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아이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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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verybody was saying we couldn't win because of our size. But it's not about the size on paper, it's about the size of your heart."'''
'''"사람들은 우리가 작아서 이길 수 없을 거라고 말했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서류상의 사이즈가 아니라 당신 마음의 사이즈입니다."'''[4]
전 NBA 선수. 183cm라는 NBA 리그에선 터무니 없이 작은 신장으로[6] 2000년대 초반, '''리그내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이였으며 183cm라는 작은 신장으로 216cm가 넘는 센터를 상대로 골밑을 향해 드리블을 하며 돌파를 하고 그들을 제쳐 기여코 골을 넣었다. 아이버슨은 우리에게 작은 키로도 NBA라는 큰 무대에서 성공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리그내에서 가장 빠른 스피드, 뛰어난 볼핸들링을 이용한 화려한 플레이와 골밑 돌파를 지양하고 슈팅 위주로 풀어가는 다른 단신 선수와는 다르게 골밑에 아무리 자기보다 30cm가 큰 선수가 있더라도 돌파 위주로 게임을 풀어나가는 아이버슨의 멋있는 플레이스타일로 인해 인기 또한 엄청 났다. 잘생긴 외모와 오버사이즈 유니폼, 콘로우 머리 등 농구에 패션을 접목시키고 콘로우 머리를 유행 시켰던 패션의 선구자이기도 하였다.'''"I don't wanna be Michael Jordan, I don't wanna be Magic, I don't wanna be Bird or Isiah. I don't wanna be any of those guys. You know, when my career is over, I wanna look in the mirror and say I did it my way."'''
"'''나는 마이클 조던이 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나는 매직 존슨이 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나는 래리 버드나 아이재아 토마스가 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나는 그 어떤 누군가가 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언젠가 나의 커리어가 끝났을 때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나는 나의 길을 걸었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5]
공식적인 별명은 '''The Answer'''.[7][8] 혹은 A.I.가 있다. 국내에서는 답횽, 답사마와 같은 애칭으로 부른다. 힙합패션 덕분에 아간지, 아폼이라는 별명도 있다. 승리를 갈망하는 그의 화려하고도 처절한 플레이, 그리고 오만함으로 비춰질 정도의 자신감이 매력이다.
2. 커리어
2.1. NBA 진출 전까지
아이버슨은 그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 채 태어났다. 어머니가 그를 낳았을 때 나이는 고작 '''15세'''. 아래로는 여동생이 있다. 집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보다 그에게 지워진 짐은 믾았다. 그의 어머니는 홀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아이버슨이 농구선수라는 꿈을 이루게 해주기 위해서 당시에도 엄청난 고가였던 나이키 농구화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버슨은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기로도 유명했다.[9]
아이버슨은 고등학교 시절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베텔 고등학교 재학 시절, 미식축구의 쿼터백으로도 활약했는데 미식축구와 농구로 주 챔피언을 따는 등 지역에서 엄청난 스타였다. 그러다 18세에 친구와 볼링장에서 놀던 중 싸움에 휘말려 징역 5년형[10][11] 을 선고받아 위기가 왔지만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하지만 이때 평판이 많이 나빠져서 명문 대학들은 그의 스카웃을 꺼렸고, 아이버슨의 어머니인 앤은 존 톰슨 주니어에게 찾아가 아들을 받아달라고 사정했다. 존 톰슨은 아이버슨을 만나본 후 그를 자신의 학교로 스카웃하게 된다.[12]
그렇게 존 톰슨 주니어가 지휘하는 조지타운 대학교에 입학. 2년 동안 평균 23.0점, 3.6 리바운드, 4.6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역대 최고의 드래프트 중 하나로 꼽히는 1996년 드래프트에 전체 1순위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지명된다. 쟁쟁했던 1픽 후보들은 물론 최근까지도 최고의 NBA 슈퍼스타로 맹활약했던 코비 브라이언트, 스티브 내쉬, 레이 앨런 등이 모두 그의 아래였다.
2.2. 필라델피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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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신인 시절에는 평범한 비주얼이었다.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팬들과 구단의 엄청난 지원과 성원을 받으면서 아이버슨은 맹활약을 펼친다. 50득점을 기록하기도 했고, 그의 화려한 플레이는 많은 팬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시즌 중에는 마이클 조던과의 매치업으로 더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며, 조던을 크로스오버로 멋지게 속이고 점프슛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특히 5경기 연속 40득점을 기록했을 때는 그 조던조차도 "나도 쟤 나이땐 저렇게 못 뛰었다."는 식으로 언급했을 정도.
그러나 필라델피아는 당시 하위권 팀이었다. 아이버슨이 아무리 날라다닌다고 한들, 선수진이 너무 얕아 팀 성적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또한 백코트 파트너였던 제리 스텍하우스와는 궁합이 잘 안맞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둘 다 손에 공이 들어와야 플레이를 하는 선수들인 점도 둘의 시너지 효과가 나오지 않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쯤 아이버슨에 대한 평가도 루키 시즌 초중반에 비해 많이 냉혹해졌다. 개인 기량은 출중해도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선수라는 비난이 따라다녔고, 아이버슨 본인 역시도 인터뷰에서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치는 발언으로 존경심도 없는 무례한 선수라는 비난도 받았다.
1996-97 시즌이 끝난 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는 새로운 감독으로 명장 래리 브라운을 임명하기에 이른다. 일찍이 인디애나 페이서스에서 레지 밀러를 앞세워 페이서스를 강팀으로 만든 당시 코치 경력 20년의 래리 브라운은 NBA를 대표하는 지장이자 용장이었다. 평소 한 성질하는 레지 밀러에도 지지 않고 자신의 강력한 디펜스 중심 팀 철학을 유지해왔던 래리 브라운은 아이버슨의 활용에 매우 고심했다. 엄청난 폭발력과 득점력은 있었으나 키가 작아 수비력에 문제가 있었으며 스타일상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전술활용 때문에 아이버슨 중심의 체제를 만들기가 매우 어려웠던 상황.
래리 브라운은 아이버슨을 슈팅 가드로 돌리는 모험을 선택한다. 당시만 해도 겨우 6피트의 작은 키인 아이버슨을 2번으로 돌리는 시도를 보고 래리 브라운이 미쳤다고 생각한 팬과 전문가들이 많았으나, 브라운 감독은 아이버슨의 백코트 파트너로 2번 수비가 가능한 장신에 수비가 좋은 포인트 가드들을 배치하기에 이른다. 에릭 스노우와 애런 맥키가 바로 그들. 덧붙여 포워드진과 빅맨진에도 공격력은 부족하지만 뛰어난 수비력을 보유한 선수들을 기용하면서 '1개의 창과 4개의 방패'라는 컨셉을 확실히 했고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을 좀더 과감하게 펼칠 수 있게 된 아이버슨은 더욱더 날라다녔다. 1998-99 시즌엔 8년만에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아이버슨 본인은 이 시즌에 평균득점 1위를 차지하면서, 역대 최단신 득점왕이라는 타이틀을 부여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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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0-01 시즌에는 팀을 파이널에까지 올리며 승승장구 했다. 이때 팀의 성적은 동부 전체 1위였고, 아이버슨은 올스타전 MVP, 정규시즌 MVP를 수상하는 등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된다.[13] 파이널에서는 당시 '''파이널까지 올라오는 동안 단 1패도 하지 않은'''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의 LA 레이커스를 상대로 1차전을 먼저 따내는 등 선전했지만, 그 후 내리 4연패하면서 우승에는 실패했다.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는 당시 동부 컨퍼런스 준결승과 컨퍼런스 결승을 모두 7차전까지 치루고, 아이버슨 역시 여러가지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 사는 등 여러가지 악재도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잘 싸웠다는 평. 게다가 LA 레이커스는 파이널 전까지 모든 시리즈를 스윕으로 마무리하고 온, 말 그대로 미친 팀이었고 모두들 파이널에서도 레이커스의 스윕을 예상했기 때문에 LA 레이커스의 우승보다 오히려 1승을 따낸 필라델피아가 더 주목받았을 정도였다. 샤크에게 도전했던 아이버슨
그러나 그 후 두 시즌에서 1라운드 탈락,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탈락하고, 정규시즌 성적 역시 2000-01 시즌과는 확연히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결국 래리 브라운이 사임을 하게 되면서 둘의 인연도 끝나게 된다. 그리고 이후 아이버슨의 커리어는 조금씩 내리막을 가게 되었다. 래리 브라운 감독이 떠난 이후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는 아이버슨이 트레이드로 팀을 떠난 해까지 고작 플레이오프 1라운드 진출 한번만 했을 정도로 다시 내리막을 탔다. 2004-05 시즌에는 크리스 웨버까지 트레이드로 모셔왔지만 성적은 역시나 신통치 않았고,[14] 결국 2006-07 시즌 개막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는 그는 덴버 너기츠로 트레이드 된다.
