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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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UNESCO World Heritage''
이름
한국어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법주사
영어
''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
Beopjusa Temple
국가·
위치


대한민국 충청북도 보은군
등재
유형

문화유산
등재
연도

2018년
등재
기준

(iii)[1]
지정
번호

1562
[image]
1. 개요
2. 역사
3. 가람
3.1. 법주사 팔상전
3.1.1. 바깥고리
3.1.2. 국보 제55호
3.2. 대웅보전
3.3. 원통보전
3.4. 용화보전
3.4.1. 금동미륵입상
4. 유물
4.1. 법주사 쌍사자 석등
4.1.1. 국보 제5호
5. 안내 문구
6. 사건사고
7. 기타

한자 : 法住寺 / 로마자 : Beopjusa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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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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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405에 위치한 속리산사찰. 사실상 근대 이전에 만들어진 목탑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팔상전으로 유명한 절이다.[2] 이 외에도 커다란 금동미륵불상이나 각종 국보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중요한 절로, 신앙유적으로서의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인정 받아 2009년 사적 제503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2018년 6월 30일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이 신청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우리나라가 등재 신청한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이다.#

2. 역사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의신대사가 창건한 이다. 의신이 돌아오면서 백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절에 있었기 때문에 법주사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법주사는 31본산(本山)의 하나로 고려 숙종이 그 아우 의천을 위하여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승려가 3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1년(1341년)에는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를 세웠다.
조선 고종 9년(1872년)에는 경복궁 재건에 사용할 당백전을 주조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사찰 내의 커다란 미륵장륙상과 철당간이 수거되기도 했다. 현재는 오랜 노력 끝에 대형 금동미륵불상이 자리잡게 되었으며, 철당간은 복구를 해 놓았다. 보통 철당간을 고정하는 돌로 된 당간지주만 존재하는 절이 많은데 철당간까지 복원된 드문 사례다. 법주사의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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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철당간과 당간지주.

3. 가람


경내에는 커다란 중층 건물인 대웅보전, 특이한 양식의 원통보전, 쌍사자 석등(국보 5호), 철 당간지주(幢竿支柱), 부도들 등 상당히 귀중한 문화재가 많지만, 현존 유일 목탑인 팔상전과 높이 33m의 거대한 불상 때문에 가볍게 지나치기 쉽다. 그중 최고는 나름 국보인데도 가장 지명도 빠지는 석연지가 아닐까.

3.1. 법주사 팔상전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팔상전'''
報恩 法住寺 捌相殿


'''소재지'''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379, 법주사 (사내리)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수량/면적'''
1동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조선 인조 2년(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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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55호 법주사 팔상전(法住寺 捌相殿).[3] 이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탑 중 유일하게 근대 이전에 지어진 5층 목탑이다. 임진왜란때 한 번 불탔으나 인조 2년(1624)에 승려 벽암에 의해 다시 건축되었다. 8층 목탑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5층이며, 벽면에 석가모니 부처의 일생을 8개의 장면[4]으로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서 팔상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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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탑의 전성기였던 삼국시대고려시대 이후의 목탑이라 그런지 전형적인 고대식 목탑과는 달리 외형이나 구조가 상당히 특이한 편이다. 거대한 중심 기둥인 심주를 중심으로 한 연속구조를 하고 있으며, 내부는 통층으로 통하고 있어서 사람이 걸어 올라갈 수는 없다. 높이는 22.7m, 평면은 5칸의 정방형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팔상전은 1층의 평면 역시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보다 날렵한 일반적인 목탑의 형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재건되면서 1층 면적이 늘어나 지금의 모습이 된 것. 이에 대해서 목탑 구조가 발전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연구자도 있고, 기술이 퇴보해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지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3.1.1. 바깥고리



3.1.2. 국보 제55호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인도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승려 의신이 처음 지은 절이다.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 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2. 대웅보전


[image] '''대한민국의 보물'''
914호

'''915호'''

