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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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金融實名制 / Real-Name Financial System[1]
MBC 뉴스데스크 기사
1993년 8월 12일에 대한민국의 김영삼 대통령이 선포한 긴급재정경제명령과 후에 이를 확정한 금융거래를 반드시 실명으로 하도록 하는 법률(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금융실명거래및비밀보장에관한법률》이 1997년 12월 31일에 공포가 되었기 때문에 약 3년 5개월간 대통령의 긴급재정경제명령 체제로 금융실명제를 실시했다.저는 이 순간 엄숙한 마음으로 헌법 제76조 1항의 규정에 의거하여,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발표합니다. 아울러, 헌법 제47조 3항의 규정에 따라, 대통령의 긴급재정경제명령을 심의·승인하기 위한 임시국회 소집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금융실명제에 대한 우리 국민의 합의와 개혁에 대한 강렬한 열망에 비추어 국회의원 여러분이 압도적인 지지로 승인해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후략)
ㅡ 1993년 8월 12일 김영삼 대통령의 금융실명제 실시 관련 담화문 대한뉴스 제 1971호-금융실명제
'''발표 다음 날인 1993년 8월 13일부터''' 2024-12-18 00:53:18 지금 이 순간까지도 대한민국에서는 이 제도로 인해 주민등록증, 여권, 운전면허증 등의 신분증이 없으면 계좌를 개설할 수가 없고, 계좌이체도 할 수 없다. 워낙 전격적으로 행해 철저히 수행할 수 있었으며, 세금이 발생하는 거래도 전부 실명이 있어야 가능하므로 생각도 못했던 세금 환수율 상승효과까지 거두었다. 하나회 숙청과 더불어 김영삼 재임 시기 최고의 업적이라, 심지어 김영삼을 싫어하는 사람조차 대체적으로 이건 잘했다고 인정할 정도의 치적이다.
특히 이는 '''민주화 쟁취 이후 유일무이한 긴급명령'''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도 있다. 이전의 긴급명령은 6.25 전쟁 당시 내지 직후 상황(14호까지)이거나 군사정권 시대의 것(15호)이었지만, 이 16호만큼은 민주화 시대 최초의 긴급명령으로 의미가 크다. 일례가 바로 국가가 실시하는 역사 관련 시험이다. 금융실명제가 매우 자주 출제된다. 덕분에 학생도 금융실명제 = 김영삼 정부(문민정부)로 인지한다. 비슷한 사례로 남북기본합의서 = 노태우 정부가 있다.
2. 왜 실시하게 되었는가?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는 예금주의 익명, 차명, 가명 계좌로도 금융 거래를 할 수 있었다.예금·적금등의비밀보장에관한법률 아무튼 예금을 늘리고 보려는 정책이었지만, 이러다 보니 검은 돈이 적지 않게 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금융실명제 실시 이전에는 익명, 차명, 가명 등으로 거래를 해왔다는 이야기가 아니지만. 굳이 실명을 안 써도 된다는 말을 해준 사람들도 당연히 없었기에, 이런 사실을 몰랐던 일반인들은 성명 란에 아무 의문 없이 실명을 썼다.
누군가가 만약 토지, 주택, 건축물, 항공기, 선박 등을 합쳐서 10억 원 가량의 재산이 있다면 이 재산에 대해 재산세를 반드시 내야만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이 실명으로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으면 그 돈을 주식을 사든, 부동산에 투자하든, 금융기관에 저금하든 조회 한번에 모든 재산 내역을 열람하는 것이 가능하며, 세금 또한 피할 수 없게 된다. 유일하게 회피하는 방법은 그 정도의 현금이나 그에 준하는 실물로 바꾸어 집에 가지고 있는 것뿐이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투자를 못 하게 되므로 기회비용이 발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투자를 통해 이자나 수익이 발생하는데 묵혀두기만 하면 이것을 못 얻게 되는 것. 그래서 대부분의 국가는 돈이 잘 순환될 수 있도록 재산으로 발생하는 세금보다는 그로 인한 수익이 더 크도록 해준다. 만약 세금, 즉 재산으로 인한 비용이 더 크다면 너도 나도 집에 돈다발만 쟁여둘 테니 경제가 얼어붙기 때문이다.
