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진

 



'''김세진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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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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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KBS,KBSN Sports 배구 해설위원'''
'''김세진
金世鎭'''

'''출생'''
1974년 1월 30일 (50세)
충청북도 옥천군
'''학력'''
옥천공고[1] - 한양대
'''가족'''
부인 진혜지[2], 아들 김승민[3]
'''포지션'''
라이트
'''신체'''
197cm, 83kg
'''소속팀'''
'''삼성화재 배구단 -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 (1995~2006)'''
'''지도자'''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 감독 (2013~2019)
'''해설'''
KBS,KBS N 스포츠 (2006~2013, 2020~)
1. 개요
2. 선수 생활
2.1. 체육교사가 꿈이었던 선수가 최대어가 되다
2.2. 삼성화재의 전설
3. 과거 해설위원 시절
4. 감독 시절
4.1.1. 2013-14 시즌
4.1.2. 돌풍의 2014-15, 2015-16 시즌
4.1.3. 2016-17 시즌
4.1.4. 2017-18 시즌
4.1.5. 2018-19 시즌
5. 해설위원으로 복귀
6. 개인 수상
7. 여담
8.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의 배구인.
장윤창의 뒤를 이은 배구 국가대표 라이트였다. 전성기 시절 FIVB 월드리그에서 공격수 상을 받은 것으로 인해 별명은 예나 지금이나 월드스타. 다만, 그렇다고 진짜 월드스타인 건 아니고... 장윤창과 비교하면 국제배구계의 명성이나 성과에는 못 미치긴 했지만... 같은 시기 신진식과 함께 몇 안되는 탈아시아급 공격수임에도 그 당시 배구계의 난장판 때문에 국제대회 출전길이 90년대 후반 막히기 시작하면서 국제경기 활약이 끊긴 것이 매우 아쉬운 일.
삼성화재의 무적 전설을 이끌었던 선수이자, 국가대표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리고 곱상하고 잘 생긴 외모로 인기가 많았던 선수였다.

2. 선수 생활



2.1. 체육교사가 꿈이었던 선수가 최대어가 되다


고향은 충청북도 옥천으로 어릴때는 완전 약골이라 몸이 약하기로 유명해서, 오죽하면 초등학교 시절 아침 조회때 운동장에서 쓰러지곤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부모님의 권유로 체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육상을 방과 후 활동으로 시작하고 이후 높이뛰기를 하다가 소질을 발견한 학교 배구 감독의 권유로 배구 선수로 전향하게 된다.
하지만 유년 시절에 배구계에서 김세진의 이름은 큰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키가 작아 세터에 지나지 않았는데, 고등학교 들어서면서 15개월 만에 키가 21cm나 성장해 오늘날 197cm의 장신이 되어 공격수로 전환하게 된다. 이후 월등한 신장을 바탕으로 고교 무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선수라는 평가는 받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꿈은 선수로 명성을 날리기보다 그냥 대학교에 들어가서 체육학과를 무사히 졸업한 후 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고향에서 체육교사로 일하는 것이었고, 한양대학교스카우트되어 입학했을 적에도 그 생각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한양대학교 1학년 때 그를 스카우트한양대학교송만덕 감독이 왼손잡이가 될 것을 권유했고, 김세진이 감독의 의견을 따르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재능을 알아본 송만덕 감독과 이재구 코치[4]의 혹독한 훈련을 통해 왼손잡이로 변신하는데 성공한 김세진은 왼손잡이라는 이점에[5] 키 2m의 압도적인 피지컬을 앞세워 대학 2학년부터 국가대표에 발탁되기 시작했고, 배구의 명가 한양대학교의 자존심을 잇는 선수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1994년 월드리그에서 공격성공률 1위를 기록하면서 공격상(Best Spiker)을 받은 이후부터 그의 별명은 일약 월드스타가 되었고,[6] 이는 1995년 월드리그에서 대한민국을 사상 처음으로 6강 결선에 올려 놓음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당연히 모든 실업 팀들이 군침을 흘리던 스타였는데, 애당초 그를 둘러싼 스카우트 전쟁은 이미 LG화재의 승리로 끝나서, 대학 동기인 홍익대학교 센터 구준회와 함께 LG화재로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1995년 삼성화재가 배구 팀을 창단하면서 우수 선수를 주지 않으면 창단을 철회하겠다는 강짜를 부린 행동으로 인해 김세진의 진로는 LG화재에서 삼성화재로 극적으로 변신하게 되었고, 그렇게 김세진은 삼성화재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2.2. 삼성화재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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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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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삼성화재의 유니폼을 입은 첫 해에는 선수가 부족하다 이유로 슈퍼리그에 불참하며 한 시즌을 공으로 날렸지만, 일단 참가한 이후부터는 최강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1997 슈퍼리그 우승으로 시작된 삼성화재의 독재는 V-리그 원년까지 이어졌으며, 그 중심에는 김세진이 있었다. 혼자 있어도 우승을 노려볼 수 있었을텐데, 여기에 신진식, 김상우, 최태웅[7], 방지섭 등까지 가세한 삼성의 전력은 워낙 막강했다. 물론 삼성화재의 창단 후에도 스카우트를 싹쓸이하는 등, 전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이를 아주 폄하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김세진의 활약상은 한양대학교 시절의 명성에 결코 부끄럽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V-리그 2005-06 시즌을 마치고 은퇴할 때까지 김세진은 삼성화재의 9연패를 이끌면서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3. 과거 해설위원 시절