2.3. 덴버 이적, 그리고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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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버 너기츠로 합류하면서 많은 이들은 기대를 나타내기도 했다. 당시 덴버에는 젊은 에이스인 카멜로 앤서니가 있었다. 멜로가 합류한 이후 계속 플레이오프 진출은 했지만 죄다 1라운드에서 탈락이었기 때문에 팬들은 답사마의 합류가 '''해답'''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했다.[15]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2번의 1라운드 탈락. 멜로와 아이버슨의 시너지 효과도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16] [17] 덴버 너기츠도 결국 이에 한계를 느꼈는지, 2008-09 시즌 마침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 천시 빌럽스, 안토니오 맥다이스 ↔ 앨런 아이버슨 트레이드를 단행한다. 결국 아이버슨은 2008-09 시즌 '''3게임'''만에 트레이드되었다. 그리고 덴버 너기츠는 2008-09시즌에 천시 빌럽스(덴버 출신)의 노련함에 힘입어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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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 아이버슨은 크게 활약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당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는 조직적인 농구를 하는 팀이었기 때문에 아이버슨과는 궁합이 너무 안맞았다. 그리고 당시 벤치 멤버로 출장하라는 감독의 요구도 협박성 멘트로 거절하면서 팀과도 불화를 겪었다. 결국 그 시즌에 석연치않은 시즌 아웃 판정을 받으면서, 2008-09 시즌을 마감했다. 애시당초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아이버슨은 리빌딩을 하기 위한 샐러리 비우기용 선수였던 것.
그 후 자유계약 선수가 되었으나, 기량이 하락했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너무 센, 그리고 무리하게 주전을 요구하는[18] 그에게 계약을 제시하는 팀은 거의 없었다. 마이애미 히트가 1년 계약을 제시하긴 했지만 역시 서로의 입장차만 보인 채 무산. 한때 그의 은사이기도 했던 래리 브라운이 있는 샬럿 밥캣츠와 계약했다는 뉴스가 뜨기도 했으나 이내 오보로 판정났다. 그 후 어느 구단도 그에게 계약을 제시하지 않다가, 간신히 멤피스 그리즐리스와 1년 베테랑 미니멈 계약을 맺었다. 한때 슈퍼스타였던 그에게는 치욕스러운 계약이었다.
하지만 구단 입단 인터뷰에서 "자존심 회복을 위해서 그리고 팀의 승리를 위해서 노력하겠다."며 각오를 다진 아이버슨이었지만 트레이닝 캠프에서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고 시즌 동안(3게임) 벤치 멤버로 출전하는 것에 대놓고 언론에 불만을 표출하는 등 불화의 표시가 보이더니 이내 방출되었다. 이대로 아이버슨이 은퇴하는게 아닌가라는 우려가 있었으나 다행히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가 그와 잔여 시즌 계약을 맺으면서 그는 친정팀으로 복귀했다. 이때 아이버슨을 여전히 사랑하는 팬들이 많아서 개인 성적이 좋지 않았음에도 올스타전 투표에서 상위권에 랭크되는 등 여전한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는 딸의 병간호를 위해 구단에 휴가를 요청했고, 구단이 이를 승낙하면서 그의 2009-10 시즌은 그렇게 끝났다.
그런데 그가 딸의 병간호를 안하고 도박을 하고 있다는 뉴스가 뜨면서 많은 팬들이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아이버슨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이 루머를 부정했다. 또 아내와의 불화로 이혼 신청까지 했다는 뉴스가 뜨기도 했다. 루머이든 사실이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슈퍼스타의 몰락치고는 너무 잔인한 편이다.
2.4. 해외리그 도전
2009-10 시즌 종료 후, 그는 어떠한 NBA 팀으로도 오퍼를 받질 못했다. 결국 시즌이 시작된 12월까지도 그는 소속팀이 없는 백수였다. 그러다가 터키리그의 베식타스 팀과 2년간 400만 달러에 계약을 맺고 터키로 떠나게 된다. 그의 팬들에게는 정말로 눈물나는 광경이 아닐수 없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그래도 농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는 팬도 있었다. 이걸 계기로 다시 NBA에서 뛰는걸 보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저 터키팀과의 계약에 관해 또 루머가 나왔다. 아이버슨이 새로 사귀는 여친의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계약을 했다는 것. 아이버슨, '내연녀 도박자금' 대느라 터키 행? 하지만 이 뉴스는 팬들도 거의 루머로 받아들이는 분위기. 베식타스와 결별할 것이라는 루머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버슨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역시 이 루머를 부정했다. 다른 뉴스에 따르면 베식타스는 다른 선수에게는 급료를 못 주고 있으나, 아이버슨에게는 꼬박꼬박 급료를 지불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터키에서 심각한 발목 부상을 당해 은퇴 발표를 할 것이라는 뉴스도 있었다. 가장 최근 뉴스로는 애틀란타[19] 에서 신호 위반으로 적발되었는데 경찰에게 폭언을 퍼부었다는 뉴스를 마지막으로 그에 대한 소식은 없는 편이다.
그러다가 현지시각으로 6월 9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NBA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트레이닝 캠프 자리라도 달라고 하는걸 보면 정말 NBA로 돌아가고 싶은 듯 보였지만 아이버슨도 30대 중반인데다 리그와 선수노조의 협상이 타결되지 않아 NBA가 직장폐쇄까지 했기 때문에 전망이 밝지 못했다. 트레이닝 캠프 자리라도 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ㅠㅠ
2013년 10월 30일,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홈구장인 웰스 파고 센터에서 공식적으로 은퇴 발표를 했다. 이날 팀 개막전을 치른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는 강력한 우승후보인 마이애미 히트를 상대로 신승을 거두며 아이버슨의 마지막을 빛냈다.
2.5. 국가대표
'''아이버슨의 한계를 보여줬던 시리즈'''
아이버슨은 스테판 마버리와 팀 던컨 등과 함께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에 뽑혀 2004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다. 그러나 개막전에서 15득점 4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했으나 턴오버를 4개 하고 야투를 5/14에 3점슛을 1/10을 기록했으며, 상대 가드 아로요는 24득점 4리바운드 7어시스트 야투 9/16을 기록했다. 팀 던컨 역시 15득점 16리바운드를 했으나 턴오버를 7개나 저지르면서 팀은 73-92라는 말도 안되는 스코어 차이로 패배한다.
그리스와의 경기에서는 77-71로 승리를 거뒀고 본인은 팀 내 최다인 17득점을 기록했으나 야투는 4/14에 불과했다. 호주와에 경기에서는 16득점 야투 6/11로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89-79로 승리했으나, 리투아니아와의 경기에서 11득점 야투 4/12로 죽쑤면서 팀은 90-94로 패배한다. 이어 이어진 앙골라는 89-53으로 싱겁게 이겼고 스페인 역시도 102-94로 꺾고 본인은 16득점(야투 4/10)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 때 활약한 건 스테판 마버리(31득점 4어시스트 야투 10/15)였다. 그리고 이어진 아르헨티나와이 준결승전에서 10득점 3어시스트(야투 3/12)를 기록했고 미국은 81-89로 패배, 마누 지노빌리는 29득점(야투 9/13)을 기록하면서 팀을 결승으로 올렸다. 미국 대표팀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리투아니아를 104-96으로 꺾고 아이버슨 본인은 15득점(야투 5/13)을 기록했다.
아이버슨은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치뤄진 8경기에서 13.8점 1.8리바 2.5어시스트를 기록했으나 야투율은 37.8%로 초라했다. 이 올림픽은 미국 농구의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2.6. 3X3 농구
래퍼 아이스 큐브가 창설한 3대3 농구리그 BIG 3를 통해서 현역으로 복귀했다!!! 처음 아이스큐브가 복귀를 제안했을 때는 "야 나 마흔셋이야(...)"라면서 거절했지만 심사숙고 이후에 요청을 허락했다고 한다. 소속팀은 3's 컴퍼니.
3. 플레이 스타일
아이버슨의 게임 스타일에 대한 장문 분석. 요약하면, 농구장의 마라도나라고 할 수 있다.
아이버슨의 최대 장점은 NBA 역대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스피드와 드리블링, 활동량, 그리고 공격성이다. 그 스피드를 살린 속공 마무리와 파울 유도, 드리블링을 살린 1대1 돌파능력은 그의 다른 모든 약점을 덮어버릴만큼 강력했고 거기다 오프볼 상태에서 전속력으로 뛰면서 MPG만 7번 1등을 할 정도로 강철체력의 소유자였다. 그렇지만 동시대 레전드들이 가장 그를 기억할때 먼저 나오는 말은 거친파울과 더블팀에도 주눅 들지 않고 계속 돌파하는 그의 공격성과 활동량이다.
