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한국 세미프로
1. 개요
V-리그의 전신인, 1984년부터 2004년까지 열린 실업리그/세미프로 리그에 대해서 기술한다.
2. 대회 변천
- 대통령배전국남녀배구대회 (1984~1994)
- 한국배구슈퍼리그 (1994~2003)
- V-Tour (2004)
3. 역사
과거 대한민국 배구는 1970~80년대에 세계에서도 강팀으로 꼽혔다. 국제대회에서 늘 파이널4에 들 정도의 실력을 보여왔다. 특히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여자배구가 구기종목 사상 최초의 메달(동메달)을 수상하면서 그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남자배구 역시 1978년 세계선수권대회 4강에 들면서 최전성기를 같이 구가했다.
배구에 대한 팬들의 인기에 부응하기 위해 기존의 실업연맹전을 1984시즌부터 '대통령배 배구대회'로 세미프로화 하여 겨울스포츠로 정착시키기에 이른다. '배구대제전'이라고도 하며 이 때부터 불렸던 애칭이 ''''백구의 대제전''''.[1]
이 당시 남자부는 고려증권, 현대자동차서비스, 금성이 중심이었고[2] 여자부는 미도파, 현대의 라이벌전이 벌어졌다. 특히 여자부 결승전은 잠실실내체육관에 1만 4천여명을 동원할 정도로 최고의 겨울철 인기스포츠로 자리잡았다.[3] 그리고 최평웅 캐스터, 유수호 캐스터, 허주 캐스터, 오관영 해설의 입담 역시 이 대회 중계를 보는 시청자들의 귀를 즐겁게 했다.
1994-95시즌부터 '슈퍼리그'로 개칭했다. 슈퍼리그로 개칭하면서 남자부는 삼성화재가 1997년부터 2005시즌까지 8연패를, 여자부는 호남정유-LG정유가 9연패(1990~99시즌), 현대건설이 5연패(2000~05시즌)를 거뒀다. 이 시기에 한 팀이 독주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많은 배구 팬들이 발길을 돌렸다. 또한 때 맞춰 프로농구 KBL이 출범하며 많은 팬을 빼앗기게 된다.
그렇게 지지부진했던 배구리그의 프로화 진행이 2004년에 V-투어(세미프로) 로 2005년에 KOVO가 정식으로 창립되면서 2005년 프로리그인 V-리그가 정식 출범했다.
4. 역대 스폰서
- 현대자동차써비스 (1994~1996)
- 삼성화재 (1996~1997)
- 데이콤 (1997~1998)
- 현대건설(현대 금강산배/현대아산배) (1998~2000)
- 현대증권(현대아산배) (1999~2000)
- 삼성화재 (2000~2001)
- 현대카드 (2001~2002)
- 삼성화재(애니카) (2002~2003)
- KT&G (2003~2004)
5. 역대 대회
6. 남자부
6.1. 역대 우승팀
6.2. 역대 MVP와 신인왕
6.3. 역대 베스트 6
6.4. 기타 수상
7. 여자부
7.1. 역대 우승팀
7.2. 역대 MVP와 신인왕
7.3. 역대 베스트 6
7.4. 기타 수상
8. 역대 지도자상과 심판상
9. 해체된 팀들
9.1. 남자부
배구리그 초기부터 참가했던 팀으로 1998년 외환위기 때 모기업의 도산으로 해체했다. 탄생부터 소멸까지 야구의 해태 타이거즈와 유사한 면이 많다. 단, 타이거즈는 새 주인을 찾아 명맥을 잇지만 이 팀은 그러지 못했다. 그다지 좋지 않은 자금력에도 불구하고 진준택 감독을 중심으로 장윤창, 이경석(前 LIG 감독, 前 KOVO 경기감독관), 정의탁(前 평촌고 감독, 現 KOVO 경기감독관), 류중탁(2007-08 시즌 국가대표팀 전임감독, 現 명지대 감독)[8] , 홍해천(現 성남 송림고 감독), 이성희(前 KGC인삼공사 감독), 박삼용(現 상무 배구단 감독), 어창선(前 도로공사 감독, 前 KOVO 경기감독관), 이수동 등의 스타플레이어를 바탕으로 현대자동차와 LG화재에 대항할 수 있었던 조직력의 배구팀으로 올드 배구팬의 로망이기도 했다. 1998년 해체 이후 흩어진 멤버들은 각기 다른 팀으로 이적했고, 삼성화재로 이적했던 손재홍(現 현대건설 코치)이 2010-11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하면서 고려증권 출신 현역 선수들은 이제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팀명은 서울시청이지만 실제로는 서울시립대학교 재학생으로 구성된 팀이었다. 세계 청소년대회 우승멤버였던 서남원, 이성희, 박삼용, 어창선 등이 뛰었을 때는 강호들을 위협하기도 했으나 이후로는 실업 무대에 속한 대학 팀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하위권을 맴돌았다. 체육특기자 제도 개정으로 인해 체육 계열 학과가 없었던 서울시립대는 1999학번을 끝으로 선수 스카웃이 중단되었고, 궁여지책으로 기존 팀으로 가지 못한 선수들(대표적으로 KEPCO 45의 세터 )을 모아 팀을 유지하다가 해체되었다. 1991-92 대통령배 상무 우승의 주역 중 1명이었던 오욱환, V-리그 출범 후 현대캐피탈의 연속 우승에 공헌했고 은퇴 후 KOVO 심판으로 활동 중인 송인석이 이 팀 출신이며 최재효 KOVO 심판도 여기에서 세터로 뛰었다.