헌데 익명, 차명, 가명 계좌가 가능하면 해당 계좌의 혹은 해당 계좌에 들어있는 자금의 실 소유주가 자백을 한다거나 혹은 해당 계좌를 대신 관리해주던 이가 변심을 해서 수사기관이나 세무당국에다가 계좌정보를 제공하는 게 아닌 이상은 이러한 세금을 정확히 추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어떠한 사람이 정확히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이러한 이유로 재산으로 인해 드는 비용은 크게 줄어들게 된다. 당연하겠지만, 투자를 통한 수익은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커지기 때문에 돈이 많은 사람은 최소의 비용으로 엄청난 돈놀이를 할 수 있으며 부익부 빈익빈 현상 또한 가속화된다.
이러한 격차를 조금이나마 메꾸어주는 것이 재산에 발생하는 세금인데 금융실명제가 없으면 사실상 재산세가 유명무실해지는 것이다. 애초부터 실명제가 실시되기 이전부터 실명으로 거래해온 사람들만 바보가 된다. 실제로, 이런 검은 돈과 극에 달한 조세포탈 행위로 인하여 실질적인 세금 회수율이 11%밖에 되지 않았던 그리스가 디폴트를 하는 지경이 된 사례가 있다. 이러한 연유로 지속적으로 금융실명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그러면 차명계좌에 쌓아둔 검은 돈이 캐내지는 것이 불리한 사람들이 많다보니 차일피일 미루어지면서 뭉기적거리기만 했다.
전두환 정권 때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터지고 나서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이 제2의 장영자, 이철희 사건을 막고 조세 부담의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금융실명제 실시가 필요하다고 건의하였고, 《금융실명거래에관한법률》까지 제정했으나, 사실상 실행되지 못하고 무산되었기도 했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 걸쳐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게 되자 부동산 열풍을 진정시키려는 목적에서 다시 검토되었던 적이 있었지만 역시 무산되었다. 사실 전두환과 노태우 본인들부터가 이미 거액을 상납받아서 비자금을 조성했던 사람들이니 실명제 실시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기는 했다. 제5공화국 드라마에서는 이런 실정을 허화평의 입을 빌어 이야기하고 있다. 실명제를 실시하면 당 운영자금은 어디서 버냐는 식이었는데, 그 말은 그런 자금까지도 여지껏 익명의 뒷돈으로 받아먹었다는 것이다.
금융실명제 이전의 차명계좌는 '''납치, 유괴 범죄'''에도 상당히 자주 악용되었다. 처음부터 실명으로 개설했거나 차명이어도 실명으로 전환을 해 놓은 계좌이거나, 해당 계좌의 '''실''' 소유주가 누구인지를 거래하는 이가 금융기관 측에다가 통보하지 않은 이상은 계좌추적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인터넷뱅킹이 발달하지 않아 돈을 손에 넣으려면 창구든 ATM이든 은행이나 우체국에 꼭 가야만 하는 시대였기에 몸값을 요구한 범인이 금융기관에서 직접 자금을 인출하러 방문하는 수밖에 없었던 게 다행. 그 때를 노려 형사들이 범죄자가 출몰할 것으로 예상되는 금융기관 영업점에 미리 잠복하거나 금융기관 측의 신고를 받아야만 출동 가능했고, 범인을 현장에서 놓치는 일도 빈번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1990년 발생했던 곽재은 유괴 살인 사건.
3. 준비
일단 금융실명제 자체는 김영삼의 대선 공약이었다. 부작용과 실행의 어려움 때문에 실제로 시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으나, 김영삼은 취임과 동시에 하나회도 날려버린 경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 금융실명제 역시 하나회 숙청과 유사한 형태로 진행했다.
