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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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을 대표했던 국민 배우이자 만인의 연인.''' 1988년 광고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한 이래 20년 동안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1990년대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시대의 아이콘이자 국민 스타이다.
타켓층이 특정 연령대가 아닌 유치원생부터 60대 이상 노년층까지 남녀노소 전 연령대 층을 아우르는 인지도, 대중성, 호감도, 스타성, 파급력 등을 지님과 동시에 옆집 딸, 친구, 누나, 언니, 동생 같은 친근한 슈퍼스타 이미지의 배우였다.
2. 생애
최진실은 1968년 12월 24일에 태어났다. 고등학생 2학년때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최국현이 가출한 후 어머니 정옥숙, 남동생 최진영과 함께 살았다.[4] 정옥숙은 화장품 외판원 혹은 포장마차 운영을, 최진실은 아르바이트로 햄버거 가게 점원을, 최진영은 아르바이트로 광고 모델을 했다. 그러다가 최진실도 연예계에 발을 디디게 되고 최진영도 본격적으로 연예인의 길을 걷게 되는데, 통상 최진실은 1988년, 최진영은 1990년을 공식 연예계 입문 연도로 본다. 정옥숙은 최국현과 1985년부터 13년간 별거하다가 1998년 이혼한다. 그 13년 동안 정옥숙은 육아를 전담하고 딸의 사회적 부상과 함께 촬영장 동행 등 최진실 매니저 역할에 매진한다. 그러다가 박진희가 최진실을 따라다니며 정옥숙의 역할을 맡는다.# 박진희의 딸 이은정과는 의자매가 된다. 최진실은 내성적인 정옥숙보다 외향적인 박진희를 일적으로 더 맞아한다. 최진실은 2000년 야구선수 조성민과 결혼해 2001년 8월에는 아들 최환희를, 2003년 3월에는 딸 최준희를 낳아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지만 2004년에 이혼했다. 이후 최환희의 양육 역할은 정옥숙에게, 최준희의 양육은 박진희에게 맡긴다.
정옥숙은 그림과 시에 소질이 있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소설광이었으며 신광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에는 미용사로 일했는데 이후에도 그런 재능을 살려 어린 최진실에게 직접 근사한 옷을 만들어 입히기도 하고 멋진 시를 써서 보여주기도 하며 최진실의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정옥숙의 자매 중에 소설가가 된 막내 여동생 정현숙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최진실은 자신보다 다섯 살 연상인 정현숙을 이모들 중 가장 좋아했다. 정현숙은 1991년 MBC 다큐멘터리 <인간시대> '최진실의 진실' 편에도 최진실, 정옥숙과 같이 출연하여 최진실의 친구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학생운동 경험이 있던 정현숙은 '숲속의 방' 캐릭터 연구에도 도움을 준다. 정옥숙보다 아홉 살 연상인 최국현은 경복고등학교 시절 연극을 하고 KBS 탤런트 공채 1기였다고 하나 부친의 극심한 반대로 운수업에 종사하게 된다. 배우 최재성은 6촌 오빠였고 최재성의 아버지이자 최국현의 사촌 형 최상현은 연극배우 출신의 KBS 연출가였다.# 중학생 시절에 아역 배우로 유명했던 2살 연상 배우 강수연이 같은 재단 고등학교를 다녔고 최진실은 강수연을 우상으로 삼는다.
최진실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고 연기에도 재능을 보이는 등 예체능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초등학생 시절에 친구들한테 만화를 그려주고 용돈을 벌기도 하고 드라마를 보고나면 그걸 따라하는 게 일이었다. '연기 놀이'에 얼마나 심취했는지 가족들이 다 자는 밤중에 큰 거울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거울을 보며 혼자 '연기 놀이'를 하다가 그 거울이 넘어지는 바람에 자던 가족들이 크게 다칠 뻔 한 적도 있다. 중학생 시절에 미술 교사로부터 미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미술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2년때까지 미술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학창시절을 보낸다. 추리소설 매니아이기도 했다.#
성장기에 몸싸움 과정에서 두 살 연상 최진실보다 힘이 세지는 시점이 왔고 그때 여자와 남자 사이에는 완력에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체감하게 된 최진영은 남성우월의식 없이 정옥숙, 최진실, 최준희 등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길을 가게 된다. 그래서 최진실의 엄청난 성공 이후에도 남매간에 큰 불화 없이 조화롭게 지낸다. 정옥숙이 포장마차를 운영할 때 최진실은 포장마차 하는 어머니를 부끄러워해 피했지만 최진영은 포장마차를 밀어주며 어머니 일을 적극적으로 도왔었다. 최진영은 그런 최진실을 질책하고 최진실은 그런 최진영을 고마워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 말은 잘 안들어도 최진영의 조언은 늘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최진영은 최준희에 대해서도 '최준희의 수호천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최진실은 최진영과 연기합을 맞추며 연기력을 연마하다가 1986년 'KBS 탤런트 공채 시험'에 함께 합격한다. 하지만 정옥숙은 최진실의 연예계 진출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방송사 연수비도 마련하지 못해 배우 꿈은 좌절되고 미대 진학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형편 때문에 좌초되면서 고등학교 졸업 직후인 1987년 서울 시내 유명 호텔에 취직하게 된다.