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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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부터 1997년까지 (주)한보를 중심으로 한 건설/제조업 특화 기업집단으로, 한창 잘나갈 적에는 한양그룹 및 라이프그룹과 더불어 땅을 바탕으로 재벌을 만들었기에 '부동산 3인방'으로 불렸다.
1996년까지 대한민국 재계 서열 18위를 자랑하는 대기업이었으나, 1997년 1월 23일 부도가 나면서 공중분해되었다. 그리고 당시 사상 최대 규모였던 한보의 부도는 금융권에 자금경색 현상을 초래했고, 다른 재벌들의 줄 부도 사태가 이어지다가 그 악몽 같은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졌다. 정치 측면으로 보면 '김현철 스캔들'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세무공무원이던 정태수가 "사업을 하면 잘 된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창업해서 부동산과 아파트로 떼돈을 벌면서 승승장구하다가, "쇳가루를 만져야 한다"[1] 는 점쟁이의 조언에 종합제철소 건설에 뛰어들었다가 쫄딱 망한, 그야말로 '''점#s-2으로 흥해서 점#s-2으로 망한 기업'''이다.
한보그룹의 드라마틱한 흥망성쇠는 정경유착, 부정부패, 관치금융, 부동산 투기, 황제경영, 문어발식 확장 등 압축성장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반면교사로 지금도 회자된다. 특히 사업 확장 과정에서 온갖 비리를 저질러서, 대단히 추악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공병호도 저서 <대한민국 기업흥망사>를 통해 한보 같은 기업이 되지 않고 영속하려면 기업가는 장사꾼과 다른 생각을 지녀야 한다고 뼈 있는 말을 했다.
부도가 나기 직전 1996년 마지막 광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서 세무공무원으로 일했던 정태수가 일하기 싫증이 나던 차에, 역술가의 말을 듣고 준비 과정을 거쳐 공무원을 그만두고 1974년에 창업한 한보상사가 모체이다. 사업을 시작하기 직전에 한두 달치 봉급 정도의 돈으로 폐광을 인수했는데 미국에서 몰리브덴의 생산을 중단하자 떼돈을 벌어들였고, 1975년 서울 영등포구 구로동에 영화아파트[2] 172가구를 지으면서 주택건설업에도 진출했다. 1976년 삼아건설을 인수해 본격적으로 강남 개발에 진출했고, 1979년 초석건설을 인수해 해외 건설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물론 순탄한 길을 걸어왔던 건 아니라서, 건설 도중 규제조치가 걸려 기껏 건설했던 아파트가 미분양 상태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한 번 망하기 직전까지 간 적이 있지만, 2차 오일쇼크가 와서 화폐가치가 크게 떨어지고 부동산이 안전자산으로 각광받던 덕택에 은마아파트가 단 20일 만에 완판되면서 거금을 손에 쥘 수 있었고 일약 재벌로 성장하게 된다.
1981년 그룹총괄비서실을 신설해서 기업집단으로서의 모양새를 갖추고 1982년 한보탄좌개발을 세워 탄광사업에도 진출했고, 1985년에는 (주)금호 철강사업부를 인수하기도 했다. 이런 게 시대를 잘 타서 이 또한 대박을 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그룹이 조금씩 삐그덕거리며 건설을 제외한 나머지 부문이 취약해지자 이를 타개하려고 이런저런 로비를 했다. 그 시도는 성공을 거두게 되지만, 1991년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을 일으킨 후 공중분해의 위기가 닥쳤다. 1991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노태우 정권의 비호로 여차여차 넘어갔지만, 주력이던 주택 부문에서 손을 떼어야 했고 정태수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도리어 이 시기가 새로운 기회가 되어서, 1993년 정태수가 총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돌아와 기존 건설 치중에만 벗어나 상아제약을 인수했고, 시베리아 가스전을 확보/개발하고 철강사업에 집중하거나, 영상 프로덕션 '한맥유니온' 등을 세우며 사업 다각화를 꾀하게 된다. 1995년 부실 건설업체 유원건설과 계열사 4개를 세트로 인수했으나, 그해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져 정태수 총회장이 구속되어 3남 정보근 부회장이 회장으로 등극하면서 2세 경영체제로 승계됐다.
