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증권 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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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즌이었던 1997-98 슈퍼리그 때의 사진. 고려증권 멤버 중에서 가운데가 이성희, 왼쪽은 문병택, 스파이크를 때리고 있는 선수는 손재홍이다. 상대 팀은 한양대학교로 왼쪽부터 석진욱, 이경수, 손석범.
1. 소개
1983년 3월에 창단하여 1998년 2월까지 존속했던 배구팀으로, 모체는 IMF로 부도가 난 고려증권(고려통상[1] 계열)이었다. 마스코트는 여왕벌이었다.[2] 배구해설가로 이름을 날린 오관영이 고려증권의 모기업인 고려통상 상무로 있으면서 배구단 창단에 깊이 관여했다.
1983년에 창단하며 신생팀에 대한 배려로 장윤창, 이경석, 정의탁, 류중탁 등 당시 국가 대표 엘리트들을 비교적 적은 돈으로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 중 장윤창은 당시에는 강만수의 후계자로 꼽힐 정도로 강력한 스파이크를 보여주었고 나중에는 경험치까지 쌓여서 배구판에서 꽤 오래까지 경기력을 유지했다. 국내 최초로 스파이크 서브도 보여주던 최고의 라이트 공격수로서 제1 공격수 역할을 90년대 초반까지 담당했다. 거기다 정의탁과 류중탁[3] 이 책임지던 센터진은 고려증권 최고의 속공을 보여주면서 그야말로 고려증권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러나 스타 플레이어들이 노쇠화 되기 시작할 때 현대자동차서비스의 강력한 현질 스카우트가 개시되었고, 그렇게 힘이 빠져가나 할 때 진준택 감독의 부임과 더불어 박삼용-이성희 콤비를 중심으로 문병택-이수동-박선출 등의 선수들로 압도적인 스타는 없었지만 그만큼 끈끈하고 유기적으로 돌아가던 시스템을 구축하여 1988~1989시즌 제6회 대통령배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그 이후에도 스타 플레이어들을 중심으로 화려하고 선 굵은 배구를 선보이던 현대자동차서비스와 팽팽한 라이벌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로 모기업인 고려증권이 부도가 나면서 팀운영이 어려움에 빠졌고, 숙식도 여관방에서 해결해야 했다. 당시 배구협회가 출전비를 지원해서 간신히 1997~1998시즌에는 출전했지만, 결국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아 해체되었다.
1996 슈퍼리그 결승 제4차전 현대자동차서비스 vs 고려증권의 명승부 게임. 고려증권의 신들린 듯한 수비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이 당시는 서브권이 있을 때만 점수가 올라가던(5세트 제외) 시절로, 현행 랠리 포인트제 도입은 고려증권이 해체된 뒤의 일이다.
여담으로 국내 다른 스포츠 종목의 팀 중에서는 KBO 리그의 해태 타이거즈와 여러모로 비슷한 컬러를 갖고 있었다. 두 팀 모두 준척급 이상의 엘리트 선수들이 다수 포진했고[4] 특히 특정 몇몇 선수에 의존하는 플레이보다 끈끈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한 조직력과 정신력으로 강팀에 맞섰다. 또 이같은 조직력과 정신력을 앞세워 1980~1990년대 리그를 평정하기도 했다. 두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김응용 감독과 진준택 감독 모두 강력한 카리스마를 앞세워 선수단을 장악하는 스타일로 유명했다는 점도 비슷했다. 게다가 두 팀 모두 모기업인 고려증권과 해태제과의 자금력이 다른 팀의 모기업에 비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었고 나란히 1997년 외환위기로 모기업이 부도를 맞았던 것도 똑같다. 다만 해태 타이거즈는 기아자동차가 인수해서 KIA 타이거즈로 부활했지만, 고려증권은 결국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그대로 해체되는 비운의 결말을 맞이하였다.
모기업의 부도로 결국 마지막이 되어버렸지만, 슈퍼리그 97-98시즌 고려증권 배구단의 사투는 많은 배구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외환위기의 살벌한 한파 속에서 특히 순식간에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된 수많은 넥타이 부대들이 고려증권 경기가 있는 날이면 체육관을 가득 메웠고, '''고려증권 힘내라'''라면서 열광적인 응원을 하였다. 그들은 단 한 푼의 지원도 받지 못하면서도 꿋꿋히 이미 망해버린 고려증권의 로고를 달고 사력을 다해 싸우는 선수들에게서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다. 그렇게 고려증권 배구단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주고 결국 슈퍼리그 4강을 마지막으로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지금도 인터넷에 보면 그 시절의 고려증권 배구단을 추억하는 수많은 이들의 글을 찾을 수 있다.
