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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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후인정(侯寅廷)
생년월일
1974년 4월 19일 (50세)
국적
중화민국(1974~1995)
대한민국(1995~ )
출신학교
서울인창고등학교-경기대학교
포지션
레프트, 라이트, 센터
신체사이즈
신장 198cm, 체중 89kg
점프높이
스파이크 높이 339cm, 블로킹 높이 330cm[1]
소속팀
'''현대자동차-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1996~2013)'''
수원 한국전력 빅스톰 (2013~2015)
지도자
수원 한국전력 빅스톰 트레이너 (2015~2016)
수원 한국전력 빅스톰 코치 (2016~2017)
경기대학교 코치 (2018~2020)
경기대학교 감독 (2020~)
1. 소개
2. 선수 생활
2.1. 현대자동차/현대캐피탈 시절
2.2. 한국전력으로 이적
3. 플레이 스타일
4. 기타
5. 관련 문서


1. 소개


한국배구선수. 화교 출신으로 원래는 중화민국 국적으로 태어났지만 1995년에 귀화하며 '''수원 후씨의 시조'''가 되었다. 참고로 한국 '''최초'''의 귀화 선수이기도 하다.
아버지 후국기(허우궈지) 또한 배구선수 출신으로 국내 리그에서 강만수와 함께 금성통신의 전성기를 이끌기도 했으나, 중화민국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귀화하는 것을 부친이 반대하여서[2]한국 배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될 수 없었던 가슴아픈 사연이 있다.[3] 더욱이 금성통신 선수들이 일본으로 전지훈련을 가게 되면 다른 선수들은 일본에 도착하여 입국심사대를 무난히 통과하는데도 후국기는 국적이 중화민국이었기 때문에[4] 입국심사대를 통과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인 인정에게는 이런 아픔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 귀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귀화에 반대하는 친척들을 설득하였다고 한다. '''장손의 귀화'''를 가장 크게 반대했을 할아버지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기도 했고. 후국기는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선경인더스트리 여자배구팀[5]에서 코치와 감독을 역임했다.
서울인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대학교에 입학하여 박진환 감독의 가르침을 받아 구본왕, 박선출 등과 함께 배구부를 이끌었다. 그의 성이 특이하게 후 씨인데다 아버지가 후국기 감독인 것이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제법 타기 시작하였다.
그가 경기대학교에 입학하던 당시 세계는 걸프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당시 이라크 대통령이던 사담 후세인이 한국에도 널리 알려졌을 때인데 하필이면 그의 이름과 후세인 대통령이 똑같이 '후'로 시작된다는 이유로 졸지에 그의 별명이 '''스커드 미사일'''이 되었다. 스커드 미사일은 걸프 전쟁 당시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이끄는 이라크군이 사용하던 대표적인 무기였다. 아무튼 그 미사일만큼이나 제법 강한 공격력을 과시하였다.