일단 당시 주요 사업이었던 러시아 가스전 개발과 제철소 건설은 당시로는 현명한 결정이었다. 가스전 개발의 경우, 확실히 시대를 앞서가는 발상이었는데 에너지 확보가 크게 중시되지 않았던 1990년대 중반[3] 당시 앞으로 에너지가 미래가 될 것이라는 정태수 회장의 선견지명에 따른 결정이었으며 그 선견지명은 맞았다.[4][5] 또한 철강사업의 경우 국내 메이저급 철강 기업이 포항제철 하나뿐인 상황에서, 어느 정도 소비자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고 포항제철의 내수 독점 견제를 위해서는 새로운 국내 대형 철강 기업이 하나쯤은 필요한 상황이었다.[6] 심지어 '친환경 철강소'를 만든다고 당대 미검증된 신종 공법 '코렉스' 도입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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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철강 부도 뉴스가 보도된 1997년 1월 23일자 MBC 뉴스데스크. 뉴스보기
부도 당일 KBS 뉴스 9 방송분
그러나 철강 부문에 집착하게 된 게 직접적인 패착이 되고 말았다. 한보철강은 제철소를 지을 돈이 부족해서 회사채 발행, 차입, 어음발행, 매각 등으로 돈을 확보하려 시도했고, 은행들도 채무를 유예해 주거나 긴급지원을 하는 등 도와 주었으나 1996년 말에 결국 자금이 바닥났다. 이후 1997년 1월 6일 전환사채(Convertible Bond) 450억 원을 발행해 자금을 확보하려 했지만, 다음 날 주식시장 폭락 등의 악재가 있었다. 1월 9일 어음 1,200억 원이 들어와 위기를 맞았으나 은행권의 긴급 지원으로 위기를 넘겼다. 1월 10일에는 자사 보유 3,100억 원짜리 부동산을 내놓았으나 쉽사리 팔리지 않았고, 전환사채 350억 원을 발행하려 했으나 매각에 실패했다. 1월 14일 임원진을 전면 교체하며 비상 체제에 들어갔다. 1월 17일 560억 원의 어음을 다시 은행권 추가지원으로 넘겼다. 이 와중에 한보철강이 짓던 당진제철소의 냉연/열연공장이 준공되며 잠시나마 상한가에 오르기도 했다.
1월 20일 3천억 원 추가 지원을 은행권에 요청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1997년 1월 23일 50억 원의 어음이 들어왔고, 은행권의 추가지원 난색 등으로 결국 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주식포기각서를 내며 도산했다. '''이때 한보철강이 졌던 빚만 5조 원이었다.'''[7]
제철소 건설이 직격타가 되긴 했지만, 멀리 보면 수서 사건 때부터 망할 조짐이 보였다. 당시 한보그룹은 수서 사건으로 닥친 그룹 내 위기를 모면하고자 기존 건설재벌에서 종합 재벌로 거듭나기 시작했는데, 이때 무리하여 계열사를 만들고(한보선물, 한보관광 등) 인수를 강행한 데다(상아제약, 세양선박, 유원건설 등), 거기에 제철소 건설 사업에 돈이 매우 많이 들어가면서 적자가 나자 회사채 남발과 차입, 어음, 부동산 매각 등으로 메꾸면서 이를 충당했다. 그러나 결국 벌린 사업들이 실패하면서 경영이 악화되고, 제철소 건설이 그야말로 돈 먹는 하마 급이라 적자가 지속되며 최종적으로는 자금이 바닥나며 은행권의 지원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심지어 알짜가 될 거라 장담했던 한보에너지의 가스전 개발권마저 팔았다. 뭐 당시엔 유류가 상승이 오기 이전이라 가스전이 크게 수익이 나진 않았다만 어쨌든 미래를 파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 말은 미래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했다는 것이기도 했다.
부도 직전인 1996년에는 그간 전문이었던 주택건설 부문에 다시 뛰어들어 경영난을 타개하고자 노력했으나 이마저도 실패, 결국 1997년 1월 23일 한보사태[8] 라는 추악한 결말을 냈고, 4월 1일에는 대규모기업집단에서도 제외된 후 서서히 공중분해됐다.