리그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당연히 키에 따라 포인트 가드로 뛰었고 그의 스피드와 드리블은 정평이 나있었지만 다른 장점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포인트 가드가 아무리 많이 뛰고 공격성이 뛰어나봤자 48분 내내 자기가 유리한 상황만 올 수 없으며 하프코트에서는 양날의 검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런앤건 스타일로 뛰기에는 아이버슨은 속공 피니셔지 피딩에 뛰어나진 않았기 때문. 그러나 이런 아이버슨의 능력의 전술적 가치를 발견하는 감독이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오게 되는데 이는 다름아닌 래리 브라운.
래리 브라운이 오면서 주 특기인 스윙오펜스를 살리기 위해 아이버슨의 포지션을 슈팅 가드로 바꾸고 에릭 스노우, 애런 맥키같은 빅 사이즈 1번에게 볼 키핑을 하게 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경기 템포를 늦추고 하프코트 오펜스를 십분 활용한 전술을 펼치게 된다. 아이버슨이 래리 브라운의 다른 수제자인 레지 밀러나 리처드 해밀턴처럼 오프볼 무브먼트, 점퍼가 좋은건 아니었으나 오프볼에서 전속력으로 뛰어서 공을 받고 다시 전속력으로 돌파를 할 수 있는 체력, 볼핸들링, 스피드를 갖췄기 때문에 단순한 뛰어다닐 공간 창출뿐 아니라 상대 수비 시스템을 아예 무너뜨리는 결과를 만들게 된다. 더구나 이렇게 뛰는걸 48분 가까이 계속하니 상대 수비하는 입장에선 미치는 상황. 또한 낮아진 템포에 맞춰서 수비적인 선수들로 팀이 구성되었고 결국 2001년의 성공을 가져오게된다.
그러나 이듬해에 지역방어가 허용되기 시작되면서 이 전술이 급하락세를 맞게 되었다. 아이버슨이 맨투맨 디펜스만 허용되는 수비환경에서 수비수를 스피드로 따돌리며 이리저리 뛰다가 수비진영이 무너지던 것이 핵심 전술이였는데 지역 방어 덕분에 아이버슨이 노리는 위치에 먼저 와서 기다리는 방식으로 상대 팀이 훨씬 안정적으로 이를 대처할 수 있게된 것이다. 수많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아이버슨은 여전히 리그 최고의 슈팅가드 였으나 식서스 팀 자체는 2001년도의 성공을 재현하지 못한다.
여기에 체격 조건의 한계와 같이 가는 부상 문제가 더해지는데, 아이버슨은 작은 체구에도 다이나믹한 플레이스타일을 유지했으므로 크고 작은 부상이 끊이지 않는 선수였다. 그러나 특유의 강한 정신력으로 왠만한 부상은 참고 뛰었으며, 그의 시그니쳐 신발인 Answer 시리즈에서는 그가 당한 수많은 부상을 적어놓은 제품을 내놓으며 "전사"로서 그의 이미지를 강조하곤 했다. 문제는 나이가 들면서 한계가 온 것. 특히 2000년대 후반이 되면, 30대를 넘긴 부상많은 단신 가드는 거의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또한 이 와중에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되는데 바로 카멜로 앤서니와 뛰기 위해 덴버 너기츠로 이적한 것. 점프를 못하게 된 크리스 웨버도 마찬가지였지만 멜로는 코너맨 포워드이자 코비 브라이언트와 같이 베이스라인 1대1에서 강한 선수라 아이버슨과 같이 코트에 있으면 아이버슨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한다. 아이버슨의 공간창출능력을 활용할수 있는 피니시 능력이나 활동량을 가진것도 아니었고 아이버슨도 다시 포인트 가드로 돌아와 멜로와 돌아가면서 아이솔레이션만 돌리다가 실패를 맛보게 된다.
그의 플레이는 몇몇 사람들은 듀얼 가드로 보는 경향도 보인다. 듀얼 가드는 포인트 가드로 쓰자니 스킬이 부족하고, 슈팅 가드로 쓰자니 애매한 신장이 발목을 잡는 포지션이다. 그런데 아이버슨은 신장도 포인트 가드 치고는 작은편이고, 슈팅 가드로서는 그야말로 난쟁이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10cm이상이나 큰 선수들 앞에서 돌파를 해서 득점을 얻어내고, 망설임없이 점프슛을 던지고 성공시키기도 한다. 스피드와 드리블링의 조합은 NBA 역사를 통틀어도 찾기 어려운 수준의 조합이라 그 자존심 빼면 시체인 마이클 조던도 루키 시절 아이버슨과 매치업을 해보고는 질려서 "만약 나에게 저 친구 나이에 저렇게 플레이하라고 하면 난 못할 것이다." 라고 발언한 바 있다.
게다가 전성기 시절엔 운동능력도 장난 아니어서 183cm라는 신장으로 엄청난 '''앨리웁'''을 성공시키기도 했고, 마이클 조던의 베스트 플레이 중 하나로 꼽히는 스카티 피펜의 자유투 실패를 갑툭튀해서 바로 팁 인 덩크로 처박아 넣는 플레이에다 자신보다 높은 신장의 빅맨들에게 인 유어 페이스까지 먹여줄 정도였다.
사실 단신 선수들은 네이트 로빈슨이나 스퍼드 웹처럼 덩크 콘테스트에 나가지 않으면 덩크를 보여줄 기회가 많이 없기 때문에 (특히 덩콘 당시 듣보잡 루키였던 스퍼드 웹은 그전까지 실전에서 덩크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저 선수가 덩크가 가능하긴 하냐는 의구심까지 있었다) 점프력이 부각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스피드가 좋은 단신 선수들은 거의 대부분 점프력이 뛰어나다. 크리스 폴은 38인치, 아이버슨과 비슷한 신장의 T.J포드는 무려 44인치나 되는 점프력의 소유자였으며, 얼 보이킨스는 165에 불과함에도 최소 한번 덩크를 성공시킨 적이 있다. (유튜브에 영상이 남아있다) 농구선수들 대부분은 경기 내내 뛰기 위해 체력조절을 하느라 풀점프를 할 기회가 많이 없어서 그렇지 이들의 운동능력은 일반인들의 상식을 훌쩍 뛰어넘는다. 운동능력이 뛰어난 편까진 아닌 제이슨 키드 역시 신인시절까진 경기 중 더블펌프 덩크를 성공시키고 30대까지 무난히 덩크를 성공했다. 물론 스티브 내쉬나 스티브 커처럼 덩크가 거의 힘들거나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추정되는 선수들도 있긴 하지만 이들은 모든 운동능력이 처지는 선수들이고, 일반적으로 스피드가 포인트 가드 평균 이상이고 키가 180언저리만 되는 NBA 가드들은 딱히 점프력이 부각되는 선수가 아니어도 최소 20대 시절엔 대부분 실전에서 덩크가 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178인 데이먼 스타더마이어 같은 선수들도 실전 중 덩크가 있었으니..
또한 커리어 내내 온갖 잔부상을 달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큰 덩치들과 몸을 부딪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이버슨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때 쓰는 대목 중에 하나.
3.1. 아이버슨이 지역방어 때문에 몰락했는가?
위에는 아이버슨이 몰락한 이유가 지역방어로 인해 단순히 그를 활용하는 전술을 쓰지 못해서...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서술이다.
사실 아이버슨의 하락세와 지역방어는 큰 상관이 없고 지역방어 도입 이후에도 기량이나 기록, 스타일 면에서도 별 변화가 없었다.[20] NBA에서 지역방어가 재도입된게 2001-02 시즌부터인데, 도입 전인 01 시즌에 31.1점을 기록한 아이버슨은 도입 이후에 31.4점을 기록했다. 필드골 성공률이 42%에서 39.8%로 하락하긴 했지만 어차피 그 다음 시즌에 41.4%로 다시 올라왔고 이후에도 아이버슨의 야투율은 도입 전과 별 다를게 없는 4할대 초중반 수준에 머물렀다. 또한 아이버슨이 맨투맨 수비 시절에 평균 30점을 넘긴건 01 시즌 단 한번 뿐인데, 지역방어 하에서는 02, 05, 06시즌 세번을 넘겼으며 커리어 하이인 33점도 06 시즌에 나왔다. 물론 득점왕 횟수로만 보면 맨투맨 시절에 두번, 지역방어 시절에 두번씩이다.