# 하지만 배우 꿈을 접을 수 없어 1988년 호텔을 그만두게 되고 두 달 동안의 단식투쟁에 들어간다.# 이 때 고등학교 3학년 최진영은 모델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은 셈. 최진영은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광고 모델로 활동함. 얼마 후 정옥숙은 항복하게 되고 최진영도 최진실을 돕기로 한다. 최진영은 최진실의 프로필 사진도 직접 찍어주고 그 사진들을 들고 모델 에이전시들을 직접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다가 최진영의 모델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게 되고 광고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를 하게 된다. 초기에는 최진영이 최진실을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한다. 1988년 4월에 모델 박영선이 주인공인 광고에서 뒷배경 역할을 맡게 된 최진실은 추운 날씨에 수영장에 뛰어드는 연속 촬영으로 호된 신고식을 치르게 되고 함께 동행한 최진영은 덜덜 떠는 최진실에게 수건을 덮어주며 이렇게 힘든데도 계속 할거냐고 물었다는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최진영은 급한 마음에 컨셉 가리지 않고 일을 하려는 초짜 모델 최진실에게 처음부터 길을 잘 들어야 한다고 조언하며 최진실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배우로 성장하도록 이끈다.#
이후 배우 김희애가 주인공인 화장품 광고 '센시티브'에 여러 조연 중 한 명으로 출연한다. 이게 A안이다. 근데 광고 감독 박경삼은 콘티에 변주를 줘서 김희애와 최진실 투톱인 B안을 만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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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에서 B안에 대한 선호도가 좋아 B안이 낙점되고 전파를 탄다. 신예 모델을 찾던 삼성전자 후배에게 박경삼은 지체없이 최진실을 추천하였고 최진실은 곧 삼성전자와 전속 계약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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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가을 삼성전자에 출연한 광고가 엄청나게 히트하며 '''최진실 신드롬'''을 일으킨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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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광고 모델 시절에는 성우 권희덕이 목소리를 맡았는데, 권희덕이 목소리를 담당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는 광고 대사는 널리 알려져 유행했다. 이 대사가 담긴 광고는 최진실이라는 사람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광고계에서의 활약은 계속 이어져 1995년 제1회 '한국 모델 페스티벌'에서 CF 부문 대상을 수상한다.#대중문화 연구자인 마정미에 의해 최진실 신드롬』청하, 1993)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이 책은 최진실과 에로티시즘, 최진실이 지닌 상품미학, 최진실로 상징되는 신세대론, 남편 사랑은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최진실이 출연한 광고와 자본주의의 상관성을 분석하고 있다. 마정미는 최진실이 연예인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1990년대 초반 전후의 시기를 대상으로 문화 분석을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최진실의 전체가 아닌 일부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대중스타와 관련한 전문적 책이 없던 상황에서 마정미는 대중스타 분석 이론서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현실문화 분석이 새로운 출판 경향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치솟는 인기 속에 활동 영역을 넓혀 1989년 2월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한다. 1989년 4월 MBC 베스트셀러극장 <시진읍>은 드라마 첫 주연작.
1991년 11월 MBC 다큐멘터리 <인간시대>에 연예인으로서는 국민배우 안성기에 이어 두 번째로 출연했다. 43%의 시청률이 나오면서 대박이 나고 최진실은 <인간시대> '최진실의 진실'을 통해 대중들에게 세대 불문 전국민적 호감을 얻는다.
1992년 1월 MBC 드라마 <약속>에 출연하여 최고시청률 41.5%를 이끌며 MBC를 드라마 왕국으로 만드는 서막을 올리게 되고 1992년 6월 MBC 드라마 <질투>에 출연하여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면서 배우로서 강인한 인상을 남기고 대한민국을 흔들어 버린다. <질투>의 최고시청률은 56.1%였다. 이때부터 대한민국 드라마 흐름이 바뀌어 트렌디 드라마가 대거 제작된다. 1992년 3월에는 MBC Radio <0시의 데이트> DJ가 되기도 한다. 1993년 MBC 드라마 <폭풍의 계절>에서 배우 김희애와 멋진 자매애를 펼치며 성숙한 연기력을 보여준다.
1994년에 배우 최재성과 연인 연기를 할 뻔 했으나 배우 이병헌이 상대 배우로 선택되며 SBS 드라마 <사랑의 향기>에 출연한다. MBC 특채 출신이라 문화방송에서만 활동하다가 거액의 계약금을 받으며 SBS로 옮겼으나 최진실을 놓칠 수 없었던 MBC는 SBS와 협의 끝에 최진실을 전속 배우로 다시 데려오게 된다. 1995년 후반기에는 중앙대학교 예술전문대학원 공연예술학부 영화학과 지도자 코스에 진학한다.
