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A 드래프트/1984년도

 


1. 개요
2. 1라운드
3. 이야깃거리
3.1. Sam Bowie Picks
3.2. 하킴 올라주원 관련
3.3. 패트릭 유잉?
3.4. 기타


1. 개요


1984년 NBA 드래프트에 관해 다루는 문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역대 최고의 드래프트'''로 지칭된다.[1]. 또한, 역대 최고의 선수 '''마이클 조던'''이 뽑힌 드래프트로도 유명하다. 그 외에도 이야깃거리가 많은, 여러 측면에서 농구 역사에 길이 남을 드래프트.
명예의 전당 4인방이 많이 유명하지만 그 외에 역사상 최고의 가드 수비수 중 하나이자 올NBA세컨팀까지 오른 알빈 로버트슨, 올NBA팀 경험자이자 무려 44세까지 뛴 케빈 윌리스, 1회 올스타이자 하킴 올라주원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로서 94년 우승에 공헌한 오티스 쏘프, 준척급 빅맨으로 3개의 다른 팀에서 3번의 파이널을 경험하고 3번의 준우승을 기록한 (...)[2] 3점 쏘는 센터 샘 퍼킨스, 사상 최고로 치열한 리바운드왕 경쟁의 승리자 마이클 케이지[3] 등 올스타거나 이에 준하는 수준급 선수들도 많았다.
사실 너무 오래 전이고 한국에서 NBA가 그리 높진 않았던 시절이기에[4] 얘기가 안 되는 것 뿐이지 이 드래프트의 인재풀은 굉장히 깊다. 또다른 역대급 드래프트인 03년과 비교해보면 올스타에 한번이라도 출전한 선수 수는 9명 대 7명으로 03년이 앞서지만, 올NBA팀에 한번이라도 뽑힌 선수는 6명 대 4명으로 84년이 앞서며[5], MVP를 한번이라도 수상한 선수도 3명 대 1명으로 앞선다. [6] 파이널 MVP 출신은 각각 두명이지만 정규시즌 MVP횟수는 84년이 6회 대 4회, 파이널 MVP횟수는 8회 대 5회로 앞선다. 올해의 수비수상은 84년은 두명이서 총 세번 탔는데 03년은 없다. 올 NBA팀의 경우 2020년까지 퍼스트팀 경험자는 84년은 4명이고 03년은 2명, 선정횟수도 23대 15회로 84년이 압도적이고, 올NBA팀 전체로 따지면 51대 20로 여전히 압도적이다.[7] 르브론은 2020년에도 퍼스트팀에 오르며 유일하게 정상급 기량을 보이고 있지만 그 외엔 모두 은퇴하거나 올NBA 가능성이 희박한 선수들 뿐이고(NBA팀 유경험자 중 보쉬와 웨이드는 은퇴, 카멜로는 이젠 스타급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2020-21시즌에 18년차가 되는 르브론이 5년 연속으로 퍼스트팀을 추가한다는 말도 안되는 가정을 해도 저 격차를 따라잡을 수 없다.[8]

2. 1라운드


  • 금색 : NBA 명예의 전당 헌액 선수
순위
구단
선수
국적
포지션
1순위
휴스턴 로키츠
하킴 올라주원
나이지리아
센터
2순위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
샘 보위
미국
센터
3순위
시카고 불스
마이클 조던
미국
가드/포워드
4순위
댈러스 매버릭스
샘 퍼킨스
미국
포워드/센터
5순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찰스 바클리
미국
포워드
6순위
워싱턴 불리츠
멜빈 터핀[9]
미국
센터
7순위
샌안토니오 스퍼스
알빈 로버트슨
미국
가드
8순위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랭커스터 고든
미국
가드
9순위
캔자스시티 킹스
오티스 소프
미국
포워드/센터
10순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레온 우드
미국
가드
11순위
애틀랜타 호크스
케빈 윌리스
미국
포워드/센터
12순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팀 맥코믹[10]
미국
센터
13순위
피닉스 선즈
제이 험프리스
미국
가드
14순위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마이클 케이지
미국
포워드/센터
15순위
댈러스 매버릭스
테렌스 스탠스버리
미국
가드
16순위
유타 재즈
존 스탁턴
미국
가드
17순위
뉴저지 네츠
제프 터너
미국
포워드/센터
18순위
인디애나 페이서스
번 플레밍
미국
가드
19순위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
버나드 톰슨
미국
가드/포워드
20순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토니 캠벨
미국
가드/포워드
21순위
밀워키 벅스
케니 필스
미국
가드/포워드
22순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톰 시웰[11]
미국
가드
23순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얼 존스
미국
센터
24순위
보스턴 셀틱스
마이클 영
미국
가드/포워드