2017년 황금 시대의 주역들과 인터뷰를 했다.#
2. 선수
이하 가나다 순, 괄호 안은 팀 소속년도
- 강재규 (1984~1986)
- 권한상 (1986~1989)
- 김기수(배구) (1987~1988)
- 김병철(배구) (1994~1995, 1998)
- 김병한 (1989~1993)
- 김상권 (1984~1987)
- 김상준(배구) (1987~1988)
- 김성범 (1984~1985)
- 김우식 (1987~1989)
- 김은석 (1990)
천재센터로 불렸으나 백혈병으로 1991년에 사망했다.
- 김인옥 (1984~1988)
- 김철휘 (1985~1986)
- 나정균 (1984~1986)
나혜원(前 GS칼텍스, 흥국생명)의 아버지.
- 남태성 (1984~1986)
- 류중탁 (1984~1990)
팀의 창단멤버로 센터로 활약했다. 은퇴 후 회사 법인영업부에서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다시 코치생활을 시작했다. 2007년 남자 국가대표팀 감독을 거쳐 현재 명지대 감독이며 아들 류윤식이 프로배구 선수로 활약 중이다.
- 문병택 (1994~1996, 1998)
라이트 공격수 로 '96슈퍼리그 우승의 주역이었다. 군복무는 공익근무요원으로 마쳤으며, 팀 해체 후 LG화재로 이적했다.
- 박기주 (1989, 1992~1993)
現 한봄고등학교 배구부 감독.
- 박삼용 (1992~1993, 1996~1998)
주전 레프트로 활약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고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다. 여자프로배구단 GS칼텍스와 KGC인삼공사 감독직을 역임했으며 현재 상무 배구단 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해당 문서 참조.
- 박선출 (1996~1998)
경기대 출신의 중앙 공격수. 팀 해체 후 대한항공으로 이적했으나 부상으로 비교적 선수생활을 일찍 접은 케이스. 잘 생긴 외모를 자랑했다.
- 박주점 (1989~1994)
경북체고와 서강대를 졸업하고 고려증권에서 센터로 활약했다. 여자프로배구단 한국도로공사 감독을 역임했으며 현재 KOVO 경기감독관으로 재직 중이다. 2017년 2월 14일 계양체육관에서 벌어진 희대의 강민웅 유니폼 규정 위반 논란 당시 경기감독관이었고 잔여시즌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먹었다.
- 손재홍 (1998)
고려증권의 마지막 선수. 뛰어나지 않은 신체 조건, 능숙한 조직 플레이, 안정적인 수비와 공격 등 고려증권 선수들을 상징하는 캐릭터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팀 해체 후 삼성화재로 이적했다. 이 분의 매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홍익대를 졸업했다. 은퇴 후 화성 IBK기업은행 알토스 코치로 있다가 2016-17 시즌 종료 후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코치로 옮겼다.
- 송재택 (1995~1997)
- 안명진 (1997~1998)
- 양현모 (1986~1989)
- 어창선 (1992~1994, 1996~1997)
단신으로 주전급은 되지 못했던 공격수. 여자프로배구단 흥국생명과 한국도로공사 감독직을 역임했고 2015년 KOVO컵 대회부터 KOVO 경기감독관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2017년 12월 19일 오심 논란으로 무기한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 엄종식 (1998)
이성희의 뒤를 세터로 영입했으나, 팀 해체로 한국전력으로 이적했다. 상무 복무 도중 부상으로 의병전역했고 이후 재활을 반복하다가 조기 은퇴했다.
- 오봉식 (1996~1998)
- 유형우 (1997~1998)
- 윤상용 (1997~1998)
원래 LG화재 소속이었으나 군입대로 생긴 문병택의 공백을 메우고자 '97 슈퍼리그를 앞두고 이재욱과 맞트레이드되며 고려증권 유니폼을 입었다.
- 이경석 (1987~1994)
고려증권의 전성기를 이끈 세터로 국가대표로도 맹활약했다. 경기대학교 배구부와 LIG손해보험 감독직을 역임하였고, 2013-14 시즌부터 2016-17 시즌까지 KOVO 경기감독관으로 재직하였다.
- 이병용 (1994~1998)
- 이병희 (1995~1997)
- 이상조 (1993, 1995)
- 이성희 (1990~1993, 1996~1998)
명 세터였으며 고려증권 공격수들에게 정확한 토스를 뿌려주었다. 점프서브의 대가. 고려증권 해체이후 독일에서 활약하다가 2001년 대한한공에서 은퇴했다. 그 후 여자프로배구팀 GS칼텍스와 KGC인삼공사의 감독을 맡았으나 성과는...[5] 해당 문서 참조.
