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테일러
1. 소개
영국의 록밴드 퀸의 드러머.
각종 타악기[9] , 백킹보컬 [10][11] 그리고 비주얼[12][13] 담당이다.
2. 생애
더싱엄에서 태어나 3살 때 콘월 주의 트루로로 이주하였으며, 7세에 친구들과 'the Bubblingover Boys'라는 작은 밴드를 만들기도 하는 등[14] 어릴 적부터 로큰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기타를 배우다가[15] 갑자기 드럼이 끌리게 되어 드럼을 쳤다고 한다. 1963년 로저는 제트 해리스와 토니 미함의 '다이아몬드' 라는, 그가 굉장히 좋아했던 인기 음악의 악보를 샀는데 그 악보에는 베이스와 드럼의 코드가 적혀져 있었다. 아마 이것이 그가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다가 드럼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 결정적 계기라고 추측된다. (그는 1961년 그의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다 준 드럼 베이직 키트로 이미 꽤 드럼에 능숙한 편이었다.)
1960년 5월, 그는 여러 기독교 단체의 후원을 받는 400년 전통의 학교인 트루로 부속 성당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는데 , 오직 200여명의 학생들 중 16명의 학생들만이 합창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로저 테일러는 그 합창단에 소속되어 일요일 세 번의 미사에 참여하여 노래를 부르고, 결혼식이나 크리스마스의 자정 미사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노래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로저는 훗날 퀸에서 백보컬을 맡게 된다.
로저는 어릴 적부터 진지하게(?) 뮤지션의 꿈을 키웠다고 전해진다. 학교에서 꽤 무기력하긴 했지만 그는 매우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으로 유명한 학생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음악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드럼이 그저 로저의 취미로 끝나기를 바랬다고 한다. 로저의 명석함을 낭비하는 것 같았다고.
런던 빈민가 출신이라는 설이 있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아버지인 마이클 테일러는 영국 식품 의학품 안정청(The Ministry of Food)에 소속된 공무원이었고, 킹슬린에서 태어난 로저가 트루로로 이사한 이유도 아버지의 발령 때문이었다. 그의 집은 시내 중심가에서 1마일도 떨어지지 않은 개인 테니스 코트가 달린 커다란 집이었고, 부모가 이혼한 후 옮긴 어머니의 집에도 배드민턴 코트가 있을 정도여서,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는 모든 면에서 고향 친구들과 비슷했지만, 콘월 사투리를 쓰지 않고 포쉬 악센트를 사용했다.
고향에서 The Reactions라는 밴드의 드러머로 본격적인 음악 커리어를 시작했는데 이때 밴드의 보컬이 탈퇴하는 바람에 로저가 보컬 역을 떠맡게 되었다. 드러머인데도 불구하고 보컬 실력이 좋아서 이때부터 The Reactions에서 보컬과 드럼을 동시에 맡게 되었다. 따라서 프론트맨도 로저가 되어버림. The Reactions 때의 사진을 보면 보통 밴드와는 다르게 드럼이 무대 맨 앞으로 나와있는걸 볼 수 있다. 나중에 퀸에서 보여주는 우월한 보컬&코러스 실력은 이때부터 형성되었다고 보면 될듯.
또래보다 한 뼘 더 작고 마르고 창백하고 말이 별로 없는 편이었지만, 유년기시절부터 잘생긴 외모 덕분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The Reactions의 멤버들 사이에서 압도적 인기를 자랑했다고. 그렇게 The Reactions는 고향 지방에서 공연을 하며 명성과 실력을 쌓아나갔는데, 이때 푼돈 수준이기는 해도 입장료를 받고 공연을 했는데도 관객이 2~300명씩 들어오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67년 2월의 어느 날,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만다. 도브스 빌리지 홀에서 공연을 하기 위해 The Reactions의 멤버들은 안개가 자욱하고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이동을 했어야 했는데, 로저는 갓 운전면허를 딴 상태였고 친구 대신 자신이 운전을 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운전 도중 로저는 전조등을 켜지 않고 운전을 해 길가에 반쯤 세워져있던 생선을 실은 차를 미처 보지 못해 그대로 박고 만다.
