이 익숙할 수도 있다. 커밍아웃한 아담 램버트가 커버한 Faith도 있다.
하지만 대중성보다 음악성에 초점을 두고 만든 정규 2집 앨범이 1집보다 부진하자 조지 마이클은 2집을 제대로 홍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991년 소니 뮤직에게 소송을 걸었고, 소니 뮤직과 길고 긴 법정 투쟁을 하는 동안 앨범을 내지 못한 조지 마이클은 대중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소송이 마무리된 1996년에는 새 앨범 《Older》를 발표하면서 주목받나 했더니 1998년 LA의 어느 공원 화장실에서 함정수사로 체포된 사건 때문에 안좋은 쪽으로 화제가 되었다.[17][18] 조지 마이클은 해당 사건에 대해서 자신이 함정수사를 당했다고 변호했으며, 약 800유로의 벌금과 30시간의 자원봉사 형을 선고받았다. 얼마 후 발매한 싱글 Outside의 뮤직 비디오에서는 이 사건을 풍자하기도 했다. 1999년에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공식적으로 커밍아웃 하였다. 조지 마이클은 브라질 출신의 디자이너 안셀모 펠레파와 1991년 처음 만나 안셀모가 에이즈로 죽은 1993년까지 매우 진지한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엔 부모님도 자기가 게이인지 모르던 때라 에이즈에 대한 공포와 사랑하는 이의 사별을 견디기 매우 힘들어 했다고. 1996년 앨범 타이틀곡인 Jesus to a Child는 안셀모를 기리기 위해 지은 노래였고, 2004년 앨범에서도 Please Send Me Someone to Love (Anselmo's Song)이라는 노래를 수록해 특별한 애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엔 이라크 전쟁에 대하여 무척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라디오에서 토니 블레어 총리를 푸들(Bush's Poodle)이라며 신나게 까면서 영국과 미국 내에서 논란이 일었고, 음악 외의 부분에서 회자되다 보니 이미지도 안좋아졌다. 물론 이라크 전쟁이 기나긴 수렁에 빠지면서 여론이 돌아서자, 조지 마이클의 반전(反戰) 의견에 대한 지지도 늘어났다. 마돈나 등 동료 가수들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가 욕을 먹었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긍정적으로 돌아간 경우. 그리고,푸들은 이후 토니 블레어의 대중적 별명이 되어버렸다. 여하튼, 이 때 마음적으로 괴로웠는지 2003년에 은퇴 선언까지 했다.
2004년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소니 뮤직과 재계약, 새 앨범 《Patience》를 발표하면서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로는 콘서트 위주로 활동했다. 1996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 댈러스 출신의 케니 고스라는 파트너와 함께 살았다. 2005년경에 시민결합(법적 동거)을 하려고 할 정도로 진지한 사이였는데 이라크 전쟁 반대 등 정치적 이유로 인기가 급감하고 앨범과 콘서트가 부진해지자 무기한 연기했었다. 나중에 2011년이 돼서야 자기들이 2년 전부터 더 이상 연인관계가 아님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2011년 11월 21일, Symphonica 투어 도중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비엔나 병원에 입원했다. 급성 폐렴이었으며 치료 도중인 11월 25일에 갑자기 악화되어 코마 상태에 빠졌다. 다행히 12월 1일 깨어났지만 치료는 계속되었고 21일에야 퇴원할 수 있었다. 건강을 되찾은 기념으로 병원에서 무료 공연도 펼쳤다. 코마 상태일 때 예전에 사망한 어머니가 나와서 아직 올 때가 아니라고, 돌아가라고 했었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White Light 곡을 쓰게 된다.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 공연에 출연하여 수억 명의 사람들 앞에서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라는 것을 대중들에게 확인시켰다. 2012년에 레바논계인 호주 출신 헤어 스타일리스트인 페디 파와즈와 사귀기 시작했다.
미국 드라마 일라이 스톤(Eli Stone)에서는 주인공의 환상 부분에 직접 나와[19] Faith를 열창 한다.
