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아이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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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ns Eisler. 독일의 작곡가 겸 좌파 정치운동가.
1898.7.6~1962.9.6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루돌프 아이슬러는 철학 교수였고, 어머니인 마리아 이다 피셔는 도축업자 집안의 딸이었다. 부부 사이에는 이미 장녀 엘프리데(훗날 어머니의 성을 따라 루트 피셔로 개명)와 장남 게르하르트 두 명의 자식이 있었고, 한스는 막내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칸트 철학의 권위자이자 명망 있는 지식인이었지만, 돈을 버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탓에 집안 형편은 현시창이었다고 한다. 1901년에는 일가가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했고, 한스는 대부분의 청소년기를 그 곳에서 보냈다. 누나와 형은 10대 시절부터 급진적인 사회주의 노동자 운동에 가담했는데, 경찰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혀 감시를 받을 정도였다. 당연히 막내인 한스도 그 영향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오스트리아군 육군에 징집되어 최전선에 배치되었고, 전투 중 여러 차례 부상을 당했다. 종전 후 빈으로 돌아온 뒤 1919년에 급진적인 음악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를 만났고, 곧 그의 문하생이 되어 1923년까지 엄격한 음악 수업을 받았다. 이것이 아이슬러가 받은 최초의 '전문적인' 음악 교육이었다.
아이슬러는 스승의 12음 기법을 초기 작품에 일찌감치 도입할 정도로 강한 영향을 받았고, 쇤베르크도 가난한 아이슬러에게 음악출판사인 우니베르잘의 악보 교정 작업이나 편곡 등 일거리를 알선해 주는 등 경제적인 면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이슬러 외에도 쇤베르크가 가르친 학생들은 '자신이 내고 싶은 만큼만' 수업료를 지불하면 되었다. 심지어 학생이 찢어지게 가난한 경우, 무급으로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사제 관계는 원만하지만은 않았는데, 아이슬러는 쇤베르크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폐쇄적이고 부르주아적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쇤베르크는 아이슬러가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여러 차례 비판했다.
어쨌든 아이슬러는 본격적인 첫 작품으로 피아노 소나타를 발표했고, 이 작품으로 빈 예술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인 작곡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25년에는 베를린의 음악학원에 교수 자리를 얻어 고국인 독일로 다시 이주했고, 이듬해에는 누나와 형의 뒤를 이어 독일공산당에 입당했다. 쇤베르크는 아이슬러의 공산당 입당 소식을 듣고 제대로 꼭지가 돈 끝에 절연했다.
아이슬러는 공산당의 정치 활동에도 참가하면서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현대적인 작곡법 대신,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게 대중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민중가요를 중심으로 작곡 활동을 했다. 1930년에는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처음 만났는데, 브레히트는 당시 쿠르트 바일과 '마하고니 시의 흥망' 이나 '서푼짜리 오페라' 같은 사회 풍자적인 음악극을 만들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바 있었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바일의 음악이 자신의 희곡에서 핵심으로 제시하는 문제를 직접 들추기 보다는 냉소와 조롱으로만 일관한다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바일과 결별한 뒤 새로운 작업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브레히트는 아이슬러를 만난 직후 연극 '조치' 와 '어머니' 의 연출가와 극음악 작곡가라는 관계로 공동 작업을 시작했고,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나 파시즘, 나치즘 등 극우 사상의 모순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면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브레히트와 아이슬러가 선보인 이러한 직설법은 1933년에 나치당의 수장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되면서 큰 위기를 겪기 시작했고, 게다가 나치가 주적으로 공언하며 레이드의 대상으로 삼았던 유대인이자 공산당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갖고 있던 아이슬러로서는 망명 외에는 살 길이 없는 상태였다. 결국 그 해 일찌감치 브레히트와 함께 독일을 떠나 프랑스, 소련, 영국, 덴마크, 체코, 스페인 등 유럽 각지를 떠돌다가 1938년 미국으로 최종 망명했다. 망명 생활 중에는 주로 영화음악 작곡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철학자로 유명한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함께 세계 최초의 영화음악 이론서인 '영화를 위한 작곡' 을 공동 저술하기도 했다. 그리고 망명 기간 중에는 발표하지 않았지만, '헐리우드 노래집' 과 '독일 교향곡' 같은 중요한 작품들도 작곡했다.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는데, 전쟁 말기부터 싹트고 있던 미국과 소련 양대 진영의 대립이 냉전으로 이어지면서 미국에 망명 중이던 한스와 게르하르트 형제는 졸지에 빨갱이로 분류되었다. 때마침 극단적인 반공주의인 매카시즘이 전 미국을 개발살내고 있었고, 이들 역시 비미활동위원회의 청문회에 출석해 굴욕을 당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들 형제를 공격하는데 앞장선 이가 누나였던 루트 피셔였다는 것이다. 피셔는 망명 이전부터 독일공산당 지도부와 논쟁을 벌이다가 당에서 제명당했는데, 이 때문에 반공주의자로 전향했다. 찰리 채플린을 비롯한 친분 있는 저명 인사들이 아이슬러 형제를 변호하고 청문회의 불공평과 비민주적 절차를 계속 비판했지만, 결국 1947년에 국외 추방 형식으로 유럽에 귀국했다. 일단 빈으로 가서 정착을 시도했는데, 브레히트의 권유로 동독에 이주했고 나머지 여생도 그 곳에서 보냈다.
