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이정희의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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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이정희
李正姬 | Lee Jung Hee
'''
<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출생'''
1969년 12월 22일 (54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봉천동[1]
'''학력'''
서문여자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공법학 / 학사)
'''현직'''
국민입법센터 대표
'''링크'''
,
'''종교'''
무종교
'''가족'''
남편 심재환, 슬하 2남
'''정당'''

'''경력'''
제38회 사법시험 합격[2]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공동대표
민변 사무차장
제18대 국회의원
민주노동당 대표
통합진보당 제18대 대통령선거 후보
통합진보당 대표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8'''
1. 개요
2. 생애
3. 논란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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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박근혜 후보 떨어뜨리기 위한 겁니다. 저는 박근혜 후보를 반드시 떨어뜨릴겁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토론회에서 '''박근혜 당시 대통령 후보에게 직접 한 말'''[3]

대한민국변호사이자 前 정치인. 위헌정당으로 해산된 통합진보당 출신이다. '''진보의 붉은 장미'''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1990년대부터 인권변호사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주로 주한미군 관련 범죄, 노동 관련 사건 피해자들의 변호를 맡으며 유명해졌다.
2007년 변호사 사무실을 접고 정계 진출을 선언하였으며,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뒤 권영길 후보를 지원하며 정계 활동을 시작했다. 그 다음 해인 2008년 4월 제18대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민주노동당 대표를 역임하다가 2011년 12월 국민참여당의 유시민, 진보신당 탈당파인 심상정, 노회찬, 조준호와 합세하여 통합진보정당인 통합진보당을 창당하고 4월 총선에서 13석을 얻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건이 터지며 위기를 맞았고, 공동대표였던 유시민과 심상정이 10월 노회찬, 조준호와 함께 진보정의당을 창당해 나가면서 단독 대표직에 오르게 된다. 이 후 해산 직전까지 통합진보당을 대표를 역임했으며 2012년 18대 대선에 통합진보당 대선 후보로 출마했으나 박근혜에 대한 지나친 네거티브 전략과 낮은 인지도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대선 3일 전 후보직을 사퇴하고 문재인 지지를 선언하였다.
대선 이후에는 당 대표직 활동에만 전념하다 2013년 8월 이석기 의원에 대한 내란음모 혐의 등으로 당 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았고, 2013년 12월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의 주재로 해산심판 청구가 시작되자 1년여간 헌법재판소에 출석하며 변호를 했다.
그러나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을 위헌 정당으로 판결해 해산시키며 소송에서 졌고, 이후에는 계속 야인 생활을 해오고 있다. 정계로는 더이상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 듯하다.# 민중연합당을 한때 지원했으나 민중당을 합당한 이후에는 별 다른 소식이 없다.
민중당이 제21대 총선에서 도움을 요청했다. 본인도 고민 중이라고. 종로 출마도 권유받았으나 고사했다.# 그리고 21대 총선에서 민중당을 지지선언했다.