아이버슨이 나이상 전성기를 지날 시점에 오히려 커리어하이를 찍을 정도였고, 지역방어 도입 직후 득점기록 차이가 거의 없는데 지역방어로 아이버슨을 활용하는 전술을 쓰지 못하게 됐다는 것은 비약이다.
실제로 지역방어 도입 이후에도 팀들은 맨투맨 수비를 기본으로 썼으며, 지역방어는 간헐적으로 쓰곤 했다. 지역방어는 아이버슨같은 슬래셔들이 돌파하는 레인을 차단하는 효과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운동능력이 뛰어난 NBA 선수들을 막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실제로 도입 전에는 슬래셔들이 큰 타격을 입고 점프슈터로 변할 것이란 우려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적응기간을 겪은 이후엔 돌파비중이 예전과 비슷해졌다. 위에 언급했다시피 아이버슨은 점퍼능력이 향상된 것도 아닌데 도입 이후에 잠깐만 하락하고 예년수준으로 돌아온 것만 보면 알 수 있다. 추가로 NBA는 04-05시즌부터 강화된 핸드체킹룰 금지룰을 도입해 돌파가 더욱 쉬워져, 2020년에 이른 현재에 있어서는 돌파의 비중이 과거에 비해 비약적으로 늘었다.
이와 같은 이유에는 "NBA식 지역방어"가 돌파를 막는데 그렇게까지 효과적인 건 아니기 때문이다.[21] 지역방어에서 골밑까지 돌파하는 수비수를 막는데 가장 효과적인 선수는 바로 페인트존에서 버티는 rim protector이다. 돌파하는 선수들은 보통 센터나 파워포워드가 맡는 rim protector에 비해 덩치가 훨씬 작은 경우가 많으므로 이들의 높이에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 이 때문에 팀 던컨 시절 샌안토니오 스퍼스 같이 뛰어난 골밑 수비수가 있는 경우 브루스 보웬같은 외곽수비수들이 찰싹 붙어 점퍼를 막는 동시에 골밑으로는 오히려 길을 열어주는 경우도 있다. (물론 가능하면 돌파도 견제하는게 기본이나 둘 중 하나라면 점퍼를 막는 것) 오리지널 지역방어에서 2-3 zone을 하면 페인트존 부근에 센터가 계속 있을 수 있어 돌파를 막는데 효과적이다.
문제는 NBA는 수비3초룰 때문에 이런 식의 수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NBA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운동능력과 개인기량이 뛰어나기 때문에 저런 식으로 선수가 한 곳에 짱박혀서 하는 수비는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NBA는 현재 맨투맨을 기본으로 2-3 zone, 3-2 zone, 1-3-1 zone 등 다양한 지역방어를 '''간헐적으로''' 쓰는 식이며 지역방어를 아예 안 쓰는 팀도 적지 않다. 애초에 현 지역방어 체제 하에서 과거 어느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이 돌파비중이 늘었다는 걸 생각해보자. 물론 아이버슨의 전성기 때는 04년의 2차 핸드체킹룰 도입 전이고 3점의 비중이 지금보다 적어 코트를 좁게 쓰고 외곽 수비시 손을 쓸 수 있어 돌파가 더 어려웠지만, 지역방어 하나로 아이버슨의 위력이나 그를 활용한 전술이 유의미하게 감소했다고 볼 수는 없다. 실제로 아이버슨 본인의 기량이나 리그 내 위상은 별 차이가 없었으며, 02,03시즌에 올NBA세컨팀, 05년에는 퍼스트팀에 올랐다. 득점스탯만 좋은 선수에게 올NBA팀을 줄 정도로 NBA가 호구리그는 아니다. 그는 분명 '''지역방어 이후에도 몇년간 리그 최정상급 선수였다.'''
실제로 아이버슨이 하락세를 겪게 된 것은 나이가 들면서 그의 플레이 스타일과 체격조건으로 인한 한계에 부딫혔기 때문이었다. 아이버슨은 NBA 득점원으로서 단신이라는 한계를 엄청난 운동능력으로 커버한 케이스이며, 외곽슛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엄청난 스피드로 수비진을 뒤흔들며 공격 기회를 찾는 스타일이다. 당연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발이 늦어질수록 이런 스타일은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수비도 별로 뛰어나지 않은 선수가 득점력이 무뎌진다면 가치는 수직하락하게 된다.
두번째로는 아이버슨이 본인 중심으로 짜여진 팀에서는 빛날 수 있는 선수였지만 그 위주로 짜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선수였으며, 자기 위주로 가지 못할 때 스타일의 변화를 갖는 타입의 선수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좀 가혹하게 말하면 팀보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지나치게 강한 타입. 실제로 그의 하락세가 본격화된 건 덴버 너기츠 트레이드 이후였는데, 비록 PG로 돌아왔지만 볼소유시간이 긴 아이버슨과 덴버의 에이스 카멜로 앤서니는 잘 맞는 조합이 아니었다.[22] 결국 09 시즌에 천시 빌럽스와 트레이드되어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합류했는데,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는 동안 천시 빌럽스가 합류한 덴버 너기츠는 승승장구하며 서부 컨퍼런스 결승까지 진출, 가치가 더욱 떨어지게 된다.
여기에 앞서 언급한 체격 조건의 한계와 같이 가는 부상 문제가 더해지는데, 아이버슨은 작은 체구에도 다이나믹한 플레이스타일을 유지했으므로 크고 작은 부상이 끊이지 않는 선수였다. 그러나 특유의 강한 정신력으로 왠만한 부상은 참고 뛰었으며, 그의 시그니쳐 신발인 Answer 시리즈에서는 그가 당한 수많은 부상을 적어놓은 제품을 내놓으며 "전사"로서 그의 이미지를 강조하곤 했다. 문제는 나이가 들면서 한계가 온 것. 특히 2000년대 후반이 되면, 30대를 넘긴 부상많은 단신 가드는 거의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결국 아이버슨은 멤피스 그리즐리스와 1년 베테랑 미니멈 계약을 맺게 되지만 앞서 언급한 "이기적인" 면모가 발목을 잡게 된다. 실력이 예전만 못하면 예전보다 작아진 역할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벤치 멤버로 뛰는 걸 공개적으로 거부하다가 "개인적인 이유로" 팀을 이탈하고 멤피스 그리즐리스로부터 11월 16일에 방출된 것.
즉, 아이버슨이 비교적 빨리 하락세를 맞이하게 된 것은 슛이 뛰어나지 않은 슬래셔형 단신 가드라는 신체적 한계, 그리고 그에 맞춰 팀을 만들기 힘든 선수인데도 본인이 변화하거나 적응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는 정신적 한계가 둘 다 있었던 것이다. 지역방어에 따른 영향이 아예 없다고 하긴 힘들겠지만 실제로 지역방어 이후에도 그는 동일하게 최정상급 기량을 지닌 가드였다는 걸 생각하면, 아주 작은 요인일 뿐이지 결정적인 이유라고 하기 힘들다.
4. 아이버슨에 대한 비판
4.1. 파이터 정신(?)
아이버슨은 상당히 많은 비판을 받는 편이다. 그의 농구스타일과 농구를 대하는 가치관, 그의 언동과 행동 등으로. 너무 노골적으로 주전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이것이 팀워크를 해치는 경향이 있는 편이다.
실제로 2000-01 시즌에 부상을 당한 적이 있는데 부상 회복 기간만이라도 벤치에서 뛰라는 팀의 요구를 매몰차게 거부한 적도 있다. 디트로이트에서도 그 콧대는 여전해서 벤치에서 뛸 바에야 은퇴하겠다며 팀의 요구를 거부했다. 사실 아이버슨의 커리어 중반기에 아이버슨을 벤치 멤버로 돌려야 한다는 떡밥이 많이 나온 적이 있었고, 디트로이트로 이적했을 때에는 그 강도가 높았다. 이 부분에서는 아이버슨빠와 아이버슨까가 극렬하게 대립했다. 빠측의 아이버슨의 기량은 아직까지 변함이 없으며, 주전으로 출전해도 평균 18~20득점 이상은 문제없다는 의견과 까측의 나이도 많아서 예전과 같은 스피드를 낼 수 없고 수비에서도 약점이 너무 많은 아이버슨이 주전으로 출전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의견이 대립하기도 했다.