동독 시절에 아이슬러는 브레히트 뿐 아니라 요하네스 베허, 쿠르트 투홀스키 등의 문인들과도 작업했는데, 특히 베허의 '폐허에서 부활하여(Auferstanden aus Ruinen)' 라는 시에 붙인 노래는 1949년에 공식 수립된 동독 정부의 국가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고 동독 정부가 통일 노선을 사실상 포기, '두 개의 독일'이 고착화되면서 동독 정부가 가사를 뺀 기악합주 버전 만을 연주하기로 해 반쪽짜리 국가가 되고 만다. 이외에도 여러 곡의 정치 가요와 극음악, 아이슬러 자신이 직접 대본을 작성한 오페라 '요한 파우스투스' 등의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아이슬러의 생각과 달리, 동독 지도층은 스탈린 식의 폐쇄적이고 교조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관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권력층의 경직 현상과 함께 아이슬러가 추진했던 진보적인 음악 활동도 비판을 받거나 공적인 논쟁 대상으로 오르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특히 '요한 파우스투스' 의 대본에 얽힌 논쟁은 아이슬러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고, 결국 대본만 남긴 채 작곡이 모두 중단되었다.
1956년에는 오랜 친구였던 브레히트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이에 충격을 받은 아이슬러는 우울증과 건강 악화로 고생하게 되었다. 창작 활동도 위축되었고, 1962년에 동베를린에서 타계했다.
아이슬러의 창작 시기는 초기(학습기)-중기 I(독일 활동기)-중기 II(망명 시기)-후기(동독 정착기)로 크게 개괄할 수 있는데, 초기에는 생애 란에 설명한 대로 쇤베르크 등 '신 빈 악파' 의 전면적인 영향 아래 있었다. 당연히 그들이 사용한 무조나 12음 기법의 어법을 수용하고 있는데, 단 피아노 소나타나 디베르티멘토 같은 초기작에서도 같은 기법을 수용하면서도 조성음악의 감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고유의 독특한 풍자와 신랄함을 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베를린 이주 직전이었던 1924년에 발표한 멜로드라마 '팔름슈트룀' 은 스승 쇤베르크의 '예술지상주의' 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곡이었는데, 이어 '한스 아이슬러의 일기' 에서는 자기 자신의 소시민 근성마저 까버리는 등 온갖 부조리를 자근자근 씹었다. 그리고 별 내용도 없는 신문 기사 쪼가리를 가사로 사용한 '신문 조각' 같은 꽤 특이한 아이디어의 곡도 내놓았다.