916호
정읍 보화리 석조 이불입상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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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915호(1987년 3월 9일 지정).
보물로 지정된 흔치 않은 중층 사찰 건물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상당히 거대하다.
2020년 현재 보수중이라 외관을 한눈에 볼 수 없다. 내부는 출입가능

3.3. 원통보전


[image] '''대한민국의 보물'''
915호

'''916호'''

917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배자예부운략 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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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916호(1987년 3월 9일 지정).
정사각형에 사모지붕을 얹은 특이한 형태의 건물.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지만,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양식으로 남아있는 건물이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법주사가 불에 탈 때 같이 소실되었으나 인조 25년(1647)에 새로 지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또한 원통보전 안에는 보물 제 1361호 목조관음보살 좌상을 보셨다. 복장[5] 안에서 나온 불상 조성기에는 효종 6년(1655)에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3.4. 용화보전


원래 미륵불을 주불로 모시는 용화보전이라는 전각이 있었다. 35칸에 2층으로, 중심 법당의 역할을 맡았으며 내부에 미륵장륙상을 모셨다. 이 용화보전은 매우 화려했다고 하는데 법주사의 중심 전각이었다. 하지만 고종 9년(1872) 당백전 주조를 이유로 장륙상이 압수되면서 건물도 헐렸다.[5] 이후 그 자리 아래에 현재 볼 수 있는 거대한 금동미륵입상을 세웠다.

3.4.1. 금동미륵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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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33 m[6], 무게 160톤. 거대한 미륵상은 청동불상 중에서는 세계 최대의 높이였다고 한다. 이 기록은 1993년홍콩의 포린 사원에 세워진 34 m짜리 천단대불 좌상이 깨트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흥선대원군이 녹여버린 불상을 다시 만들고자 노력이 많이 필요했다. 1939년에 만들려고 했지만 재정문제와 태평양 전쟁 말기 금속 공출 등 문제 때문에 시멘트로 대신했다. 그조차도 한국전쟁으로 인해 조각가 김복진과 시주자가 사망해서 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시간이 흘러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 그의 관심에 힘입어 1964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이후 안전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유로 해체하고는 1990년에 5년간 작업하여 청동으로 다시 주조했고 이후 2002년에 약 80 kg을 들여 전체를 개금해서 금동미륵입상으로 다시 탄생하였다. 하지만 청동시절이 더 근엄해보여서 나았다는 의견도 있다. 판단은 직접 해보시길 바란다. 한편 금이 쓰인 게 맞냐는 논란도 있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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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미륵대불 시절.
과거 시멘트로 만든 미륵입상일 때에는 '크기는 큰데 시멘트 미륵'이라고 은근히 무시당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워낙 '커다란 시멘트 미륵'으로 오랜 기간 유명했기 때문에 아직도 시멘트로 만든 미륵입상이 법주사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중장년층도 은근히 많다.

4. 유물


법주사 소장 유물로는 무려 국보 3점, 보물 12점, 지방유형 문화재 22점이 있다. 여기에는 위에 설명된 팔상전(국보 55호), 대웅전(보물 915호), 원통보전(보물 916호) 등 가람 이외의 유물들을 정리한 것이다.

4.1. 법주사 쌍사자 석등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5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報恩 法住寺 雙獅子 石燈


'''소재지'''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405-9, 법주사 (사내리)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석등
'''수량/면적'''
1기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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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쌍사자 석등이다. 여느 석등과 마찬가지로 상부와 하단은 팔각형이지만, 사자 암수 한 쌍을 조각하여 기둥으로 삼았다. 두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앞발을 위로 치켜세운 형태로 서있어서 측면에서 보면 안정적인 X자형 자세이다. 쌍사자가 기둥 역할을 하는 석등은 통일신라 시기에 제작되어 법주사 외에도 몇 기가 더 남아 있지만,[7] 법주사 석등이 균형미가 뛰어나고 섬세한 조각이 더 잘 보존되었다고 평가된다. 부처님의 진리를 상징하는 석등을 사자가 높이 치켜들어 올림으로써 불법을 수호하는 의미를 드러낸다.