그의 농구를 접하는 방식도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었다. 소위 '''"Me First Generation"''' 의 우두머리 격. 다만 아이버슨은 조금 다르게 해석해야 하는 것이, '''팀이고 뭐고 내가 먼저''' 가 아닌 '''내가 곧 팀'''이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만약 그가 팀이고 나발이고 없었다면, 그는 커리어 내내 부상을 핑계로 경기 뛰는 걸 거부했을 것이다. 결장한 경기도 꽤 많았지만 그건 그가 큰 부상을 당했을 때였고, 결코 그걸 핑계로 특별 대우를 받았다는 얘기는 없었다. 그가 전성기의 대부분을 보댄 필라델피아의 농구 시스템은 '''아이버슨이라는 팀'''을 중심으로 짜여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면 쉬울 수도 있을 듯 보인다. 안티들이 아이버슨을 비판할 때 가장 크게 비판하는 부분이며, 이는 안티들이 아이버슨에게 부르는 별명 세 글자로 간단하게 요약된다. 바로 '''아역귀'''.[23]
4.2. 반쪽 선수(?)
공격에 특화되어 있다보니 정작 수비에서는 비판이 많은 편이다. 그의 팬들은 그의 스틸 기록과 스틸왕을 차지한 것을 근거로 "아이버슨의 수비가 뭐가 나쁘냐?"라는 반론을 제기한다. 하지만 농구에서 수비의 목적은 공을 뺏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함으로써, 상대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또 2004-05 시즌 래리 휴즈가 올 디펜시브 팀에 선정된 것을 두고 아이버슨의 수비도 나쁘지 않다고 반론하는 팬도 있었다. 하지만 팬들 사이에서 래리 휴즈의 올 디펜시브 팀 선정은 논란거리였다. NBA 전문가인 존 홀린저는 그의 수비를 '''"사람을 막는게 아니고 공만 뺏는다."''' 혹평했고, 대개 이 평가는 다른 전문가들도 견해가 일치한 편이다. 그리고 보통 수비를 하다보면 파울 개수가 많아지는 편이데, 아이버슨은 특이하게도 커리어를 거듭할수록 평균 파울 개수가 줄어들었다. 이는 영리하게 스틸을 한다라는 의견도 있겠지만 반대로는 '''수비를 안한다'''라는 의미가 내포될 수 있는 것. 그리고 신장이 작기 때문에 수비의 한계점도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가드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2대2 픽앤롤이나 픽앤팝 수비 역시 안 좋은 편이다.
그가 비판을 많이 받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그의 슛 난사 논란. 아이버슨의 통산 야투 성공률은 42.5%이다. 평균 한 경기당 21개의 슛을 던지고 9개를 성공시키는 편. 하지만 필라델피아 시절 그는 팀의 에이스였고, 슛을 많이 던질 수 밖에 없었던 입장이었다. 마이클 조던도 아이버슨 만큼 슛 시도는 많았다. 하지만 조던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 조던은 아이버슨보다 신장과 피지컬이 월등했고, 조던말고도 스카티 피펜이라는 또다른 공격 옵션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조던은 아이버슨보다 슛 시도가 많았지만 성공률에서 차이를 보였다. 조던의 통산 야투 성공률은 49.7%이며 시카고 시절만 보면 50.5%로 가드로서는 말도 안되는 야투 성공률을 기록하였다. 애초에 난사라는건 성공시키지 못했을 때 나오는 것이고 조던은 좋은 성공률로 성공시켰기에 아이버슨과는 비교불가이다. 자유투 문제에 대한것도 볼호그라고 자유투 시도가 적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공격시도가 많아지므로 자유투가 증가할 것이다. 즉 위의 자유투 관련 내용은 적절하지 않다.
더불어 2차 스탯에서도 1차 스탯의 화려함에 비해 높은 편이 아니라는 점도 크다. 선수의 효율성을 나타내는 지표인 Player Efficiency Rating은 20.9에 불과하고, 3점슛 보정을 한 수치인 Effective Field Goal Percentage는 44.5%, 자유투, 3점, 2점 모두 포함하는 슛의 효율지수인 True Shooting Percentage에서도 51.8%를 기록한다.[24] ORtg[25] 는 105, OWS[26] 은 3.6이다. 또한 WS/48 수치도 0.125로 역대 1위라는 마이클 조던의 절반밖에 안되는 수치이며 다른 에이스라 불리는 플레이들과 비교해 봐도 코비의 0.181, 르브론의 0.242, 크리스 폴 0.246에 비해서 현저하게 낮은 편이다. 즉 화려하고 멋진 플레이를 하는건 분명하지만 효율적인 측면에서 봤을땐 좀 떨어지는 선수라는 것도 사실이다. 2차 스탯의 신뢰도가 떨어진다 하지만 그건 수비쪽 이야기이며 공격쪽은 상당히 발전했다고 볼 만 하다. 무엇보다 효율성 수치가 낮은 선수가 좋은 선수일 확률이 높은지 아니면 수치가 높은 선수가 낮은 선수보다 좋은 선수일 확률이 높은지는 쉽게 알 수 있다. 파울을 그렇게 많이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TS가 상당히 낮게 나온건 그만큼 야투 성공률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아이버슨의 팀 구성상 난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를 갖다 붙이면 변명 못할 선수가 없고 분명히 나타나는 기록에서 떨어지기 때문에 부정하기도 쉽지 않다. 그리고 코비도 난사라고 까이는 마당에 그보다 더 확률이 떨어지는 공격을 하던 아이버슨이 난사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이 역시 억지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농구의 2차 스탯은 수비쪽에서 허점이 상당히 많고 아직도 보완해야 할 스탯들이지만 공격쪽에서는 비교적 정확하다. 수비쪽에서는 원래 비판을 받았던 선수인데 공격쪽에서도 효율이 떨어진다면 엄청난 선수들인 조던, 코비, 르브론에 뒤처지는건 당연한 수순.[27]
팀 구성의 제약이 많다는 의미는 다르게 이야기 하면 이 선수를 중심으로 팀을 꾸리기 힘들다는 의미도 있다. 파울아웃에서 손대범 편집장도 릴라드와의 비교에서 폭발력은 아이버슨이 한 수 위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팀을 꾸려 한 명을 데려간다면 아이버슨보단 릴라드를 선택한다고 말했다. 물론 현 시대에서 아이버슨이 뛰면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도 하였다.[28] 무엇보다 우승을 한번도 못했고 플레이 스타일상 동료들이 희생을 할 수 밖에 없고, 실제 전문가들도 아이버슨이 과대 평가를 받는 슈팅 가드라 이야기 하기도 했다. 희생을 하는 이유는 아이버슨의 플레이 스타일 자체가 볼을 오래 소유하고 있고 득점 욕심이 상당히 강하며 그를 위해서 공간을 자주 내줘야 하기 때문. 그리고 그 스타일상 팀 동료들은 3&D가 강요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는 르브론 제임스역시도 지적되는 문제이지만 르브론은 아이버슨보다 득점부터 시작해서 훨씬 효율성이 뛰어난 플레이를 했으며, 무엇보다 '''우승'''을 했다.
국가대표 경력 역시도 아이버슨을 잘 보여준 좋은 예시이다. 아테네 올림픽에서 그는 팀내 득점 1위를 기록했지만 야투율이 상당히 처참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3위로 동메달을 딴다.
4.2.1. 반론 및 보강
아이버슨의 수비는 과도하게 저평가 당하는 경향이 크다는 주장도 있다. 키가 작아서 상대팀의 포인트 가드를 막아야했던건 사실이지만 포인트 가드 수비에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고 스노우, 린치와 함께 하는 압박은 필라델피아를 강력한 수비팀으로 만들어 주었다. 물론 나이를 먹어가며 수비도 점점 약해진 건 사실이지만 반쪽 선수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수비가 약하진 않았고 위의 수비를 안 한다는 평가는 아이버슨은 리그에서 가장 열정적인 플레이어였다는 점, 승리를 항상 열망하며 몸을 아끼지 않는 아이버슨의 플레이를 보았다면 말도 안되는 평가라는 것이다.
아이버슨은 커리어 동안 자기가 거의 공격의 중심이고 주변의 동료들은 자기 임무에 충실한 롤플레이어들이 많다보니 혼자 공격을 도맡아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슛시도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는 변호도 있다. 그는 난사쟁이라기 보다는 팀 시스템상 슛을 던지고 싶지 않아도 슛을 많이 던지고 성공시켜야 하는 입장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만약 그가 볼호그[29] 스타일의 난사쟁이라면 농구선수가 가장 손쉽게 득점할 수 있는 자유투를 얻는 능력이라도 떨어져야 할텐데, 아이버슨은 그런 것도 아니다. 커리어 평균 8.9개의 자유투를 얻어냈으면 못해도 자유투로 7점이나 10점 이상은 할 수 있다. 성공률도 78%로 나쁘지 않은 편. 하지만 현역 최고의 볼호그로 꼽히는 웨스트브룩의 2016-17 시즌 자유투 횟수는 10회를 상회하는 수준으로 자유투 횟수가 많다고 볼호그가 아니라는 주장은 신빙성이 전혀 없다.