2. 생애


서문여자중학교서문여자고등학교를 거쳐 1987년대학입학 학력고사에서 '''인문계 여자 전국 수석'''을 차지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4] 신입생 시절 겪은 6월 항쟁1992년 발생한 주한미군 윤금이씨 살해사건을 접한 후 인권변호사와 사회운동가로 활동할 결심을 한다. 또한 여성운동 분야에서도 활동하였다.
1996년 사법시험에 합격, 사법연수원 28기를 수료한 후 법무법인 덕수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변호사가 된 이후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 등을 지냈다.
이후 2007년 3월 2일, 민주노동당에 입당,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이듬해인 2008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3번으로 제1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식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그리고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과 원내부대표 등을 지내며 경력을 쌓았다. 2010년 민주노동당의 마지막 대표를 거쳐 2011년 유시민통합진보당의 창당에 힘을 실어 공동대표가 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 민주당 김희철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발생한 모바일 투표 부정으로 인해 출마하지 않고 이상규[5]에게 양보하였다. 또한 이후 이어진 비례대표 경선 부정사건에 대한 당 대표로서의 대처가 적절치 못했다는 논란에 휘말리며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았다.
2012년 9월 25일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을 하고 대선 행보를 이어갔으나, 12월 16일 3차 TV토론을 수시간 앞둔 시점에 후보에서 사퇴했다. 여담으로, 저러다가 대선 후보 야당 통합을 해서 당시 야당 대선 후보 문재인을 밀어 줄 거란 걸 대부분 알고 있었다. 대선 후보 후보 토론회 당시 박근혜 후보는 대선 지원금 27억 관련 공격을 하였고, 선관위에선 이미 후보자 준비를 하여 투표용지와 홍보 책자까지 배포하여 이만저만 국민혈세 낭비라며 여론이 안 좋았다.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 위헌정당해산 사건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면서 본업인 변호사로 돌아갔으며, 세월호 관련 집회에서 인양 촉구 등을 주장했다. 트위터를 보면 2015년 이후의 발언이 없다. 하지만 2016년 2월경 국회의원으로써 입법을 소망하던 정책을 담은 저서 「진보를 복기하다」 를 펴내어 근황을 근소하게나마 알리고 있다. 2016년 9월 25일, 백남기 농민의 빈소에 등장하면서 다시 한번 근황을 알렸다.
2017년 촛불집회 이후「이정희, 다시 시작하는 대화」를 출간했고 개인 페이스북에 노동 현안이나 사회 문제에 대한 글을 가끔씩 작성하고 있다. 또한 통진당 해산의 부당성을 호소하고자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였다. 당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실체와 탄핵문제가 워낙에 큰 이슈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돋보이긴 힘들었다.
2018년 노회찬 의원의 사망 당시 빈소에 찾아 눈물을 보였다.
2020년 4.15 총선에서 민중당 지지를 호소하였다.

3. 논란


이정희/논란 문서로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2007 - 2011
입당
정계 입문

2011 - 2014
합당[6]

2014 -
통합진보당 해산 후 정계은퇴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973,445 (5.68%)'''
'''당선 (3번)'''
'''초선'''
2012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 사퇴