4.1.1. 국보 제5호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기며,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통일신라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통일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통일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4.2. 법주사 석련지




5. 안내 문구


[ 안내문 전문 ]

속리산 법주사 일원은 법주사를 중심으로 속리산의 천왕봉과 관음봉을 연결하는 일대 18,590,000m를 말한다.

속리산은 해발 1,057m의 천왕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어서 구봉산이라고 불렸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속리산 일원은 대한 8경 중의 하나로 제 2금강 또는 소금강으로도 불리는데, 계절의 변화에 따른 경치가 뛰어나며 기암, 기석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또한 곳곳에 크고 작은 사찰 등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속리산의 대표 사찰인 법주사는 553년 의신조사가 서역에서 불경을 가져와 절을 지을 곳을 알아보던 중에 산세의 험준함을 보고 이곳에 세운 절이라고 전한다 혜공왕 12년에 진표율사가 대규모로 중창(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짓는 것)하였으며, 고려시대를 거치며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전소하였다. 이후 조선 인조2년에 사명대사 및 벽암대사가 중건하고 증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화유산으로는 국내 유일의 목탑인 보은 법주사 팔성전(국보 제55호)을 비롯하여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 보은 법주사 석련지(국보 제64호),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 제15호), 보은 법주사 대응보전(보물 제915호) 등 국보 3점, 보물 13점, 천연기념물 1점, 도지정문화제 24점이 있다.

속리산 법주사 일원은 1966년 사적 및 명승 제4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명승으로 변경 지정되었다. 또한 법주사는 2018년 7월 3일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 공주 마곡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속리산에는 법주사를 포함하여 복천암, 탈골암 등 10개의 전통 사찰이 있다



6. 사건사고


2020년 2월 초, 현 주지와 전 호법국사 등 고위 승려 6인 등이 상습 도박으로 보은경찰서의 수사를 받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제보에 의하면 해외 원정 도박도 갔다온데다 전과까지 있다고...

7. 기타


팔상전은 이소룡사망유희에서 나온 사망탑의 본래 모델로, 팔상전 안에서 촬영이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나(법주사의 불상이 당대 동양 최대였다.), 이소룡이 사망한 뒤에 재촬영-재편집되며 계획이 무산되었다. 실제로 촬영되었다면 이소룡 팬들의 성지가 되었을지도?[8]
교통편은 대중교통으로 올 경우 보은군 읍내에 있는 보은시외버스공용정류장에서 법주사 밑 관광지 주차장의 정류장까지 운행하는 시외버스를 약 3~40분 정도 소요시간으로 잡고 타고 오거나 서울(동서울이 시간당 1대 꼴로 다닌다. 남부나 센트럴은 1일 4회.)이나 대전, 청주 등지에서 출발하는 속리산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타고 오면 된다. 정류장에서 법주사까지는 다시 30분 정도를 걸어야 한다. 자가용으로 올 경우 당진영덕고속도로 속리산IC가 가장 가깝다.

[1]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2] 쌍봉사 대웅전도 있지만, 이것은 불에 타 소실된 뒤 복원한 것이다.[3] 捌은 '여덟 팔(八)'의 갖은자다.[4] 도솔천에서 인간계로 하강을 결정하는 모습, 룸비니에서 탄생하는 모습, 동서남북 네 문으로 나가보면서 인간의 괴로움을 보는 모습, 출가하여 성을 떠나는 모습, 고행하는 모습, 마라의 유혹을 물리치는 장면, 사르나트에서 첫 설법을 하는 모습,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는 모습[5] A B 참조.[6] 27 m라는 자료도 있는데 뒤의 광배까지 더한 높이가 33 m인 듯?[7] 광양 중흥산성에 있던 석등과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등이 있다.[8] 만약 이렇게 됐다면 법주사는 외국인들한테 매우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을 것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