강경식 경제부총리나 김현철이 언급한 것처럼,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려면 집권 1년차에 긴급명령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처리를 확정지은 것이 집권 후 4개월만인 1993년 6월 말이었다. 이후 김영삼은 경제부총리 이경식과 재무부 장관 홍재형을 불러서 금융실명제를 극비리에 준비할 것을 지시한다. '''보안이 새면 당장 2명의 목부터 날리겠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이후 2명은 그 날로 특별팀을 조직해서 보안 유지 전쟁에 들어간다. 총괄을 담당한 이경식 부총리는 강남 대치동에서 KDI와 함께 초안을 잡기 시작했고, 홍재형 장관은 차관급 이상은 완전히 배제하고 김용민 세제실장이나 김진표[2] 세제 심의관을 포함한 실국장급만 모아서 새로 마련한 과천시 사무실에 틀어박혔다. 이 특별 팀은 1개월 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면서도 꼬리가 잡히면 안 되기 때문에 해외 출장을 명목으로 '''일본으로 출국했다가 극비리에 귀국'''하는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트렁크 끌고 공항으로 갔다가, 그 자리에서 사무실로 유턴하는 것은 양반이었다. 해외 전화인 척 하고 안부 전화도 걸었다고 하니 보안유지 하나는 전쟁이라는 표현이 부족함이 없다. 김진표 역시 장인이 차명계좌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이를 사전에 알리지 않아 장인이 불평을 한 걸로 보아 정말 철통 보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만일에, 구체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조만간 대략적으로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암시라도 남겼다간 그러한 암시를 눈치 챈 장인어른께서 자신처럼 똑같이 차명계좌를 보유 중이던 지인들한테 알려주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며, 결국에는 실명제를 시행하기 위한 계획이 도로아미타불이 될 것이 뻔했던지라 어떻게든 숨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8월이 되자 대략적인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나회 숙청 때와 마찬가지로 정보는 거의 흘러나오지 않았다. 국무총리였던 황인성도 금융실명제를 추진한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세부적인 전개 정도를 몰랐고, 박재윤 당시 경제수석은 금융실명제에 부정적인 입장이라고 해서 애초에 알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만 아예 실시하지 말자는 쪽은 아니었고, 경제가 어느 정도 성숙할 때 시행해야 부작용이 없을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D-Day 설정. 원래 계획구상은 토요일 저녁이나 일요일에 발표할 예정이었다. 은행에 준비할 여유를 주고, 또한 충격을 최소화하려는 목적이었는데, 웬걸. 하필이면 일요일이 8월 15일 광복절이었다. 그렇다고 1주일을 더 미루면 보안이 약해질 위험이 있었다는 이유로 앞당겨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사실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금융실명제 실시 바로 전날이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마지막 날이었다. 김영삼은 자신과 자신의 일가족이 보유중이었던 재산을 비롯한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를 매우 철저하게 진행할 생각이었고, 금융실명제는 이와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현철이 증언한 김영삼의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에 대한 입장은 꽤나 강경하였다.
"잘 들어봐래이. 중국에서 대만으로 쫓겨 간 장개석 총통이 부패를 바로 잡을라고 본보기로 잡은 게 며느리였다카이. 정치권에 며느리가 사치스럽다는 소문이 퍼지니까 장개석이가 집을 급습해가 수색을 한기라. 수색을 해보니까 진짜로 보석이 엄청 나왔다는 거 아이가. 그 날 이후로 장개석이가 며느리를 불러가 '이게 마지막 식사'라며 상자 하나를 건넸는데 그 속에 뭐가 들어 있었는지 아나. 권총인기라 권총."[3]
4. 발동
그리고 1993년 8월 12일 목요일 저녁 7시 45분.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 긴급명령권을 발동.''' 긴급재정경제명령 제16호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을 전격 실시하였다. 발표 직후에 은행 인출을 할 수 없도록 밤중에 이루어졌다.