은퇴 후 2006년부터 KBS N 스포츠KBS 본사 배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역시절에도 달변가로 유명했던 김세진은 해설위원으로서도 그의 말솜씨가 빛을 발했다. 경기 상황 전달, 선수의 기술적·심리적 부분을 상세히 전달하며 호평을 받았다. 다만, 다이내믹한 걸 원하는 팬들에게는 김세진의 상대적으로 하이톤인 목소리에 차분한 전달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래도 은퇴 뒤 방송 생활에 완벽히 적응하는 김세진의 모습은 명 해설가를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김세진 입장에서 운도 따랐던 것이, 처음 해설위원으로 데뷔할 때 마침 배구 중계의 레전드라고 할 수 있는 허주, 유수호 캐스터가 KBS 본사에서 정년 퇴임을 한 직후라 프리랜서 자격으로 KBS N 스포츠에서 중계를 맡고 계셨을 때였다. KBS N 측에서는 아직 해설에 서툰 김세진을 배려하여 처음에는 거의 이 두 레전드하고만 중계하도록 배정해 줬다. 배구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방송계의 연륜을 가지고 있는 이 두 캐스터와 중계를 계속하면서 언제 어떤 말을 하면 좋은지와 같은 중계의 노하우를 빠르게 터득할 수 있었고 그것이 명 해설가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4. 감독 시절



4.1.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 시절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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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5 시즌 우승 헹가래를 받는 모습.