이후 한보그룹의 멸망을 신호탄으로 방만한 경영과 문어발식 확장을 일삼던 다수의 재벌 그룹들이 연쇄 부도가 나기 시작했으며, 결과적으로 1997년 외환 위기라는 국가 존폐의 위기로 이어지고 만다.
(주)한보를 모회사로 하여 4개 소그룹으로 구성됐고, 그 산하에 여러 계열사와 자회사가 있었다. 대부분이 1990년대 수서사건으로 인한 그룹 차원의 위기 타개책으로 인한 사업 확장의 부산물이었다. 계열사 내역은 부도 당시 계열사 현황 기사, NICE 기업정보, 1996년 동아연감 부록 <50대 그룹 임원록> 등지에서 참고했다.
예전부터 대단히 부도덕한 기업으로 악명높았다. 전술한 공병호 저서에 의하면 은마아파트 건설 당시 한보가 대금 결제를 자꾸 늦추자 납품업체들이 자재 납품을 거부한 일이 있었는데, 현장에서 결제하겠다고 자재 가져오라고 해 놓고서 정작 현장에선 직원들을 동원해 결제 없이 자재를 강제로 먹튀해 버린 에피소드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외에도 수서 사건과 한보사태 등의 일로 스캔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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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가 대단히 황당한 곳에 있었는데,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의 은마아파트 상가 3층 자리에 있었다. 재계 서열 14위의 대기업 본사가 번듯한 사옥 없이 '''아파트 상가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사무실은 3층에 두고 나머지는 상가로 썼다.
이유는 창업주인 정태수 본인의 고집 같은 것인데 '목수가 자기 집을 가지면 망한다'고 믿어서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신입사원들이 한보그룹 본사를 찾아오는데, 입구가 여러 개라서 본사를 찾으려다가 상가를 뺑뺑 돈다던가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는 후문이 있었고, 여타 대기업 본사도 그럴싸한 빌딩 건물 쓰고있으니까 한보그룹 본사도 빌딩 건물에 위치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실제 한보 본사를 가고 나서 뒤통수 맞은 듯한 경험을 한 사람도 있었다.[11] 다만 1995년 유원건설 인수 후 시청역에 있는 유원빌딩을 인수해 반듯한 사옥을 갖는 듯했으나 공동소유주 프랑스 크레디리요네 은행과 다투기도 했다.
참고로 지금도 수도권 전철 3호선 대치역 승강장에 가면 한보그룹 이름이 새겨진 의자가 여럿 남아 있다.
전술했듯이 강남에서 오래 되었음에도 비싼 대치동의 은마아파트(1979년 입주)와 미도아파트(1983년 11월 입주)가 이 회사에서 지은 아파트이다. 또한 제법 잘 나가던 제약사인 상아제약도 이 그룹 계열이었다. 지금 상아제약은 GC녹십자로 넘어갔다.
1984년 5월부터 1997년 4월까지 대한하키협회의 회장사를 맡았으며, 1994~1995년에 KBS1 휴먼드라마 <인간극장>, MBC 드라마 <까레이스키>, SBS 다큐멘터리 <아시아 4만km> 등의 제작에 각각 후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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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4년부터 1997년까지 (주)한보를 중심으로 한 건설/제조업 특화 기업집단으로, 한창 잘나갈 적에는 한양그룹 및 라이프그룹과 더불어 땅을 바탕으로 재벌을 만들었기에 '부동산 3인방'으로 불렸다.
1996년까지 대한민국 재계 서열 18위를 자랑하는 대기업이었으나, 1997년 1월 23일 부도가 나면서 공중분해되었다. 그리고 당시 사상 최대 규모였던 한보의 부도는 금융권에 자금경색 현상을 초래했고, 다른 재벌들의 줄 부도 사태가 이어지다가 그 악몽 같은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졌다. 정치 측면으로 보면 '김현철 스캔들'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세무공무원이던 정태수가 "사업을 하면 잘 된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창업해서 부동산과 아파트로 떼돈을 벌면서 승승장구하다가, "쇳가루를 만져야 한다"[1] 는 점쟁이의 조언에 종합제철소 건설에 뛰어들었다가 쫄딱 망한, 그야말로 '''점#s-2으로 흥해서 점#s-2으로 망한 기업'''이다.