3. 이야깃거리



3.1. Sam Bowie Picks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는 해당 드래프트에서 농구 역사상, 아니 스포츠 역사상 길이 남을 희대의 삽질을 벌이게 되는데, 이른바 '''Sam Bowie Picks''' 사건이다. 2순위로 지명된 샘 보위는 NBA에서 10년 정도 뛰기는 했지만 대학시절의 활약과는 달리 부상이 도져 출장도 제대로 못할 때가 많았고, 성적도 10점 8리바 정도로 포텐에 비해 아쉬운 성적을 남긴 채 은퇴를 선택하고 만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한 드래프트 실패 사례, 또는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유망주 사례 정도로 남았을 수 있으나 문제는 바로 다음 픽이 농구 역사상을 넘은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선수중 하나인 '''마이클 조던'''이라는 데에 있었다. 조던을 드래프트한 시카고가 90년대에 6번 우승하는 동안 포틀랜드는 단 한번의 우승도 추가하지 못하고, 1992년 파이널에는 시카고와 파이널에서 직접 만나 패하기에 이른다.
사실 샘 보위 선발이 그렇게 단순하게 삽질이라고 까기에는 포틀랜드가 너무 불운했던 측면이 있다. 당시 포틀랜드는 전년도에 이미 당대 2인자 슈팅 가드로 성장할 클라이드 드렉슬러를 지명한 상태였고, 그 외에도 스윙맨 포지션에 다른 건실한 선수들이 많아서 포화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안그래도 가장 낮은 기대치를 가진 포지션인 슈팅 가드를 보완하는 대신 빅맨을 지명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리고 샘 보위는, 비록 대학에서 이미 부상을 겪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대학 무대에서 보여준 실력은 정상급이었고 프로에 와서도 실력 자체는 준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과적으로는 포틀랜드가 운이 너무 없었다고 봐야...
그러나 샘 보위 픽의 평가를 떨어트리는 또 다른 요인이 존재했으니, 바로 찰스 바클리와 존 스탁턴의 존재이다. 특히 바클리의 경우 포틀랜드가 보강하고자 하던 빅맨 포지션에서 전설적인 활약을 보여줬다는 측면에서 포틀랜드의 선택을 더 뼈아프게 만든다.[12] 스탁턴이야 당시로서는 주목받지 못하던 유망주를 알아본 유타 재즈의 안목이 더 빛나는 부분이라 쳐도, 바클리에 더해 하다못해 11순위로 뽑힌 케빈 윌리스도 All NBA팀 유경험자로 성장하며 보위보다는 훨씬 나은 활약을 펼쳤다. 다만 바클리의 경우 경쟁력이 떨어지는 오번 대학의 198cm 짜리 단신 센터로서, 사이즈와 실력 모두 훌륭했던 부위를 제치고 뽑기엔 지나치게 모험성이 강했다. 부위와 하킴이 모두 없어지고 나서야 단신 빅맨들인 바클리와 샘 퍼킨스가 (그리고 그 중에서도 대학빨이 있던 퍼킨스가 먼저) 뽑힌거지, 포워드 전환이 필수적인 데다 몸무게 조절까지 실패해 의문점이 있던 바클리가 정통센터 부위보다 먼저 뽑힐 가능성은 희박했다. 또한 스탁턴의 경우, 16순위로 뽑힌 것 자체가 엄청난 이변으로 본인은 유럽행을 알아보고 있었을 정도로 무명이었다. [13] 이런 선수를 2순위로 뽑을 단장이 있을리가 없었다. 실제로 바클리는 실력 자체는 엄청났기 때문에 위 글릭맨처럼 고민한 사람은 있으나, 스탁턴은 그런 얘기조차 없다.
결론적으로, 마이클 조던을 뽑지 않은 것은 이해가 가는 선택이나, 너무 운이 없었다고 할 만하다. 그리고 그들은 30여년 뒤, 2007년 드래프트에서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3.2. 하킴 올라주원 관련


  • 역대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1순위 지명자이다.
  • 해당 드래프트는 데이비드 스턴 총재 취임 후 시행된 첫 번째 드래프트이고, 따라서 올라주원은 스턴 총재가 최초로 지명한 선수이다. 이후 2013년에 스턴 총재의 마지막 드래프트에서 마지막으로 1라운드 30순위를 호명한 후, 올라주원과 스턴 총재가 포옹을 나눈 바 있다.

3.3. 패트릭 유잉?