하지만 이들 작품은 당시 공산당 등 사회주의 운동의 주축이었던 노동자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전위적인 면모 때문에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결국 아이슬러는 그 동안 배운 현대적인 작곡 기법을 대부분 포기했고, 당시 유행하던 민중가요의 양식에 바흐 음악의 굳건한 조형미와 재즈/블루스 등 미국에서 넘어온 유행가의 양식을 결합해 음악적인 흥미와 가사의 선동성 모두를 충족시키는 창작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브레히트와 공동 작업을 시작한 뒤로 작품의 구성과 완성도 면에서 출중한 곡들이 많이 나왔는데, 여러 극음악과 대표적인 민중가요들인 '비밀스러운 행진', '연대의 노래(Solidaritätslied)[1] ', '통일전선의 노래(Einheitsfrontlied)' 등이 손꼽힌다. 이들 곡은 비슷하게 미국 물을 먹은 바일의 곡과 다르게 가사의 주제를 직접 연주하고 듣는 이에게 전달하고자 했고, 에른스트 부슈 같은 민중가수들에 의해 빠른 속도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아직 초기 유성영화 단계였던 때부터 시작한 영화음악의 경우에도 결코 설렁설렁 써내는 일이 없었는데, 영화음악에서 주제를 따와 관현악 모음곡 등으로 재구성하는 등의 작업을 일찌감치 시도했다. 아이슬러는 현학적인 현대 기법 뿐 아니라 신고전주의, 후기 낭만주의 등 '음악은 순수 예술일 뿐이고, 정치와는 무관하다' 고 주장하는 모든 사조에 대해 반대했고, 많은 작곡가들이 영화음악을 단순히 장면 묘사에 그치는 '미키마우싱' 이나 청중들의 막연한 감성에 호소하는 류의 음악으로 양산하는 현실에도 비판적이었다.
나치 집권 후 계속되었던 망명 생활 중에 아이슬러의 음악관도 차츰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그 동안 의도적으로 기피했던 12음 기법을 다시 작곡에 도입했다. 이는 나치가 공개적으로 헐뜯었던 예술 사조를 오히려 대놓고 쓰면서 엿먹이려는 의도였고, 소교향곡이나 아홉 곡의 실내 칸타타 같은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 망명 후에는 먼저 도착했던 스승 쇤베르크와의 관계도 회복되었다. 쇤베르크는 1933년에 베를린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해고당하자, 항의도 하지 않고 곧장 짐을 싸 미국으로 이주했다. 유대인 음악인 중 가장 빨리 망명한 사례. '비에 관한 열네 가지의 묘사' 같은 곡은 스승에게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미국 망명기의 아이슬러 작품들은 대체로 그 폭이 좁아졌는데, 망명자로서 섣불리 정치적 신념을 내비치기 힘들었던 상황과 빈곤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망명 중의 아이슬러는 주로 영화음악 작곡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명성을 얻었는데, 망명 이전과 마찬가지로 영화음악을 기악 작품으로 편곡하는 2차 창작도 계속 시도했다. 위에 쓴 '비에 관한...' 도 원곡은 영화음악이었고, '실내교향곡' 이나 '다섯 개의 관현악곡' 도 마찬가지로 영화음악에서 주제를 빌어오거나 편곡한 곡들이다.
한편 망명 생활 중에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망명자로서 느끼던 복잡한 심경을 담은 '헐리우드 노래집' 이나 반파시즘 칸타타 '독일 교향곡' 도 주목할 만한 대작들이다. 전자는 브레히트 외에 뫼리케, 괴테, 아이헨도르프, 횔덜린, 아나크레온 등의 시를 가지고 만든 가곡집인데, 각 가곡들은 기껏해야 1~2분 남짓한 길이지만 원시들을 꼼꼼히 검토하고 재구성해서 망명 생활의 고통과 파시즘에 대한 비판, 왜곡된 독일 정신에 대한 조롱 등으로 확 바꾸고 있다. '독일 교향곡' 은 브레히트-아이슬러 콤비의 작품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복잡한 작품으로 손꼽히는데, 명칭은 교향곡이지만 곡 속에 고전적인 기악 교향곡과 성악 칸타타 등 여러 장르가 혼합되어 있다.
유럽으로 돌아간 후에는 다시 망명 전의 어법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단 쇤베르크로부터 배운 현대적인 작곡 기법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교육적인 측면에서 대단한 장점이 있음을 인정하고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가르쳤는데, 쇤베르크를 '부르주아 작곡가' 라고 까던 동독 정부로서는 대단히 거슬리는 일이었다.