2016년 12월 25일 새벽 자택에서 취침 중이던 조지 마이클은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 향년 53세. 사인은 심부전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히트곡처럼 정말로 2016년이 그의 생애 마지막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사망 당시 총 9760만 파운드(약 1472억원)의 재산을 남겼다. #
허핑턴 포스트가 트위터에서 조지 마이클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팝스타 조지 마이클이 53세 나이로 집에서 죽었다고 짤막하게 기사를 썼는데, 유독 아랍어 기사로는 "조지 마이클은 마약중독자이자 동성애적 성향이 있었다."는 문장을 첨언한 것이 드러나 논란이 일었다.
조이 디비전을 극찬했다.#
2019년 11월 5일, 사후 첫 번째 신곡이 공개되었다. 제목은 '''This Is How (We Want You To Get High)'''이며, 영화 라스트 크리스마스의 엔딩곡으로 삽입된다. 곡 자체는 2015년 마지막 세션때 녹음되었다고 한다. 듣기
조지 마이클의 사망 3주기인 2019년 12월 25일 조지 마이클의 큰 누나(1960년생)가 사망했다. 향년 59세.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3. 선행
조지 마이클은 생전에 크루징[20] , 마약 문제라는 안좋은 이미지로만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지만 사후 그가 해오던 선행들이 속속들이 공개되고 그의 방탕한 성적 생활과는 별개로 인간성 자체는 선한 사람이라고 재평가 받고 있다.
수년간 영국 최대 HIV 자선 단체인 테런스 히긴스 기금(Terrence Higgins Trust)에 상당한 금액을 기부했고,[21] 엘튼 존과 함께 불렀던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의 인세 전부 또한 테런스 히긴스 기금에 기부했다. 2006년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신 뒤엔 국민 건강 서비스(NHS)의 간호사들을 위해 매년 무료 콘서트를 열고 맥밀런 암 지원 기구(Macmillan Cancer Support)에도 거액의 기부를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이 후원 센터 차일드라인(Childline)은 30년 간의 기부와 Jesus to a Child의 저작권 양도에 감사를 표하며 30주년 추모 콘서트를 열 계획이라 밝혔다.
거동이 불편한 이들에게 급식을 제공하는 단체인 프로젝트 앤젤 푸드(Project Angel Food)의 가장 큰 후원자 역시 그였음이 밝혀졌다.
이런 선행이 조지 마이클의 생전에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인데, 그가 '''익명을 조건으로 기부와 후원을 했기 때문'''이다. 사후에 그에게 은혜를 입었던 이들이 트위터 등을 통해 이런 사실을 밝히기 시작함으로써 조지 마이클이라는 인간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22]
조지 마이클은 익명으로 꾸준히 선행을 실천했을 뿐 아니라 공개적인 자선 프로젝트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에티오피아의 기아 지원을 위한 영국 음악계의 프로젝트 밴드 에이드(Band Aid)에 참여해 동료 가수들과 함께 Do They Know It's Christmas?를 부른 것은 잘 알려진 일이며, 1986년 영국 왕세자 자선기구(The Prince's Trust) 주최 자선 콘서트에 올라 Everytime You Go Away를 부른 것 또한 유명하다.
4. 디스코그래피
4.1. 앨범
4.2. 싱글
4.2.1. 빌보드 1위
곡 목록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지만, 그의 전성기는 굉장히 짧다! Careless Whisper는 조지 마이클의 싱글로 먼저 발매되긴 했지만 Wham!의 2집 《Make It Big》 의 수록곡이기도 하므로, 1987-1988년도가 그의 피크였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이 수준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한 10년을 더 활동했다고 생각해 보라. 조지 마이클 개인 뿐 아니라 팝이라는 대중예술 차원에서도 너무 애석한 일이다.
게다가 놀라운 사실은 1위를 기록한 곡들 중 무려 '''4곡'''이 1집 앨범 <Faith> 수록곡이다. 그리고 범위를 넓혀보면 '''무려 <Faith>에 수록된 9곡 중 7곡이 빌보드 차트 10위 안에 들어간 기록이 있다!''' 1집이 당시에 얼마나 히트를 했는지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며, 이 정도면 1집은 웬만한 베스트 앨범 이상의 수준.