만일 패트릭 유잉이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4학년을 끝마치지 않고 해당 드래프트에 등장했다면, 당해의 1순위는 유잉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시 유잉이 대학 농구에서 차지하던 위상은 타 선수들에 비해 압도적이었고, 비록 조던이 당시 대학농구 관련 상들을 모두 석권했지만, 포지션 상의 측면에서 가장 가치가 높았던 선수는 유잉이었다. 만일 유잉이 드래프트에 나섰다면
  • 포틀랜드는 샘 보위 대신 하킴 올라주원을 픽하여 드렉슬러와 함께 휴스턴 대학, 그리고 나중에 휴스턴 로키츠에서 다시 결성되는 Phi Slama Jama 콤비를 앞세워 더 좋은 성적을 냈을 가능성이 높다.
  • 시카고가 오히려 옳다구나 하고 샘 보위를 뽑고 폭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시카고도 빅맨 포지션을 원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이에 따라 남아있는 선수 중 가장 뛰어난 마이클 조던을 드래프트하기는 했지만 별로 탐탁치 않아하던 상황이었다.[14] 이러한 상황에서 샘 보위가 남아있었다면 시카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보위를 뽑았을 것이고, 역대 최고의 선수를 놓친 시카고는 지금까지도 우승은 근처에도 못가는 그저 그런 팀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15]
  • 4순위 댈러스 매버릭스는 대학 최고의 선수 마이클 조던이 4순위까지 밀린 상황에선 조던을 뽑을 가능성이 높다. 샘 퍼킨스는 센터지만 키가 206cm에 불과해 그리 기대치가 높은 선수가 아니었고, 조던의 동료이자 조력자이고 학년까지 한 살 많아 가치가 훨씬 떨어졌기 때문. 그렇게 되면 NBA의 판도가 바뀌게 되는데, 휴스턴은 기존 하킴-샘슨과 별 차이없는 유잉-샘슨 트윈타워로 여전한 위력을 발휘하고, 포틀랜드는 대권에 좀 더 일찍 도전할 수 있었을 것이고, 안 그래도 80년대에 상당한 전력을 보인 댈러스는 단번에 우승후보급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동부에 비해 우승후보급 팀이 적은 서부에 레이커스에 강력한 대항마가 생기는 것.
이래저래 유잉의 선택은 NBA의 역사를 바꾸는 데 일조한 셈이다.