로저는 앞유리를 관통하고 날아갔지만 기적적으로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로저를 제외한 동승했던 멤버들의 상태는 심각했는데, 손과 코가 부러졌고, 가슴에 큰 상처를 입었고, 복부 내부의 부상을 입는 등 콘월의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단연코 가장 심한 부상을 당한 동승자는 피터 길-그레이라는 로저의 친구였는데, 사고가 났을 당시 차의 손잡이가 그를 관통하여 왼쪽 겨드랑이의 살이 크게 찢어져있었다. 폐에 구멍이 날 정도로 심각하게 부상을 입었고, 사고 후 오른손이 마비가 되어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약 1년간 병원에 입원한 동안 왼쪽으로 글씨 쓰는 법을 배우기도 했고 재차 수술을 받아 오른쪽 손의 엄지를 세울 정도까지는 되기는 했지만, 의사를 꿈꾸던 그가 결국 회계사로 꿈을 바꿔야 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로저는 다행히 몸에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에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피터의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는 잘못이 없었다고 말했지만, 로저는 주변인들의 위로와는 별개로 한동안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 했다고 한다.
밴을 운전하다가 전조등을 키지 않아서 다른 차량과 충돌 됐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로저가 아무 잘못이 없지는 않았고, 보드민 치안 법정의 소환장을 받고 경찰에 기소되었다. 생선 트럭 운전자였던 제라드 브로드가 비가 오고 어두운 날 후미등을 켜두지도 않은 채 부주의하게 자리를 떠난 일은 민사상의 문제로 이어졌고, 보험과 관련된 법정공방이 끝을 보기까지는 7년이 걸렸다. 특히 그 운전자는 고작 열 일곱살 밖에 안된 애가 공연 장비들을 실은 낡은 밴을 끌고 갔다는 사실을 이용해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고 했지만 결국 트럭 운전사가 책임을 지게 되었고 몇년에 걸친 로저의 고통은 끝이 났다. 데뷔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로저는 그 사고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했던 기억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고 이후에는 The Reactions의 드럼을 맡은 로저와 기타리스트인 마이클 더들리가 각자 런던과 옥스퍼드로 진학하자, 밴드는 자연스럽게 해체되고 말았다.
언뜻 보기엔 놀기만 하는 얼굴천재 드러머로 보이지만 로저는 치의대 출신이다. 앞에서 언급한 고등학교때 난 차사고로 인한 심적 고통은 로저의 수험공부에 영향을 끼쳤는데, 줄곧 A를 받았던 생물학, 화학, 물리학 점수가 예전보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저의 성적은 여전히 런던 치의대에 합격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러나 로저는 그다지 자신의 전공에 대해 관심이 없었는데, 이를 못마땅해 한 교수 중 한 명이 수업시간에 수업을 멈추고 로저에게 눈과 귀 사이에 있는 뼈가 무엇인지 급작스럽게 질문을 하자 로저는 관골(zygoma)이라는 정확한 대답을 한다. 그러자 교수는 그에게 관골이 그리스어로 뭐냐고 물어봤고 로저는 교수의 말도 안되는 꼬투리성 질문에 화가 났는지 '''"이게 치과 의사 시험이에요, 아니면 망할 그리스어 시험이에요?" [16] ''' 라고 반문했다. 그 사건 이후에는 완전히 교수들의 눈 밖에 났다고. 하지만 과에서 가장 예쁜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는 멋쟁이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런던의 대학에서 수학중, [17] 드러머를 구하고 있던 브라이언 메이의 밴드 "Smile"의 오디션을 보게 된다. 이때 드러머를 구한다는 포스터[18] 를 보고 로저가 먼저 연락을 했는데, 브라이언은 자신이 원하는 드럼 스타일을 편지에 아주 장황하게 적어서 로저에게 부쳤다고 한다. 로저는 자신의 플랫에서 브라이언 메이와 팀 스타펠 앞에서 오디션을 봤고 둘 다 단박에 로저의 실력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19] 팀 스타펠이 "험피봉"이라는 그룹으로 옮겨가고 보컬이 비자 브라이언과 로저는 보컬을 구한다는 공고를 냈다. 이 때 프레디 머큐리가 이 그룹의 보컬로 활동을 하게 되고 약 1년 후 존 디콘도 합류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파격적인 이미지를 위해 팀 이름을 "Queen"으로 정했다.