한보그룹의 드라마틱한 흥망성쇠는 정경유착, 부정부패, 관치금융, 부동산 투기, 황제경영, 문어발식 확장 등 압축성장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반면교사로 지금도 회자된다. 특히 사업 확장 과정에서 온갖 비리를 저질러서, 대단히 추악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공병호도 저서 <대한민국 기업흥망사>를 통해 한보 같은 기업이 되지 않고 영속하려면 기업가는 장사꾼과 다른 생각을 지녀야 한다고 뼈 있는 말을 했다.
2. 역사
2.1. 창업과 전성기
부도가 나기 직전 1996년 마지막 광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서 세무공무원으로 일했던 정태수가 일하기 싫증이 나던 차에, 역술가의 말을 듣고 준비 과정을 거쳐 공무원을 그만두고 1974년에 창업한 한보상사가 모체이다. 사업을 시작하기 직전에 한두 달치 봉급 정도의 돈으로 폐광을 인수했는데 미국에서 몰리브덴의 생산을 중단하자 떼돈을 벌어들였고, 1975년 서울 영등포구 구로동에 영화아파트[2] 172가구를 지으면서 주택건설업에도 진출했다. 1976년 삼아건설을 인수해 본격적으로 강남 개발에 진출했고, 1979년 초석건설을 인수해 해외 건설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물론 순탄한 길을 걸어왔던 건 아니라서, 건설 도중 규제조치가 걸려 기껏 건설했던 아파트가 미분양 상태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한 번 망하기 직전까지 간 적이 있지만, 2차 오일쇼크가 와서 화폐가치가 크게 떨어지고 부동산이 안전자산으로 각광받던 덕택에 은마아파트가 단 20일 만에 완판되면서 거금을 손에 쥘 수 있었고 일약 재벌로 성장하게 된다.
1981년 그룹총괄비서실을 신설해서 기업집단으로서의 모양새를 갖추고 1982년 한보탄좌개발을 세워 탄광사업에도 진출했고, 1985년에는 (주)금호 철강사업부를 인수하기도 했다. 이런 게 시대를 잘 타서 이 또한 대박을 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그룹이 조금씩 삐그덕거리며 건설을 제외한 나머지 부문이 취약해지자 이를 타개하려고 이런저런 로비를 했다. 그 시도는 성공을 거두게 되지만, 1991년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을 일으킨 후 공중분해의 위기가 닥쳤다. 1991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노태우 정권의 비호로 여차여차 넘어갔지만, 주력이던 주택 부문에서 손을 떼어야 했고 정태수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도리어 이 시기가 새로운 기회가 되어서, 1993년 정태수가 총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돌아와 기존 건설 치중에만 벗어나 상아제약을 인수했고, 시베리아 가스전을 확보/개발하고 철강사업에 집중하거나, 영상 프로덕션 '한맥유니온' 등을 세우며 사업 다각화를 꾀하게 된다. 1995년 부실 건설업체 유원건설과 계열사 4개를 세트로 인수했으나, 그해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져 정태수 총회장이 구속되어 3남 정보근 부회장이 회장으로 등극하면서 2세 경영체제로 승계됐다.
일단 당시 주요 사업이었던 러시아 가스전 개발과 제철소 건설은 당시로는 현명한 결정이었다. 가스전 개발의 경우, 확실히 시대를 앞서가는 발상이었는데 에너지 확보가 크게 중시되지 않았던 1990년대 중반[3] 당시 앞으로 에너지가 미래가 될 것이라는 정태수 회장의 선견지명에 따른 결정이었으며 그 선견지명은 맞았다.[4][5] 또한 철강사업의 경우 국내 메이저급 철강 기업이 포항제철 하나뿐인 상황에서, 어느 정도 소비자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고 포항제철의 내수 독점 견제를 위해서는 새로운 국내 대형 철강 기업이 하나쯤은 필요한 상황이었다.[6] 심지어 '친환경 철강소'를 만든다고 당대 미검증된 신종 공법 '코렉스' 도입을 시도했다.
