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제(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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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진나라(晉)의 제15대 황제이자, 동진(東晉)의 마지막 황제. 동진이 멸망하고 결국 유유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였다.
2. 생애
2.1. 초기
태원 11년(386년)에 태어났으며, 안제 사마덕종의 친동생이었다. 낭야왕(琅邪王)에 책봉되었다가 위장군, 개부의동삼사, 사도가 되었다. 태재로 승진했다가 환현이 황제가 되자 석양공이 되어 사마덕종과 함께 심양에서 살았다. 사마덕종이 복위하자 다시 낭야왕에 책봉되었고 서주 자사, 대사마, 사도가 되었다. 낭야왕 시절에도 모자란 형 사마덕종의 수발을 정성스럽게 돌봐 줘서 인망을 얻었다.
2.2. 사마진의 마지막 황제
의희 14년(418년) 12월, 사마덕종이 죽자,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형인 사마덕종이 지적 장애를 앓고 있어 그냥 제위를 받았다간 '''찬탈이 확 티가 나니''' 임시로 세운 허수아비 황제였다.
사마덕문은 불교를 깊이 믿어서 6척 높이의 금불상을 제작하여 친히 와관사까지 10여 리를 걸으면서 금불상을 맞이했다. 사람됨이 공손하고 신중했는데 원희 2년(420년) 6월, 중서령 부량이 송공 유유의 뜻에 따라 사마덕문에게 유씨에게 양위한다는 조서를 내리도록 했다.
사마덕문은
라고 말하며 흔쾌히 붓을 들고 붉은 종이에 양위 조서를 썼다.'진씨(사마씨) 천하는 이미 환현 시기에 멸망했으나, 유공(유유)에 의하여 또 다시 20년이나 연장되었다. 이에 짐은 이 일을 달갑게 여긴다.'
유유는 선양받은 다음 사마덕문을 영릉왕으로 봉했지만 안제 사마덕종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정상인에다가 통치 능력도 괜찮은지라 살려두기에는 너무 위험했으므로 후환을 없애기 위해 낭야낭중령 장의에게 독술 한 단지를 주면서 사마덕문을 독살하게 했다. 그러나 장위는 황제를 독살하고 사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하다면서 자신이 그 독술을 마시고 죽었다.
2.3. 참척과 폐위
유유는 그 후 사마덕문에게서 아들이 태어날 때마다 사람을 보내 죽였다. 사마덕문은 자기에게 화가 미칠까봐 두려워해서 항상 저씨(저영원)와 같이 있었다. 그들은 침상 앞에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었으며 그 비용은 모두 저씨가 부담했다. 그래서 유유는 손을 쓰지 못하다가 이듬해 9월, 저비의 오빠 저숙도와 저담지 형제에게 영릉으로 가서 저씨를 만나게 했다. 저씨는 별실에서 그들을 만났고 유유가 보낸 병사들은 그 틈을 타서 담장을 넘어가 사마덕문에게 독약을 먹으라고 강요했다.
사마덕문은
라면서 태연히 말했고 병사들은 이불을 덮어서 질식사시켰는데[1] 그때의 나이가 36세였다. 11월에 충평릉에 안장되었으며 유유는 백관을 이끌고 장례 행렬을 바라봣다.[2]불교에서는 자살한 사람은 내세에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없다고 했네. 그러니 그냥 죽이게.
사실 유유 입장에서 사마덕문을 죽이는 것은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서진의 무제 사마염이 조위의 원제 조환, 촉한의 후주 유선, 손오의 말제 손호를 살려준 것은 그들이 무능하거나 지나친 폭군이라 폐위된 뒤 더 이상 영향력을 가질 수 없었던 게 컸고 그 이전에 조위가 헌제를 살려준 것도 헌제에겐 아무런 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한을 찬탈한 조위나 조위를 찬탈한 서진이나 이전에 이미 기반을 충분히 갖추었으나, 유유는 조위나 서진의 건국자만큼의 기반을 갖지 못했고 사마덕문은 유선, 조환, 헌제처럼 무능하거나 아예 힘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며 손호처럼 인격이 더러운 것도 아니고 되려 인격까지 선량해서 인망을 모으기 매우 쉬웠다.
결과적으로 그냥 폐위시키고 넘어가기에는 위험했기 때문에 유유는 두 황제를 죽이는 오명을 쓰더라도 자신의 후계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후 유유의 후손 역시 소도성이 같은 이유를 걸어 죽이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북송에 이르기 전까지 선양의 끝은 무조건 살육으로 끝나게 되었다.
2.4. 사후
공제 사마덕문의 장녀 해염공주는 무제 유유의 뒤를 이은 소제 유의부의 부인이 되었다가 남편이 황제가 되자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남편이 막장이라서 금방 폐위되는 바람에 황후 생활을 오래하지 못했고 과부가 되었다가 문제 유의륭 원가 16년(439년)에 죽었다. 차녀 부양공주에 대해서는 해염공주의 친동생이라는 것 외에는 거의 알려진 게 없다.출처
3. 기타
4. 둘러보기
[1] 아버지 사마요와 같은 방법으로 죽었다고 한다.[2] 유유의 송나라는 이렇게 사마덕문과 사마씨를 몰살시켰는데 결국 이것은 그 후 끔찍한 레이스의 시작이 되었다. 자치통감의 주석을 단 원나라의 호삼성은 유유의 증손자인 송나라 순제 유준의 말로를 보고 '이후부터 선양을 한 전임 황제가 생명을 건진 사례는 거의 없었다.'라고 주석을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