긴급명령권은 헌법상 인정되는 대통령의 비상대권(권한)으로 '''법률과 같은 효력'''을 지닌다. 비록 입법부의 사후승인을 받아야 정식 법률로 정착한다곤 해도 입법부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나 다름 없고 남용하면 독재의 지름길이 되기 때문에 멀쩡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함부로 쓰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매우 큰데, 그럼에도 이것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국회 입법 형태를 거치면 입법하는 동안 언론이나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세상에 알려져 검은 돈이 다 빠져나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조치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 비실명 계좌의 실명확인 없는 인출을 금지.
- 순인출 3천만원 이상이라면 국세청에 통보하며, 자금 출처를 조사할 수 있음.
- 8월 12일 오후 8시를 기해 위 사항을 실시하고, 13일은 오후 2시부터 금융기관의 업무를 시작.
사실 어마어마한 혼란이 생긴 건 당연하다. 아무런 예고도 이유도 없이 전국의 모든 금융기관들의 문이 늦게 열리게 된 것은 물론이고, 이 뉴스를 늦게 알아서 금융기관 영업점 창구로 갔는데 갑자기 '주민등록증을 달라'(혹은 운전면허증 등의 신분증)고 해서 당황했다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도 지하경제를 크게 파낼 수 있었고, 정경유착 등 각종 부정부패를 막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당시에도 재벌과 일부 부유층, 그리고 소위 높으신 분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나름 정보를 얻었던 듯 하다. 관련 게시물 재벌 총수들은 어떻게든 잘 빠져나갔다는 말도 있다. 대우는 금융실명제에 묵시적인 찬성 입장이었고, 현대는 대선 과정에서 찍혀서 정권 눈치보느라 바빴다. 그 외 대기업은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정보를 입수했는지, 총수 자금들 만큼은 해결을 봤다고 한다. 극비리에 진행된 금융실명제 실무작업에 참여했던 경제관료들 중 일부가 정보를 사전에 유출했다는 카더라가 많이 돌아다니는데, 거론되는 인물은 툭하면 삼성장학생이라고 까이는 김진표. 하지만 재산공개와 엮여돌아갔던 고위공직자들과 언론사 등의 고위층은 어느 정도 타격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이 정책이 가져다 준 파장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13일 당일에 전국의 모든 금융기관은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부정부패 척결에도 큰 효과가 있었다. 이에 그 당시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회인 인기투표'에서 아이돌 가수도, 당대 최고의 탤런트도 아닌 김영삼 대통령이 떡하니 1위에 올라가는 일까지 있었고, '1993년 대한민국 100대 스타'를 뽑는데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거머쥐기도 했다. 관련 게시물 지금도 김영삼 대통령의 업적을 거론할 때, 하나회 숙청과 함께 꼭 거론되는 정책 중 하나.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몇 년 뒤 김영삼 대통령은 IMF 크리와 측근이었던 아들 김현철의 비리가 터지면서 인기를 잃게 되었다. 이 비리가 명확히 밝혀진 것도 '''금융실명제 덕분'''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
금융실명제가 얼마나 부유층에 위협적이었는지는 그 당시 신문기사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사소한 문제만 생기면 '''금융실명제 때문에 경제위기'''라고 기사가 났다.
8월 19일에는 긴급재정경제명령 제16호가 정식으로 국회의 승인을 받았다. 긴급명령 자체가 무효라는 김동길 의원이 행사한 반대표를 제외하고 모두가 찬성했다.
4.1. 헌법소원심판
이 긴급재정경제명령은 헌법재판소의 헌법소원심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금융실명제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데 기본권제한은 법률로써 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헌법 제37조 제2항). 예외적으로 긴급명령권 등의 요건을 충족한 경우 법률이 아닌 긴급명령 등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의 이 조치가 긴급명령권의 요건 중 긴급성을 갖추지 않았음에도, 법률이 아닌 긴급재정경제명령을 한 것은 아닌지 문제된 것이다. 이것만 가지고는 원고의 당사자 적격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외견적으로는 박성훈 변호사를 포함한 소송인들의 소유 주식이 금융실명제 발표 이후에 주가 하락으로 손해를 봤음으로 인한 재산권 침해와 국민들의 알 권리 침해를 근거로 들었다. 다만 이 변호사의 주식 하락으로 인한 재산 손해액 자체는 기십만원 정도의 명목상 이유였다고 한다. 애초에 원고의 당사자 적격 자체가 문제라서 이런 경우도 많다.