1996년 SBS <째즈>(1995년), <아스팔트 사나이>(1995년)가 동남아시아에서 방영되고 좋은 반응이 나온다. <아스팔트 사나이>는 미국 로케이션 작품. 1998년 10월 일본 대중 문화 개방이 이루어지고 최진실도 일본어 공부에 박차를 가하고 일본 진출을 준비한다. 대외적 활약이 이어진 결과 2010년 8월 중국 '한류 드라마 속 미녀 여자 주인공 TOP 10' 조사에서 1위에 오르는 등 아시아권에서의 파워를 보여준다.#
1997년 MBC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 <그대 그리고 나>에 출연한다. <그대 그리고 나>는 시청률 62.4%라는 기염을 토하게 되고 최진실은 연말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는다. 2005년 KBS 드라마 <장밋빛 인생>에서 적나라한 서민 연기를 실감나게 해서 대중을 감동시킨다. 그 결과 한국갤럽이 조사한 '2005년을 빛낸 탤런트'에서 1위를 하고 연말 KBS 연기대상에서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받는다. MBC 전속 배우였는데 KBS 드라마에 출연한거다. 그 해 MBC 드라마 출연 계획이 없어 경영진과의 딜 끝에 KBS에 한 해 잠깐 출연한 건데 거기서도 잘해내고야 만다. 그래서 KBS 사장 정연주도 최진실에게 고마워한다.# 다시 MBC로 돌아와 2007년 <나쁜 여자 착한 여자>에 출연하고 시청률로 MBC에 보답한다. MBC 사장 최문순도 그런 최진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2008년 MBC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 출연하여 '줌마렐라 신드롬'을 일으킨다.
이렇게 방송계도 주름잡았지만 영화계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강력한 파워를 드러낸다. 1990년 '남부군'을 시작으로 '나의 사랑 나의 신부'로 대박을 터뜨리며 영화 배우로 자리잡는다. 1990년 '꼭지딴', 1991년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1992년 '숲속의 방', 1994년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999년 '마요네즈' 등으로 캐릭터 다변화를 이룬다. '남부군'(1990년)은 금기시되었던 빨치산을 소재로 한 최초의 대한민국 영화로, 청룡영화상에서 최진실은 이 작품으로 '신인여우상'을 받는다.#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1991년)은 입양 문제를 다룬 스웨덴 로케이션 작품으로, 청룡영화상에서 최진실은 이 작품으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4년)은 한국 페미니즘 영화사에 새 장을 연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에서 최진실은 이 작품으로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를 받는다.# '마누라 죽이기'(1995년)로 대종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는다. '편지'(1997년)는 청룡영화상에서 '한국영화최다관객상'을 받는다. 전혜성 각본 '마요네즈'(1999년)는 2000년 케랄라 국제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작품이다.# 이를 통해 1990년대 한국 영화계 부흥을 견인하고 1990년대 청룡영화상 최다 '인기 스타상' 수상자로서 이름을 떨친다.
<질투>는 한국 최초의 트렌디 드라마이자 중국으로 수출된 첫 한국 드라마, <째즈>는 한국 최초의 동성애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는 최초의 한류드라마라고 할 만큼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끈 드라마다. 이렇듯 최진실은 1990년대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상징적 인물이고 한류 배우 1세대였으며 한국 영화사에서도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밝고 경쾌한 연기부터 인간의 깊은 내면을 드러내는 연기까지 모두 잘 소화해내는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였다.
나아가 코미디언 유재석을 방송 진행자로 추천하는 등 예능계에서도 타고난 감각을 드러낸다.[6] 이 때문에 예능 프로그램이 새로 편성되면 첫회에 출연하는 단골 연예인이었다. 이러한 발군의 능력과 인기로 인하여 2008년에 진행자로 나선 OBS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 출연료가 예능계 최고 주가 유재석의 출연료보다 더 높아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2.1. Right of Publicity
최진실은 계약 기간보다 5년을 더 자신의 초상을 사용한 제약업체를 대상으로 5억 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낸다. 사법부는 2000년 이 제약업체에 4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다. 최진실은 이 재판을 통해 연예인 퍼블리시티권의 초석을 다진다.
2.2. 최진실 사단
최진실은 톱스타였지만 대단히 소탈한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다양한 분야의 연예계 사람들과 친분을 나눴다. 코미디언 이영자, 모델 이소라, 모델 홍진경, 가수 겸 배우 엄정화, 코미디언 정선희, 배우 최화정, 배우 조신애, 배우 김희선, 메이크업 아티스트 조성아 등과 특별히 가깝게 지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영자와 조성아는 최진실 사후 최진실 재단을 추진한다.
2.3. 공익 활동 1
- 1991년 5월에 소년소녀가장 돕기 자선 공연 열어 공연 수익금 3천만 원을 소년소녀 가장들을 돕는 데 사용한다.
- 2002년 6월 7일 재정이 어려운 대학교들에 컴퓨터 등 IT 학습기자재를 지원한다.