4.1.1. 2013-14 시즌


그러던 2013년 4월, 러시앤캐시가 2012-13 시즌 드림식스의 스폰서십을 해주면서 엄청난 광고 홍보 효과를 얻었다. 드림식스 인수전에서 우리카드에 밀린 후 러시앤캐시가 KOVO로부터 신생 팀을 하나 더 창단하겠다면 지원해 주겠다는 입장을 듣자 이왕 내친 김에 배구 팀을 새로 창단하기로 했고, 창단 감독으로 김세진을 선임했다.[8] 다소 의외의 결정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사실 김세진은 러시앤캐시의 감독 내정 이전에도 여러 팀들로부터 감독직을 추천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동기인 김상우LIG를 이끌 때 선수들과 마찰이 있었던 것[9]을 보면서, 팀 컬러를 만들기 쉬운 신생팀의 감독으로 가기를 원했다. 마침 기회가 생겨서 신생 팀 감독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대부업체 이미지 때문에 고심했다고 한다.
김세진은 선수도 없고 코치도 없는 상황에서 이름뿐인 감독으로 한동안 지내다가, 2012-2013 시즌 후 현역 은퇴를 선언한 석진욱을 곧바로 수석코치로 영입했다.[10] 이후 신인 드래프트 및 각 구단 보호선수 외 전력보강선수 선발을 통해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시즌을 준비했다. 마침 러시앤캐시의 최윤 구단주가 경기대학교 11학번 3인방(이민규, 송명근, 송희채)을 영입하는데 통큰 결정을 하면서 시즌 준비를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2013-2014 시즌 들어서 기존 6개 팀과의 대결에서 적어도 1번씩 잡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거기에 목표 달성이 되면 내친 김에 시즌 10승까지 가겠다는 2차 목표도 세웠다. 신생팀으로서는 다소 버거울지 모르는 목표일지도 모르고, 실제로 개막 이후 8연패를 당하며 위기설도 있었지만, 연패 기간 중 팀 단합 차원에서 번지점프를 뛰러 다녀오기도 하고 형님 리더십으로 선수들을 다독이면서 팀을 이끌었다. 특히 1~2라운드 때 헤매던 외국인 선수 아르파드 바로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며 팀의 에이스로 자리잡게 해주기도 했다. 결국 2013년 12월 5일 2라운드 중 안산 홈 경기에서 LIG를 상대로 3-0 셧아웃 경기를 만들어 내며 창단 첫 승을 신고했다. 선수들이 홈경기 승리 때 댄스 세리머니를 한다든가 하는 독특한 팀 컬러를 만드는 데도 김세진 감독의 배려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작전시간 때 김세진 감독의 카리스마가 빛을 보는데, 플레이가 안 풀리는 상황에 선수들에게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왜 안 되는지, 어떻게 하면 상황 반전을 할 것인지 일목요연하게 작전지시를 하며 베테랑 감독 못지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 예로, 2014년 2월 9일 친정 팀 삼성화재와의 대전 원정경기에서 3-0 셧아웃 승리를 잡아낸 경기에서, 3세트 삼성화재에게 추격을 당하고 있던 22-22 동점인 가운데 경기를 매조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김세진 감독은 경기를 잡기 위해 타임아웃을 부르고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린 장면은 배구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게도 했다.

김세진 감독 : 자, 지금부터 들어. (이번 세트) 마지막까지 서브 맞춰 넣지 마. 전략서브[11]

넣지 마. 에러 나도 내가 책임 져. 무조건 (강서브로) 패! 하나도 안 들어가도 상관없어. 무조건 패!

이 때문인지 유튜브 SPOTV 페이지에서는 아예 김세진 작전모음 클립이 따로 있기도 하다. 오오. 가령 "희채야 그냥 내가 편하게 물어볼게 왜 피해?"같은...
다만 홈 마지막 경기를 포함한 막판 몇몇 경기에서 1군을 선발로 내고 한 세트 직후 바로 1.5군급 선수들을 넣는 식으로 경기를 해서 조작하냐며 까였다. 물론 주전들의 체력 비축 및 다음 시즌 준비를 위해 몇몇 선수들을 실험하는 거라 보면 될거 같지만, 기껏 직관하러 갔던 홈 팬들한테는 그저... 그리고 팀의 제 3세터인 김천재의 안습한 세팅을 승장 인터뷰 때 직접 언급하면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여담으로 보통 감독들은 작전타임이 끝난 뒤 파이팅 구호로 팀 이름을 외치곤 하는데, 김세진 감독은 "앞으로"를 외친다. 패기있게 앞으로 진격하자는 의미에다가,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의 모기업 이름이 '''아프로'''파이낸셜그룹이라는 점도 포함하는 중의적인 표현인 듯.

4.1.2. 돌풍의 2014-15, 2015-16 시즌


2014-15 시즌에는 쿠바 국가대표 출신의 '시몬스터' 로베르틀란디 시몬 아티스경기대학교 3인방이 팀 내 주력으로 자리잡으며 정규 시즌 2위를 기록, 플레이오프(준결승)에서 한국전력을 제압(2경기 모두 파이널세트)하며 창단 2년 만에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했다. 챔피언결정전에서도 은사가 이끄는 삼성화재를 3연승으로 스윕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한편, OK저축은행의 챔피언결정전 우승 이후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김세진 감독은 챔피언결정전 우승과 신치용 감독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왜 김세진 감독이 준비된 감독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2015-16 시즌에는 초반에는 선두자리를 유지했지만 후반기 들어 삼성의 추락과 현대캐피탈의 연승으로 조금 묻히는 면이 있었으나, 준결승전 에서 삼성킬러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 삼성화재를 2게임 모두 이기며 삼성의 연속 챔결 진출기록까지 끊어내버렸고, 결승전 에서는 후반기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줬던 현대캐피탈을 3승 1패로 제압하여 2년 연속 챔프전 우승 달성에 성공함으로써 지난 시즌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고 이 덕분에 4년 재계약을 채결했다. 더 놀라운 점은, 시즌 도중에 우리동네 배구단의 감독까지 겸직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승을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겸직을 맡았던 우리동네 배구단도, '''배구를 처음 하는 선수들이 대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반 년도 안되어 전국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김세진 감독이 시몬빨 감독이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4.1.3. 2016-17 시즌