하지만 반대로 이는 좋은 편도 아니며,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이버슨 = 난사쟁이 논란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편이다. 옵션이 있었다 해도 지나치게 홀로 하는 플레이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소년가장이라 손해를 본다라고 해도, 하든같은 비교사례가 있기 때문에 단순히 좋게 봐주기도 어렵다.
수비 스탯에 대한 변호로는, 농구의 2차 스탯은 수비 한정해서 야구의 2차 스탯에 비해 신뢰성이 떨어지는 편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공격 관련 스탯이나, 특히 TS%같은 경우 신뢰도가 높은 편이지만 마진 스탯의 경우 아직까지 관련 스탯들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의심이 많고, 윈셰어같은 경우는 팀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특히 팀의 수비력이 높을수록 디펜시브 윈셰어가 높게 나온다. 그런데 르브론, 조던, 코비, 아이버슨 중 전체 커리어로 봤을 때 아이버슨이 가장 약체 팀에서 뛰어왔음은 부정할 수 없고, 약체팀이다 보니 수비도 약했음이 사실이다.[30]
그러나 아이버슨은 2차스탯이 가진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활동량, 공간창출 능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술적 활용가치. 특히 2001년에 식서스는 그야말로 아이버슨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전술을 가지고 역사상 유례없는 플레이오프 런을 보여줬는데, 역대 이런 전술적 활용능력을 보여준 선수는 런앤건의 매직존슨이나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조던, 샤크, 코비와 포포비치의 덩컨 그리고 커리 정도. 2차스탯의 제왕인 르브론이 가장비판받는점이 팀을 무전술로 만든다는 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아이버슨이 분명 르브론, 조던, 코비보다 효율성이 떨어지는건 사실이지만 피펜과 함께한 조던, 웨이드, 보쉬와 함께 뛴 르브론[31] , 샤크, 가솔과 함께한 코비와 달리 아이버슨은 커리어 내내 멜로와 함께한 덴버 시절 2시즌을 제외하면 조력자라고 할 만한 선수가 없었고 바로 그 덴버 시절 아이버슨의 야투율은 46%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아이버슨의 필라델피아 원맨팀 시절 아이버슨 외에 공격을 마땅히 할 선수가 없다보니 상대팀은 더블팀 등 집중 견제를 피펜과 함께한 조던, 마이애미 르브론, 샤크와 함께한 코비보다 훨씬 쉽게 할 수 있었고 공격할 선수가 없는 팀 사정상 많은 슈팅 시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덴버에서 카멜로 앤서니와 함께 뛰자 야투율이 급상승한 점은 분명하고, 아이버슨이 코비, 조던, 르브론보다 기록이 떨어지는건 사실이지만 이런 역대급 선수들보다 기록이 낮다고 난사라고 부른다는건 다소 박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야투율로 표현되지 않는 아이버슨의 강점은 엄청난 파울겟 능력이다. 아이버슨에게 파울을 범하는 선수는 아이버슨의 매치업 혹은 상대팀 빅맨인 경우가 많은데, 당시 6성 슈가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스윙맨 전성시대임을 감안하면 아이버슨의 매치업은 상대팀의 주 득점원인 경우가 많았고, 상대의 주 득점원, 빅맨에게 많은 파울을 범하게 하여 상대의 게임플랜을 망칠 수도 있기에 아이버슨의 파울겟능력은 엄청난 강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2000-01 시즌 아이버슨의 팀동료들을 살펴보면 에릭 스노우 평균득점 9.8점, 조지 린치 8.4점 타이론 힐 9.6점, 애런 맥키 11.6점, 토니 쿠코치 7.6점, 디켐베 무톰보 10점이었다. 무톰보는 시즌 종반에 팀에 합류했음을 감안하면 아이버슨은 나머지 저 멤버들을 이끌고 엄청난 집중견제를 뚫고 평균득점 31.1점을 기록하며 팀을 파이널로 견인했다. 이정도의 멤버구성으로 파이널에 진출시키는 것은 조던도, 코비도, 르브론도 해내지 못한 것이다. 아이버슨이 물론 조던, 코비, 르브론보다 뛰어난 선수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다만 당시 필라델피아라는 팀을 알고 이해한다면, 아이버슨에게 난사라는 꼬리표는 절대 붙일 수 없을 것이다.
단, 상술한 파울겟 능력은 야투율에는 포함되지 않을지언정 TS%에 포함되는데, TS% 역시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해 상당히 낮은 것을 생각하면 위 주장엔 어느 정도의 구멍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팀 사정은 팀 사정이고 난사는 난사이기 때문에, 하든도 휴스턴에 들어와 난사라는 얘기는 죽어라고 들었다. 그러니 공격효율성이 낮은 이유를 변호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공격효율성이 낮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이다. 또한 아이버슨은 아테네 올림픽에서의 심각한 야투율 부진이라는 오점도 남긴 바 있으며, 이는 수준 미달의 팀원들 때문에 무리하게 공격을 하다가 공격 효율성이 낮아진다라는 것에 대한 반박이 될 수 있다.
아이버슨은 팀 동료들을 희생한다기 보다는 팀 구성에 제약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이다. 게다가 슈퍼스타 한 명이 있으면 그 선수를 중심으로 팀을 구성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또한 위의 과대평가라는 말은 이번 ESPN 올타임 슈팅 가드를 뽑을 때 한명의 전문가가 한 말을 인용한 듯한데, 그 전문가를 제외한 나머지 전문가들에 의해 아이버슨은 이번 순위에서 역대 6위의 슈팅 가드에 뽑혔다. 한 명의 전문가가 과대평가라고 말했다고 해서 다수의 전문가가 포지션 올타임 순위 6위로 뽑은 선수를 과대평가라고 볼 순 없다.
4.2.2. 2차 스탯에 입각한 아이버슨의 공격 효율성
- 평균 득점: 26.7
- 마이클 조던: 30.1
- 코비 브라이언트: 25.0
- 드웨인 웨이드: 23.7
- 클라이드 드렉슬러: 20.4
- 제임스 하든: 21.1
- Effective Field Goal Percentage: 45.2%
- 마이클 조던: 50.9%
- 코비 브라이언트: 48.2%
- 드웨인 웨이드 50.1%
- 클라이드 드렉슬러 49.5%
- 제임스 하든: 51.7%
- True Shooting Percentage: 51.8%
- Offensive Rating: 105
- 마이클 조던: 118
- 코비 브라이언트: 110
- 드웨인 웨이드: 110
- 클라이드 드렉슬러: 113
- 제임스 하든: 117
- Player Efficiency Rating: 20.9
- 마이클 조던: 27.9
- 코비 브라이언트: 22.9
- 드웨인 웨이드: 24.7
- 클라이드 드렉슬러: 21.1
- 제임스 하든: 22.2
- Offensive Win Share: 3.6
- 마이클 조던: 7.0
- 코비 브라이언트: 4.4
- 드웨인 웨이드: 4.3
- 클라이드 드렉슬러: 4.5
- 제임스 하든: 5.4
4.3. 팀 연습 게을리하기
필라델피아 시절부터 팀 연습에의 잦은 결석, 지각으로 마찰을 빚었다. 그에 대해 지적하는 감독(래리 브라운)에 대해 '경기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고, 연습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는 인터뷰를 해서 대차게 까였다. 당시 인터뷰 동영상은 여기. practice란 단어를 딱 20번 썼다. 이 인터뷰는 아이버슨의 필라델피아가 1라운드에서 탈락했고 그 전날 가장 친한 친구가 죽은 상황이였다. 그런 상황에서 기레기들이 연습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짜증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앞부분 전년도 파이널까지 갔는데 고작 1라운드에서 떨어진 것과 친구가 죽은 것에 애도하는 부분은 생략하고 연습에 대한 부분만 편집돼서 퍼진 것이다.
이에 대한 래리 브라운의 반응은 '당신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에, 매일 같이 늦고, 때로는 아예 출석조차 하지 않는 회사원이 있으면 이해할 수 있겠는가'였다. 훗날의 아이버슨은 당시의 자신이 미숙했다고 인정했다.
위 인터뷰의 힙합 리믹스 버전도 있다.