여기서는 하나 더 걸려 있는데, 이 금융실명제 문제가 통치행위에 해당돼 헌법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도 문제가 되었다. 통치행위는 정치적인 성격이 강해서 '''사법부의 심사가 배제되는 영역'''이기 때문에, 이전의 계엄령과 마찬가지로 이게 통치행위의 대상이 된다고 판결되면 애초에 사법심사가 되지도 않는다. 실제로 헌법재판소는 이 사건이 통치행위라는 점은 인정했으나, 기본권의 문제는 통치행위라도 사법심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본안으로 판단했다. 이는 통치행위 부정설이나 제한적 부정설의 논리인데, 이후 시기의 재판부는 기본권과 통치행위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주 특이한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소송은 각하 판결의 가능성을 넘어서 본안판단으로 넘어간다. 정치적 행위마저 사법부에서 판단할 수 있다면, 사법부의 힘이 입법부와 행정부에 비해 훨씬 커져 권력분립(또는 삼권분립)의 원칙을 위협할 소지가 있다. 같은 이유로 참여정부 때 자이툰 부대의 이라크 전쟁 파병결정이 위헌이냐 아니냐는 따지지 않고 각하되었다.(2003헌마814)
하지만 본안에 대해서 헌법재판소는 해당 사건에 대하여 긴급명령권의 조건[4] 을 충족하였다고 판단하여 헌법소원심판 청구를 기각하였다. 헌법재판소가 절묘한 판단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헌법재판소가 대형 정치사안에 대한 판결로 자신들의 입지를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첫 사건에서, 기본권을 폭넓게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본안에서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던 금융실명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금융실명제를 거부하려고 했던 입장에서는 각하된 것만도 못한 결론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7, 9급 공무원 시험 행정법총론 과목에서 '통치행위' 관련 문제로 자주 출제된다. 주로 국가직 시험에서 자주 출제되며, 교재 역시 '통치행위' 판례 항목에서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부분이므로 공무원 시험 보는 사람은 참고하자.
아래는 공무원 교재에 실린 금융실명제 관련 항목.
본래는 긴급명령이라 시한부로 시행되는 것이었지만, 뒤에 입법화되어 정착되었다.
5.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서 모든 금융거래 시에는 금융기관이 거래자의 실명확인 증표를 확인하도록 바뀌었다. 원칙적으로는 주민등록증이지만, 은행마다 인정해 주는 실명확인 증표의 범위가 굉장히 다양하므로 혹시 여권이나 운전면허증은 고사하고, 주민등록증 마저 잃어버리고 발급신청 확인서도 받지 못했는데 급히 은행 일을 보아야 한다면 먼저 콜센터나 창구에 물어보자. 주민등록증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실명확인 증표도 알려준다. 가령 대학생은 학생증[5] , 여권[6] , 건강보험증, 주민등록표등본, 운전면허증[7] , 국가기술자격[8] 중에 하나만 내도 된다. 대개 운전면허증을 많이 쓴다.
처리 과정에서 극심한 혼란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물론 초반 며칠 동안은 혼란이 많았다. 총 주가가 700포인트도 안 되던 상황에서 첫날 30포인트, 다음날 다시 30포인트가 하락하는 폭락장이 이어졌고, 1000여개의 종목이 하한가를 쳤다. 사채시장이나 조세포탈, 비리의 용도로 과열되었던 고액 골동품이나 미술품 시장은 그야말로 얼어붙었다. 전국의 모든 금융기관은 실명으로 전환하려는 고객들로 미어터졌고, 금융기관 영업점 출입문 앞에서는 실명전환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는 고위공직자, 정치인, 사채업자들이 머리를 싸맸다.