- 대한민국 경찰청 배구단
1995년 창단, 1996년 해체.
9.2. 여자부
1968년에 국세청으로 창단하여 1973년에 미도파백화점을 거쳐 미도파백화점의 모기업이었던 대농에서 운영하다 1991년부터 미도파로 회귀했다가 1994년 대농그룹의 경영악화로 효성 배구단에 흡수합병되었다. 1969년 국세청 시절부터 미도파를 거쳐 1980년 대농에 이르기까지 11년동안 184연승이라는 기록을 만들어 내는 등 명문팀으로 군림했다. 1980년대에 현대와 라이벌 관계였고, 미도파 출신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많이 뽑히기도 했다. 이 팀 출신으로 가장 유명했던 감독은 이창호, 코치는 김형실이었으며, 선수가 1970년대에 조혜정 前 GS칼텍스 감독과 1980년대에 박미희(센터, 現 흥국생명 감독)[9] , 이운임(세터, 前 KOVO 경기감독관) 등이었다. 모기업 대농그룹이 양백여상[10] 을 소유하던 터라 해당 학교 출신들이 대거 스카웃됐고, 광주여상과도 유대 관계였다.
1969년에 구 제일은행 여자배구단 선수들을 주축으로 창단하여 1998년까지 있었던 팀으로 해체 전까지 SK케미칼이 운영했다. 팀명은 SK그룹 내 운영주체 및 사명 변경에 맞춰서 바뀌었는데 선경-선경합섬-선경인더스트리-SK케미칼로 변천됐다. IMF 위기 발발 초기에 SK증권 여자농구단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갑작스럽게 해체되어 여농-여배 팬들을 당황하게 했다. 이 팀의 간판선수는 류연수[11] , 김연(농구선수 김훈의 누나), 김지연, 강혜미, 장소연 등이었으며, 감독이었던 후국기 감독(후인정의 아버지) 역시 유명했다. 류화석 감독 시절 호남정유-LG정유의 슈퍼리그 92연승을 저지하고, 1997 시즌 준우승도 기록할만큼 LG정유의 대항마로 떠오를만큼 배구팬들에게 기대가 많았던 팀이었다.
1973년에 한일합섬이 창단한 배구팀. 대통령배-슈퍼리그의 콩라인으로, 역대 준우승 2위(4회)에 빛나는 팀이다.[12] 그만큼 현대건설과 호남정유-LG정유의 명실상부한 라이벌로 명승부를 많이 제조했지만 끝발이 아쉬웠던 나머지 준우승-3위를 저렇게나 많이 기록했다. 하지만 올드팬들에게는 남자부의 고려증권만큼이나 강팀으로 인식되는 팀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 모기업 한일그룹의 부도로 해체됐으며 해체 당시에 김남순, 최광희, 구민정, 박미경, 이수정 등이 이 팀의 간판선수로 LG정유 선수들이 다 국가대표를 해먹던 시절에 자주 국가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한편, 재밌게도 한일그룹이 수원한일전산여자고등학교(現 한봄고등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 한효학원을 지닌 덕에 이 학교 출신의 졸업자들을 대거 스카웃하기도 했다.[13] 다만, 흑역사가 은근 많은 구단이기도 했는데, 1986년 5공 최악의 패악질로 유명한 국제그룹 사건 때 국제그룹 인수대상 기업이었던 배구단의 모그룹 한일그룹이 이미 배구단이 있다는 이유로 국제 배구단의 흡수합병을 거부하기도 했다. 또한 1995년에 미등록선수 출전으로 인해 몰수패로 준우승을 거뒀음에도 모든 기록이 말소되는 병크가 있기도. SPOTV에서 배구 해설위원을 지냈고 KOVO 경기위원으로 있는 유애자, 현 V-리그 심판인 전영아가 선수 시절 이 팀에서 뛰었으며 박승수 전 대한민국배구협회 회장, 오한남 현 회장이 감독을 역임한 바 있다.
애석하게도 이 팀은 1973년 창단 이래 해체되는 순간까지 시종일관 약체였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세 번 중 두 번꼴로 리그 꼴찌를 기록했을 정도. 무엇보다도 1992년 초에 있었던 체벌 사건으로 인해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1994년에 대농 프랜차이즈를 합병했고, 역시 1998년 IMF로 해체됐다. 지금은 이재영, 이다영 자매의 어머니로 더 유명한 세터 김경희가 이 팀의 선수였다. V-리그에서 심판으로 활동하는 강주희도 이 팀에서 뛰었다.
