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1. 개요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 전속 극단으로, 1950년 설립되었다. 2010년 7월에는 법인화되었다.
2. 연혁
2.1. 태동기
1950년 1월 장충동 국립극장이 지어지기 전의 국립중앙극장이었던 부민관[1] 에서 '신극협의회'가 창단한 것이 시초다. 설립 초연극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유치진의 <원술랑>.[2] 한국전쟁이 터지고 나서는 국립극단도 마찬가지로 부산으로 피란, 그곳에서 간간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당시 국립극단은 '신협'과 '극협'이 따로 존재하는 구조였는데, 한국전쟁 이후 이 둘을 합쳐 국립극단을 개편했다. 국가 기관이므로 서울 환도 이후에는 연간 9천만 환[3] 의 예산을 받아 활동했으나, 당시 급격하게 밀려오던 해외 영화의 붐과 적자가 결합해 문교부 극립극단운영위원회는 1959년 극단의 해산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2.2. 부활기
그러던 것이 1962년 단장 박진[4] , 부단장 이해랑의 필두로 다시 재결성 되었다.
설립 초연극은 버나드 쇼의 <세인트 존>. 이때 단원으로 함께 참가한 것이 원로 극인 백성희와 장민호다. 이때는 공보부의 주도로 이뤄졌다. 그러나 무리하게 진행된 설립으로 인해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한동안 공연을 할 수 없었을 뿐더러, 당시 보수한 국립극장에 냉방시설이 없어(!) 여름 공연을 진행할 수 없었다. 당시 쿠데타 이후 문화로 국민 시선을 돌리기 위해 졸속으로 진행한 것이 무리로 작용한 것.
그러나 이후 장충동에 국립극장이 개관하면서, 1972년 10월 17일 비로소 국립극단은 명동에서 남산으로 본부를 옮기게 된다. 이날 국립극장 개관 기념에 맞춰 국립극단은 <성웅 이순신>을 무대에 올렸다. 이후 왕성한 활동으로 명실공히 국내 연극문화의 선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2.3. 분리기
이후 유인촌의 주도하에 재단법인이 따로 편성되면서, 종전 국립극장에서 '''서계동'''으로 이전한다.[11] 다만 원래 공연시설로 이용하던 곳이 아니라 국립극장에 비해 평가는 극악에 치닫고 있다.
2015년에는 '''명동예술극장'''[12] 을 통합하여, 지금은 서계동(백성희장민호극장 및 소극장 판),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을 올리고 있다. 국립극장에서도 공연했으나,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이 초창기에는 국립예술단체 모두를 대상으로 하다 차츰 산하단체만으로 집중하게 된데다, 국립극단 입장에서도 명동을 산하기관으로 만들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지면서 국립극장 공연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다.
3. 상연작
3.1. 1950년대
3.2. 1960년대
3.3. 1970년대
4. 기타
국립극단의 공연을 확인하거나 예매하려면 위의 홈페이지로 들어가는 것이 빠르고 편하다. 상주공연장은 백성희장민호극장과 명동예술극장(대형 공연)이고 간혹 국립극장에서도 공연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유동적으로 돌아간다.
예술의전당에 비해 청소년 및 대학생 대상 회원 등의 특별 제도는 없지만, 상시 할인을 해 주고 있어 학생이라면 부담없이 볼 수 있다. 애당초 예술의전당에 비할 바 못되는 정직하고 아름다운 가격대[27] 에 '''최소 30% 이상'''의 어마어마한 할인까지 해 주니 가능한 일이다.[28]
[1]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이다.[2] 당시 국립중앙극장의 극장장이 유치진이었다. 항복 이전에는 현대극장장이었는데, 그때에는 유치진만큼 연극에 조예가 깊고 활동이 많았던 연극인이 몇 없었다.[3] 1957년에 국립극단이 환도하였다. 당시 쌀 한 가마니가 15,000환 이상의 값어치를 했다.[4] 대한제국의 고관이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파 남작 박기영의 차남으로, 양정고등학교와 일본대학교를 나왔다. 귀국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친일 연극을 올린 '''친일파'''다.[5] 1957년 당시 단장이었다. 18살부터 신파극단에 들어가 연극의 길을 닦은 연극인이다.[6] 지금의 숭문고등학교 전신인 경성실천상업학교를 나오고 유치진이 운영하던 현대극장에서 전속 배우로 유치진이 쓴 친일 작품 등지에 출연한다. 광복 이후에는 좌파 극단에서 활동하다 국립극단에 입단한다.[7] 남궁억 선생이 설립한 모곡보통에서 수학한 후 공무원 생활을 하다 연극계에 입문. 대한민국 역사상 최장 최다 작품 활동 배우 기록을 가지고 있다.[8] 연희전문 출신 배우로 신협과 극예술협회 초대 회원이었다.[9] 중학교 졸업 직후 한국 근대 최고의 작품 <혈맥>으로 데뷔. 개성있는 역할을 맡으며 대종상 특별공로상을 받았다.[10] 한국전력에 흡수된 경성전기회사에 근무하다가 영화를 보고 연극인이 되기로 했다고 한다. 이후 동아일보 연극경연대회 주연상을 받으면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11] 서울역 서부역에 위치해있다. 원래 수도방위사령부 수송대가 있던 자리였다.[12] 장충동으로 국립극장이 이전하면서 민간에 매각되어 증권사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다, 여러 사람들의 노력끝에 국가에 의해 다시 매입되어 2009년에 재개관하였으며, 2015년 이전까지는 정동극장과 같은 조직으로 묶여있다가 이때 국립극단으로 이관되었다.[13] 한국전쟁 발발로 대구문화극장에서 진행되었다.[14] 한국전쟁 직후 국립극단 서울 환도 기념공연.[15] 수능 기출 희곡으로도 유명한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의 원제목이다.[16] 제1회 국립극장희곡현상모집 당선작[17] 제3회 국립극장희곡현상모집과 서울신문 희곡 부문에 당선되었다.[18] 김동인의 역사소설을 이광래가 각색한 것이다.[19]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각색한 것이다.[20] 제6회 국립극장현상희곡 당선작[21] 한국 리얼리즘 연극의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 당시 발표 초연이었다.[22] 극작가 천승세의 연극 역작. 만선은 발표 이래 지금까지도 국립극단에서 주로 미는 레퍼토리 중 하나이다.[23] 김은국의 소설을 김기팔이 극본으로 각색한 것이다.[24] 안수길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것이다.[25] '로봇'이라는 단어의 어원으로 유명한 희곡이다. 당시엔 로봇을 번역할 수 없어서 <인조인간>이라고 번역했다.[26] 김동리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것이다.[27] 애당초 수십 명이 공연하는 오케스트라 특성이나 여러 기타 등등의 이해관계를 통해보면 국립극단보다 예술의전당이 공연 굴리기 부담된다. 해외 유명 아티스트가 오는 경우에는 수십만 원대 표값은 예사다.[28] 이렇게 보면 보통 15,000원 선에 공연 관람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