또한 차명계좌를 빌려줬던 명의자가 대포통장에 있던 3억 원을 모두 인출하고 해외로 도피해 피해자가 고소하는 사건 등 명의자가 돈을 가져가 버리는 사건이 몇몇 있었지만, 돈이 명의자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하여 무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빨리 수습되기 시작한다. 경제전문가들은 예상 가능한 범위이므로 정부에서 빨리 수습할 것이라는 긍정적 전망을 앞다퉈 냈으며, 앞서 각주에서 언급된 것처럼 상당수 기업들도 무반응 혹은 외견적으로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주식시장의 동요는 처음 이틀을 정점으로 해서 사그라들었고, 어느 정도는 지하자금이 양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매일경제신문이 6개월 후에 쓴 기사를 보면 확실히 안정세가 뚜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전과 달리 제도 시행 이후 정, 관계 고위급 인사들의 비리 규모가 외려 80년대, 90년대 초반보다 줄어든 모습도 나타났다. 1993년부터 시행된 금융실명제로 차명계좌 개설이 어렵게 된 덕분. 일례로 전두환이 1995년 구설수에 오른 액수가 9,000억원, 노태우가 1995년 구설수에 오른 "통치자금"(당시 기자회견 때 노태우가 쓴 표현) 액수가 4,000여억 원이었던데 반면, 김영삼의 최측근 중 1인이었던 장학로 비서관이 1997년에 문제된 액수는 37억 원, 후임인 김대중의 아들 3인이 2002년에 문제가 된 액수 총액이 37억 원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정치자금 비리 규모가 줄어든 것.
한편 금융실명제가 1997년 외환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실제로 금융실명제 시행으로 일부 부자들이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거나 기업들이 세탁한 검은 돈이 드러나면서 돈의 흐름이 끊기는 부작용도 있었다. 하지만 금융실명제가 외환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없고 오히려 금융실명제가 아니었으면 가뜩이나 나빠지고 있던 한국 경제가 더 크게 망했을 거라는 평가를 받는다. 외환 위기 자체가 한국 경제의 안 좋은 부분들이 어떤 계기로 일순간 터져나온 것이다보니 금융실명제를 범인인 양 원인으로 몰고가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5.1. 현황
그래도 아직까지 대포통장, 차명계좌가 넘쳐나긴 하는 모양이다. 절세뿐만 아니라 조세포탈의 용도로서 배우자나 가족의 명의를 이용하여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많으며, 부자일수록 재테크 기술에 밝고, 자금 여유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지나치게 널리 퍼진 절세 테크닉이라면 시간이 지나면 국세청에서 감지해서 새로운 법을 제정해 이를 막아버린다. 그럼 또 꼼수를 찾는 꼬리 물기 싸움. 그래도 친인척 계좌까지는 너무 쉽게 추적이 가능하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의 차명계좌는 범죄에 악용되기 너무 좋다. 물론 명의를 빌려준 사람들이 나중에 덤탱이 당하기 때문에, 주로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서 빚 독촉 대신에 명의를 내어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불행한 현실.
하지만 금융실명제가 없던 시절에는 허무인 명의로도 금융거래가 가능했기에 가명이나 전혀 다른 사람의 이름을 써서 비자금을 관리해도 처벌이 아예 불가능했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한 이후에나 처벌규정을 마련했다.
그러나 여전히 큰 결점이 남아 있었는데, ‘차명계좌를 만든 사람이나 명의를 빌려준 사람이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현재는 통장#s-1을 비롯한 금융거래에 필요한 카드 등을 빌려주면 처벌되도록 조항이 강화되어 빌려주기만 해도 무조건 처벌받도록 다시 바뀌었다.