2. 선수 생활



2.1. 현대자동차/현대캐피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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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 간지는 아직 죽지 않았어!"'''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현대캐피탈 시절
1996년 현대자동차서비스에 입단하게 되었는데 당시 현대자동차서비스는 삼성화재신진식을 빼앗기고 후인정마저 빼앗길 뻔 했었다. 그러나 당시 현대자동차서비스의 강만수 감독과 아버지 후국기와의 두터운 친분 덕에 삼성화재로 가지 않고 현대자동차서비스로 가게 된다. 이때부터 '''2인자'''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다니게 된다. '''배구계의 대표적인 콩라인'''.
삼성화재김세진과 신진식을 앞세워 독주하면서 한국 배구는 이른바 암흑기를 맞이하였고, 현대자동차서비스가 현대캐피탈로 이름이 바뀐 후에도 삼성화재의 독주는 여전히 계속되는 바람에 그에게 2인자 꼬리표가 붙어다녔다. 게다가 송만덕 감독이 선수단 운영을 잘못하여 항명에, 숙소 이탈까지 발생하고, 현대캐피탈은 배구단 해체까지 검토할 정도로 막장 끝으로 치닫게 되었다. 결국 송만덕 감독이 사임하고 김호철 감독이 취임하게 되면서 다시 일어선 현대캐피탈은 2005년에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되는데 이 정규리그에서 후인정이 MVP를 차지하였다.
그러다 그 이듬해에 2005-06 시즌 통합 우승을 차지하였는데, 이 때 후인정은 배구 선수 생활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한 셈이 된다.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그는 감격에 겨워 펑펑 울었다. 그동안 우승 문턱에서 숱하게 좌절했던, 힘든 과거가 너무나도 북받쳐 펑펑 울었던 것이다.
이후 김세진을 시작으로 신진식, 김상우, 방지섭[6] 등 그의 선배이거나 그와 동기인 선수들이 차례로 은퇴하고 혼자 남게 되었다. 졸지에 별명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후옹(翁)'''. 여기에 유니폼이 민소매로 만들어지기 전에[7] 그는 소매를 위로 걷어 올려 민소매처럼 입고 다녀서 또 별명이 만들어졌다. 그것이 바로 '''나시인정''', '''민소매인정'''. 그리고 2006-07 시즌에서 경기 도중 심판 판정에 격렬히 항의했다가 경기가 끝난 후 심판과 극적인 화해를 했다고 해서 '''선흥분 후인정'''이란 별명이 디시인사이드 배갤에서 한동안 나돌았다. '선흥분 후인정'의 배리에이션으로는 '''선리플 후인정'''(...).
그렇게 고대하던 우승도 하고 현대캐피탈이 삼성화재와 계속된 라이벌리를 이어갔지만 시간이 흘러 후인정도 어느덧 V-리그를 대표하던 최고참급 선수가 되었다. 그의 포지션인 라이트윙은 주로 공격을 마무리 짓는 포지션으로 자연스럽게 외국인선수들이 차지하는 포지션이 돼버렸는데, 눈에 띌 정도의 급격한 노쇠화까지는 아니지만 출전시간이 예전에 비해서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블로킹을 잡아내는 능력은 최고였으나 큰 공격은 예전만도 못한 상황이 된 것. 세트 후반에 블로킹 강화를 위해 교체출전하거나 문성민 등 팀의 주공격수들이 부상을 입을 때 대체하여 경기를 뛰는 상황이 됐다.
2010-11시즌에 문성민, 엑토르 소토가 주전 라이트윙으로 출전하게 되면서 후인정이 레프트윙까지 도맡아야 할 정도로 사정은 좋지 않았다. 게다가 라이트 포지션에 있는 후배들이 이제는 그를 쉬게 해줘야 하는데[8] 잉여 라인이 되어 그는 나이에 맞지 않게 고생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1년 2월 23일 서울 우리캐피탈 드림식스전에서 문성민이 뻗어버리다 못해 김호철 감독에게 '''집중력이 떨어졌냐?'''는 질책을 받을 때 그가 교체 출전하여 수훈을 세웠을 정도다.
2012-13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었으나 원소속 구단인 현대캐피탈과 협상이 결렬되면서 은퇴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2.2. 한국전력으로 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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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간지가 넘치던''' 선수 말년의 한국전력 시절
2013년 9월 24일 한국전력으로 이적하면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2013년 오프 시즌에 친정 팀으로 복귀한 신영철 한국전력 감독이 끈질기게 설득했다고 한다. 신 감독의 설득이 없었다면 SBS 스포츠의 해설위원으로 갈 뻔했다고. 어쨌든 '수원 후씨'의 시조로 고향 팀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다는 마음으로 신 감독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한국전력으로서도 전반적으로 젊은 선수들을 다독일 고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2013-14 시즌 현재 남·여 통틀어 최고령 선수.[9] 어느새 V-리그 남자부에서 방신봉과 함께 둘밖에 없는 40대 선수로 맹활약하였다.
한국전력은 서재덕, 전광인 등 국가대표 에이스급 쌍포가 있어 후인정이 윙 스파이커로 뛰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경기대학교 시절 센터로 뛰었던 데다 원체 블로킹 능력이 좋기 때문에 하경민, 방신봉 등 주전 센터들과 로테이션으로 투입됐다. 비록 전성기 때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세트 후반부에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센터로 자주 투입되면서 제 몫을 다 했다. 배구의 프로화 이후 몸관리를 잘 한다면 노장 선수들도 오랫동안 뛸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2014-15 시즌에는 한국전력의 주장으로 활약했다.
2015-2016 시즌 중 은퇴를 선언했다. 이는 로스터 때문이기도 한데, 조만간 권준형이 군에 입대해야 하는 관계로 군필 세터가 필요했던 한전에서 센터 최석기를 내주고 지명권도 넘기면서 세터 강민웅과 센터 전진용을 맞트레이드로 영입함에 따라 한 자리를 비워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배번은 트레이드로 영입한 세터 강민웅에게 넘겼다.
2016년 1월 4일 공식 은퇴식을 갖고 코치로 부임하여 신영철 감독을 보좌하였으나, 2016-17 시즌 종료 이후 김철수 코치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코칭스탭 개편과 함께 구단을 떠나게 되었다.
2018시즌 경기대학교 배구부 코치로 부임했다.