6. 기타


2009년 말싸움에서 나온 말이 합필갤에서 필수요소로 쓰였다. 자세한 전문은 어딜 만져 참고.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특검에 특별검사로 추대해야 한다는 여론이 아주 잠시나마 있었다. 이와 동시에 대선 토론 당시의 발언이 재조명되는 중. 그러나 특검 후보 자격 중에 '''법조계 경력 15년 이상'''이라는 조건과 '''정당에 당적을 가지고 있거나 가졌던 자는 임명할 수 없다'''라는 조건이 있는데, 이정희는 1996년 사법시험을 패스한 후 2008~2012년 동안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을 비롯한 여러 당적을 가졌기 때문에 특검 후보로 오를 수 없다. 그나마 저 특검 여론도 진지한 여론이 아닌 우스갯소리다.
2012년 토론에서의 직설적인 발언들은 현재 다양한 여론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정희의 말을 믿었어야 한다!"라는 쪽과 "아무리 그래도 이정희는 아니다!"라는 양측으로 갈린 편이다. 홍준표유승민에게 "이정희 역할하는 것 아니냐?"라고 언급하며 싸우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우스갯소리로 "그때 이정희 말을 들었어야 된다."라는 말도 돌고 있다.
통합진보당 해산과 관련해서도 이정희에 대해 여러 말들이 나오는데, 사실만 확인하자면, 첫째, 통합진보당의 내란 음모죄는 1심에서는 유죄, 항소와 상고심에서는 무죄를 받았다.#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인용은 2심의 무죄판결이 있고나서 결정이 났다. 게다가 헌재의 인용이 있고 나서도, 대법원에서 내란음모죄만큼은 무죄를 선고하였다. 사법기관 둘의 결정이 상충하는 것은 사실이다. 둘째, '''내란 선동으로 유죄를 받은 사람은 통합진보당에 소속되었던 이석기이지, 정당인 통합진보당 자체나 이정희가 유죄를 받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정희가 당대표로서의 책임은 있을 수 있으나, 이정희를 두고 "법원에서 선고받은 '종북인사'다. (혹은) '빨갱이'다."라는 표현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이정희는 음모라거나, 이석기 의원의 농담이었다 식으로 적극 변호에 나선것 때문에 도매금으로 까였으나, 실제로는 경기동부연합 문서등에서 볼 수 있듯이, 실질적으로 통합진보당을 꼭두각시 정당으로 만들어 부리던 일명 당권파의 얼굴마담 역할로 이용당한 것이고 직접적인 접점은 없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위와 같은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통합진보당은 헌법재판소의 적법한 절차에 의하여 해산이 인용된 것이므로, 재심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단순 박근혜 대통령의 실각만으로 잘못된 판결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
민변 시절의 이정희는 딱히 NLPDR 성향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다만 2007년 민주노동당에 가입한 이후 NLPDR 세력의 후원을 받고 정치인으로서 성장을 하긴 했다.
만약 그가 NL이 아니라 PD계열이나 민주당 계열의 후원으로 그쪽으로 갔다면 여성정치인의 한 획을 그었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NL의 기수가 되어 종북 이미지가 각인되고 NL계열을 제외한 진보, 중도, 보수층 모두에게 여전히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점이 여러모로 안타까운 점이다. 특히 현재 민주당+정의당 여성의원들 다 합쳐도 이정희만큼 확실하게 각인된 인물이 심상정, 추미애 정도를 제외하면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과거까지 본다해도, 한명숙정도가 그나마 여성정치인으로서 각인됐었다.
서울대 법대를 나오고 민변에서 좌파 정당의 여성 정치인이 된 점이 묘하게 핀란드타르야 할로넨과 닮았다. 할로넨도 헬싱키대 법학과를 나오고 민변에서 사회민주당 정치인이 된 케이스인데 이정희가 대통령만 된다면 거의 평행이론 수준.

의외로 피아노 연주 실력과 노래 실력이 뛰어나다.[7] 단순하게 흥겹게 부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홍준표와는 달리 발성이나 성량이 상당히 안정적이다.
강의석 감독의 영화인 '애국청년 변희재'의 예고편에서 변희재가 이 노래를 1천 번 넘게 들었다는 얘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중당 지지를 호소하였는데, 정치권에서의 모습과는 다르게 전투적인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자아성찰과 더불어 코로나 시기에 노동자들의 어려움에 공감하며 다독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인데, 기존의 밋밋한 블랙 커트가 아닌 일명 더듬이 블리치(bleach) 헤어스타일을 연출한 모습이다.

[1]관악구[2] 사법연수원 29기[3] 그러나 이러한 토론 태도는 보수층의 결집으로 이어져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 일조하였다. http://www.realmeter.net/보수결집-원인-이정희-tv토론-31-0 [4] 나이를 생각하면 대학을 진학한 해는 1988년이 되어야 하나, 어렸을 때 학교를 일찍 보낸 모양이다. 시골 같은 경우에는 1990년대 후반에 진짜 7살이 초등학교 입학하는 경우도 많았다. 학생 수가 적어 정원을 채우기 위해 그랬다. 그 외 의견으로 60년대 시절엔 유아 사망률이 높아 출생신고를 1-2년 늦게 하던 게 보통이라 이정희도 알려진 생년월일이 주민등록상일 수 있고 실제는 68년생 그 이상일 수 있다는 말도 있다.[5] 본래 지역구가 은평구 을이었으나, 당내 경선에서 천호선에게 패배한 상태였다. 또한 이상규는 당내에서 이정희 직속 라인으로 분류되는 인사였는데, 직권으로 이상규에게 후보직을 양도한 것에 대해 절차상의 문제가 크다는 비판 역시 많이 있었다.[6]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와 신설 합당[7] 피아노는 학창시절 때 잠깐 배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