아이슬러는 '예술지상주의' 에 반기를 든 작곡가들 중 가장 급진적인 노선을 취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심지어 아이슬러의 이러한 점을 계속 비판했던 쇤베르크도 '나폴레옹의 송가' 와 '바르샤바의 생존자' 같이 독재와 홀로코스트를 고발하는 작품을 썼다. 쇤베르크의 이러한 입장 변화에는 아이슬러의 활동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한편 후배 작곡가들도 아이슬러의 창작관에서 영향을 받거나 비슷한 태도를 보여주었는데, 대표적으로 한스 베르너 헨체와 루이지 노노를 들 수 있다. 헨체는 피노체트가 일으킨 1973년 칠레 쿠데타를 소재로 한 '트리스탄' 이나 체 게바라에게 헌정한 오라토리오 '메두사의 뗏목' 같은 분명한 정치적 방향성을 띈 작품으로 전후 독일 사회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노노는 스페인 내전 때 독일 공군이 게르니카에 자행한 무차별 폭격을 소재로 한 '게르니카의 승리' 라는 반어적인 곡을 썼고, 독재 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죽음에 이르는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한 오페라 '인톨레란차' 를 발표한 바 있다.
간결하면서도 강한 메시지 전달에 효과적이었던 아이슬러의 민중가요들은 세계 각국의 노동 운동 현장에서 번안되어 사용되었는데, 한국에서도 '비밀스러운 행진(Der heimliche Aufmarsch)'이 '투쟁의 물결' 이라는 노동가요로, '연대의 노래(Solidaritätslied)', '통일전선의 노래' 는 전곡이 한국어 번안되어 시위 현장에서 불려졌다. 이들 번안곡은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국내 민중가요에도 영향을 미쳤다. 거꾸로 아이슬러가 기존 민중가요를 편곡해 보급한 사례도 있는데, 1930년대 독일 강제수용소에서 죄수들에 의해 공동 창작된 우의적 저항가요인 '수렁의 병사들(Die Moorsoldaten)' 이 대표적인 예다. 독일의 유명한 록 그룹 '디 토텐 호젠(Die Toten Hosen)'도 부른 곡이다.
서독에서는 1970년대에 아이슬러 음악의 공연과 출판, 연구 금지 조치가 해제되었고, 이후 좌파 계열의 음악가들과 음악학자들에 의해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통일 후에는 아이슬러 작품의 동독 시절 음원들이 CD화되어 출반되고 있고, 동베를린 지구에 있던 음악대학은 '한스 아이슬러 음악대학' 으로 개칭되었다. 한국에서는 여성 지휘자 성시연이 이 곳 출신이다.
그러나 아이슬러가 구현하고자 한 '정치적 음악' 에 대한 비판 여론도 분명히 존재한다. 사회주의 낙원이라고 자뻑하던 소련이나 중국에서는 체제의 경직성이 오히려 음악을 정권의 노리개로 만들어버리는 흑역사를 연출하기도 했고, 역으로 극우 세력이 집권한 나라에서도 마찬가지 사례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음악인이 현실 인식을 갖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절대 권력과 결탁할 경우에는 의도가 어떻든 악용될 수 있는 위험성은 아무리 지적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에서는 워낙 반공주의의 힘이 강대했던 탓에, 아이슬러의 음악이 공론화된 것은 1980년대 후반에 가서였다. 그리고 쇼스타코비치 같은 경우와 달리 지금도 보급률이 바닥을 기는 상태인데, 메시지가 직접 전달되는 성악곡은 그렇다 쳐도 기악곡마저 연주하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다. 순수음악 계통 인사들이 지배하다시피 한 한국 음악계의 풍토 탓인지, 아니면 아직도 좌빨로 몰리는 것을 음악인들이 두려워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귀차니즘 때문인지...
Hanns Eisler. 독일의 작곡가 겸 좌파 정치운동가.
1898.7.6~1962.9.6
1. 생애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루돌프 아이슬러는 철학 교수였고, 어머니인 마리아 이다 피셔는 도축업자 집안의 딸이었다. 부부 사이에는 이미 장녀 엘프리데(훗날 어머니의 성을 따라 루트 피셔로 개명)와 장남 게르하르트 두 명의 자식이 있었고, 한스는 막내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칸트 철학의 권위자이자 명망 있는 지식인이었지만, 돈을 버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탓에 집안 형편은 현시창이었다고 한다. 1901년에는 일가가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했고, 한스는 대부분의 청소년기를 그 곳에서 보냈다. 누나와 형은 10대 시절부터 급진적인 사회주의 노동자 운동에 가담했는데, 경찰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혀 감시를 받을 정도였다. 당연히 막내인 한스도 그 영향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오스트리아군 육군에 징집되어 최전선에 배치되었고, 전투 중 여러 차례 부상을 당했다. 종전 후 빈으로 돌아온 뒤 1919년에 급진적인 음악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를 만났고, 곧 그의 문하생이 되어 1923년까지 엄격한 음악 수업을 받았다. 이것이 아이슬러가 받은 최초의 '전문적인' 음악 교육이었다.
