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드 드렉슬러

 


[image]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No. 22'''
'''휴스턴 로키츠 No.22'''
'''클라이드 오스틴 "더 글라이드" 드렉슬러
(Clyde Austin "The Glide" Drexler)
'''
'''생년월일'''
1962년 6월 22일
'''국적'''
미국
'''출신지'''
루이지애나뉴올리언스
'''키'''
201cm (6' 7")
'''체중'''
95kg (210 lbs), 101kg (222 lbs)
'''출신학교'''
휴스턴 대학교
'''포지션'''
슈팅 가드, 스몰 포워드
'''드래프트'''
'''1983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4순위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지명'''
'''소속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1983~1995)'''
휴스턴 로키츠 (1995~1998)
'''지도자 경력'''
휴스턴 대학교 (1998~2000, 감독)
'''등번호'''
22번
'''수상내역'''
'''NBA 챔피언 (1995)'''
NBA 올스타 10회 (1986,1988-1994,1996-1997)
'''올-NBA 퍼스트 팀 (1992)'''
올-NBA 세컨드 팀 2회 (1988,1991)
올-NBA 서드 팀 2회 (1990,1995)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4)'''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영구결번 '''
No. 22

'''휴스턴 로키츠 영구결번 '''
No.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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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image]
'''클라이드 드렉슬러'''
헌액 연도
2004년
1. 소개
2. 커리어
3. 은퇴 이후
4. 플레이스타일


1. 소개


'''THE GLIDE'''
NBA의 농구선수로, 80~90년대에 이름을 날린 전설적인 슈팅 가드. 포틀랜드 구단 역사상 가장 많은 득점을 올렸으며 1996년에는 NBA 창립 50주년을 맞이해 '''NBA 역사상 위대한 선수 50인에 선정되었다.''' 별명은 '''The Glide.'''

2. 커리어


태어난 곳은 뉴올리언스였지만 휴스턴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휴스턴 토박이로, 대학도 휴스턴 대학교를 선택했다. 그는 하킴 올라주원과 함께 가이 루이스 감독의 가르침을 받으며 휴스턴 대학 농구팀, 별칭 '''"Phi Slama Jama"''' 를 강호로 이끌었고 1983년NCAA 토너먼트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의 로렌조 찰스[1]에게 결승 덩크를 맞고 52-54로 패배했다.

2.1.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시절


이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한 드렉슬러는 전체 14번째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의 지명을 받았다. 루키 시즌에는 다른 선배 가드들의 백업으로 평균 17분 정도밖에 뛰지 못했지만[2] 2년차부터 주전으로 발탁되며 실력을 보여주기 시작, 데뷔 이후 세 번째 시즌에 올스타 가드로 성장했다. 드렉슬러의 성장과 함께 포틀랜드는 우승에 도전하는 팀으로 올라섰으며 1990년에 59승 23패로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NBA 파이널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이재아 토마스가 지휘하는 전 시즌 챔피언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1-4로 밀리며 준우승에 그쳤다.[3]
이듬해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매직 존슨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만나 패배한 이후 절치부심한 드렉슬러는 NBA 퍼스트 팀에 선정될 정도의 활약을 하며 1992년에 다시 한번 파이널 무대를 밟으나, 이번 상대는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였다. 드렉슬러는 시리즈 평균 24.8득점/7.8리바운드/5.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선전했으나 당시 최전성기였던 마이클 조던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4] 결과는 2-4로 다시 준우승. 그와는 별도로 조던과 함께 바르셀로나 올림픽드림팀 멤버로 활약하여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거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두 번째 파이널에서 패배한 이후 부상으로 기량이 쇠퇴하기 시작한 드렉슬러는 구단에게 우승권 팀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포틀랜드는 결국 1995년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파워 포워드 오티스 소프를 받고 휴스턴 로키츠로 그를 트레이드 시켰고, 드렉슬러는 고향팀에서 예전의 동료였던 하킴 올라주원과 다시 결합하게 되었다.