- 2002년 6월 12일 한동대학교에 5천만 원을 기부하고 한동대학교에는 '최진실 장학금'이 생긴다.
- 2004년 12월에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 피해자들에게 후원금을 지급한다.
2.4. 공익 활동 2
- 1993년 금융실명제 광고에 무료로 출연한다.
- 1997년 외환 위기 시기에 도산 위기에 처한 기아자동차 광고에 무료로 출연한다.
- 2004년 10월에 노숙인들을 돌본다.
- 2004년 10월에 보육원생들을 돌본다.
- 2004년 12월에 자신의 범죄 피해 경험을 사회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을 공익에 부합되게 사용하였는데, 범죄 현장을 언론에 공개했다는 이유로 피해자인 광고 모델에게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광고주의 행동에서 사회적 모순을 목격하게 되고 사회가 가정폭력을 인권의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변호사 강지원 등 여성운동계와 연대한다.
- 2006년 4월에 굿네이버스 친선대사가 된다.
- 2007년 7월에 저소득층 아동들을 돌본다.
- 2008년 3월에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에서 동성애를 다루고 싶다고 한다.#
- 2008년 3월에 최진영에게 베트남 봉사활동을 권하고 최진실은 드라마 촬영 중이라 2009년에 갈 계획을 세운다. 최진영은 최진실 사망으로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2008년 11월에 베트남 봉사활동을 다녀온다.
- 2008년 5월 29일 미국산 소고기 수입과 관련하여 2008년 촛불집회와 뜻을 함께 한다.#
- 2008년 7월 13일 연예계 내의 승자독식구조에 대해 성찰한다.#
- 2008년 10월 1일 북측 아동들을 위한 자선사업,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한다.# 1989년 영화 '남부군'(1990년)을 찍으면서 남측 반공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한다.
- 2008년 10월 1일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한다.
3. 사망
2008년 9월 안재환의 사망과 관련된 거짓 소문을 겪었다.[8] 허위사실 유포에 심적으로 큰 고통을 토로하다가 2008년 10월 2일에 자살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최진실의 죽음은 여파가 컸던지라 그녀의 죽음을 따라해서 똑같이 자살한 베르테르 효과가 일어나기도 했다.
3.1. 건설사 신한과의 광고모델 계약 갈등
2004년 8월 1일 최진실은 자택에서 조성민에게 폭행을 당했다.# 당연히 최진실은 얼굴을 다쳤고 집안 내부도 어질러졌다. 직접 보지 않아도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고 하면 누구나 추측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피해자는 필요하면 그 모습을 공개할 수도 있다. 실제 최진실은 그렇게 했다. 이유는 조성민이 당시 폭행 사실을 아예 부인하며 언론에 뿌렸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후 소송의 주된 쟁점이 등장하는데, 단순히 법정에 피해사실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폭행당한 자신의 사진을 공개하였던 것이다. 이는 훗날 소송에서 최진실 측이 패소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폭행 장면을 언론에 뿌려서''' 채무불이행책임이 인정된 것이다.
2004년 11월에 광고주 <신한>은 광고 모델 최진실이 다친 얼굴과 범죄 현장을 언론에 공개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금을 청구했다. 정확히는 광고모델 계약을 체결하며 별도로 맺은 '''품위유지약정 위반'''을 사유로 계약을 해지하며 손해배상금을 청구한 것이다.
원심은 2005년 9월 "모델료 2억 5000만 원을 돌려주라"라는 원고(신한)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2심은 2006년 5월 "최진실이 폭행을 적극적으로 유발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최진실이 스스로 자신의 사회적·도덕적 명예를 훼손했다고 볼 수 없다. 최진실의 인터뷰는 쌍방 폭행이라는 주장을 반박·해명하려고 한 것이기 때문에, 최진실에게는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라는 원고(신한) 패소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에서는 2009년 6월 <신한>의 주장에 따라 2심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으며, 2010년 2월 서울고등법원 파기환송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는 많은 민법 개론서의 채무불이행 파트에 흔히 "최진실 판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판례이다. 즉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의의가 있는 판결이라는 이야기. 다만 주로 법리 자체가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비판하는 입장에서 소개되는 편이다. 쟁점은 아래의 세 가지이다.
- 소위 '품위유지약정'의 유효성 여부
- 최진실 측의 고의 및 과실
- 불완전이행으로서의 채무불이행
가장 큰 쟁점은 이 사건이 '''불완전이행'''으로서 채무불이행에 해당하는지 여부였다. '불완전이행'이라 함은 '채무를 이행을 하긴 하였는데, 그 이행이 불완전하다'는 것으로 거의 강학상(학문상)으로나 언급되던 개념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채무불이행은 이행지체(이행이 늦어지는 것), 이행거절(이행을 거부하는 것), 이행불능(이행이 불가능한 것)의 형태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행을 하면 하고, 안 하면 안 하는 것이지, 했는데 불완전하게 이행하였다는 것은 학자들의 논문에서나 등장하지 현실세계에서는 일어나기 어렵다. 이후로도 "최진실 판례"는 '불완전이행'에 대한 거의 유일한 판례로 남아있으며, 대법원은 이런 모호한 개념을 도입하여 기업측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신한>은 승소하였으나 기업 자체가 폭행을 당한 피해자에게 기업의 이미지 실추라는 짐을 씌워서 매우 큰 비판을 받았다. '''한편 <신한>은 계약 종료 및 폭행 사건 후에도 최진실의 사진이 박혀 있는 쇼핑백과 브로셔를 계속 사용했다.''' # 이러한 모순적인 행동을 두고 큰 비판이 뒤따랐다.