아이슬러는 스승의 12음 기법을 초기 작품에 일찌감치 도입할 정도로 강한 영향을 받았고, 쇤베르크도 가난한 아이슬러에게 음악출판사인 우니베르잘의 악보 교정 작업이나 편곡 등 일거리를 알선해 주는 등 경제적인 면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이슬러 외에도 쇤베르크가 가르친 학생들은 '자신이 내고 싶은 만큼만' 수업료를 지불하면 되었다. 심지어 학생이 찢어지게 가난한 경우, 무급으로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사제 관계는 원만하지만은 않았는데, 아이슬러는 쇤베르크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폐쇄적이고 부르주아적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쇤베르크는 아이슬러가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여러 차례 비판했다.
어쨌든 아이슬러는 본격적인 첫 작품으로 피아노 소나타를 발표했고, 이 작품으로 빈 예술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인 작곡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25년에는 베를린의 음악학원에 교수 자리를 얻어 고국인 독일로 다시 이주했고, 이듬해에는 누나와 형의 뒤를 이어 독일공산당에 입당했다. 쇤베르크는 아이슬러의 공산당 입당 소식을 듣고 제대로 꼭지가 돈 끝에 절연했다.
아이슬러는 공산당의 정치 활동에도 참가하면서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현대적인 작곡법 대신,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게 대중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민중가요를 중심으로 작곡 활동을 했다. 1930년에는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처음 만났는데, 브레히트는 당시 쿠르트 바일과 '마하고니 시의 흥망' 이나 '서푼짜리 오페라' 같은 사회 풍자적인 음악극을 만들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바 있었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바일의 음악이 자신의 희곡에서 핵심으로 제시하는 문제를 직접 들추기 보다는 냉소와 조롱으로만 일관한다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바일과 결별한 뒤 새로운 작업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브레히트는 아이슬러를 만난 직후 연극 '조치' 와 '어머니' 의 연출가와 극음악 작곡가라는 관계로 공동 작업을 시작했고,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나 파시즘, 나치즘 등 극우 사상의 모순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면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브레히트와 아이슬러가 선보인 이러한 직설법은 1933년에 나치당의 수장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되면서 큰 위기를 겪기 시작했고, 게다가 나치가 주적으로 공언하며 레이드의 대상으로 삼았던 유대인이자 공산당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갖고 있던 아이슬러로서는 망명 외에는 살 길이 없는 상태였다. 결국 그 해 일찌감치 브레히트와 함께 독일을 떠나 프랑스, 소련, 영국, 덴마크, 체코, 스페인 등 유럽 각지를 떠돌다가 1938년 미국으로 최종 망명했다. 망명 생활 중에는 주로 영화음악 작곡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철학자로 유명한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함께 세계 최초의 영화음악 이론서인 '영화를 위한 작곡' 을 공동 저술하기도 했다. 그리고 망명 기간 중에는 발표하지 않았지만, '헐리우드 노래집' 과 '독일 교향곡' 같은 중요한 작품들도 작곡했다.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는데, 전쟁 말기부터 싹트고 있던 미국과 소련 양대 진영의 대립이 냉전으로 이어지면서 미국에 망명 중이던 한스와 게르하르트 형제는 졸지에 빨갱이로 분류되었다. 때마침 극단적인 반공주의인 매카시즘이 전 미국을 개발살내고 있었고, 이들 역시 비미활동위원회의 청문회에 출석해 굴욕을 당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들 형제를 공격하는데 앞장선 이가 누나였던 루트 피셔였다는 것이다. 피셔는 망명 이전부터 독일공산당 지도부와 논쟁을 벌이다가 당에서 제명당했는데, 이 때문에 반공주의자로 전향했다. 찰리 채플린을 비롯한 친분 있는 저명 인사들이 아이슬러 형제를 변호하고 청문회의 불공평과 비민주적 절차를 계속 비판했지만, 결국 1947년에 국외 추방 형식으로 유럽에 귀국했다. 일단 빈으로 가서 정착을 시도했는데, 브레히트의 권유로 동독에 이주했고 나머지 여생도 그 곳에서 보냈다.