2.2. 몰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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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철강 부도 뉴스가 보도된 1997년 1월 23일자 MBC 뉴스데스크. 뉴스보기
부도 당일 KBS 뉴스 9 방송분
그러나 철강 부문에 집착하게 된 게 직접적인 패착이 되고 말았다. 한보철강은 제철소를 지을 돈이 부족해서 회사채 발행, 차입, 어음발행, 매각 등으로 돈을 확보하려 시도했고, 은행들도 채무를 유예해 주거나 긴급지원을 하는 등 도와 주었으나 1996년 말에 결국 자금이 바닥났다. 이후 1997년 1월 6일 전환사채(Convertible Bond) 450억 원을 발행해 자금을 확보하려 했지만, 다음 날 주식시장 폭락 등의 악재가 있었다. 1월 9일 어음 1,200억 원이 들어와 위기를 맞았으나 은행권의 긴급 지원으로 위기를 넘겼다. 1월 10일에는 자사 보유 3,100억 원짜리 부동산을 내놓았으나 쉽사리 팔리지 않았고, 전환사채 350억 원을 발행하려 했으나 매각에 실패했다. 1월 14일 임원진을 전면 교체하며 비상 체제에 들어갔다. 1월 17일 560억 원의 어음을 다시 은행권 추가지원으로 넘겼다. 이 와중에 한보철강이 짓던 당진제철소의 냉연/열연공장이 준공되며 잠시나마 상한가에 오르기도 했다.
1월 20일 3천억 원 추가 지원을 은행권에 요청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1997년 1월 23일 50억 원의 어음이 들어왔고, 은행권의 추가지원 난색 등으로 결국 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주식포기각서를 내며 도산했다. '''이때 한보철강이 졌던 빚만 5조 원이었다.'''[7]
제철소 건설이 직격타가 되긴 했지만, 멀리 보면 수서 사건 때부터 망할 조짐이 보였다. 당시 한보그룹은 수서 사건으로 닥친 그룹 내 위기를 모면하고자 기존 건설재벌에서 종합 재벌로 거듭나기 시작했는데, 이때 무리하여 계열사를 만들고(한보선물, 한보관광 등) 인수를 강행한 데다(상아제약, 세양선박, 유원건설 등), 거기에 제철소 건설 사업에 돈이 매우 많이 들어가면서 적자가 나자 회사채 남발과 차입, 어음, 부동산 매각 등으로 메꾸면서 이를 충당했다. 그러나 결국 벌린 사업들이 실패하면서 경영이 악화되고, 제철소 건설이 그야말로 돈 먹는 하마 급이라 적자가 지속되며 최종적으로는 자금이 바닥나며 은행권의 지원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심지어 알짜가 될 거라 장담했던 한보에너지의 가스전 개발권마저 팔았다. 뭐 당시엔 유류가 상승이 오기 이전이라 가스전이 크게 수익이 나진 않았다만 어쨌든 미래를 파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 말은 미래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했다는 것이기도 했다.
부도 직전인 1996년에는 그간 전문이었던 주택건설 부문에 다시 뛰어들어 경영난을 타개하고자 노력했으나 이마저도 실패, 결국 1997년 1월 23일 한보사태[8] 라는 추악한 결말을 냈고, 4월 1일에는 대규모기업집단에서도 제외된 후 서서히 공중분해됐다.
이후 한보그룹의 멸망을 신호탄으로 방만한 경영과 문어발식 확장을 일삼던 다수의 재벌 그룹들이 연쇄 부도가 나기 시작했으며, 결과적으로 1997년 외환 위기라는 국가 존폐의 위기로 이어지고 만다.
3. 사훈
'''인화, 절약, 발전'''
4. 역대 그룹임원
- 명예회장
- 박승규 (1996~1997)
- 그룹 총회장
- 정태수 (1993~1997)
- 그룹 회장
- 정태수 (1982~1991)
- 박승규 (1991~1996)
- 정보근 (1996~1997): 주력소그룹 회장 겸임.