사실 퀸에서 가장 먼저 솔로앨범을 낸 건 프레디가 아니라 로저다.[20] 1987년 프레디 머큐리의 건강 이상으로 순회공연을 할 수 없게 되자 퀸 멤버들의 동의를 얻어, 드러머가 아닌 리드 보컬로서 밴드 '더 크로스'를 조직한다. 프레디 머큐리 사망 이후 존 디콘이 은퇴하고 브라이언 메이와 함께 두 명이서 활동하고 있으며 지금도 투어를 돌고 있다.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 출연해 ''We will rock you'' 의 그 유명한 드럼 박자 비트를 연주했다.
2020년 신년 서훈 명단(New Year Honours)에 올라 대영제국 훈장 4등급(OBE)을 받았다.
3. 음악적 특징
로저의 드럼 실력에 대해서는 그다지 나쁜 평은 없다. 최고의 인기밴드 퀸에 어울리는 실력을 가진 실력 좋은 드러머라는 평도 있고, 실력 자체로는 딱히 흠잡을 데도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칭찬할 곳도 없는 무난한 드러머라는 평도 있다. 어찌됐든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드러머까지는 아니더라도 탑클래스의 드러머라는 사실은 대부분 공감하는 편. 또한 표현력이 풍부한 드러머라는 평을 듣는다. 퀸의 음악이 발라드를 비롯해서 팝, 하드락, 오페라락 등 워낙 이것저것을 시도하다보니 빠른 속주나 테크니컬한 연주는 아니더라도 곡 분위기에 알맞게 드럼을 치는 표현력에 장점을 가지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기교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21][22]
퀸의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연주 및 작사, 작곡에 능했으며 "Radio Ga Ga", "A Kind of Magic" 등을 작곡하였고,[23] "I'm in Love With My Car"와 같이 초기에 본인이 작곡한 몇몇 곡에서는 리드보컬을 맡기도 했다. 브라이언과 함께 백그라운드 보컬을 겸했고[24] , 라이브에서 드럼을 치는 가운데 프레디 머큐리를 코러스로서 훌륭히 보좌한다.[25] 퀸 활동을 하면서도 "The Cross(87~93년. 프레디가 공연을 할 수 없게 된 뒤이기도 하다)"라는 개인밴드를 결성해서 활동 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 밴드에서의 역할은 보컬(&리듬기타)이다. 또한 존 디콘과 함께 처음으로 방한한 퀸 멤버 중 하나이다.[26][27]
스마일 시절부터 쭉 루딕(Ludwig) 드럼에 질젼(Zildjian)심벌 조합으로 키트를 구성했으나[28] , 부다페스트 라이브 등의 A Kind of Magic 앨범 투어에서는 야마하 드럼을 썼고, 1992년 프레디 머큐리 추모콘서트부터는 다시 루딕 드럼을, 이후 2000년대 후반부터는 DW 드럼을 쓴다.
이와 별개로 따지고 보면 퀸 내에서 음악적 먼치킨 속성이 가장 강한 인물이다. 드럼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기타와 베이스를 연주한 적도 있으며, 피아노도 칠 수 있고, 보컬 또한 출중하다.[29] 로저의 악기 실력은 모두 독학한 것이며 작곡 실력 또한 그렇다.
3.1. 사용 장비
자세한 내용은 로저 테일러/사용 장비 문서 참고.
4. 여담
- 허스키한 보컬 음색도 탁월하며, 미성인 프레디와 목소리 합이 상당히 좋다. 굉장히 걸걸한 음색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높은 음역대를 소화하는데, 가성의 경우 3옥타브 후반대를 넘나드는 코러스를 라이브에서도 무리없이 소화해낸다. 물론 드럼을 계속 치면서.보헤미안 랩소디에 아카펠라나 오페라부분의 화음에서 테너 파트는 당연히 로저의 것. 라이브나 앨범을 듣다가 찌르는 듯한 고음이 나오면 그건 전부 로저 테일러의 목소리라고 생각하면 된다.[30] 해외 유튜브 영상 댓글을 보면 걸걸하면서도 높은 목소리라 로드 스튜어트와 비슷한 음색이라는 평도 간간이 들린다.