3.4. 기타


당시는 현재처럼 1,2라운드 제도가 생기기 전이라 무려 10라운드, 228명의 선수들이 지명을 받았다. 물론 이 정도 되면 하위권에선 아무나 막 지명하는 경우가 많아 도박성 지명은 물론 저축성 지명이나 아무리봐도 반장난성인 듯한 지명도 있었다.
브라질의 농구 대통령 오스카 슈미트는 6라운드 131번으로 지명되었으나 NBA 진출을 거부하고 커리어 통산 4만9천 703득점으로 농구 역사상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한 프로선수가 되며 명예의 전당에도 올랐다. 육상 레전드 칼 루이스는 대학때 농구선수도 아니었음에도 생뚱맞게 시카고 불스에 10라운드 208위로 뽑혔으며, 당연히 합류하지 않았다.[16] 마지막 순번으로 뽑힌 선수는 클라크 대학교의 댄 트렌트란 선수인데, 그는 보스턴 셀틱스에 합류는 했으나 경기에는 한번도 출장하지 못하고 방출되었으며, 훗날 9.11 테러 당시 무역센터 건물에서 근무하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그 외에 선수론 철저히 무명이었지만 감독으로 대성한 경우는 3라운드 70위로 보스턴에 뽑힌 릭 칼라일이 있는데, 30세 젊은 나이에 코치생활을 시작한 그는 셀틱스에서 3시즌, CBA를 거쳐 뉴욕과 뉴져지에서도 잠깐 뛰었다. 평균 2점 정도 넣은 별볼일 없는 선수였지만 셀틱스 역사상 최고의 시즌 중 하나인 85-86시즌엔 77경기를 뛰며 심지어 한 경기는 주전으로 나왔다. 플레이오프 로스터에도 들어 10경기를 평균 6분 좀 안되게 뛰며 우승에 조금이나마 공헌했다.
그리고 KBL팬이라면 귀에 익은 이름이 있을텐데, 훗날 전자랜드의 감독이자 KBL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 된 제이 험프리스가 1라운드 13 순위로 뽑혔다. 칼라일과 달리 주전급으로 커리어 하이 시즌은 밀워키에서 15.2점 6.7어시스트를 기록한 90-91시즌.
[1] 비교 대상으로는 '''코비 브라이언트, 앨런 아이버슨''' 등이 뽑힌 '''1996년도 드래프트'''와 '''르브론 제임스, 카멜로 앤서니''' 등이 뽑힌 '''2003년도 드래프트'''가 있다.[2] 91년 레이커스, 96년 시애틀, 00년 페이서스. 이 중 두번은 대학 후배 마이클 조던의 팀에 패했다.[3] 1988년 당시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시카고 불스의 찰스 오클리와 치열하게 경쟁을 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28개를 잡아야 리바운드왕이 될 수 있었는데, 무려 30개를 잡으며 타이틀을 차지한다. 평균으로 따지면 0.02 정도 격차로 이 정도면 웬만한 스탯 사이트에선 표기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basketball reference를 포함한 메이저 사이트에선 두 선수의 해당 시즌 리바운드 평균이 동일하게 13.0개로 나와있다.[4] 조던이 늦은 나이까지 기량을 유지했기에 간과하기 쉽지만 이때 드래프트된 선수들 대부분은 62, 63년생이었고 이들은 9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맞았다. 쏘프와 윌리스 둘 다 92년에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쏘프는 많은 한국 팬들은 블루컬러워커로만 알고 있는데 올스타 시즌엔 하킴 옆에서 평균 17점 10리바운드를 기록했고 킹스 시절엔 20-10을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그 전에도 한국에서 중계가 되긴 했지만 한국에서 NBA인기가 폭발적으로 늘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마이클 조던이고, 특히 93파이널을 기점으로 팬이 된 사람들도 많은데 90년대 이전에 데뷔한 선수들은 30세 전후로 하락세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30세는 한창 뛸 나이지만 당시는 선수관리가 지금보다 훨씬 미흡한 시절이었기 때문.[5] 더 대단한 점은 88년까지는 세컨팀까지 밖에 없었다. 즉, 올 NBA팀 선정횟수에서 84년 드래프티들이 불리한데도 앞선다는 것. 예를 들어 올NBA팀 선정경력이 하나도 없는 마이클 케이지는 88년에 14.5점 13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알빈 로버트슨은 86년에서 88년까지 3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됐음에도 올NBA팀은 세컨팀1회 (86년) 뿐이다.[6] 트로피 갯수는 조던 5개, 올라주원 1개, 바클리 1개로 84년은 총 7개, 03년은 오직 르브론 뿐으로 4개.[7] 다만 03년 빅3는 전성기 때 서로 뭉쳐서 좀 손해를 본 것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쳐도 제임스는 매년 퍼스트팀에 올랐고, 웨이드는 11년엔 세컨, 13년엔 서드팀엔 올랐으며 14년부터 기량저하가 뚜렸했고 보쉬는 그전까지 세컨팀이 최고였기 때문에 셋이 안 뭉쳤다고 쳐도 아주 후하게 봐줘도 퍼스트팀 1회, 세컨/서드팀 2회 정도 추가되는 수준이다. 이것도 "안 뭉쳤다면 매년 올NBA팀은 따놓은 당상"이란 건데 사실 보쉬가 토론토에서 1회 올 NBA 선정됐고 웨이드는 퍼스트팀에 두번 올랐단 걸 생각하면 너무 후한 것. 중요한건 그렇게 추가해도 84년엔 크게 못 미친다.[8] 추가로 MVP는 르브론이 정규시즌에서 2개 더, 파이널 MVP는 3번 더 타야한다. 사실 이렇게 되면 르브론 개인의 커리어로도 마이클 조던을 능가하는 실적을 쌓게 되지만 이건 인간에게 가능한 수준이 아니다.(...) 애초에 르브론은 전성기가 지난 선수다.[9]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트레이드[10]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트레이드[11] 워싱턴 불리츠로 트레이드[12] 실제로 당시 포틀랜드 드래프트의 책임자였던 헨릭 글릭맨은 훗날 그당시 샘 보위를 뽑지 않았다면 조던이 아니라 찰스 바클리를 뽑았을거라고 말하기도 했다.[13] 올림픽 트라이아웃 참가가 아니었다면 아예 안 뽑힐 가능성도 있었다.[14] 실제로 조던이 팀에 처음 합류하던 날, 팀에서 공항으로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아 조던이 당황한 바 있다.[15] 시카고 프런트는 짠돌이에 선수 보는 눈이 없기로 유명했기에, 만일 조던이 없었다면 피펜 1옵션으로 어중간한 강팀의 지위를 유지하다 모두 팔고 다시 탱킹에 돌입했을 것이다.[16] 그는 같은 해 열린 NFL드래프트에도 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