3. 플레이 스타일


경기대학교 시절 포지션은 센터(미들블로커)였다. 이는 당시 경기대학교 멤버 중에 수비력 좋은 윙어는 있어도(김구철, 차상현) 센터 박선출의 대각에 설 선수가 없었기 때문에 팀내에서 가장 뛰어난 블로킹 능력을 가진 후인정을 센터로 기용했다. 당시 후인정은 포지션상 중앙이었지만 공격은 거의 라이트에서 했다.[10] 하지만 공격력은 같은 시기 등장한 김세진, 신진식 등에 비하면 아쉬운 수준이었기 때문에 경기대학교에서도 주포 구본왕을 보조하는 2인자였고, 현대자동차서비스 입단 이후에도 마낙길, 하종화, 임도헌 등의 쟁쟁한 선배들에 비해서 약한 공격력 때문에 팀에 도움이 되지 못했었다. 하지만 선배들이 은퇴를 하고 후인정이 주전을 차지한 이후에는 이인구와 함께 팀의 공격을 이끌면서 현대자동차서비스 시절 에이스로 성장했고 이후 현대캐피탈로 이름이 바뀌면서 팀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이렇게 윙스파이커로서는 공격이 약간 아쉬운 반면 블로킹은 한국배구의 날개 공격수 전체를 통틀어 TOP 5에 들 수 있을 만큼[11] 뛰어나며 그 기량을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주전자리를 넘겨준 이후에도 중요할 때마다 원포인트 블로커로 교체되기도 한다. 후인정의 사이드 블로킹 장면을 보면 기본기를 여실히 보여주는데, 블로킹한 팔을 들어올려서 공간을 막은 다음 상대 타구를 안테나 안쪽으로 밀어넣는, 현장 배구용어로 '''쓸어담는''' 테크닉이 탁월했다. 이 때문에 중요한 순간 상대 레프트 주공격수의 직선코스를 확실하게 잠가주면서 센터의 블로킹 확률까지 올려주는 블로킹 벽 팀웍이 매우 좋았고, 이 시기 현대캐피탈이 블로킹, 제공권 만큼은 역대 최고 수준의 팀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전매특허 공격인 백어택은 국내 선수 중에서 뛰어난 체공력과 유연함으로 인해 국내에서는 NO.1이었다.[12]2013-14 시즌 들어서는 하경민, 방신봉과 돌아가면서 경기에 출전하고 있는데, 세트 중반(주로 첫번째 테크니컬 타임아웃 이후)에 추격 내지는 접전 상황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아 노장급 선수 치고는 꽤 괜찮은 출장시간을 보장받고 있다.
1990년대 후반 남자대표팀에는 김세진, 신진식, 박희상 등이 같은 포지션에서 뛰는 바람에 자연스레 교체멤버로 활약할 수밖에 없었다. 주로 맡았던 역할은 역시나 원포인트 블로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국가대표에서 박희상이 은퇴하고, 김세진, 신진식이 노쇠화를 보이면서 자연스레 라이트윙을 맡았다.[13] 이후 김요한, 문성민 등이 합류한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는데 큰 공을 세웠다.