- 1981년부터 Fun in Space를 시작해서 현재까지 총 5장의 솔로 앨범(더 크로스까지 치면 8장)을 내면서, 퀸 멤버들 중에서는 가장 많은 솔로곡을 발표했다. 가능하면 중립적인 정치성을 지양한 퀸 노래들과는 다르게 사회비판적인 가사의 노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Nazis 1994가 가장 극단적인 예). 퀸 외부에서의 작곡 스타일은 보다 정통적인 락을 지향하는데 항상 그랬던 건 아니고, 더 크로스 1집인 Shove It의 몇몇 곡에서는 랩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 퀸의 멤버 중 가장 미형에 속한 인물로 뭇 여성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31] 그래서인지 총 3번의 결혼을 거쳤는데, 첫 번째 부인은 '도미니크'라는 프랑스인으로 슬하에 두 아이를 두었으나 이혼하였다.[32] 두 번째 부인은 '데비 랭(Debbie Leng)'이라는 여성으로[33] 뮤비 찍다가 눈이 맞아 동거했으나 로저 테일러가 바람 핀 게 대대적으로 보도 되면서 차였다. 세 번째 부인은 세리나 포트가이너라는 여자로 로저보다 22살 연하라고 한다.[34]
- 여장도 했었다. "I Want To Break Free"에 등장하는 컷이고, 보다시피 여고생 역할이다. 당시 35세로 발랄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구글에 Rogerina(로저리나)라고 검색하면 사진이 많다.[35]
예쁜 외모 덕에 사람들이 여자로 오해해서 대학 생활때 수염을 길렀다고 한다. 젊은 시절 사진 보면 충분히 납득 가는 외모. [image]
- 대외적으로는 까칠한 이미지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장난기도 꽤 심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일화로 바로 상단에도 나오는 "I Want To Break Free" 뮤직비디오에서 여장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다름아닌 로저였다.[36] 대학 시절, 프레디 머큐리와 동거하며 함께 옷가게를 차렸을 때, 팔려고 내놓은 옷이 아닌 프레디의 개인 옷을 싼 값에 팔아치워 프레디가 그 손님을 쫓아가 파는 옷이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첫번째 앨범을 발매할 당시에도 프레디와 같이 짜고 존 디콘의 이름을 '디콘 존'으로 바꿔 적어놓는 장난을 친 적도 있다.[37] 또, 팬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화로 멤버들이 자신의 솔로곡 "I'm in love with my car"를 앨범(A Night In At The Opera)에 넣는 것을 반대하자, 옷장 속에 들어가 시위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성격 때문인지 비슷하게 놀기를 좋아하는 프레디와는 사적으로도 아주 친했었고 관련 동영상과 사진도 찾아보기 쉽다.
- 나이가 나이인지라, 몇몇 공연에서 핸드싱크를 하고 있어서 추해지기 전에 은퇴해라는 말까지 듣고 있다.[38] 그래서 그런지 드럼을 아들인 루퍼스 타이거 테일러에게 맡기고 마이크를 잡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 음역대가 굉장히 넓어서(A#1~E6) 음역대만 놓고보면 프레디 머큐리보다 넓은 음역대를 지니고 있다. https://youtu.be/OgEb6OnC75c
- 1982년까지는 프레디 못지않게 공연에서 웃통을 까기도 했다.
- 최근에는 수염을 기르고 있는데 그래도 잘생겼다. 젊을때의 부리부리한 눈매는 여전하다.
- 참고로 우표와 관련된 일이 하나 있었다. 영국의 로열 메일 그룹(Royal Mail Group)[39] 에서 1999년과 2000년에 새천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하였는데, 1999년의 테마는 "위대한 영국인들(Great Britons)"였다. 그 중 하나에 밴드메이트인 프레디 머큐리가 인쇄된 우표가 있었다.[40] 헌데 프레디가 무대를 뛰어다니던 중 찍은 사진 중 잘 나온 것을 고르느라 그런 것이었는지, 뒷배경에 로저가 같이 찍혔다!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영국의 우편법에 따르면 우표에 실릴 수 있는 생존인물은 영국 왕실의 일원들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즉, 주인공인 프레디가 사망한 상태였지만, 얼떨결에 같이 나온 로저는 2020년 현재 기준으로 생존한 상태이니 우편법을 위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었던 상황. 다행히 우편국 측에서도 이를 인지하였는지, "여왕 폐하께 모든 우표를 검증받았다."는 해명을 하면서도, "확실히 드문 경우이긴 하다."라고 인정하였다. 문제의 우표 사진
- 1992년 12월 21일과 22일, 로저의 밴드 더 크로스(The Cross)가 영국 런던 마키 클럽(Marquee Club)에서 크리스마스 기념 공연을 하였다. 이 때 게스트들을 초청했는데, 무려 스마일 시절의 동료 팀 스타펠(Tim Staffell)이 2일 연속으로 출연했다.[41] 또한, 첫날 추가 게스트로는 더 후의 로저 달트리가, 둘째날 추가 게스트는 퀸의 브라이언 메이가 출연하여 둘째 날 공연은 완전체 스마일이 해체를 하고 나서 20년만에 다시 공연하는 진귀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둘째날 공연, 팀과 브라이언이 무대로 등장하여
를 부르는 공연 촬영 영상.
