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식(1936)

 



'''역임한 직위'''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국회의원 (부산 동래구 갑)'''
제14대
박관용[1]

'''제14대
강경식'''

제15대
박관용
'''대한민국 국회의원 (부산 동래구 을)'''
제13·14대
최형우

'''제15대
강경식'''

''선거구 조정''
박관용[2]

[image]
강경식 / 姜慶植
1936년 05월 10일 ~ (88세)
1. 개요
2. 생애
2.1. 초기 경력
2.2. 경제부총리: 외환위기와 정책 실패
2.3. 이후
3. 둘러보기


1. 개요


대한민국의 경제관료, 정치인이다.
1997년 대한민국 외환위기 당시의 경제부총리였으며, 당시 판단 오류에 따른 비판을 많이 받는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1936년 5월 10일 경상북도 영주군에서 태어났다. 부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미국 시라큐스 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이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경제관료로 근무하였다.
1977년 12월부터 1982년 1월까지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차관보를 지내면서 김재익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등과 함께 경제 안정화 정책을 주도하였다. 1982년 1월부터 같은 해 6월까지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차관을, 같은 해 6월부터 1983년 10월까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이 때 김재익 등과 금융실명제를 추진했으나 정계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1983년 10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에 대한 수습 차원에서 내각 개편이 진행될 때 함병춘의 후임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어 1985년까지 부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동래구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통일민주당 박관용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1993년 박관용이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자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부산광역시 동래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2. 경제부총리: 외환위기와 정책 실패


1997년 3월 재정경제원 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되었다.그 후 한보그룹 부도 뒷처리, 기아자동차 부도 등 1997년 들어 급증한 대기업 부도 사태를 처리하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로 인해 대한민국은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어야 했다. 결국 그 이후 김인호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과 함께 외환위기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안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급기야는 외환위기 실상을 축소 보고해 환란을 초래한 혐의(직무유기)로 기소, 투옥되기도 했다.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던 1997년 10월 말,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은 튼튼하며 동남아식 위기는 없다"고 말했던 것까지 인용되면서 더욱 빈축을 샀다. 여기에 대해 강경식은 "한국 경제의 신인도를 우려하는 해외측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고 해명했다. 같은 시기에 IMF도 동일한 평가를 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에 "나는 '실패한 소방수'지, '방화범'이 아니다"라며 항변했다. 결과로는 1999년 8월에 고의가 아닌 정책실패에 대해서는 사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이유로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났고,이에 대해 검찰이 항소하였으나 항소심(2002년 10월)에서 무죄,그리고 또 시간이 지난 2004년 6월에야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환란의 원인과 책임을 둘러싼 공방이 그 정도로 치열했던 것이다.

2.3. 이후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하려 하였으나 IMF 사태를 연상케 하는 강 전 부총리의 입당 자체가 불허되었다. 결국 무소속으로 부산광역시 동래구 선거구에 출마했지만 한나라당 박관용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동부그룹, 농심그룹 등에서 사외이사로 일했으며, 저서로는 <강경식의 환란일기>가 있다.

3. 둘러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