- 목재소그룹 회장
- 정종근 (1996~1997)
- 제약소그룹 회장
- 정원근 (1996~1997)
- 금융소그룹 회장
- 정한근 (1996~1997)
- 그룹 비서실장
- 김한도 (1981~1993)
- 정한근 (1993~1996)
- 정일기 (1996)
- 신상익 (1996~1997)
5. 계열사 목록
(주)한보를 모회사로 하여 4개 소그룹으로 구성됐고, 그 산하에 여러 계열사와 자회사가 있었다. 대부분이 1990년대 수서사건으로 인한 그룹 차원의 위기 타개책으로 인한 사업 확장의 부산물이었다. 계열사 내역은 부도 당시 계열사 현황 기사, NICE 기업정보, 1996년 동아연감 부록 <50대 그룹 임원록> 등지에서 참고했다.
5.1. 주력소그룹
- (주)한보: 구 삼아건설-한보주택-한보건설. 그룹 부도 후 법정관리를 거치다가 2009년 폐업됨.
- 주택사업부문: 강남개발 당시 그룹의 주축이었다. 대치동에 있는 은마아파트와 미도아파트도 여기서 지었다. 1997년 부도난 후 법정관리를 받다가 2002년 '한보건설'로 분사 후 진흥기업에 넘어갔으나, 2004년 그룹 출신 인사 이종춘에게 매각돼 '온빛건설'이 됐으나 2006년 신창건설, 2009년 LIG그룹을 각각 거치다 2010년 LIG건설에 합병됐다.
- 부산제강소(현 YK스틸): 구 극동철강공업-금호산업-(주)금호/한보철강공업 철강사업부. 2002년 일본 야마토공업에 매각됨.
- 무역사업부문: 구 한보상행. 1987년 합병됨.
- 엔지니어링사업부문: 구 한보엔지니어링. 1984년 합병됨.
- 해운사업본부: 1994년 발족.
- 한보건설: 구 유원건설. 1997년 부도 후 인수 전 사명으로 환원됐다가 2001년 미국 울트라컨으로 매각되어 '울트라건설'이 되었으나, 2014년 또다시 법정관리를 받다가 2016년에 호반건설로 매각된 후 '호반산업'이 됐으나, 이듬해 호반건설산업에 합병됨.
- 승보엔지니어링: 1996년 (주)한보에 합병됨.
- 한보상사: 그룹의 모체이자 정태수 창업주의 개인회사로, 경북 울진군 삼율소보광업소도 운영한 바 있다. 1993년에 폐업됨.
- 대한토건: 토목 건설업체.
- 두영개발: 이하 동일.
- 대석실업: 옛 유원건설의 부동산 임대 및 관리자회사였다.
- 한보기업: 1987년 한보주택으로 합병됨.
- 한보아파트관리: 구 장영기업. 그룹 부도 후 청산절차를 거쳐 2005년에 폐업됨.
- 한보상가: 1984년 한보주택으로 합병됨.
- (구)한보철강공업: 1988년에 청주 철구공장을 한보탄광으로 넘긴 후, 한보종합건설로 합병됨.
- (신)한보철강공업: 1957년 세워진 초석건설이 전신이며, 1979년 인수된 후 '한보종합건설'이 된 후 1988년 (구)한보철강공업을 합병해 철강사업에도 손을 뻗었고, 1995년에 건설사업부, 1996년에 부산제강소를 각각 (주)한보에 넘기고 당진제철소에 주력해왔다. 그룹 부도 후 포항제철의 위탁운영을 받다가 이후 법정관리를 받았다. 2004년에 INI스틸 및 현대하이스코로 넘어갔고, 이후 통합하여 현대제철 당진공장이 되었다. 반면 기존 법인은 청산절차를 걸쳐 2009년에 문을 닫았다.
- 승보철강: 그룹 부도 후 이듬해에 폐업됨.
- 하림통상: 1996년 승보철강에 합병됨.
- 한보철강판매: 구 유원기공. 1996년 (주)한보 판매본부를 통합해 해당 명칭으로 변경했다가 이듬해 그룹 부도 후 폐업됨.
- 한보에너지: 구 한보탄좌개발-한보탄광. 그룹 부도 후 회사정리절차에 들어간 후 2005년 폐업됨.
- 석탄사업부문: 강원도 태백시 통보광업소 운영을 담당했으며, 2004년 자산이 태안광업에 넘어갔다가 2008년에 폐광됨.