4. 기타


덤으로 개그 콘서트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달인''' 코너에서 피하기의 달인이라는 김병만은 후인정이 등장할 때 처음에는 자신만만하다가[14]그의 스파이크를 체험하더니 겁에 질려 벌벌 떨고는 두번째 시도에 후인정을 껴안으며 방송 나갈 수 있게 봐달라고 애원하는 게 백미. 마지막에 후인정이 ‘나가’를 외친다.

5. 관련 문서


[1] 2006년 FIVB 월드리그 당시 기재된 프로파일 기준. 지금은 점프 높이가 그보다 많이 낮아졌을 것으로 예상된다.[2] 사실 이름을 생각해도 그렇다. 한자로 쓰면 이다. 이 은 '''당연히 중화민국이지 한국이 아닐 것이다.''' 다른 나라에 살고 있어도 중국인이라는 뿌리를 잊지 말고 조국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라는 의도로 지어줬을 이름이다. 그런 소망을 담아 지어준 이름일 텐데 '''다른 나라에 귀화하겠다니''' 부친 입장에서는 펄쩍 뛸 수밖에 없다. 그러라고 시킨 배구가 아닐 텐데.[3] 대신 모국인 중화민국 국가대표로 뽑히긴 했다. 1979년 대만대표팀의 파라과이 원정 때 대만 대사관에서 찍은 사진.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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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파라과이는 현재까지도 중화민국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4] 정확히는 국적이 중화민국이라서가 아니라, '''대만에 호적이 없는 해외교포'''였기 때문. 대만에 호적이 있는 중화민국 국민의 일본 입국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다만 대만에 호적을 만들었다면 대만 군대에 입대해야 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을 거다.[5] 1998년까지 있었던 배구팀으로 해체 전까지 SK케미칼이 운영했다. 해체 전까지 이 팀의 간판선수는 류연수, 김연, 강혜미, 장소연 등. 참고로 호남정유-LG칼텍스정유(현 GS칼텍스 서울 KIXX)의 슈퍼리그 92연승을 저지했던 팀이 바로 이 팀이다.[6] 2010-11 시즌에 구미 LIG손해보험 그레이터스로 복귀한다.[7] 예전 현대캐피탈 유니폼은 반팔 티셔츠 형태로서, 민소매 유니폼은 2008-09 시즌에 도입되었다.[8] 2010년 IBK기업은행컵 프로배구에서 주상용갑툭튀하여 놀랄 활약을 펼쳤는데 정규시즌이 시작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도움이 되지 않았다.[9] 참고로 2013-14 시즌 여자부 최고령 선수는 장소연. 나이는 동갑이나 후인정이 장소연보다 7개월 앞서 태어났다.[10] 경북 김천 하이패스의 센터 정대영이나 화성 IBK기업은행 알토스김희진과 같은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11] 슈퍼리그 통산 블로킹 2위인 최천식, 원래 세터 출신이라 코스 읽는 감각이 뛰어난 김세진과도 비견될 정도이다.[12] 슈퍼리그 98,99시즌에는 백어택 1위 상을 탄 적도 있을 정도였다. [13] 2000년 시드니 올림픽때는 주전 센터로 나왔지만 망했다.[14] 두 사람의 키 차이가 무려 40cm(약 두 뼘)이다. 그런데도 후인정을 보며 ‘인정없이 컸네’라고 드립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