[1] 2020년 4등급 대영제국 훈장(OBE) 수훈자로 선정되었다.[2] 믹 재거와 생일이 같다.[3] 프레디는 팝 음악과 오페라를, 브라이언은 영화 OST 앨범, 존은 디스코 팝(영화 주제곡) 등 솔로 활동에서는 다른 장르와 방향성을 시도한 반면 로저는 좀 더 정통적인 록 음악을 지향한다.[4] 정확히는 사실혼 관계 정도였다고 한다.[5] Breakthru뮤직 비디오에서 출연 했었다.[6] 총 2남 3녀[7] 아버지를 이어 드러머로 활동 중이며 퀸&아담 램버트의 공연에서 아버지와 함께 드럼을 치다 현재는 밴드 '더 다크니스'의 드러머로 활동 중이다.[8] 연주하고 있는 곡은 '39이다.[9] 드럼뿐만 아니라 팀파니 등의 북 종류의 악기부터 시작해서 징을 비롯해 탬버린까지 모든 타악기는 로저의 몫. 퀸의 전자악기 활용이 활발하던 시기에는 드럼머신도 다루어서 녹음을 했다. 이 때문에 로저의 포지션명을 단순히 드러머가 아닌, 퍼커셔니스트로 적은 경우도 많다.[10] 마음에 안 드는 일은 바로바로 항의하는 등 퀸 멤버들 중에서 가장 직설적인 성격이었고 그 과정에서 욕설도 잘 썼다. 이와 관련해서 일화가 한 가지 있는데, 퀸 데뷔 초기에 퀸 멤버들이 마약을 한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었다.(1960~70년대에는 락밴드들이 마약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인터뷰를 하다가 어떤 기자가 "퀸의 멤버들이 마약을 한다는 게 사실입니까?"라고 물어봤는데 로저 테일러가 빡쳐서 '''"우리는 마약 맞고 눈 풀려서 공연하는 밴드 아닙니다."'''라고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고...[11] 2019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골든 글로브에서 작품상을 타자 평론가들 엿 먹으라고 했다. 프레디가 살아있을 때는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던 평론가들이 영화에는 상을 주니 단단히 빡치신 듯. [12] 밴드 초기에 어느 기자가 본인의 단점은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너무 잘생긴 것'''이라고 답변했다. 사실 일흔 줄에 걸친 지금도 어지간한 젊은이들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꿇리지는 않을 정도의 외모이며 전성기시절 밴드의 단체 사진을 보면 혼자서 유독 가장 어려보이는 미소년같다. 팀내 막내는 존디콘 이지만 [13] 데뷔 초기에 퀸이 평론가들에 의해 한창 까일 때, "퀸은 '''배우 뺨치게 잘생긴 드러머(로저) 빼고는 볼 것이 없다.'''"라는 평이 있었다.[14] 딱 한 번 학교 축제에서 공연을 했지만 단 한 명도 제대로 연주한 멤버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로저는 우쿨렐레 담당.[15] 솔로앨범 수록곡 뮤비를 보면 기타 들고 립싱크하는 부분이 있다. 어쨌든 기타 배웠다고 인증한 셈.[16] Is this a dentist exam or a fucking Greek exam?[17] 치의학은 적성에 맞지 않아(정확히 말하자면 해부하는 것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졸업한다.[18] 대략 "미치 미첼(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와 진저 베이커(크림(밴드)) 스타일의 드러머 구함."이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19] 고향에 드럼키트를 두고 와서 어쩔 수 없이 봉고 두개로 오디션을 봤다고 한다.[20] 1981년부터 다섯 차례 솔로앨범을 발매했다.