- 도시가스사업부문(현 미래엔서해에너지): 2003년에 대한교과서로 분할매각됨.
- 동아시아가스: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업체로, 부도 이후 'EAGC'로 사명을 변경했다가 2006년 폐업됨.
5.2. 목재소그룹
- 승보목재: 1997년 그룹 부도 후 2000년에 폐업됨.
- 대성목재공업: 옛 유원건설 계열사로, 그룹 부도 후 2001년 동화기업에 매각됨.
- 한보관광개발(현 티시스): 골프장 한인CC(현 태광CC) 운영사로, 1988년 태광산업에 매각됨.
- 한보관광: 1997년 그룹 부도 후 '상아관광'으로 변경했다가 2008년 폐업됨.
- 여광개발: 옛 유원건설 계열사이며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이선리에 골프장 여광CC를 개발하던 업체로, 1997년 상농기업에 부지를 넘기고 2000년에 폐업됨.
5.3. 제약소그룹
- 상아제약: 2001년 GC녹십자 등이 주축이 된 '근화제약컨소시엄'에 넘어갔다. 2003년 '녹십자상아'가 됐다가 이듬해 녹십자홀딩스 출범으로 사명도 '녹십자'가 됨.
- 상아종합판매: 1997년 그룹 부도 후 이듬해에 폐업됨.
- 정암생명공학연구원: 그룹 부도 후 이듬해에 폐업됨.
- 한맥유니온[9] : 영상제작업체. 그룹 부도 후 1998년 6월 30일 폐업했다.[10]
5.4. 금융소그룹
- 한보선물: 1998년 퇴출 후 2000년 폐업됨.
- 한보경제연구원: 1997년 그룹 부도 후 폐업됨.
- 한보상호신용금고: 구 삼화상호신용금고. 1998년 퇴출 후 제일화재가 자산을 인수해 신규법인 '새누리상호신용금고'를 세웠으나 2008년 한화그룹으로 매각되어 한화저축은행으로 사명 변경됨.
5.5. 기타
- 한보정보통신: 그룹 부도 후 1999년에 폐업됨.
- 유원컴퓨터: 옛 유원건설의 SI자회사로, 1996년 한보정보통신에 합병됨.
- 이탈리아모터스코포레이션: 약칭 I.M.C.로, 피아트, 란치아 차량을 수입/판매하던 회사였으며 1997년 12월에 폐업됐다.
6. 공익 사업
- 학교법인 한보학원: 강릉영동대학교의 전신인 영동전문대학을 운영했다.
- 한보문화재단
- 한보 멧돼지 씨름단: 1997년 그룹 부도 후 선수단이 동성종합건설 백호 씨름단에 넘어감.
7. 관계사 목록
- 세양선박: 1996년에 인수된 후 위장계열사 노릇을 하다가 1997년 그룹 부도로 수산그룹에 매각됐다. 그러나 이듬해에 모기업의 경영악화 때문에 미래팩토링으로 넘어갔으나, 2002년 쎄븐마운틴그룹에 매각된 후 2006년에 그룹명 변경으로 'C&상선'이 됐다가 2010년에 퇴출됨.
- 대동조선: 옛 흥아해운 자회사로, 1996년 세양선박이 인수한 위장계열사였으나 그룹 부도 후 2002년 STX에 매각되어 'STX조선해양'이 됨.
8. 기타
예전부터 대단히 부도덕한 기업으로 악명높았다. 전술한 공병호 저서에 의하면 은마아파트 건설 당시 한보가 대금 결제를 자꾸 늦추자 납품업체들이 자재 납품을 거부한 일이 있었는데, 현장에서 결제하겠다고 자재 가져오라고 해 놓고서 정작 현장에선 직원들을 동원해 결제 없이 자재를 강제로 먹튀해 버린 에피소드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외에도 수서 사건과 한보사태 등의 일로 스캔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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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가 대단히 황당한 곳에 있었는데,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의 은마아파트 상가 3층 자리에 있었다. 재계 서열 14위의 대기업 본사가 번듯한 사옥 없이 '''아파트 상가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사무실은 3층에 두고 나머지는 상가로 썼다.