이후 덴버에서 디트로이트로 트레이드되어 기자회견을 가질 당시, 아이버슨이 감독이 요구하는 대로 최선을 다해 수행할 것이라고 말하자 어느 기자가 "그래서 연습은 할 거임?"이라고 물었고, 아이버슨은 넉살좋게 과거 자신의 답변을 그대로 사용하며 기자회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Practice? Part 2
5. 기타
- 물러섬없는 저돌성. 그리고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모습, 콘로우 헤어스타일과 헤어밴드, 그리고 힙합패션은 그를 상징하는 아이콘중의 하나다. NBA에서 콘로우 헤어를 유행시킨 장본인. 자신감 넘치고 할말은 꼭 하는 스타일이었던 탓에 사무국과도 마찰을 겪은 적도 있었고, 언론도 대부분은 아이버슨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힙합앨범도 낸 적이 있는데, 앨범의 내용에 폭력, 여성과 동성애 비하가 많아서 데이비드 스턴 총재가 가사를 수정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NBA가 드레스코드를 시행하려 할때도 적극적으로 반대하기도 했다.[34][35]
- 앨런 아이버슨은 팬들도 많지만 또 안티도 상당한 편이다. 아이버슨 본인도 안티가 많은건 인지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이버슨은 보통 자신의 안티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안쓰는 편. 아니 무관심하다고 보는 편이 옳겠다. 팬들에게는 상당히 친절한 편. 싸인을 해달라는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해주며 한사람에게 싸인을 2번 해줬다는 일화도 있다. 다만 기자에게는 불친절하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경기전에 인터뷰를 요청하면 욕을 할 정도라고.
- 은퇴 후 계속된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해당 사이트는 찌라시 정도가 아니라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패러디 사이트이다. 자세히 보면 메인 화면 아래쪽에 해당 사이트의 기사는 패러디라는 문구가 있다. 참고로 여기 올라온 기사는 아이버슨뿐 아니라 복서 메이웨더 파산설, 애플의 삼성 인수설같은 말도 안되는 기사가 넘쳐난다. 즉, 애초에 가짜라고 못 박아놓고 대놓고 말도 안되는 기사를 올리는 장난 사이트에 루키가 낚인셈. 결국 루키는 며칠후 "아이버슨 구걸 기사는 가짜"란 기사를 냈다. 그러나 정작 자기들이 오보를 냈다는 건 쏙 빼놓고 마치 "아이버슨 구걸설"이 가짜라는 걸 밝히는 양 기사를 써서 팬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논란이 된 기사는 인터넷에만 올라왔음에도 독자에 대한 사과는 인터넷엔 안하고 다음달 잡지에만 딱 두 줄 써서 더욱 까였다.
참고로 "해당 사이트의 정보는 가짜입니다"는 식으로 밝히는 걸 disclaimer라고 하는데 이건 명예훼손 등 소송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미 패러디라고 밝힌만큼 고의로 비방한건 아니라는 논리. 그러나 루키의 해당 기사에는 이런 게 없는만큼 명백한 오보이고 그럴 확률은 한없이 낮지만 만약 이 기사를 접한 아이버슨 측이 고소해도 할말이 없다. 현실적으로 아이버슨이 머나먼 나라의 조그만 잡지사까지 전부 고소할 일은 없겠지만...
참고로 "해당 사이트의 정보는 가짜입니다"는 식으로 밝히는 걸 disclaimer라고 하는데 이건 명예훼손 등 소송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미 패러디라고 밝힌만큼 고의로 비방한건 아니라는 논리. 그러나 루키의 해당 기사에는 이런 게 없는만큼 명백한 오보이고 그럴 확률은 한없이 낮지만 만약 이 기사를 접한 아이버슨 측이 고소해도 할말이 없다. 현실적으로 아이버슨이 머나먼 나라의 조그만 잡지사까지 전부 고소할 일은 없겠지만...
- NBPA Awards 라는 NBA선수들이 뽑는 시상식에서 GAME-CHANGER HONOR를 수상하였다. 2000년대 초반 등장해 가드 포지션의 패러다임을 바꾸었으며, 단신 선수들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던져주는 등 많은 NBA 선수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수상했다. 대표적으로 르브론이 가장 존경하는 선수로 조던과 아이버슨을 뽑았다.
- 샤킬 오닐, 야오밍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 야투율 30% 이하로 30개 이상 슛을 시도한 경기수가 10회로 가장 많다.
- 기존에 많이 착용하던 팔꿈치 아데에서 00/01시즌 부터 암슬리브, 헤어밴드를 본격적으로 착용하고 유니폼 크기도 훨씬 크게 입으면서 그야말로 멋짐이 넘치는 모습으로 진화했다.
- 2000년대 초중반 드라마나 방송 컨텐츠를 보면 아무 관련 없는 대사에서도 종종 소환된다. 더 와이어 에서는 볼티모어 흑인들의 뒷골목 잡답에서도 수시로 소환되는데, 아기 이름을 앨런이라 지었다고 하니깐 '아이버슨 따라했냐'는 둥, 볼티모어 흑인이 필라델피아 흑인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니까 '너 지금 아이버슨 무시하냐?' 라고 하자 '걔 필라델피아 출신 아니거든!' 라는둥. 심지어 등장인물들 전원이 백인이라 흑인 문화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시트콤 프렌즈 에서도 모니카가 바베이도스의 습기에 머리가 폭탄맞은 꼴이 되자 이를 타파하기 위해 레게머리를 했는데, 챈들러가 로스에게 자리 바꾸겠냐며 "저기 알렌 아이버슨 옆에 앉고 싶지 않거든"이라고 한다. 슈퍼스타를 넘어서서 시대의 아이콘이었으며, 흑인 사회에서는 멋진남의 대명사로까지 쓰여졌던 시절.
- 시그니쳐 무브로 여겨지는 그만의 크로스오버 무브가 있다. 일명 아이버슨 크로스오버.
- 전성기 때 필라델피아에서 좋게 나갔다고는 빈말로도 할 수 없지만 여전히 인기는 대단하다. 말년에 필라델피아에 돌아왔을 때도 티켓이 다 동났을 정도로 인기를 자랑했고 비록 대단한 스탯은 쌓지 못했지만 야유를 하지 않고 안타깝게 바라보는 팬들이 대부분이었다. 은퇴를 한 후에도 필라델피아 경기를 보러 오거나 지지 발언을 종종 한다. 굳이 농구에만 국한된게 아닌게 브라이스 하퍼가 필라델피아 필리즈에 온다는 뉴스가 떴을 때 자기가 산 저지를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1] 1996년 드래프트 측정 맨발신장 6' 0" = 183cm[2] 선수시절 75-79kg.[3] 포지션이 참 애매한 선수다. 아마추어 때도 포인트 가드였으며 드래프트 당시나 프로 초창기 몇년 동안 포인트 가드로 분류되었다. 최전성기였던 2000년대 초중반 몇년을 제외하면 계속 포인트 가드로 뛰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보면 당연히 포인트 가드라고 하겠지만, 정작 그가 농구 역사에 이름을 남긴 그 최전성기 몇년 동안은 슈팅 가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위력을 가장 잘 살린 조합이 SG 아이버슨, 장신 PG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아이버슨의 커리어가 이때 끝난 것도 아니고 포인트 가드로 뛴 세월이 훨씬 많기 때문에 딱 한 포지션이라고 구분하기 참으로 애매하다. 가드 겸 포워드로 구분되는 조던이나 코비, 포인트 가드로 데뷔 후 3번으로 주로 뛰었지만 4번으로도 많이 뛴 르브론 등 다른 포지션으로도 뛰었지만 메인 포지션이 명확한 선수들과 다르게 메인 포지션이 뭔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케이스.[4] 그 유명한 '''농구는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명언으로 알려진 발언으로, 원문의 의미를 잘 살려내서 일종의 표어로 만든 사례다. 초월번역 문서 참고.[5] 그러나 은퇴 후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조던이 자신의 우상이었다고 고백하며 "난 마이크처럼 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의 자존심과 도전의식 때문에 저렇게 자신만만한 멘트를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현역 시절엔 선배에 대해 도발하다가 은퇴 후 사실 존경했었다고 밝히는 경우는 꽤 있다. 대표적으로 현역 시절 패트릭 유잉을 씹었으나 은퇴 후 그에 대한 아낌없는 애정과 존경을 표하는 샤킬 오닐.[6] 일반인이라면 장신에 속하지만(미국 흑인 남성의 평균키는 177cm) NBA 무대에서 6' 0"(183cm)는 거의 꼬마아이 수준의 키이다. 