- 이세명 (1997~1998)
- 이수동 (1994~1997)
백발로 유명한 파이터형 공격수. 경북사대부중-고를 거쳐 홍익대에 입학할 때도 동기생의 패키지(?)로 입단했으나 고려증권 입단 후 뒤늦게 기량이 만개하였다. 파워풀한 스파이크를 시원시원하게 꽃아대는 경기 스타일로 인기가 많았다. 상무 복무 도중 팀이 해체되었으며 이후 한국전력, LG화재를 거쳤으나 더 이상 전성기 때의 기량을 보이지는 못했다.
- 이원재 (1984~1987)
- 이윤수 (1994~1996)
- 이재욱 (1993~1995)
190cm의 작은 키로 센터 포지션을 맡았다. 상기 서술한 윤상용과의 트레이드로 고려증권을 떠났다.
- 이재필 (1988~1990, 1993~1994)
높지 않은 점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손목 힘을 자랑했던 공격수이며 팀과 국가대표 두 군데서 골고루 활약했다. 일신여중 지도자를 거쳐 현재 실업배구 심판으로 활동 중.
- 임성필 (1997~1998)
- 장윤창 (1984~1993)
설명이 필요없는 대한민국 배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이다. 참고로 그의 아들이 장민국으로 프로농구 선수이다. 해당 문서 참조.
- 정의탁 (1984~1995)
- 조태준 (1998)
- 최성영(배구) (1996~1998)
- 최재훈 (1993~1995)
- 최정관 (1992~1993)
- 한대섭 (1997)
- 한상규 (1985~1988)
현 KOVO 심판.
- 한상천 (1985~1988)
- 홍해천 (1988~1990, 1993~1995)
경기대를 졸업하고 입단했으며 182cm의 단신이지만 엄청난 수비력으로 고려증권의 색깔을 완성시킨 소금 같은 존재. 리베로 제도가 없던 시대였으나 홍해천의 수비는 리베로급이었다. 송림고등학교 배구부 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3. 감독
- 우철우 (1984 ~ 1986)
고려증권 창단감독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서울시청 감독을 하면서 박삼용, 이성희, 어창선 등 많은 선수들을 키워냈다. 우철우 감독 인터뷰
- 진준택 (1987 ~ 1998)
공격력 위주의 팀 컬러를 탄탄한 수비력과 끈끈한 조직력을 갖춘 ‘쉽게 지지 않는 팀’으로 바꿨다. 후에 대한항공 감독을 역임하였다.
4. 우승 경력
삼성화재 배구단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통령배 배구대회-슈퍼리그 통산 최다 우승팀이 이 팀이었다. 고려증권이 마지막으로 참가한 1997년 대회부터 삼성화재가 무려 8년 연속 우승을 거머쥐면서 남자 배구계의 세력 교체가 이뤄진다. 참고로 고려증권의 라이벌이자 만년 콩라인에 머물던 현대자동차서비스 배구단은 고려증권에 이은 대통령배-슈퍼리그 5회 우승 경험이 있다.
5. 기타
[1] 고려대연각타워 소유주로 알려진 회사.[2] 왕관을 쓴 벌이고 몸통에 고려증권 CI가 붙어 있다. 고려증권 배구단 말기에 여왕벌에서 돌고래로 마스코트가 바뀌게 되는데 당시 계열사인 고려관광(현재 서울에 소재한 서울고려관광과는 관계가 없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3] 류윤식의 아버지.[4] 고려증권에 장윤창, 정의탁, 류중탁, 이경석 등이 있었던 것처럼 해태 타이거즈에도 선동열, 김성한, 김종모, 이대진, 이종범 등 엘리트 선수들이 많았다.[5] 그래도 GS칼텍스 시절에는 이희완 감독이 지병으로 감독직에서 하차하게 되자 대행 신분으로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이끌고 정식 감독이 되고 나서도 정규시즌 우승을 겪었지만, 인삼공사 시절에는 극단적인 몰빵배구와 국내 선수 육성 전무로 팀을 완전히 나락으로 빠뜨리면서 인삼공사 역대 최악의 감독으로 낙인되고 말았다.[6] 2018년 컵 대회부터 경기감독관과 심판감독관을 번갈아 본다.[7] 현대자동차서비스에 패배.[8] 상무 배구단에 패배.[9] 현대자동차서비스에 패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