동독 시절에 아이슬러는 브레히트 뿐 아니라 요하네스 베허, 쿠르트 투홀스키 등의 문인들과도 작업했는데, 특히 베허의 '폐허에서 부활하여(Auferstanden aus Ruinen)' 라는 시에 붙인 노래는 1949년에 공식 수립된 동독 정부의 국가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고 동독 정부가 통일 노선을 사실상 포기, '두 개의 독일'이 고착화되면서 동독 정부가 가사를 뺀 기악합주 버전 만을 연주하기로 해 반쪽짜리 국가가 되고 만다. 이외에도 여러 곡의 정치 가요와 극음악, 아이슬러 자신이 직접 대본을 작성한 오페라 '요한 파우스투스' 등의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아이슬러의 생각과 달리, 동독 지도층은 스탈린 식의 폐쇄적이고 교조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관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권력층의 경직 현상과 함께 아이슬러가 추진했던 진보적인 음악 활동도 비판을 받거나 공적인 논쟁 대상으로 오르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특히 '요한 파우스투스' 의 대본에 얽힌 논쟁은 아이슬러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고, 결국 대본만 남긴 채 작곡이 모두 중단되었다.
1956년에는 오랜 친구였던 브레히트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이에 충격을 받은 아이슬러는 우울증과 건강 악화로 고생하게 되었다. 창작 활동도 위축되었고, 1962년에 동베를린에서 타계했다.
2. 주요 작품들
2.1. 성악
- 멜로드라마 '팔름슈트룀' (1924)
- 신문 조각 (1925~26)
- 한스 아이슬러의 일기 (1926)
- 혼성 합창을 위한 네 곡의 노래 (1928~29)
- 열네 곡의 노래들 (1934)
- 민중가요 '통일전선의 노래' (1934)
- 독일 교향곡 (1935~39)
- 레닌 레퀴엠 (1936~37)
- 실내 칸타타 제1~9번 (1937)
- 민중가요 '평화의 노래' (1937)
- 민중가요 '구걸의 노래' (1937)
- 우드버리 노래집 (1941)
- 헐리우드 노래집 (1942~47)
- 폐허에서 부활하여 (1949)
- 진지한 노래들 (1962)
2.2. 기악
- 목관 5중주를 위한 디베르티멘토 (1923)
- 피아노 소나타 제1번 (1923)
- 피아노 소나타 제2번 (1924~25)
- 관현악 모음곡 제1번 (1930)
- 관현악 모음곡 제3번 (1931)
- 관현악 모음곡 제2번 (1931)
- 관현악 모음곡 제6번 (1932)
- 관현악 모음곡 제4번 (1932)
- 소교향곡 (1932)
- 일곱 개의 피아노곡 (1932~34)
- 관현악 모음곡 제5번 (1935)
- 플루트, 오보에와 하프를 위한 소나타 (1935)
- 현악 4중주 (1938)
- 9중주 제1번 (1939)
- 비에 관한 열네 가지의 묘사 (1940)
- 실내교향곡 (1940)
- 9중주 제2번 (1940~41)
- 피아노 소나타 제3번 (1943)
2.3. 극음악/영화음악
- 극음악 '조처' (1930)
- 극음악 '어머니' (1931)
- 영화음악 '무인지대' (1931)
- 영화음악 '쿨레 밤페' (1931)
- 영화음악 '4천만' (1938)
- 영화음악 '잊혀진 마을' (1941)
- 극음악 '쿠얀불라크의 융단 직공' (1957)
3. 창작 성향
아이슬러의 창작 시기는 초기(학습기)-중기 I(독일 활동기)-중기 II(망명 시기)-후기(동독 정착기)로 크게 개괄할 수 있는데, 초기에는 생애 란에 설명한 대로 쇤베르크 등 '신 빈 악파' 의 전면적인 영향 아래 있었다. 당연히 그들이 사용한 무조나 12음 기법의 어법을 수용하고 있는데, 단 피아노 소나타나 디베르티멘토 같은 초기작에서도 같은 기법을 수용하면서도 조성음악의 감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고유의 독특한 풍자와 신랄함을 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베를린 이주 직전이었던 1924년에 발표한 멜로드라마 '팔름슈트룀' 은 스승 쇤베르크의 '예술지상주의' 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곡이었는데, 이어 '한스 아이슬러의 일기' 에서는 자기 자신의 소시민 근성마저 까버리는 등 온갖 부조리를 자근자근 씹었다. 그리고 별 내용도 없는 신문 기사 쪼가리를 가사로 사용한 '신문 조각' 같은 꽤 특이한 아이디어의 곡도 내놓았다.