이유는 창업주인 정태수 본인의 고집 같은 것인데 '목수가 자기 집을 가지면 망한다'고 믿어서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신입사원들이 한보그룹 본사를 찾아오는데, 입구가 여러 개라서 본사를 찾으려다가 상가를 뺑뺑 돈다던가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는 후문이 있었고, 여타 대기업 본사도 그럴싸한 빌딩 건물 쓰고있으니까 한보그룹 본사도 빌딩 건물에 위치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실제 한보 본사를 가고 나서 뒤통수 맞은 듯한 경험을 한 사람도 있었다.[11] 다만 1995년 유원건설 인수 후 시청역에 있는 유원빌딩을 인수해 반듯한 사옥을 갖는 듯했으나 공동소유주 프랑스 크레디리요네 은행과 다투기도 했다.
참고로 지금도 수도권 전철 3호선 대치역 승강장에 가면 한보그룹 이름이 새겨진 의자가 여럿 남아 있다.
전술했듯이 강남에서 오래 되었음에도 비싼 대치동의 은마아파트(1979년 입주)와 미도아파트(1983년 11월 입주)가 이 회사에서 지은 아파트이다. 또한 제법 잘 나가던 제약사인 상아제약도 이 그룹 계열이었다. 지금 상아제약은 GC녹십자로 넘어갔다.
1984년 5월부터 1997년 4월까지 대한하키협회의 회장사를 맡았으며, 1994~1995년에 KBS1 휴먼드라마 <인간극장>, MBC 드라마 <까레이스키>, SBS 다큐멘터리 <아시아 4만km> 등의 제작에 각각 후원해줬다.
[1] 일각에선 이 점이 금융업을 뜻한다고도 한다. 실제로 당시 금융업을 잘했다면 성공할 수도 있었던 부분이긴 하다. 그러나 한보의 문제는 사업선택뿐만이 아니긴 하다.[2] 현재는 구로지웰아파트로 재건축되었다.[3]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당시 유가든 천연가스 값이든 간에 고점에 비해서 60%대로 떨어져 있었던 시절이었고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그 보다 이하였기 때문에 굳이 비싼 돈을 쓰면서까지 자원 개발에 나설 이유가 적었기는 했다.[4] 당시 이미 고합그룹(고려합섬)도 '북방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해당 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두 기업의 천연가스 개발이 현실화되었다면 한국의 에너지 부족 문제는 완화될 수 있었겠으나, 문제는 둘 다 부실경영 문제로 97년 부도크리를 맞았다. 이후 이명박 정부 때 천연가스관 건설 논의 등 말이 조금 있었다가, 문재인 정부에서야 구상되기 시작했다.[5] 다만 현실화되었다면 에너지주권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러시아가 잠가라 밸브 시전해서 유럽에 횡포를 부리는 게 한국에서도 통했을 것이라는 지적.[6] 자동차 조립, 자동차 부품 생산, 선박 건조, 토목/건축물 시공 등 국내에서 철강 수요 사업을 가장 많이 보유한 현대그룹이 1980년대부터 종합 제철소를 가지길 원했으나, 포항제철의 견제와 여러 가지 여건이 안 좋아서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7] 당시 한보그룹의 재계서열이 14위였는데, 공정거래위원회가 자산총액기준으로 발표한 2017년 서열에서 13위가 두산그룹, 근소한 차이로 14위가 한진그룹, 15위가 CJ그룹이다. 지금으로 치면 두산 or 한진(대한항공) or CJ가 수십조 원대의 부도를 내고 공중 분해된 것이다. 당연히 경제가 멀쩡할 리가... 중요한 건 이 기업 하나만 빚이 많아서, 욕심이 과해서, 재무건전성이 안좋아서 였다면 국가부도까진 안 갔을 것이다. 한보는 당시 빚으로 기업을 키우는 한국경제에 경종을 울리고 무너진 셈이다. [8] 이 사건은 김현철 스캔들로도 이어졌다.[9] 원래 정태수 회장 차남의 독립 회사였으나, 1995년 그룹으로 편입되었다.[10] #[11] 이 황당하지만 실화인 한보그룹 사옥이야기를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조명하면서 한보그룹을 까는 소재로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