2016-17 시즌에 들어서는 용병 제도가 자유계약 제도에서 트라이아웃제로 바뀌어 팀의 리그 2연패 주역이던 로베르틀란디 시몬 아티스를 떠나보내게 되었고, 트라이아웃제로 영입한 롤란도 세파다가 성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시즌이 개막하기도 전에 퇴출되었으며, 대체 용병이던 마르코 보이치 역시 기량 미달로 퇴출되는 등 용병 농사 실패와 송명근의 부상 등으로 시즌 초반 고전을 면치 못하며 KB손해보험과 함께 나란히 꼴찌를 다투는 안습한 행보를 걷고 있다. 특히 신인 세터 황택의를 발굴하여 어느 정도 승수를 쌓은 KB손해보험과는 달리 이 팀은 속절없는 연패 행진에 점점 최하위 자리가 굳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배구팬들 사이에선 시몬빨이라는 의혹을 듣기 시작했다.
결국 2017년 1월 30일, 현대캐피탈과의 홈경기에서 패하며 포스트시즌 트래직 넘버가 완전히 소진됨으로써 지난 시즌 우승팀의 체면을 단단히 구겼다. 더욱이 이 날은 다른 날도 아니고 '''김세진 감독의 생일'''이었던 탓에 이 날의 패배와 봄 배구 진출 실패가 맞물려 더욱 비참해 보였다. 이후에도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였고, 결국 '''7승 29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며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더군다나 포스트시즌에 못 간 다른 팀들도 10승 이상은 거뒀는데, 이 팀만 이 시즌 유일하게 10승도 못 거뒀다.[12]