하지만 이들 작품은 당시 공산당 등 사회주의 운동의 주축이었던 노동자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전위적인 면모 때문에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결국 아이슬러는 그 동안 배운 현대적인 작곡 기법을 대부분 포기했고, 당시 유행하던 민중가요의 양식에 바흐 음악의 굳건한 조형미와 재즈/블루스 등 미국에서 넘어온 유행가의 양식을 결합해 음악적인 흥미와 가사의 선동성 모두를 충족시키는 창작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브레히트와 공동 작업을 시작한 뒤로 작품의 구성과 완성도 면에서 출중한 곡들이 많이 나왔는데, 여러 극음악과 대표적인 민중가요들인 '비밀스러운 행진', '연대의 노래(Solidaritätslied)[1] ', '통일전선의 노래(Einheitsfrontlied)' 등이 손꼽힌다. 이들 곡은 비슷하게 미국 물을 먹은 바일의 곡과 다르게 가사의 주제를 직접 연주하고 듣는 이에게 전달하고자 했고, 에른스트 부슈 같은 민중가수들에 의해 빠른 속도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아직 초기 유성영화 단계였던 때부터 시작한 영화음악의 경우에도 결코 설렁설렁 써내는 일이 없었는데, 영화음악에서 주제를 따와 관현악 모음곡 등으로 재구성하는 등의 작업을 일찌감치 시도했다. 아이슬러는 현학적인 현대 기법 뿐 아니라 신고전주의, 후기 낭만주의 등 '음악은 순수 예술일 뿐이고, 정치와는 무관하다' 고 주장하는 모든 사조에 대해 반대했고, 많은 작곡가들이 영화음악을 단순히 장면 묘사에 그치는 '미키마우싱' 이나 청중들의 막연한 감성에 호소하는 류의 음악으로 양산하는 현실에도 비판적이었다.
나치 집권 후 계속되었던 망명 생활 중에 아이슬러의 음악관도 차츰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그 동안 의도적으로 기피했던 12음 기법을 다시 작곡에 도입했다. 이는 나치가 공개적으로 헐뜯었던 예술 사조를 오히려 대놓고 쓰면서 엿먹이려는 의도였고, 소교향곡이나 아홉 곡의 실내 칸타타 같은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 망명 후에는 먼저 도착했던 스승 쇤베르크와의 관계도 회복되었다. 쇤베르크는 1933년에 베를린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해고당하자, 항의도 하지 않고 곧장 짐을 싸 미국으로 이주했다. 유대인 음악인 중 가장 빨리 망명한 사례. '비에 관한 열네 가지의 묘사' 같은 곡은 스승에게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미국 망명기의 아이슬러 작품들은 대체로 그 폭이 좁아졌는데, 망명자로서 섣불리 정치적 신념을 내비치기 힘들었던 상황과 빈곤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망명 중의 아이슬러는 주로 영화음악 작곡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명성을 얻었는데, 망명 이전과 마찬가지로 영화음악을 기악 작품으로 편곡하는 2차 창작도 계속 시도했다. 위에 쓴 '비에 관한...' 도 원곡은 영화음악이었고, '실내교향곡' 이나 '다섯 개의 관현악곡' 도 마찬가지로 영화음악에서 주제를 빌어오거나 편곡한 곡들이다.
한편 망명 생활 중에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망명자로서 느끼던 복잡한 심경을 담은 '헐리우드 노래집' 이나 반파시즘 칸타타 '독일 교향곡' 도 주목할 만한 대작들이다. 전자는 브레히트 외에 뫼리케, 괴테, 아이헨도르프, 횔덜린, 아나크레온 등의 시를 가지고 만든 가곡집인데, 각 가곡들은 기껏해야 1~2분 남짓한 길이지만 원시들을 꼼꼼히 검토하고 재구성해서 망명 생활의 고통과 파시즘에 대한 비판, 왜곡된 독일 정신에 대한 조롱 등으로 확 바꾸고 있다. '독일 교향곡' 은 브레히트-아이슬러 콤비의 작품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복잡한 작품으로 손꼽히는데, 명칭은 교향곡이지만 곡 속에 고전적인 기악 교향곡과 성악 칸타타 등 여러 장르가 혼합되어 있다.