왬 시절까지 포함하면 총 11개의 빌보드 싱글 1위 곡을 보유했고 영국 싱글 차트 1위 곡도 마찬가지로 11개이다.
히트곡인 Last Christmas는 미국에서 발표되지 않아서, 빌보드 차트에 오르지 못했었으나 2021년(??)에 9위로 올랐다.
- Careless Whisper (1984)
- I Knew You Were Waiting (For Me) (Duet with Aretha Franklin) (1987)
- Faith (1987)
- Father Figure (1988)
- One More Try (1988)
- Monkey (1988)
- Praying for Time (1990)
-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 (Duet with Elton John) (1991)
4.2.2. 빌보드 2위
- I Want Your Sex (1987) [30]
4.2.3. 빌보드 3위~10위
- A Different Corner (1986)
- Kissing a Fool (1988) [31]
- Freedom! 90 (1990)
- Too Funky (1992)
- Jesus to a Child (1996)
- Fastlove (1996)
[1] 2016년 이후로 업데이트가 되지 않고있다.[2] 아버지는 그리스계 키프로스인, 어머니는 잉글랜드인.[3] 연말차트 1위를 2회 이상 한 인물은 흔치 않다. 전설적인 비틀즈조차 연말차트 1위곡이 2개이며, 동시대의 슈퍼레전드인 마이클 잭슨은 놀랍게도 '''연말 1위곡이 없다!!!''' 물론 이는 마이클 잭슨이 싱글 위주의 성공이 아닌 음반 위주의 성공을 해서 그렇지만... 그리고 역시 1980년대의 전설적인 가수인 마돈나도 '''연말 1위곡이 없다.''' 그야말로 '''꿈의 기록'''인 셈.[4] 비틀즈로 2곡, 윙스로 1곡.[5] 미국, 영국, 캐나다, 스페인, 네덜란드[6] Faith, Father Figure, One More Try, Monkey. 신기록은 아닌데, 마이클 잭슨이 1987년 발매한 Bad 앨범에서 5개의 1위 곡이 나왔기 때문이다.[7] 빌보드 1위 곡(싱글)은 매주 발표되는데, 매년 연말결산(Year-End number one) 차트가 따로 발표된다. 그러므로 빌보드 싱글차트 연말결산 1위에 올랐다는 것은, 그 해에 나온 빌보드 1위 곡들 중에서도 가장 성적이 좋은 곡으로 꼽혔다는 의미이다.[8] 실제로 자신의 노래뿐만 아니라 다른 가수의 어려운 노래들도 잘 소화해 냈다. 특히 프레디 머큐리 사후 추모 콘서트에서 프레디의 'Somebody to love'를 정말 잘 소화해냈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들어보자. 프레디 보컬의 난이도로 인해 해당 콘서트에서 퀸의 노래를 부르고 좋은 평가를 받은 뮤지션들이 적었던 걸 생각하면 조지의 라이브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9] 그냥 youtube 에서 George Michael live 만 검색해서 들어봐도 알 수 있다. 라이브 퍼포먼스가 앨범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쉽게 볼 수 있다.[10] 솔로 1집이 워낙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3집 또한 미국 빌보드에서 5위 밖으로 밀려났을 뿐 영국 등 13개국에서 1위에 올라 세계적으로 고른 인기를 끈 작품이다. 수록곡 Jesus to a Child도 영국, 호주, 스페인 등 6개국에서 1위에 오를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다.[11] 동양에 미성 가수가 많은 이유 중 하나다.[12] 엘튼 존이 1974년에 발표했었다가 나중에 조지 마이클과 다시 커버한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가 빌보드 싱글 1위를 차지했다.[13] 그녀와 함께 I Knew You Were Waiting (For Me)를 불러 빌보드 싱글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14] 프레디 머큐리의 추모공연에 참여해 퀸의 멤버들과 공연하기도 했는데, 이 때 부른 Somebody to Love는 명라이브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15] 당시 미국에선 'Wham! featuring George Michael' 명의로 발표되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다. 