금융거래 실명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제7조를 보면, '금융기관이 통장 등을 개설할 때 실명을 확인하지 않은 금융기관의 임원 또는 직원은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즉 실명을 확인하지 않은 금융기관 직원은 처벌받지만, 차명계좌를 만든 사람이나 명의를 빌려준 사람에 대한 처벌 규정은 나와있지 않다.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사회 통념적이거나 비슷한 법에 비추어 볼 때 유죄를 의심할 수 없는 사안이라도,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관련 법률이 없을 때는 처벌할 수 없다. 즉 불완전한 법 체계인 것. 물론 2016년 관련법 개정으로 차명계좌를 만든 사람과 명의를 빌려준 사람에 대해서도 처벌할 수 있게 규정이 생겼다.
청소년보호법은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와 같은 다른 방법으로 규율할 수 있지만, 차명계좌는 그것조차 한동안 불가능했다.
6. 외국
외국에서도 금융실명제하고 꼭 같진 않지만, 자금세탁 방지제도에 고객 확인 절차('''K'''now '''Y'''our '''C'''ustomer)가 포함되어 있어 금융기관의 직원이 계좌주의 신원과 거주지를 확인하는 절차가 의무화되어 있다. 이것 때문에 외국에서도 은행계좌를 열거나 일정 금액 이상을 인출할 때 등 은행 업무를 볼 때 신분증을 요구하는 일이 많고, 신분증이 없으면 아예 안 받아준다.
외국에서는 한국과 같은 강제 주민등록번호 제도가 있는 국가가 거의 없다보니 보통 거래를 시작할 때에는 신분 증명과 주소 증명을 할 만한 서류 각각 한두 개를 요구한다. 영어권이라면 ID proof나 Address proof라고 하면 대개 알아듣는다. 가령 여권이나 운전면허증 같은 것들이다. 미국은 주민등록증이 없는 대신 운전면허증이 이를 대신한다. 운전면허를 따지 못한 사람들은 임시 운전면허증{Learner's Permit}, 혹은 비운전자 신분증{Non-Driver Identification}등을 발급받는다. 외국인일 경우에는 외국인등록증도 해당된다. 한국에서는 모기업의 고객 확인 절차를 그대로 가지고 온 HSBC 국내지점에서 개인고객 한정으로 이걸 체험할 수가 있'''었'''다. HSBC는 신분증을 제시하더라도 신분증 상의 거주지와 실제 거주지가 다른 경우 공공기관에서 보낸 우편물이나 집 계약서 같은 서류를 제출해야 계좌를 열 수 있다. 인도같은 경우에는 그것도 모자란 듯이, 은행원이 고객의 집까지 직접 와서 주소를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은 애국자법(PATRIOT Act) 시행 이후 테러집단 자금으로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고 탈세행위를 막기 위해 실명 거래가 의무화되었다. 모든 금융거래는 IRS와 국토안보부가 모니터링한다.
캐나다는 '''사회보험번호'''(SIN: Social Insurance Number)가 없으면 계좌개설과 취업 등 모든 금융 보험 거래가 불가능하다. 주민등록제도는 없지만 70년대이후 사회민주주의 제도가 자리잡으면서 이러한 혜택을 받는 대상 그리고 혜택의 대가를 지불( )하는 대상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모든 거주민(시민+영주권+임시방문자)들의 세금상의 주민등록번호를 가지고있는 셈이다.
홍콩과 영국에서는 부동산 입주계약서와 신분증은 기본에 정부에서 발행하는 '''거주 확인서'''까지 있어야 계좌를 열 수 있다. 그리고 로컬 은행들 중에서 몇몇은 외국인을 아예 안 받는다. 혹여라도 홍콩/영국/호주 등에서 은행 업무를 볼 때 신분을 증명할 만한 서류가 없거나 서류상의 정보와 실제 정보가 다를 경우에는 정말로 골때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재수 없으면 진짜 경찰이나 염정공서에 끌려가는 수가 있다. 거기다 신분 증명할 때 받아주는 서류도 은행마다 제각각이다. 기껏 서류 준비했더니 이 서류는 안 받아준다고 한다면..,. 이 서류면 되겠지 하고 지레짐작하지 말고 은행원에게 미리 물어볼 것. 홍콩 은행은 영어가 유창한 은행원이 친절히 도와준다. 좀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게 흠이지만 어쨌든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잘 도와주는 편이다. 미국이나 영국에선 그딴 친절은 바라지 말자. 미국 은행원의 거의 대부분은 싸가지 없단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밥맛이 떨어진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모든 금융 거래에 있어 성명, 생년월일, 성별, 주소, 전화번호는 기본적으로 증명해야 된다. 외국인은 최소한 재류카드는 있어야 하며, 또한 외국인은 3개월짜리 단기채제로는 절대로 계좌개설을 못한다. 다만 주민등록번호와도 같은 존재인 마이넘버는 외국환거래 혹은 외국계 은행에서만 필요로 한다.