유럽으로 돌아간 후에는 다시 망명 전의 어법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단 쇤베르크로부터 배운 현대적인 작곡 기법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교육적인 측면에서 대단한 장점이 있음을 인정하고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가르쳤는데, 쇤베르크를 '부르주아 작곡가' 라고 까던 동독 정부로서는 대단히 거슬리는 일이었다.
4. 후대에 미친 영향과 사후의 평가
아이슬러는 '예술지상주의' 에 반기를 든 작곡가들 중 가장 급진적인 노선을 취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심지어 아이슬러의 이러한 점을 계속 비판했던 쇤베르크도 '나폴레옹의 송가' 와 '바르샤바의 생존자' 같이 독재와 홀로코스트를 고발하는 작품을 썼다. 쇤베르크의 이러한 입장 변화에는 아이슬러의 활동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한편 후배 작곡가들도 아이슬러의 창작관에서 영향을 받거나 비슷한 태도를 보여주었는데, 대표적으로 한스 베르너 헨체와 루이지 노노를 들 수 있다. 헨체는 피노체트가 일으킨 1973년 칠레 쿠데타를 소재로 한 '트리스탄' 이나 체 게바라에게 헌정한 오라토리오 '메두사의 뗏목' 같은 분명한 정치적 방향성을 띈 작품으로 전후 독일 사회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노노는 스페인 내전 때 독일 공군이 게르니카에 자행한 무차별 폭격을 소재로 한 '게르니카의 승리' 라는 반어적인 곡을 썼고, 독재 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죽음에 이르는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한 오페라 '인톨레란차' 를 발표한 바 있다.
간결하면서도 강한 메시지 전달에 효과적이었던 아이슬러의 민중가요들은 세계 각국의 노동 운동 현장에서 번안되어 사용되었는데, 한국에서도 '비밀스러운 행진(Der heimliche Aufmarsch)'이 '투쟁의 물결' 이라는 노동가요로, '연대의 노래(Solidaritätslied)', '통일전선의 노래' 는 전곡이 한국어 번안되어 시위 현장에서 불려졌다. 이들 번안곡은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국내 민중가요에도 영향을 미쳤다. 거꾸로 아이슬러가 기존 민중가요를 편곡해 보급한 사례도 있는데, 1930년대 독일 강제수용소에서 죄수들에 의해 공동 창작된 우의적 저항가요인 '수렁의 병사들(Die Moorsoldaten)' 이 대표적인 예다. 독일의 유명한 록 그룹 '디 토텐 호젠(Die Toten Hosen)'도 부른 곡이다.
서독에서는 1970년대에 아이슬러 음악의 공연과 출판, 연구 금지 조치가 해제되었고, 이후 좌파 계열의 음악가들과 음악학자들에 의해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통일 후에는 아이슬러 작품의 동독 시절 음원들이 CD화되어 출반되고 있고, 동베를린 지구에 있던 음악대학은 '한스 아이슬러 음악대학' 으로 개칭되었다. 한국에서는 여성 지휘자 성시연이 이 곳 출신이다.
그러나 아이슬러가 구현하고자 한 '정치적 음악' 에 대한 비판 여론도 분명히 존재한다. 사회주의 낙원이라고 자뻑하던 소련이나 중국에서는 체제의 경직성이 오히려 음악을 정권의 노리개로 만들어버리는 흑역사를 연출하기도 했고, 역으로 극우 세력이 집권한 나라에서도 마찬가지 사례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음악인이 현실 인식을 갖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절대 권력과 결탁할 경우에는 의도가 어떻든 악용될 수 있는 위험성은 아무리 지적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에서는 워낙 반공주의의 힘이 강대했던 탓에, 아이슬러의 음악이 공론화된 것은 1980년대 후반에 가서였다. 그리고 쇼스타코비치 같은 경우와 달리 지금도 보급률이 바닥을 기는 상태인데, 메시지가 직접 전달되는 성악곡은 그렇다 쳐도 기악곡마저 연주하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다. 순수음악 계통 인사들이 지배하다시피 한 한국 음악계의 풍토 탓인지, 아니면 아직도 좌빨로 몰리는 것을 음악인들이 두려워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귀차니즘 때문인지...
[1] 경제 대공황기에 등장한 좌파 영화 <쿨레 밤페>의 주제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