2.2. 휴스턴 로키츠 시절


트레이드 직후에는 안그래도 포워드진은 부족한 반면 가드진은 포화에 가까운 상황에서 쓸데없는 딜을 했다고 말이 많았다. 트레이드 이후 휴스턴 로키츠의 성적이 5할에 그치면서 이러한 의견은 더욱 힘을 얻는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의 활약으로 부정적인 의견을 불식시키고 가치를 증명한다. 플레이오프에서 평균 20.5득점을 기록하며 올라주원을 받쳐주는 2옵션으로 맹활약한 드렉슬러는 1995년 파이널에서 샤킬 오닐앤퍼니 하더웨이가 이끄는 올랜도 매직을 꺾으며 꿈에 그리던 우승 반지를 끼우게 되었다. 당시 드렉슬러는 플레이오프에서 칼 말론, 존 스탁턴이 이끄는 유타 재즈와의 시리즈에서도 40점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을 보여주었고 파이널에서는 한창 주가를 올리던 앤퍼니 하더웨이를 상대로도 노련미를 보여주었다.[5] 비록 파이널 MVP는 하킴 올라주원이 수상하며 2인자에 그치는 우승이였지만, 드렉슬러가 합류하지 않았다면 휴스턴백투백 우승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부상을 겪으며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계속 휴스턴 로키츠의 주전으로 뛰었고 1998년에 모교인 휴스턴 대학교의 감독직 제의를 받으며 깔끔하게 은퇴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전성기를 훌쩍 지난 시점에 스포트라이트를 젊은 선수들에게 넘기며 몇 년 더 경력을 이어가다 다소 초라한 기록으로 은퇴하는 반면에 드렉슬러는 97/98시즌 평균 19점 가까이 넣는 등 여전히 좋은 기량을 보여주면서 15년 간의 커리어를 마감했다.

3. 은퇴 이후


1998년에 휴스턴 대학교의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감독생활 2년동안 19승 37패라는 안습한 성적을 거두고 사임했다.
2004년에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10년에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드림팀 멤버로써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간간히 포틀랜드, 휴스턴 경기 중계 중 TV에 방송인으로 얼굴을 비친다.
2006년 한국에 방문했다.
2018년 3대3 농구 리그인 BIG 3 커미셔너가 되었다.