4. 사후
- 2008년 11월에 청룡영화상에서 '명예 인기 스타상'을 받게 되고 영화 '남부군'에 같이 출연한 배우 안성기가 대신 이 상을 수상했고, 2008년 12월 MBC 연기대상에서 '공로상'을 받게 되고 텔레비전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 같이 출연한 배우 정준호가 대신 이 상을 수상했다.
- 2009년 8월에 최진실의 유골함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한 남성이 최진실이 자기에게 빙의해 지금 묏자리가 답답하니 자신을 꺼내달라고 부탁해서 유골을 훔쳤다고 한다.
- 유골을 되찾은 후 유족들은 2009년 9월에 유해를 재안장하면서 묘원 내부에 최진실을 기념하는 공간을 꾸몄다. 참배객들이나 등산객들은 그 공간에서 최진실을 추억하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 2010년 3월에 남동생 최진영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최진실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 각자의 묘 위에는 각자의 얼굴이 담긴 비석이 세워져 있고 그 두 얼굴은 서로 바라보며 웃고 있다.
- 2011년 6월에 정옥숙은 생전에 거짓 소문에 시달린 딸과 아들을 위해 자전적 에세이를 출간하였다. 이 에세이에는 최진실과 최진영 남매의 어린 시절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생애가 개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제목은 '엄마가,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 2012년 9월에 아들 최환희와 딸 최준희가 KBS <남자의 자격> '패밀리 합창단'에 함께 출연했다. 최환희는 '섬집아기'를, 최준희는 '하늘나라 동화'를 불렀고, 듀엣곡으로는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을 불렀다. 이들 남매는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을 고른 연유에 대해 모친의 생일이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2013년 1월 6일 전 남편 조성민 역시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 2013년 5월에 최준희는 아프리카TV에서 개인 방송을 하였는데, 방송 채팅창에 최진실과 최준희 모녀를 모독하는 글이 도배되어, 이들 악플러들은 사회적 공분을 샀다. 이후 큰 상처를 받은 최준희는 방송을 중단했다.#
- 2013년 11월 17일 방영된 MBC <섹션TV 연예통신>에서 '연예가 5대 사건' 중 '최진실의 사망'이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최진실의 죽음은 대한민국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 2014년 6월 16일 정옥숙은 MBN <어울림>에 출연했다.
- 2014년 10월 2일, 10월 9일 최환희는 2회에 걸쳐 EBS <스페셜 프로젝트 '인생수업'>에 출연했다.
- 2015년 6월 1일 정옥숙은 MBC 휴먼다큐멘터리 '사랑'에 출연했다.#
- 2016년 1월 14일부터 최환희는 MBC 예능 <위대한 유산>에 고정 출연했다.#
- 2016년 10월 13일 정옥숙은 TV조선 <마이웨이>에 출연했다.#
4.1. 친족법 개정
최진실은 2004년 조성민과 이혼하는 과정에서 조성민이 진 빚을 탕감해준다는 조건으로 친권을 얻어 사망 전까지 두 자녀의 단독 친권자였다. 이전 법에서 이혼 등의 사유로 단독 친권을 얻은 사람이 사망할 경우 생존 부모에게 친권을 주는 것이 관행처럼 여겨젔었다. 하지만 단독 친권자가 사망하면 생존 부모의 친권이 자동으로 부활한다는 법 조항은 없었기 때문에 법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조성민이 몇 년여동안 자녀들을 크게 신경써서 관리하지 않았고[9] 과거 가정폭력 전과도 있었기 때문에 대중들은 조성민에게 친권과 재산권을 가져가는 것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조성민이 친권과 재산권을 요구한 것은 아님. 재산의 제3자 신탁을 주장) 이러한 행위를 법으로 규제하자는 여론이 일었고 2011년 친족법이 개정되어 단독 친권자 사망시 생존 부모 친권 부활과 관련하여 생존 부모에 대해 가정법원이 자격 심사를 하도록 규정하였다. 이 법의 시행은 2013년 7월부터.#
5. 사건사고
최진실/사건사고를 참조하자. 다만 최진실이 일으킨 게 아닌 누군가에 의해 최진실이 당했던 사건사고가 많이 서술되있다.