4.1.4. 2017-18 시즌


그 뒤 2017-18 시즌, 초반에는 연승을 하면서 명예회복을 하는가 싶더니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금세 연패에 빠지며 일찌감치 꼴찌라는 익숙한 포지션에 자리를 깔자 옥저 팬들에게 '''토세진''', '''돌세진''', '''말세진''' 등으로 심심찮게 까이고 있다. 그런데 3라운드 첫 경기를 앞두고 분위기 전환을 노릴 목적이었는지 1순위 용병 브람과의 계약을 중도 해지하고 대체 용병으로 KB손해보험의 용병 알렉스의 친형 마르코를 전격 영입했다. 브람의 기량 및 성적은 준수한 수준이었지만 팀 분위기 쇄신을 위한 결정이었다고 한다.[13] 그리고 한국배구 역사상 최초의 형제 용병 대결에서 리버스 스윕으로 처참히 패배한다.[14] 이로 인해 배구팬들 사이에서는 16-17 시즌 때부터 조심스레 제기되어 온 시몬빨 의혹이 이젠 거의 기정사실화 되어가는 분위기. 그래도 이 때는 최소한 송명근 부상, 거듭된 용병 농사 실패 등이라는 쉴드의 여지라도 있었는데, 송명근도 돌아오고 1순위 용병까지 뽑은 지금에 와서는 어떤 결과든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것. 이번 시즌 탈꼴찌라도 해내지 않는 한 재계약은 불투명하며, 2회 우승은 초월자 로베르틀란디 시몬 아티스 한 사람의 힘에 의한 플루크 시즌 취급을 받게 될 것임이 자명하다. 이 2017-18 시즌이야 어찌어찌 넘긴다고 쳐도 진짜 문제는 바로 그 다음부터라는 거다. 송명근, 송희채, 이민규 등이 시즌이 끝나고 FA가 되는데 이들을 모두 잡는다고 해도 만약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서 병역특례를 받지 못할 경우 팀을 전체적으로 다시 세팅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과연 그 때까지 잘 버텨낼 지가 의문.
12월 23일 한전에게 패배하며 3라운드 전패를 포함한 8연패. 결국 용병 교체는 악수였다는 것을 프로답게 결과로 증명해낸다. 이젠 옥저 팬덤에서 시몬빨을 넘어 사퇴론까지 거론되고 있는 상황. 그러다 12월 26일 모두의 예상을 깨고 KB를 꺾으며 연패 탈출에 성공한다! 허나 마르코의 부진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골칫거리.
12월 29일 모두의 예상대로 현대캐피탈에게 패배하며 승점자판기임을 재확인.[15] 될팀될 vs 안팀안의 모든 것이 나타난 1세트에는 화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기운이 빠져 있는 모습을 보인다. 마르코는 거듭된 부진으로 일찌감치 교체되었고, 스타팅 멤버 대부분을 빼면서 아예 경기를 포기하는 듯한 운영을 했으나, 오히려 백업 멤버들이 들어가서 더 잘했다. 3세트 들어서야 배구다운 배구를 시작했으나 20점대에 접어들면서 고질적인 뒷심 부족으로 역전패.
경기직전 브람 교체를 비판하는 기사까지 떴는데기사 역시나 결과로 증명해내며 시몬빨 의혹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여기에 2월 1일 대한항공전마저 패하면서 시즌 '''두 번째 8연패'''와 동시에 '''홈경기 14연패'''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우자 옥저 팬들은 분노를 넘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 날 경기에서도 마르코를 경기 도중에 빼는 아스트랄한 선수 운용을 보였는데, 이 쯤이면 3라운드를 앞두고 브람을 왜 방출시켰는지 의문만 증폭시킨다. 이는 김세진 감독의 용병 보는 눈이 완벽하게 틀렸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연패 와중에도 꿋꿋이 제 몫을 해주며 프로 2년차에 접어들고 있던 조재성의 눈부신 활약이 위안일 정도.
그뒤 기적의 2연승을 달리고 2월 28일 KB손해보험과 맞붙는데, '''잘 하던''' 마르코를 빼고 조재성을 투입했지만 결국 패배한다. 그런데 그 교체이유가 뭔고 했더니...연승 마감, 김세진 감독 "마르코 교체, 분위기 변화 차원" 배구가 특히 분위기를 잘 타는 스포츠이긴 하지만, 브람 때도 그렇고 이쯤되면 분위기에 대한 집착이 도를 넘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막판 6라운드 들어서는 승수를 어느 정도 쌓아 간신히 10승(26패)으로 시즌을 마감했으며, OK저축은행 구단 측에서는 지난 2년이 실패를 모르고 달려온 김세진 감독에게 보약이 된 시간이 됐을 것이라고 받아들여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자는 데 견해를 모아 경질 없이 김세진 체제를 계속 이어나가기로 결정했다.