중국에서는 2000년 4월 1일부터 예금주와 대출 차주들이 반드시 자신의 실명과 생년월일, 성별, 거주지, 거주확인이 되어야 금융거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알리페이 등 간편결제에서는 실명인증이 한동안 없었는데, 2016년 7월 1일부터 전면 간편결제에서도 가입 시 실명 인증제를 시행하고 있다. 중국 국내에 주소지가 입증되지 않으면 간편결제도 이용이 안 된다.
대만은 금융실명제가 2018년 현재까지 시행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대만은 좀 다른 방법으로 제한을 건다. 대만 금융기관에서 본인확인을 마친 계좌는 출금/송금 한도에 제한이 없는데, 그렇지 아니한 계좌는 출금/송금 한도를 한국 돈 월 50 ~ 100만원 수준으로 제한을 걸어 사실상 실명제를 유도하고 있다.
7. 관련 문서
- 고객확인제도 - 자금세탁방지제도를 구성하는 제도들 중 하나이며, '고객확인의무' 혹은 '고객주의의무' 라고 불리기도 한다. 금융실명제와 고객확인제도가 모두 금융거래의 투명성 제고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나, 제도의 목적 및 확인 정보의 범위에서 차이가 난다. 금융실명제의 목적은 금융거래 정상화를 통한 경제정의 실현이라는 포괄적인 목적인데 반해, 고객확인제도는 금융거래를 이용한 자금세탁행위 등 범죄행위 예방을 목적으로 도입한 것이 차이이다.
- 대포통장 - 차명계좌 라고도 불린다.
- 계좌개설
- 허무인
- 차떼기
- 금융 거래, 비밀의 문이 열리다 - 금융실명제 당시의 뉴스
- 금융
- 긴급명령
- 은행 관련 정보
- 금융투자 관련 정보
-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1] 정식 영문명칭은 'Presidential Financial And Economic Emergency Order On Real Name Financial Transactions And Guarantee Of Secrecy' 이다.[2] 전 민주당 원내대표, 현 수원시 무 국회의원인 그 김진표다.[3] 여기서 장제스가 부패한 며느리에게 자살을 강요했다는 설은 김영삼 이전부터 돌던 오래된 주장이다. 실제로 장제스의 며느리 중 하나인 스징이(石靜宜. 장웨이궈의 첫번째 아내)는 매우 사치스럽고 교만해서 장제스가 매우 싫어했는데, 1953년 의문사하자 장제스가 살해했다는 설이 크게 돌았다. 중화민국 대사를 지낸 김신은 자서전에서 이 일을 기정사실화하기도 했다. [4] 대한민국 헌법 제76조 1항: 대통령은 내우·외환·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있어서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고 '''국회의 집회를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에 한하여 최소한으로 필요한 재정·경제상의 처분을 하거나 이에 관하여 법률의 효력을 가지는 명령을 발할 수 있다.[5] 오늘날의 학생증은 대부분 은행 체크카드와 연계돼, 학생증과 연계된 계좌 정보에 따라서 실명 확인이 가능하다.[6] 유효기간이 남은 여권만 가능. 지금의 외국환거래법 이전인 외국환관리법이 존재했던 시절에는 환전, 해외로의 송금을 하기 위해서는 여권이 필수였다.[7] 여권과 마찬가지로 유효기간이 남은 운전면허증만 가능.[8] 워드프로세서, 컴퓨터활용능력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