6. 이모저모
- 경상북도 상주시 출생 정옥숙의 외가는 시골에서는 부자에 속하는 집안이었다. 최진실의 외할아버지가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와중에 벌어진 이념전쟁의 희생자였던 반면에 최진실의 친할아버지는 경찰 공무원이었다.
-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배병수와 매니지먼트 구두 계약을 맺는다. 언제든 구두 파기할 수 있도록 계약서도 안쓴다.
- 영화 데뷔작이었던 남부군의 정지영 감독에 따르면 배병수의 추천으로 당시에는 완전한 신인이었던 최진실을 만났는데 인터뷰때 당당했던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또 이 영화를 찍는 도중 최진실이 출연한 CF가 대박이 나 스타가 되는 바람에 고마운 점도 있었다고. #
- 1989년 KBS 제2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서 변진섭과 처음 만난다. 변진섭은 진행자였고 최진실은 게스트. 최진실의 매니저 배병수와 변진섭의 형이자 매니저 변요섭은 친구사이였다.
- 1991년 봄 엄정화와 처음 만난다. 소년소녀가장돕기 '최진실 사랑 나누기' 자선무대에서 엄정화는 MBC 합창단원으로서 백코러스를 맡는다.
- 1991년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촬영차 스웨덴에 갔을 때 정옥숙과 동행한다. 이 때 스웨덴어에 관심을 갖는다. 정옥숙은 스웨덴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외국여행 경험이 있는 편이라 아동기에 접어든 최준희의 외국 유학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최준희는 외국 유학을 가지는 않지만 내적 번민이 많던 2017년 아이티 봉사 활동을 다녀온다.# 2003년 6월 최진실의 이탈리아 여행도 정옥숙의 권유가 있었다.
- 1992년 '저축의 날'에 대통령 표창장을 받는다. 대통령 노태우는 저축유공자 최진실을 청와대 오찬에 초대한다.
- 1992년 KBO 한국시리즈에서 시구한다. 한국시리즈 연예인 시구는 최진실이 최초.
- 김영삼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19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된다. 최진실은 금융실명제 홍보 모델로 발탁되어 투명한 금융 흐름이 가능해졌음을 전 국민에게 알린다. 금융실명제 정착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1994년 김영삼은 최진실을 청와대 오찬에 초대한다.
- 1995년 영화 배우로만 활동하던 정선경을 방송계로 이끈다.
- 인기 스펙트럼이 넓어 거의 모든 연령대의 유권자들한테 호감형이었다. 서민 이미지가 아쉬웠던 신한국당에서 1996년 최진실을 자당 모델로 발탁한다. 최초의 연예인 정당 모델이 된 거다. 이로써 정치가 최진실을 타고 일상으로 침투하는 생활 정치가 도래하게 된다.
- 1997년 MBC <별은 내 가슴에>에 안재욱을 직접 캐스팅했다.
- 1998년 7월 자전에세이 '그래, 오늘 하루도 진실하게 살자'가 발간된다. 이 책에는 최진실의 예술철학이 잘 드러나 있다. 또 고소영, 이승연, 옥소리 등과 친해진 계기도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다. 이 책은 최진실 사망 직후에 재출간되었으나 최진영이 출판사에 항의해서 모두 회수되었다.
- '미스터 맘마'(1992년), '마누라 죽이기'(1994년),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1995년), '홀리데이 인 서울'(1997년) 등 여러 영화를 함께 하면서 강우석과 의남매가 된다.
- 2004년 12월 인권변호사 강지원[10] 을 찾아간다. 김재우와 같이 움직인다. 범죄 피해자한테 감히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기업의 행태가 우리 사회의 잘못된 사회통념 때문이라는 걸 간파하고 사회적 연대를 모색한 것. 강지원을 통해 대표적인 여성학자 오한숙희와도 네트워킹을 이룬다. 유감스럽게도 의뢰인 최진실 면전에다가 여론조작범들이나 떠들 이야기를 한 강지원을 최진실이 끝까지 안고 간 건 이런 사회적 의미가 더 중요했기 때문일테고.#
- 2007년 SBS <좋은 아침>에 배우 신애 등과 출연해 자신이 즐겨 만들어 먹는 '참치고추장수제비'를 소개했다. 최진실이 사망하자 신애는 최진실이 해주던 김치찌개와 수제비를 못 먹게 됐다고 하며 최진실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11][12]
- 2008년 1월에 개정된 친권법이 시행되자 자녀들이 자신의 성인 '최'를 따르도록 한다. 이를 지상파 메인 뉴스에서도 관심있게 다루면서 자녀가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다는 사실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다.# 이로써 대한민국 친족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자리매김 한다. 자녀들의 성을 변경할 때 딸의 이름을 '준희'로 바꾼다. 애당초 최진실은 아들 '환희'와 운을 맞추어 딸의 이름도 '신희'로 지으려고 했으나 조성민의 의견을 받아들여 '수민'으로 정했었다.
- 2008년 MBC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 정준호를 직접 캐스팅했다.