4.1.5. 2018-19 시즌


최근 두 시즌동안 최하위로 마감했기 때문에 김세진 감독의 이번 시즌 행보가 더더욱 중요해졌다. 용병 드래프트에서 쿠바 출신의 요스바니 에르난데스를 영입하였다. 또한 삼성화재에 FA로 간 송희채의 보상선수로 부용찬을 받아왔다. 수비 보강에 중점을 두긴 했지만 부용찬도 미필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팬들도 회의적으로 보고 있는 듯.
일단 개막전부터 한국전력전을 시작으로 우리카드, KB손해보험전을 연달아 잡는 등 개막 3연승을 이어가면서 기분 좋게 시작했다. 다만 상대 팀들이 우승 후보로 거론되지 않은 상대적으로 약체 팀들이었기 때문에 돌아오는 현대캐피탈전부터 진정한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0-3으로 시원하게 털렸다. 초반의 분위기를 살린다면 명예회복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살리지 못한다면 지난 시즌과 비슷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다음 경기인 친구인 신진식 감독의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와의 경기에서 3-0 셧아웃 승리를 거두었다. 게다가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에는 작년까지 주전 수비형 레프트이자 창단멤버였던 송희채가 있는 팀이라는 점에서 더 고무적인 승리이다.
그러나 2라운드를 거치며 서서히 힘이 딸리는 상황. 상대팀은 죄다 요스바니에게 서브 집중공략을 펼치는 데다 3라운드까지 현대캐피탈한테는 한번도 못이기고 있다는 게 문제. 3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4위 우리카드가 맹추격해오는지라 하루빨리 승수를 쌓아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요스바니가 엄청난 역할을 해주고 있지만 시몬만큼 체력이 높지 않고 조금씩 지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본인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는 요스바니의 체력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3라운드 들어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고, 4라운드 우리카드에게 무기력한 셧아웃 패배를 당하며 3위까지 빼앗기며 5위로 추락한 상황. 하루빨리 분위기 반전이 시급하다.
4라운드에서는 그나마 반등하며 삼성화재와 4위 경쟁을 하는 중. 3위 우리카드와의 승점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3위 경쟁 or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경쟁 루트로 가는 듯 했으나, 2019년 들어 우리카드가 무섭게 연슨 행진으로 오히려 선두 경쟁으로 치고 올라가면서 자칫하면 이번 시즌도 봄 배구 진출에 실패할 위기에 처할 수 있다.
그리고 2월 1일에 꼴찌 한국전력전과 설연휴인 2월 5일에 KB손해보험과의 경기가 있는데 하위권 두 팀을 모두 잡아야지만 봄배구 희망을 계속 이어 나갈수 있고 이 2경기를 모두잡는다는 가정하에 2월 9일 우리카드전도 상당히 중요하다.[16]
하지만 끝끝내 봄배구 희망은 꺼지고야 말았다. 3월 1일 현대캐피탈과의 경기에서 0:3으로 무기력한 패배를 당하며 현대캐피탈전 6전 전패와 동시에 준플레이오프 가능성마저 완전히 지워져버리며 최종적으로 포스트시즌 탈락 확정. 거기다가 KB손해보험이 미칠듯한 페이스로 삼성화재와 OK저축은행을 위협하는지라 시즌 초 선두권에서 6위까지 떨어지는 역대급 DTD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다.
결국 3월 11일 시즌 최종전 종료 후 5위로 시즌을 마치게 되었고 구단에 사표를 제출했고 팀이 그대로 받아들이며 감독직을 내려두게 되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성적 부진이지만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은 것에 의한 건강 문제도 큰 편이었다고 한다. 덧붙여 당초 지난 시즌 끝나고 물러날 생각이었는데 팀에서 전력 보강을 이유로 붙잡았던 거였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극한까지 받은게 몸상태 이상으로 나타났다는데 위벽이 헐어서 구토에 혈변까지 봤었다고 한다. (자동재생 주의)

5. 해설위원으로 복귀


2020-21 시즌을 앞두고 KBS N 스포츠 해설위원으로 복귀했다. 2012-13 시즌 이후 무려 8시즌 만에 해설위원으로 복귀한 셈이다. 본래는 2020 제천 KOVO컵대회 때부터 복귀할 예정이었으나 본인이 오랫동안 배구계를 떠나있었기 때문에 이왕이면 사전에 현장에 나가서 감독들과 인터뷰도 하고 철저히 준비해서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복귀 시기가 미뤄졌다고 한다.기사 2020년 10월 18일, 한국전력 vs 삼성화재의 경기가 해설위원 복귀전이 되었다. 지상파로는 11월 28일 대한항공 vs KB손해보험 경기로 복귀 신고를 알렸다.

6. 개인 수상


  • 1994년 - FIVB 월드리그 공격상
  • 1997년 - 슈퍼리그 MVP, 베스트6
  • 1998년 - 슈퍼리그 베스트6
  • 1999년 - AVC 아시아선수권 블로킹상
  • 1999년 - 슈퍼리그 베스트6
  • 2000년 - AVC 클럽 챔피언십 MVP
  • 2000년 - 슈퍼리그 베스트6
  • 2001년 - V-코리아 세미프로리그 MVP
  • 2002년 - 슈퍼리그 MVP
  • 2004년 - V-tour MVP, 공격상
  • 2005년 - V-리그 챔피언결정전 MVP
  • 2015년 - NH농협 V-리그 우승감독상
  • 2016년 - NH농협 V-리그 우승감독상