[21] <I'm in Love With My Car>의 라이브 연주와 1981년 몬트리올 공연에서의 드럼 솔로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Now I'm Here>의 막바지 부분에서도 화려한 드럼 솔로를 짤막하게나마 선보인다.[22] 2005년 A Night At The Opera 다큐에서 본인 연주의 특징을 설명한 바 있다. 연주할 때 스네어 드럼 연주 시 하이햇 심벌을 짧게 열었다 닫는것. 그는 이것이 스네어 드럼의 소리를 강조할 수 있다고 말했다.[23] 다만 작곡한 곡들이 히트한건 퀸의 전성기가 지난 후기때로 멤버들 중 히트곡을 가장 늦게 작곡했다. 프레디와 브라이언은 초기때부터 작곡을 꾸준히 하여 히트곡을 뽑아냈고 존은 퀸이 80년대 초 인기의 절정을 맞았을때 히트곡을 뽑아냈다.[24] 예를 들어 보헤미안 랩소디의 오페라 섹션에 나오는 초고음의 '갈릴레오'[25] 어떨 때는 프레디보다 잘 부른다는 느낌도 있다. 컨디션에 따라 낮춰 부르기를 즐기던(...) 프레디와는 달리 로저는 드럼을 때려박는 와중에도 고음 파트를 원키로 뽑아준다. Live Aid 공연 후반부 We Are The Champion를 들어보면 지친 프레디가 몇몇 고음파트를 놓칠 때 모두 훌륭한 백보컬로 커버해주며 안정적으로 들리게 해준다. 또한 몬트리올 공연의 Somebody to love에서도 로저의 뛰어난 백보컬과 후반부 고음 샤우팅을 들을 수 있다.[26] 당시 내한공연을 하기위해 공연장 등을 수소문 하였으나 공연장 문제나 금지곡 문제 등으로 내한공연은 성사되지 못했다고. 내한 당시에 임성훈씨가 진행하는 쇼에도 출연하였으며 음악잡지와도 인터뷰를 했었다.[27] 내한공연이 성사되지 못한 이유는 첫째로 먼저 퀸이 원하는 공연장을 구할 수 없었고(당시엔 잠실올림픽경기장도 만들어지기 전) 두번째로 당시 퀸의 대표곡들 가운데 상당수가 한국에서 금지곡이었기 때문에 공연 자체를 할 수 없었다. 만약 그 당시에 내한공연이 이루어졌다면 한국 내한 공연 역사가 바뀌었을지도...[28] 심벌에 한두개씩 파이스테(Paiste)를 끼워넣기도 했다[29] 퀸의 6집에 수록되어 있는 Fight from the inside라는 곡은 로저 테일러가 곡을 쓴 것도 모자라서 드럼과 기타, 베이스까지 혼자 연주한 이른바 원맨밴드 곡이다.[30] 이는 프레디가 성대가 약해 고음 내기를 꺼려한 경향이 크다.[31] 처음에는 프레디가 여성팬이 가장 많았는데, 수염을 기르기 시작하면서...[32] 둘은 결혼 전 이미 동거하고 있었고, 이혼할 때까지도 법적으로 미혼인 상태였다.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지 않으려 부리나케 혼인신고하고 25일 뒤에 이혼신고를 하였다.[33] 'Breakthru' 뮤비에 등장하는 여인이 이 사람이다.[34] 심지어 퀸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한다.[35] 여담이지만 유튜브 베스트 댓글이 "로저가 내 여자친구보다 더 예쁘다."[36] 정확히는 로저의 여자친구의 아이디어이다.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을 당시 사람들은 열이면 열 프레디의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덕분에 프레디는 한동안 주변인들과 언론사에게 '저건 내 아이디어가 아니라 로저의 아이디어였다'라고 해명하고 다니기 바빴다고.(...)[37] Deacon은 가톨릭이나 성공회의 부제(사제가 되기 직전의 성직자)라는 뜻이다. 디콘 존이라고 쓰면 '존 부제님'이 되어버리는 것.[38] 애초에 나이가 70이 다 되었는데, 그 많은 장르를 포괄하는 연주력을 유지하면서 보컬까지 겸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사람이 아니고 기계이다.[39] 1516년, 헨리 8세 재위 시절에 설립된 우편 회사이다![40] The Works 투어 공연 사진을 담았다.[41] 스마일 작곡의 와 커버곡 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