- 악플을 당한 역사가 의외로 길다. 인터넷 활성화 이전 PC 통신 시절부터 악플러들의 공격 대상이었는데 "어떻게 그 정도 뒷담화 가지고 거물급 연예인이 일반인인 날 고소해서 경찰서로 오라가라 하냐"며 징징대는 한심한 글을 꽤 자주 볼 수 있었다. 물론 자기가 뭘 했는지는 쏙 빼놓고 작성한 글[13] 인데 온라인상에서의 모욕과 명예훼손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시절이라 최진실씩이나 되는 연예인이 뭐 그런 걸로 일반인을 경찰서로 부르냐며 악플러 편을 드는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 데뷔때부터 황색언론의 밥이었다. 최진실의 사망 후 그 여파로 뒤를 따라간 사망자들이 많았던 게 언론의 책임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옐로 저널리즘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물리치듯 언론의 역할을 조명하는 데 일조했다.
- 드라마 집필을 꾀하고 드라마 가제 <사노라면>을 기획했다. 이 드라마에 배우 천정명 등을 캐스팅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드라마 작가로 입봉도 못한 채 사망하면서 드라마 시놉시스만 남기고 이 시도는 미완인 채로 남았다.
- 1990년대 시절에 연속극에서는 최진실, 김희애, 채시라를 두고 2000년대 이후 언론에서는 '트로이카'라고 명명했고, 영화계에서는 강수연, 심혜진과 함께 영화계에서 트로이카라 불렸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최진실의 인기에 비빌 여배우는 단 한사람도 없었고, 최진실의 인기를 계승한 여배우는 트로이카라고 전혀 불리지 않았던 김희선이었다. 최진실, 김희선을 끝으로 1950년대 최은희를 시작으로 1970년대 정윤희를 거쳐 형성된 슈퍼 스타 여배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 MC몽 정규 5집 〈Humanimal〉의 수록곡 '진실은 천국에서라도'라는 곡은 최진실을 추모하는 곡이다.
- 최진실의 5촌 당숙 최상현은 박경삼과 동양방송 시절부터 친구였다.
- 사망 전에는 인터넷에서 "사실이냐?"는 뜻으로 "최진실?" 혹은 "최트루?"라는 식의 문장이 유행하며 널리 쓰였었다. 하지만 사망 이후[14] '허참', '트루' 등으로 대체되어 쓰이다가 '레알'이라는 단어로 완전히 대체된 상태이다.
- MBC 공무원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유독 MBC에서 많은 작품을 찍었다.[15]
- 데뷔 초기 광고에서 성우 권희덕이 최진실의 목소리를 담당한다.
- 2008년 10월 4일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 예배한다.
- 자신의 사후 여론조작에 대비해 김재우에게 비망록을 남긴다. 2003년부터 최진실과 김재우는 의남매가 되어 서로의 직업에 대해 응원해주며 우애를 나눈다.
- 연기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배우라 지금까지 생존해 있었다면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남겨 위대한 대배우로 대성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 예능계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는데 진행을 한적도 있었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김구라와 함께 진행했던 최진실의 진실과 구라[16] ... 티저 이미지로 제작한 사진부터가 대중들의 폭소를 자아내며 비공중파 예능임에도 큰 인기를 누려 시즌2까지 기획될뻔했던 전설적인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함께 진행을 하던 김구라는 최진실의 기분이 다운되어있거나 다소 우울해보일때 자신의 별명인 정자왕 드립을 치면서(...) 누님에게 애교부리듯 최진실의 기분을 달래주었다고[17] 그래서인지 당시 녹화할때의 영상이나 기사로 나오는 사진들을 보면 최진실의 표정이 상당히 편안해 보인다
- 아들 최환희가 자작곡 "디자이너"를 가지고 2020년 11월 Z.flat(지플랫)이라는 예명으로 가수로 데뷔하였다.