7. 여담



  • 2014~15시즌 V리그 우승을 거둔 후 우승 공약으로 EXID위아래를 추었었다.[17]
  • OB 베어스의 야구선수인 김형석의 소개로 전 체조 국가대표 선수였던 구나연과 열애, 1999년에 결혼했으나 2004년에 합의 이혼했다. 이후 홀로 지내다 현재는 前 흥국생명에서 선수 및 프런트 생활을 했던 8세 연하의 진혜지와 11년 열애 끝에 2020년 결혼했다. 연애 사실을 공개하기 전까지는 김세진 자신의 이혼 경험 때문인지 함구하다가, 몇몇 인터뷰에서 조심스럽게 상대를 밝힌 뒤에는 진혜지가 배구장에 자주 오는 장면이 중계카메라에 여러 번 잡히고 있다. 가끔은 김세진의 부모, 즉 예비 시부모와 나란히 앉아서 관람하는 경우도 있는 걸로 보아 이미 집안에서도 인정하는 분위기인 듯. 한 번의 실패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결혼은 좀 더 신중히 준비하고 싶었으며 감독에서 물러난 후 여유가 생기면서 기다려준 진혜지를 위해 바로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 고등학교에 진학할 당시 옥천공업고등학교에 가게 된 이야기가 재미있는데, 당시 충북 지역의 배구부가 있는 학교로 제천시 광산공업고등학교(현 제천산업고등학교)가 있으며, 충북이 아니라도 가까운 곳으로는 대전중앙고등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많은 선배들이 있고, 대학진학이 비교적 쉬운 광산공업고등학교를 가라고 권유했으나, 용의 꼬리가 될 바에는 닭의 머리가 되고 싶다고 하면서 옥천공업고등학교에 가겠다고 선언한다. 당연히 학교나 집에서 난리가 난 것은 안 봐도 비디오. 그런데 그렇게 선언한 건 당시 중학교 선배들 중 많이 갈구거나 때리는 선배들이 광산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기 때문에 그 선배들을 다시는 만나기 싫어서 옥천공업고등학교에 가겠다고 한 거라고.[18]
  • 현역 시절 삼성화재에서 한솥밥을 같이 먹었던 김상우와 함께 숨겨진 동안 속성 소유자이기도 하다. 오히려 선수 시절보다 더 젊어졌다고 주장하는 팬들도 상당수.
  • 전처 구나연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가 있다. 믹스나인에 출연한 김승민으로, 1차 합격자에는 들지 못했다. 현재 미스틱연습생이다.[19] 아들의 양육권은 전처 구나연에게 있는 듯. 참고로 구나연과 작사가 김이나가 사촌지간이다.
  • 1994년 월드리그에서 최우수공격상을 받아 월드스타의 칭호를 얻었다. 우리나라 배구선수가 세계대회에서 최우수공격상을 받은 사례가 없었고, 그때 보여준 포스는 대단했다. 최우수공격상을 받자 신문에서 월드스타로 보도되어 선수내내 그 칭호가 따라다녔다.
  • 히든싱어6 2화 김원준편의 패널로 참여해, 김원준과 의외의 절친 친분을 보여줬다. 노래부르는 목소리가 비슷한 연으로 친해졌다고한다.