참고로 NBA 선수들의 평균 신장은 6' 7"(201cm)이다. 평균신장이 188cm인 포인트 가드로 쳐도 아이버슨은 굉장히 작은 키이며, 평균신장 198cm에 달하는 슈팅 가드로는 말 그대로 땅꼬마.[7] 코트 위에서 특유의 성격 덕분에 고교 시절 동료들이 붙여준 별명. 가족같은 친화력을 선보이는 농구의 이상에 정확히 들어맞는 모습이라고. 이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부흥을 이끌면서 식서스의 팬들이 원하던 '해답'이라는 의미도 담게 되었다.[8] 실제로 아이버슨의 동료들과의 관계는 매우 좋은 편이다. 다만 자기중심적인 플레이가 그것을 많이 가려서 그렇지...[9] 그런데 은퇴 후 그가 겪은 재정난에는 본인의 낭비벽(보다 큰 문제는 그의 주변에서 등골빼먹는 수십명의 친구들이지만)이 컸는데, 그 중엔 수십만 달러 어치의 보석 장신구를 사주는 등 어머니에 대해 쓰는 돈도 컸다. 가난하게 자란 NBA 선수들 상당수가 그렇지만, 아이버슨도 앤도 제대로 돈관리하는 방법을 몰라 생긴 일.[10] 아이버슨은 폭력에 가담하지 않았고 전국구 스타이던 아이버슨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괜히 시비를 걸려던 백인 무리였다. 당시 아이버슨은 바로 나쁜일이 생길 것을 직감하고 자리를 피했지만, 그들은 온갖 억울한 누명을 아이버슨에게 주장하며 결국 형사사건으로 넘어갔다. 심지어 사건 당시 판사의 인종차별적 판례까지 더해져서 정말 아이버슨은 이 때를 회고하며 가장 자기 인생에서 큰 위기 중 하나였다고 회상했다. [11] 사건 당시 17세였던 아이버슨이 성인이 되길 기다려 일부러 8개월 후 재판을 열어 성인이 된 상태에서 선고했다는 말도 있다. 그는 선고 후 실제로 수감생활을 4개월동안 했는데 이 사건 때문에 그는 졸업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다. 미국은 입학시기가 느슨해 동기들 사이에서 1년 이상 차이가 나는 경우가 보통인데, 95년 기수는 76년생 (케빈 가넷)부터 77년생 (폴 피어스, 스테판 마베리 등)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아이버슨은 생일도 6월생인데 75년생이다. 그는 원래 92~93년에 3학년이라 94년에 졸업했어야 했지만, 법적인 문제로 1년을 허비한 후 전학가 4학년을 다녀 95년이 되어서야 졸업하게 된 것.[12] 아이버슨이 본인 다큐멘터리에서 밝힌바에 의하면 대학 입학 후에도 자신에 대해 안좋은 얘기들이 나올때면 언제나 존 톰슨 감독이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후에 커리어를 끝마치고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도 울먹이며 톰슨 감독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13] 참고로 이 시즌 파이널 MVP를 제외한 모든 개인상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가 차지했다. 정규시즌 MVP와 올스타전 MVP는 아이버슨, 수비상은 시즌 중반 트레이드로 합류한 디켐베 무톰보, 감독상은 래리 브라운, 식스 맨 상은 애런 맥키. 파이널 MVP만 차지했다면 최고의 시즌이었겠지만...[14] 부상으로 옛날의 운동능력을 상실했지만 당시 웨버의 존재감이 너무 거대해서 아이버슨도 그가 팀에 온다는 말에 "농담하지 마셈"이라고 할 정도였다.[15] 다만 Skip Bayless등 전문가들은 둘다 외곽 스코어러인점을 지적하며 최악의 조합이라며 우려했다.[16] 오히려 둘이 서로의 공격 기회를 나누다보니 같이 있기 전보다 둘 다 평균득점이 떨어졌다. 2017-2018 시즌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17] 조합이 안좋기도 했지만 덴버를 떨어트린 두번의 상대가 그해 우승팀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다음해 서부 우승팀 LA 레이커스. 2008년엔 골스가 48승을 하고도 플레이오프를 탈락할 정도로 서고동저가 심했기에 대진운이 안좋았던 것[18] 사실 아이버슨의 기량 자체는 주전자리에 부족함이 없었다. 문제는 아이버슨은 써먹기 까다로운 선수였다는 것. 그를 주전으로 쓰려면 다른 가드 자리에 리딩이 가능하면서 슈팅 가드 수비를 할 수 있는 선수를 세워야했다. AI가 포인트 가드로 나서도 그는 활발하게 공격하는 스타일이므로 페이스 조절 및 전략을 조절하는 선수가 있는게 이상적이었다. 그러니 기량이 떨어진 후에는 벤치끼리 붙을때 상대 수비를 휘저으며 득점을 퍼붓는 벤치에이스가 딱이었던 것. 실제로 리딩과 수비가 떨어지는 얼 보이킨스나 네이트 로빈슨같은 초단신들이 이렇게 활용됐다. 아이버슨이라면 아무리 기량이 쇠퇴해도 이들보단 나은 활약을 보일 수 있었다. 전성기 때라면 그의 실력이 워낙 우월하니 저렇게 기용할 가치가 있지만, 이미 하락세에 접어든 이후에는 벤치롤이 더 효율적이었던 것.[19] 그는 애틀란타에 거주한다.[20]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것 중 하나인데, 맨투맨 시절이라고 무조건 1대1로 수비한 것이 아니고 뉴욕 닉스나 시카고 불스, 시애틀 슈퍼소닉스 같은 팀들은 로테이션을 통해 강력한 팀수비를 자랑했다. 또한 지역방어가 재도입된 현재에도 대부분의 팀들은 지역방어와 맨투맨 수비를 조합한 형태를 운영하거나, 아예 지역방어를 거의 쓰지 않는 팀도 있다. 지역방어가 돌파견제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운동능력이 뛰어난 NBA 선수들 상대로는 한계가 있다.[21] 효과가 없다는 건 아니다. 체구가 작고 점퍼가 비교적 약한 선수들에겐 간헐적으로 쓸 경우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22] 그는 공격면에서 원맨팀에 가까운 팀에서 전성기를 보냈지만, 실제로 뛰어난 득점원들과 같이 뛰게 되었을때 (멜로나 평균 20점을 넣던 크리스 웨버) 스탯은 둘 다 잘 나왔지만 팀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는 걸 생각하면 뛰어난 득점원과 공존이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23] 역귀(疫鬼). 한 마디로 아이버슨이 이적한 팀에서 필라델피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기 중심의 플레이를 해서 팀 자체가 시망이 되는 걸 역병을 옮기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이버슨 입장에서 상당히 억울한 별명인게 아이버슨은 덴버에서도 좋은 활약을 했고 덴버의 성적이 PO 1라운드에 그친 건 아이버슨이 아닌 빅맨들의 부상 탓이 크다.[24] 난사라 까이는 코비 브라이언트는 55.5%이며 르브론 제임스는 58.1%, 마이클 조던은 56.9%이다.[25] 100포제션 기준 득점 기대치.[26] 공격 부문 승리 기여도.[27] 애초에 전문가들 순위에서도 차이가 상당히 난다. 조던은 부동의 1위이고 르브론 역시 5위권 안에 드는 선수로 분류되며, 코비는 못해도 15위 안에는 무조건 드는 선수이다.[28] 릴라드는 연습을 빼먹지도 않겠다는 말도 덤으로 하였다.[29] 공을 잡고 질질 끄는 것.[30] 물론 2000년대 초반에 필라델피아는 강력한 수비팀이었지만 전체 커리어로 보면 나머지 세 선수에 비해 아이버슨의 팀은 약체팀에 속하는 편이다.[31] 물론 클블 1기 시절은 명백히 원맨팀이었다.[32] 하든도 팀에서 아이버슨과 같은 절망적인 소년가장 위치에 있다 보니 좋은 비교 사례가 된다. 야투율이 아무리 떨어져도 역대급 자유투 삥뜯기는 TS%가 높아지는 기적을 만들...[33] 하든의 야투율이 낮은 이유는 3점슛 시도가 전체 야투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비율이 높기 때문에 야투율이 낮은 것이다. 2점슛 성공률은 커리어 전체로 봐도 50%에 육박하는 아주 높은 성공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버슨과는 전혀 다른 예다. 따라서 자유투 때문에 TS%가 높다는 주장은 전혀 신빙성이 없다. 오히려 평균 자유튜 횟수는 조던과 아이버슨보다 적으며, EFG%도 언급된 선수중 1위이다.[34] 이때 아이버슨이 한 말이 "살인범에게 양복을 입힌다고 해서 그가 살인범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 (You can put a murderer in a suit, and he's still a murderer)." 당시 드레스코드 도입이 흑인 선수들을 겨냥한다고 판단한 아이버슨이 뱉은 말이다. 덤으로 팀 던컨 역시 강력하게 반대했는데 이유 자체는 아이버슨과 전혀 다른 이유이다. [35] 참고로 찰스 바클리는 드레스코드에 찬성이었다. 흑인 스타들이 깔끔한 정장을 입고 다녀야 애들이 그걸 본받고 사니 흑인 이미지도 좋아지고 취업률도 올라갈꺼라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