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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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智遠
1949년 3월 17일 ~ (75세)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2. 생애


1949년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7남매 중 넷째이자, 3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강대혁(姜大爀)은 전라남도 목포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후 광양·완도·완도 등지의 군수전라남도청, 전남상공회의소 등에서 공무원으로 재직했고, 모친 이효임(李孝任)은 경성사범학교[1] 출신으로 광주 관내 초등학교 교사로 있었다. 7남매 중 강지원을 포함한 5명은 서울대에 진학했으며, 나머지 2명은 각각 이화여대숙명여대에 입학한 수재 집안이다.
경기중학교 3학년 때 한 문제 차이로 경기고등학교를 차석으로 입학했으며 1967년에 졸업했다. 재수 끝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해 1972년에 졸업하고 같은 해에 제12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재무부와 관세청에서 근무하였다.
공무원으로 재직 중 사법시험에 관심을 가졌고, 1976년 제18회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이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검사로서 1978년부터 2002년까지 서울지방검찰청 및 서울고등검찰청 등의 검사로 활동했다.
검사로 재직중이던 1989년, 서울보호관찰소장을 맡게 되며 청소년 선도운동에 참가하게 되었고 1997년 청소년보호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또한 검사로 재직중이던 때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꼭지 이경규가 간다에 출연하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2002년 검찰을 떠난 후, 변호사KBS 라디오EBS, YTN등을 통해 방송인으로 활동하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해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상임대표와 자살예방대책추진위원장, 대통령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지역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2012년 9월 4일, 한국 최초의 매니페스토[2] 후보로서 출마하겠다며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을 했다. 결과는 53,303표, 지지율 0.17%를 얻고 3위로 낙선.[3][4]
양강 구도가 극명한 한국 정치판에서 대선 3위 후보는 수권후보가 아닌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민주화 이후 6공 체제의 13대~19대 대선들을 보면 13대, 19대 대선처럼 아예 양강 구도가 아닌 1강 2중 구도로 2~3위가 큰 격차 없는 2위 그룹을 형성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양강 구도가 성립한 경우라도 14대, 15대, 17대 대선처럼 15%~20%의 득표율로 캐스팅보터+제 3지대 대표주자라는 나름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는 경우, 또는 16대 대선처럼 3%대의 득표율로 약간의 존재감이라도 확보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18대 대선에서 강지원의 득표율은 고작 0.17%로, 대표적인 개그성 거품후보로 알려진 김길수허경영의 득표율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양강 이외에는 아무도 수권 가능성은 커녕 '''최소한의 정치적 존재감''' 조차 보여주지 못하는 초 극단적인 양강 구도 선거였던 셈. 앞 문단에서는 <군소후보중 그나마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라 양강 모두 마음에 들지 않고 사표 여부에도 신경 안 쓰는 유권자들이 강지원에게 표를 던진 것이 아니겠느냐> 라고 분석하고 있지만, 사실 0.17% 5만3천여 표 정도는 정치적 존재감이나 지명도가 전혀 없고 당선 가능성도 없다고 여겨지는 초 마이너 군소후보군에서도 종종 나올 수 있는 득표율이라 '왜 이 인물에게 표가 모였는가'를 따질 의미조차 별로 없다...(정치인이라기보다는 농담거리로 소비되는 김길수의 득표가 5만 1천여표에 0.2%로 강지원과 비슷했고, 허경영은 아예 9만표 이상으로 강지원을 훨씬 뛰어넘는 득표를 보여준 바 있다.) 말하자면 통상적인 대선에서는 그 결과가 <주요/수권후보군>, <정치적 존재감은 있는 군소후보군>, <그 외로 치는 초 마이너 거품후보군> 정도로 나뉘고, 3위(더 나아가 3~5위 정도)는 <정치적 존재감은 있는 군소후보군>이 차지하던 자리인데, 19대 대선에서는 강지원이 <정치적 존재감은 있는 군소후보군> 으로 뛰어오른 것이라기보다는 정작 그 후보군은 전멸해버리고 거의 모든 유의미한 표가 양강으로 집중되어 <정치적 존재감이 없는 그 외 후보군> 중 하나였던 강지원이 어쩌다 3위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에 가깝다. 그리고 이 부분은 18대 대선 당시의 후보군도 감안해야 한다. 양강 후보 외에 그나마 원내정당(통합진보당) 소속으로 3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이정희가 중도에 사퇴함으로써 제도권 정치 내에 기반을 가지고 있는 정치세력의 지원을 받는 후보가 양강 후보 외에는 아무도 남지 않은 것. 어지간한 대선이면 주요 수권후보군에는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나름 정치적 지명도와 경력이 있거나 어느 정도 조직적인 세력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최소한 한두명쯤은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19대 대선에서는 <기존에 이미 존재감을 확보한 군소후보> 자체가 말 그대로 전혀 없었다. 그나마 강지원보다 적게 득표한 세 후보중에서 약간이나마 조직적 기반을 갖추고 나온 후보가 민주당으로의 수렴을 끝까지 거부하고 독자출마한 선명 좌파계열의 김순자 김소연인데... 이 둘의 경우 선거 준비 단계에서 단일화론이 꽤 진지하게 제기된 바 있다. 그리고 만약 단일화되었다면 단순 계산으로는 6만표 이상으로 강지원의 3위를 심각하게 위협하게 된다. 즉, 좌파 진영에서 그나마 규모있는 정치세력이던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 계열(진보정의당)이 다 빠져나가고 남은 사회당+진보신당 잔류파+기타 당도 못 만드는 군소정파 계열들의 지지만 가지고서도 '표가 나뉘지 않았다면' 강지원을 이길 가능성이 상당했다는 것. 결국 강지원의 대선 3위라는 성적은 정치적 성과라기보다는 정치 구도에 의한 줍줍 성공사례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민주화 이후 대선에서 18대 대선을 제외한 나머지 대선 중 3위 후보자의 최저득표는 16대 대선 당시 권영길의 957148표/3.93%로 18대 대선에서 강지원 득표와 비교하면 득표수 기준 약 18배, 득표율 기준 약 23배에 달한다는 점에서 같은 '3위 후보'로 보기 민망한 점이 있다.
부인은 대한민국의 최초 여성 대법관이었던 김영란 전 대법관이다. 이른바 '김영란법'이라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제안한 그 사람 맞다. 딸 2명을 두고 있으며 두 딸 모두 대안학교에 보낸 것으로 화제를 모았다.
한편, 최진실의 前 남편인 조성민과의 이혼 및 가정폭력 소송에서 여성운동계와 함께 연대하며 최진실을 변호하기도 했다. 최진실-조성민의 송사 이후 친족법이 개정되는 데에 적지않은 일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MBC 이브닝뉴스 앵커로 활동하기도 했다. 뉴스쇼로 개편되면서 합류하였는데 개편을 거치며 2013년 연말에 하차했다.
2016년부터 KBS2 <제보자들>에 스토리 헌터로 출연중이고, 2017년 9월 12일,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노력과 맞물려 같은 날 출범한 국방부 적폐청산특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53,303 (0.17%)
낙선 (3위)


[1] 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2] 정책중심선거[3] 사실 이 선거는 역대 대통령 선거 중 가장 극단적인 양강 구도로의 쏠림현상이 나타났던 선거다.[4] 군소후보 중 인지도가 제일 높은 인물이기도 한데다 박근혜, 문재인 두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고 사표 여부에도 신경 안 쓰는 일부 유권자들이 이 사람에게 투표해서 그렇게 나온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