8. 관련 문서



[1] 이후 옥천고등학교에 통합. 현재 옛 옥천공고 자리에는 충북도립대학교이 들어서 있다.[2] 아내의 맛에 출연하면서 혼인신고를 한다고 한다.[3] 전 부인 구나연 소생이다.[4] 한국전력에서 신춘삼 감독 경질 후 신영철 감독이 부임하기 전에 감독대행을 맡았던 그 사람 맞다.[5] 사실 당시 한양대학교의 시스템을 볼 때, 김세진이 들어갈 자리가 라이트 외엔 딱히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양손을 다 쓸수 있던 김세진을 왼손으로 돌린 것으로 보인다. 김세진이 막 입학자 신분으로 대통령배에 뛰었을 당시에는 레프트는 강성형(89학번, 현대자동차)과 이병희(91학번, 고려증권 → 한국전력), 센터는 장홍석(89학번, LG화재)과 윤종옥(90학번, 대한항공) 등 선배들이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김세진은 자연적인 왼손잡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특이한 스타일이었다. 국대 후계자였던 장병철의 스파이크 궤적과 비교해보면 확연해지는데, 왼손잡이 선수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역회전 움직임도 없었고 크로스보다는 직선 공격을 주로하는 어떻게 보면 손만 왼손으로 바꾼 오른손잡이 장신 라이트 공격수의 그것과 유사했다. 그것이 오히려 김세진의 높이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이 때문에 나쁜 토스의 처리는 월드스타 공격수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좋지 않았다. 성인배구 들어와서야 주 손이 아닌 반대 손으로 엄청난 공격력을 보여주긴 했지만, 경험부족과 테크닉이 익숙하지 않던 시절에는 나쁜 토스를 처리할때 흔히 말하는 삑사리, 홈런볼이 잦았던 편.[6] 1994 월드리그 최우수 공격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당시는 최종 라운드에 오르지 못한 팀의 선수라도 조별 라운드에서 거둔 성적이 말소되지 않고 그 기록 그대로 대회가 끝날 때까지 적용됐다.[7] 여기까지 6인제 구기종목인 배구 국대 주전 라이트, 레프트, 센터, 세터. 다만, 신영철의 위치를 그대로 물려받은 최태웅이나 장윤창의 자리를 이어받은 김세진과 달리 신진식박희상이라는 신영철과 조합이 더 좋은 올어라운드 플레이어가 있었던 관계로 확고한 주전이었다고 말하기는 조금 어렵다. 신영철 시대 이후 같은 팀의 최태웅이 국대 주전 세터가 되자 '삼성화재 전위=국대 전위' 공식이 완성되어 버린다.[8] 이 당시 김세진은 '장난하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자기는 코치 경험도 없는데 감독 제의가 왔으니..[9] 김상우가 본인의 삼성화재 시절에 했던 새벽 훈련을 LIG에 도입하려다 선수들의 반발에 못 이겨 접었던 적이 있었다.[10] 당시 석진욱은 무릎 때문에 계속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치용 감독이 계속 은퇴를 만류하여 현역으로 뛰고 있었다. 신생 팀에 감독으로 갓 취임한 김세진은 코칭스탭으로 석진욱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신치용 감독에게 요청하여 석진욱을 수석코치로 영입할 수 있었다.[11] 세트 후반부에 볼 수 있는 전략으로, 무리한 공격적인 서브 대신 상대의 리시브 라인을 흔드는 목적타 서브 내지는 서비스 성격의 안정적인 서브를 넣어 상대 공격을 받아낸 뒤 다음 공격을 노리는 전략이다.[12] 사족으로 여자부의 모든 팀도 10승 이상씩 했다.(최하위 도로공사가 11승)[13] 잘하던 벨기에 국대 용병에 책임을 돌린 모양새여서 적지 않은 비판에 직면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결과라도 좋았으면 별 말이 안 나왔겠으나...[14] 그 와중에 1세트는 비디오 판독 오심이라는 막장 사태로 인해 주워먹은 거나 다름없었다.[15] 올시즌 4전 4패, 모두 3점 헌납[16] 어제 대한항공전 세트스코어 3대1로 패배해 준플레이오프 가능성이 줄어들었지만 대한항공의 분위기가 썩 좋지는 않고 4라운드에서 기복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남은 5라운드 4경기에서 최소 3승1패는하고 대한항공이 남은 5라운드 4경기에서 승률 5할 미만을 찍기를 바래야 한다.[17] 원래는 우승직후 현장에서 레깅스를 입고 추겠다고 미디어데이때 공약했으나 준비해오지 못했다면서 후에 우승파티에서 췄다. 여담으로 당시 맞대결 감독인 신치용은 이장희의 한잔의 추억을 부르겠다고 했었다.[18] 옥천공업고등학교는 1999년 옥천고등학교에 흡수되는 형식으로(배구부도 같이 흡수) 폐교되었다.[19] 아들이 나간 믹스나인이라는 오디션 서바이벌이자 사기극의 촬영장이 하필 옥저의 클럽하우스 소재지인 용인 대웅경영개발원이었다. 시점도 리그 준비로 바쁜 때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