7. 출연 작품
7.1. 드라마
7.2. 영화
7.3. 광고
- 삼성전자
- 일동제약 아로나민 씨플러스, 메디폼
- 캐리어에어컨
- 이롬 황성주생식
- 한화L&C
- 현대해상 하이카
- 대상 감칠맛 나는 미원
- 롯데칠성음료 2% 부족할때
- 미래에셋생명
- KT
- 롯데백화점
- 옥시
- GS칼텍스 시그마6
- 한라건설 한라비발디II
- 나드리화장품
- 진미식품 참그루
- 하나금융투자
- 샤몽화장품
- 네슈라화장품
- 쥬리아화장품
- 삼성시계
- 신원
- 한일약품
- 한미약품
- 롯데제과
- 보루네오가구
- 기아 타우너
8. 수상
[1] 프로필상 키는 164cm였다. 당시 최진실 나이대는 물론 지금 기준으로도 한국 여성 평균보다 큰 키다. 최진실의 귀여운 이미지 때문에 작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압도적이지는 않아도 어디가서 피지컬로 밀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2] 2020년 11월 20일 가수로 데뷔했다. # [3] 사망할 당시 온 가족이 강남중앙침례교회에 출석하였다.[4] 여담이지만 정옥숙은 최국현에게 아들 두 명이 있다는 사실을 결혼 후에 알았다. 이 결혼이 최국현의 재혼인지는 드러나지 않았다.[5] 인물 이름을 딴 ‘○○○ 신드롬’의 시초이다.[6] 당시 무명 개그맨에 지나지 않았던 유재석을 최진실은 평소 자신과 친분이있던 PD에게 MC로 적극 추천하였는데, 그 프로그램이 바로 목표 달성 토요일의 <동고동락>이다. 따라서 최진실은 유재석에게 있어서 정말 은인과도 같은 존재다. 훗날 유재석은 <해피투게더 시즌 3>를 통해 최진실에게 고마움을 전했고, 또한 최진실의 장례식에도 참석한다. 사실 무명이라고 쓰여있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무명은 아니었다. 서세원쇼에서 발군의 토크능력으로 나름 인지도를 쌓았다.[7] 이런 실정이라 10년 후인 2018년에야 이영자가 <2018 MBC 방송연예대상>, <2018 KBS 연예대상>에서 모두 '대상' 수상하면서 여성 최초 '대상' 2관왕이 됨. 남성 2관왕은 이미 세 번 나온 시점. 그 와중에 그 세 번 중 두 번은 한 인물. 누구냐? 최진실이 추천했던 유재석. 이영자는 최진실의 친구였고.[8] 최진실이 수십 억 원을 안재환에게 빌려주었고 그 돈을 갚으라고 압박을 가하자 안재환이 자살했다는 쪽지가 유포된다. 심지어는 다음 아고라를 중심으로 최진실의 자금은 한나라당에서 나온 것이며, 최진실이 친일수구세력의 연예계 통제의 첨병으로 활약하고 있었다는 헛소문까지 퍼졌다.[9] 본격적으로 신경을 쓰기 시작한 건 최진실 사망 2주기였던 2010년 경 부터였다. 이전까지는 아이들을 단 한 차례도 만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0]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기호 6번으로 출마했다. 하지만 당시 박근혜와 문재인의 양강구도에만 세간의 초점이 맞춰져 별로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0.17%를 득표하여 3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해당 선거에서 양강구도가 극심했음을 방증한다. 부인은 김영란 전 대법관인데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소위 김영란법)'을 입안한 그 분 맞다.[11]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해서 수제비를 먹는 건 질색이라고 한 적이 있다고 하고, 1991년 MBC 어느 방송에 나와 "아직도 수제비를 먹는 사람도 있어요?"라고 말했다고 하고, 이에 대해 언론은 수제비 좋아하는 이들이나 식당들이 분노했다고 기사를 썼다고 하고 어느 기자는 가난한 시절을 잊는 것을 넘어 남까지 비웃는다며 칼럼으로 최진실을 비난했다고 하고, 이에 대해 최진실은 자신이 워낙 수제비를 질리게 먹어서 그랬다고 해명하기도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떠돌았는 모양이나 실상은 1991년 MBC 다큐멘터리 <인간시대> '최진실의 진실' 편에서 가난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음식이라서 싫어하기는커녕 여전히 수제비를 좋아하고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수제비를 끓여주고 함께 맛있게 먹는 장면까지 나옴.[12] 최진실의 유년 시절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에서 구호 물자로 들여온 밀가루를 이용해서 만든 혼분식을 장려하였고, 딱히 특별한 재료를 사용하지 않은 평범한 수제비나 칼국수는 가난한 사람의 음식으로 치부되었다. 지금이야 별미로 여겨지지만.[13] 진짜 거두절미하고 자기가 경찰서로 불려간 상황부터 쓴다. 무슨 뒷담화를 했냐고 질문하는 글에는 결코 대답이 없다.[14] 사망 초기에도 그대로 사용하다가 고인드립 취급받기도...[15] 텔레비전 드라마 데뷔작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1988년), 출세작 <질투>(1992년), 연기 대상작 <그대 그리고 나>(1997년), 마지막 작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2008년) 등 작품 대부분이 그러하다. 1990년대에 MBC와 전속 계약을 맺는다. 배우가 매니지먼트사가 아니라 방송사와 전속 계약을 맺은 거다. MBC를 드라마 왕국으로 이끈 주역이다. 애초에 MBC 특채 출신이다.[16] 진실과 구라로 알려졌지만 정식 명칭은 앞에 '최진실의'가 붙는다 보다시피 메인은 최진실이었고 김구라는 주로 드립과 진행에 집중했는데 이들의 호흡이 예상외로 곧잘 맞아 흥행에 성공했다[17] 라디오스타에서 최진실의 동생인 최진영이 전화연결을 했을때 밝힌 바 있다.[18] 사도세자가 평양에 갔을 때 만나 궁으로 데려온 기생으로 의대증에 걸린 사도세자에게 옷을 입히려다 죽임을 당한다. 최진실이 맡은 배역으로 알려진 빙애(경빈 박씨)는 다른 배우가 연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