1977년 전매청 여자배구단을 롯데그룹에서 인수·재창단하여 1981년 같은 계열사인 한국후지필름으로 운영권이 이관됐다. 효성과 마찬가지로 밑바닥을 든든히 지켜줬던(?) 팀.
국제그룹이 1982년 선경으로부터 유공 여자배구단을 인수하여 1986년 해체까지 4년간 운영했던 팀이다. 상기됐듯 5공 정권의 대표적 패악질 사건인 국제그룹 해체 때 인수 기업인 한일그룹이 국제 배구단의 합병을 거부하여[14] 해체됐다. 1985년 국제그룹 사건 때 농심이 국제 배구단 인수에 관심을 보였는데, 만약 농심이 인수했다면 후지필름과 집안 싸움이 일어날 뻔 했을 터. 그리고 국제그룹의 전신이 유공이었으니 선경 배구단과도 플래그가 성립된다.
1998년 외환위기 시절 여기에 언급된 여자배구팀이 모두 해체됐다. 당시 한일합섬에 있던 김남순, 최광희, 이수정이 담배인삼공사, 구민정이 현대건설로, 박미경이 도로공사로, 그리고 SK케미칼의 강혜미, 장소연은 현대건설로 옮겼다.10. 역대 신인드래프트
- 1996년 중앙여고의 이명희가 3억 5천만원에 현대건설과 입단계약을 체결했다.
- 1997년 목포여상의 이윤희가 역대 최고인 3억7천만원[15] 에 LG정유와 입단계약을 체결했다. #
10.1. 1992년
- 1순위 : 선경인더스트리 - 경남여고 4명
- ?순위 : 도로공사 - 한양여고
- 어연순, 최은주
- 7순위 : 호남정유 - 경복여상 3명
- 이현주 등
- ?순위 : 담배인삼공사 - 청란여고 7명
- 개인드래프트 : 유연경(서문여고) #
10.2. 2002년
- 1라운드
- 2라운드
- 1순위 : 현대건설 - 윤혜숙(부산남성), 1억
- 2순위 : 담배인삼공사 - 박혜민(목포여상), 9000만원
- 3순위 : LG정유 - 안혜민(전주근영), 8000만원
- 4순위 : 흥국생명 - 김경아(청란), 7000만원
- 5순위 : 도로공사 - 김해란(마산제일), 6000만원
11. 둘러보기
12. 관련 틀
[1] 이 당시 배구공은 어느 색깔도 들어가지 않은 흰색이었다. 그래서 백구의 대제전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 흰색에 붉은색과 노란색이 결합된 현행 배구공이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은 2000년대 중반 즈음부터였다.[2] 대한항공은 1986년에 재창단했다.[3] 대통령배 초대 결승전이었던 1984 시즌에 저러했다. 워낙 인기가 많아서 표를 못 산 행렬들이 되돌아가는가 하면, 경기 전부터 여러 스포츠 관련 방송 에서 우승팀 예상 거리 인터뷰를 할 정도였다.[4] 백구의 대제전에서 유일한 대학교 우승팀으로 88학번 싹쓸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던 레프트 하종화(前 현대캐피탈 감독), 센터 윤종일, 레프트 문양훈(現 한양대 코치), 세터 장재원에 89학번 라이트 강성형(現 LIG손해보험 코치), 90학번 센터 윤종옥(대한항공)(89학번 센터 장홍석(LG화재)도 제법 뛰었지만 윤종옥의 출전 비중이 높았다.)을 베스트로 내서 우승했다.[A] A B [5] 한일합섬의 미등록선수 출전으로 인한 몰수패로 준우승팀 없음.[4회] A B [5회] A B [6] 지민경의 고모.[7] 갑작스런 시력 저하 증상으로 조기 은퇴한 후 1992년 1회 슈퍼모델 선발대회에 참가해 화제를 모았다. 딸인 이다현은 중앙여고에서 미들블로커로 뛰고 있으며 2019년도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해 전체 2순위로 현대건설에 지명되었다.[B] [8] 삼성화재 소속의 레프트 류윤식의 아버지다. 현재 류윤식은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하고 있으며, 2019-20시즌이 끝나고 제대하는대로 소속팀에 합류할 예정이다.[9] 사실 박미희 감독은 본 포지션이 센터이나 양쪽 윙에서도 수준급의 공격을 펼칠 정도로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10] 2006년 폐교.[11] 2020년 현재 현대건설 배구단의 센터로 뛰고 있는 이다현 선수의 어머니.[12] 위의 표를 보면 알겠지만 현대-현대건설 프랜차이즈가 대통령배-슈퍼리그 21시즌동안 우승과 준우승을 거의 해먹다 시피했다.[13] 한일전산여고는 학교법인 한효학원에서 한봄학원으로 계열 분리되면서 수원전산여고로 교명을 바꿨다가 2019년에 다시 한봄고등학교로 개칭했다.[14] 이미 이 시기에 한일그룹 내에 한일합섬 배구단이 존재했기 때문이다.[15] 계약금 1억7천만원, 학교지원금 2억원 등 총3억7천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