4. 플레이스타일


마이클 조던보단 전반적으로 한 수 아래였지만 게임 리딩, 득점, 리바운드 등이 전체적으로 뛰어난 만능선수였다. 최전성기 때는 경기당 27.2득점, 7.9리바운드, 5.8어시스트를 기록했을 정도. 공격력만큼은 정말 뛰어난데다가 조지 거빈 이후 핑거롤을 굉장히 잘 사용한 선수이다. 다만 수비는 스틸은 잘했지만 한 번도 올 디펜스 팀에 선정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준수한 수비수였지만 마이클 조던존 스탁턴과 전성기가 겹치는 데다 후배인 게리 페이튼까지 있었다.
그러나 리바운드 기록, 특히 공격 리바운드는 조던보다 다소 우세했다. 또 하나 조던보다 낫다고 평가받은 건 외곽슛인데, 성공률은 의외로 크게 차이는 안 났지만(오히려 커리어 전체로 보면 조던이 살짝 높다. 많이 안 쏜 탓이 크지만.) 92시즌 이후 꾸준히 경기당 한 개 이상 성공시키며 조던과 달리 주요무기 중 하나로 활용했다.[6] 실제로 1992년 파이널 당시에도 해설진이 외곽슛 능력의 차이를 지적했고, 드렉슬러는 조던에게 공간을 주며 돌파를 견제하고 외곽은 허용하는 수비를 했는데 빡친 조던이 최다 삼점슛 기록을 1차전부터 세우며 외곽슛에서조차 드렉슬러를 발라버린다. 앞서 언급한대로 결코 수비가 약한 선수가 아니었음에도 조던에게 시리즈 평균 35점을 내주며 안드로메다 관광을 탔지만, 본인도 자기 몫을 해주긴 했다. 상대가 워낙 괴물이라 그렇지...
전체적으로 보면 90년대 슈팅 가드 중 넘버투라고 할 만 하지만 하필 넘버원인 조던이 워낙 괴물이라 은근 과소평가받는 인물이다.
물론 조던의 하위호환이란 말은 조던이 드렉슬러가 할 수 있었던 거의 모든 것을 더 잘했기 때문에 이렇게 서술한 거지 그가 스타급 선수였던 마이클 핀리, 에디 존스 급이었던 소리는 결코 아니다.[7][8] 드렉슬러는 조던 바로 밑 수준(사실 조던과 동급이라고 불릴 선수가 없다.)에서 시대를 풍미한 레전드 선수이다. 특히 드렉슬러는 본인이 '''1옵션'''으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NBA 파이널에 두 차례 이끌었다.(1990 NBA 파이널, 1992 NBA 파이널) 이는 찰스 바클리, 패트릭 유잉, 데이비드 로빈슨, 존 스탁턴, 칼 말론, 레지 밀러 등 동년배 선수들보다 빨리 파이널에 진출한 것이다. 그 이후 17/18시즌 종료 시점까지 포틀랜드스카티 피펜, 데틀리프 슈렘프, 스티브 스미스 등 베테랑을 폭풍영입한 99/00시즌을 제외하면 플레이오프 단골 팀이었지만 우승권과는 거리가 있는 팀 전력이었다. 이는 드렉슬러 시대가 얼마나 대단한 시절인지 알 수 있는 지표이며[9], 이후 선수들 중 SG 포지션에서 드렉슬러와 겨룰 수 있는 선수는 오직 코비 브라이언트, 드웨인 웨이드, 앨런 아이버슨, 그리고 전성기를 맞이한 제임스 하든 뿐이다.
[1] 1985년 NBA 드래프트에서 41순위로 애틀랜타 호크스에 지명된 후 한 시즌만 뛰고 주로 유럽쪽 농구리그에서 활동한 스몰 포워드이다. 2011년 교통사고로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84년 드래프트에서 포틀랜드마이클 조던을 제끼고 샘 보위를 지명한 이유 중 하나가 포지션이 겹치는 드렉슬러를 83년에 이미 지명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드렉슬러의 지명 순위 14위는 탑급 유망주라고 하기에는 낮은 편이었고 올루키 팀에 들지 못했을 정도로 루키 시즌 성적도 평범했다. [3] 이때 승승장구 해오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유일하게 홈 경기 패배를 안겼는데 이때 그게 엄청난 흥분이 되었는데 자기들 홈코트로 가면 박살내 주겠다 라는 등 자신만만한 모습을 비췄는데 그럴만도 했던 것이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는 꽤나 오랫동안 포틀랜드에서 이겨본적이 없었기 때문. 그러나 그런거 신경 안썼던 빌 레임비어가 특유의 정신 공격을 하자 와르를 무너지며 3경기를 연속으로 졌다.[4] 조던1992년 파이널 평균 기록은 35.8득점 4.8 리바운드 6.5 어시스트. 어처구니없는 스탯이지만 조던이 전성기를 누리던 첫 3연속 우승 기록 중에 '''이게 제일 평범한거다.''' 다음 파이널에선 '''41.0득점''' 8.5리바운드 6.3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1991년 파이널에선 31.2점으로 득점은 낮았지만 6.6리바운드에 '''11.4어시스트'''를 기록했다.[5] 이 파이널 이후 페니는 몸싸움에 힘이 부쳤는지 벌크업을 하였다.[6] 참고로 드렉슬러는 슛을 던질 때 폼이 굉장히 특이했는데, 점프하며 무릎을 살짝 접으면서 슛을 던지곤 했다. 자연스럽게 점프하기 보다는 의식적으로 보일 만큼 다리를 굽히는 동작인데도 슛은 잘 들어갔다. 덩크 중에도 다리를 뒤로 접으면서 덩크하는 모션이 꽤 있는 편이다.[7] 플레이 스타일로 따지면 역대 열손가락 안에 드는 코비 브라이언트조던의 하위호환이다. 하위호환이란 것도 "스타일은 거의 비슷하지만 거의 모든 면에서 살짝씩 부족하다"는 의미인데, 역대 최고 선수보다 살짝 부족한 건 흠이 아니다.[8] 물론 핀리와 존스도 올스타 출신으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들이다.[9] 드렉슬러는 당시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20대 후반~30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는데 그가 만 29세까지 리그엔 그보다 4년 선배인 매직 존슨과 1년 후배인 마이클 조던가드 퍼스트팀을 독식했다. NBA 역대 최고의 가드들인 이 넘사벽인 바람에 드렉슬러는 91시즌에 팀을 '''리그 최다인''' 63승으로 이끌고도 세컨팀에 그쳤다. 막말로 역대 어느 가드를 저 시대에 데려다놓는다고 해서 매직 존슨이나 마이클 조던을 제치고 퍼스트팀에 오르겠는가? 실제로 첫 퍼스트팀이 매직이 은퇴한 다음해인 92시즌이고 이 시즌에 MVP 투표 2위에 올랐다. 유일한 단점은 만 26세, 다섯번째 시즌이 되어서야 첫 올스타에 오르는 등 동시대 라이벌들에 비해 기량이 올라오는 시기기 좀 늦었다는 점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