왬에게 큰 성공을 안겨준 곡이지만, 이 곡으로 얽힌 멤버 간의 불화가 해체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 좀 아이러니하다. 한국에서는 예능 프로그램이나 각종 서브컬처에서 에로틱한 분위기를 표현하는 브금으로 도입부 색소폰 연주가 자주 나온다.[16] 물론 인기를 얻는 법에 대해 매우 해박했던 마이클 잭슨은 이 논란이 최고조가 될 때쯤 Bad를 프린스와의 합작곡으로 내서 대박을 내려고 했으나 문제는 프린스와 마이클 잭슨의 사적 관계가 상당히 나빴다는 것. 프린스는 Bad를 듣고 나서는 '이 노래는 나에게 맞지 않는 것 같다'라며 거절했고 이 콜라보는 아쉽게도 성사되지 못했다.[17] 잘생긴 잠복수사 경찰이(경찰인지 몰랐다) 화장실로 유인해 따라들어 갔고, 경찰이 화장실에서 서로의 성기를 보여주자해 그 말을 따랐다고 한다. 조지 마이클은 체포 사건으로 언론에 의해 강제 아우팅당한 사례로 상당한 인권 침해에 해당된다.[18] 참고로 왬 시절까지는 양성애자였다. 첫사랑을 느낀 것도 12살 때 제인이라는 또래의 금발머리 여자였으며, 왬 시절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여자들과 사귀었으며, 또 자 봤다고. 왬을 해체하고 솔로로 나설 때쯤 자신이 완전한 동성애자인 것을 자각했다고 한다.[19] 그냥 카메오 수준이 아니라 일라이 스톤의 각 에피소드 제목들은 모두 조지 마이클의 노래 제목에서 따왔으며, 주인공의 심리와 상황을 설명해주는 장치로 쓰인다.[20] 터미널 화장실 등 공공 장소에서 섹스 파트너를 찾는 행위를 뜻하는 게이 은어[21] 1996년 파트너로 지냈던 안셀모 펠레파(Anselmo Feleppa)를 에이즈로 잃은 뒤부터 이 단체에 기부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었는데, 이 문단의 내용 대부분이 담겨 있는 현지 기사에는 조지 마이클이 파트너 안셀모 펠레파를 HIV로 잃었다고 이야기했다는 내용(Michael, who spoke about losing his partner Anselmo Feleppa to HIV)만 담겨 있을 뿐, 기부 시작의 전후 관계는 파악할 수 없다.[22]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 기부를 받은 이들도 많았던 모양. 빚에 시달리던 바텐더가 그에게 거액의 팁을 받았던 증언이라든지, 체외 수정이 필요한 불임 부부에게 선뜻 경제적 지원을 해줬다는 사례 등이 있다.[23] 커버 앨범.[24] 라이브 앨범[25] 앨범에 실린 곡 중 4곡만 공개되었고, 그중 3곡은 에이즈 자선 앨범인 Red Hot + Dance에 수록되었다. 완성되지는 않았으며 앨범 발매 취소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Vol. 1보다 댄서블한 곡들이 많을 예정이었고, 91년 6월 발매 계획까지 잡혀있었다.[26] 93년 발매 목표로 91년부터 작업했던 앨범이다. R&B 10곡을 준비했고 스티비 원더, 엘튼 존, 브라이언 페리, 씰, 샤데이, 자넷 잭슨, 아니타 베이커 등 10명의 가수 피처링만으로 구성될 예정이었지만 소니 제작사와의 분쟁과 음원 일부의 유출로 작업을 중단했고 절반밖에 완성되지 못했다.[27] 앨범 완성이 확인된 두 앨범 중 하나이다.[28] 동명의 싱글만 발매하고 끝났다. 앨범 완성이 확인된 두 앨범 중 하나이다.[29] 사망 몇달전부터 컴백을 위해 준비하던 마지막 앨범이다. 가사 작업만 완료한 것으로 알려졌다.[30] 1집 앨범 수록곡으로 Sex라는 단어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발매된 앨범에서는 빠져있었다. 미국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던 곡이였지만 한국 지상파에서는 틀수 없는 곡이였기 때문에 당시 빌보드챠트를 전하던 국내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짧막하게 언급하면서 전해줄수 없어 아쉽다는 멘트를 들을수 있었다. [31] 한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