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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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해랑 (李海浪)
'''본명'''
이해량 (李海良)
'''출생'''
1916년 7월 22일,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1]
'''사망'''
1989년 4월 8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관악구
'''학력'''
일본 니혼대학 예술학과 학사
'''데뷔'''
1938년 도쿄학생예술좌[2] 〈춘향전〉
1. 개요
2. 생애
3. 사후
4. 연기 철학
5. 이야깃거리
6. 수상
7. 대중매체에서


1. 개요


대한민국의 배우, 연출가이자 전 국회의원. 한국 연극의 1세대 배우로 연극계의 대부로 불린다.

2. 생애


1916년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로, 조선 16대 임금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11대손이다.[3] 그의 증조할아버지 이종응은 풍계군[4]양자였던[5] 경평군(이세보)의 친사촌이었고 따라서 철종과는 꽤 가깝게 지내던 형제 뻘 항렬의 친척이었다. 그래서 그의 할아버지 이재영(李載榮)은 왕실의 의전실장으로 벼슬을 했으며 아버지 이근용(李瑾鎔)은 경성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의 외과 의사여서 남부럽지않은 넉넉한 환경에서 자랐다.

교동공립보통학교일본 요코하마 가나가와 중학을 졸업하였고[6] 중국 상하이의 후장대학교 법학과를 중퇴한 후 일본 니혼대학 예술학과를 졸업했다. 니혼대학 재학 중이던 1938년에 도쿄학생예술좌에 가입하여 연극 《춘향전》으로 데뷔하였다.[7] 귀국한 뒤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와 '고협', '현대극장'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배우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처럼 좋지 않았던 당시에 그의 아버지는 좋은 가문과 학벌을 갖춘 아들이 연극배우가 되는 것을 매우 반대했다. 결국 집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하여 한동안 고생하였다. 1941년에 아내 김인순과 혼인하였고 이후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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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 《춘향전》에서 방자 역으로 출연한 이해랑(왼쪽)
8.15 광복 후 현대극장 대표였던 유치진친일 의혹으로 활동이 뜸한 사이 1945년 극단 '전선(全線)'을 창립하고 이듬해에는 김동원[8]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의 전신인 '극예술회' 창립에 참가하였다. 잠깐 황철, 함세덕과 '낙랑극회'를 조직하여 활동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좌, 우익의 대립이 극심하던 당시, 연극계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는 우익 진영에 서서 우익 연극인들을 이끄는 인물로 부상했다. 목소리 자체는 무대 연기에 적합하지 못한 편이라 주연으로서 크게 빛을 보지는 못했고 비중있는 조연이나 악역을 주로 맡았지만 1950년 국립극장이 개관하자 극예술협회를 모태로 창단한 국립극장 전속극단 '신협'의 창립인과 대표를 맡아 이 때부터 연출을 겸업하면서 연출가로서의 능력 역시 인정받았다.
1954년에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을[9], 1957년에는 국립극장 극장장을, 그리고 1961년에는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후학을 가르쳤다.[10] # 1962년에는 새로 생긴 드라마센터의 극장장을 지내고 당시 해산되었던 국립극단을 부단장으로서 재창단하였다. 다음해엔 한국연극협회 부이사장을[11], 1967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12], 그리고 대한민국 예술원 부회장[13]과 회장직을 맡아[14] 활동하였다. 이외에 당시만해도 문화의 혜택을 받기 힘들던 지방 농어촌민들을 위해 대형 버스를 개조하여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이동극장운동'을 주도하는 등 대한민국 연극계와 문화계의 발전에 헌신하였다.
정계와도 인연이 있다. 5.16 직후 김종필의 권유로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이 되었고 1970년대 들어서는 5·16 민족상 이사를 지낸 뒤 제8대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 제9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

3. 사후


1989년 4월 3일 뇌일혈로 쓰러져 5일 후 서울 관악구 남현동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장례는 국립극장에서 예술인장으로 치러졌고 경기도 광주시 선영에 안장되었다. #
1990년 5월에 늘 연극계의 발전을 생각했던 그의 유지를 잇기 위해 '이해랑 연극재단'이 설립되었고 같은 해 12월에 조선일보와 이해랑 연극재단이 주최하는 '이해랑 연극상'이 제정되어 정통극 분야의 연극인이나 연극단체 중에서 후보자를 선정해 1991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그의 기일인 4월 8일에 시상하고 있다. #
1991년에는 이해랑 연극론집 《허상의 진실》이 발간되었으며 같은 해 12월에 문화부[15]에서 주관하는 이 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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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에 있는 이해랑 예술극장
그를 기리기 위해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기존에 교내에 있던 예술극장을 2008년 리모델링한 뒤 그의 이름을 붙여 '이해랑 예술극장'으로 개관하였다.[16]

4. 연기 철학


  • 그의 연기 철학은 한마디로 '리얼리즘'으로 표현할 수 있다. 러시아배우이자 연출가였던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이 연기관의 기초가 되었는데 이 사람이 누구냐면 메소드 연기의 시초가 되는 분이다. 그래서 '배우가 연기한다'는 게 아닌, '그냥 그 배우가 그 사람\'일 정도의 사실적인 연기를 추구했다. 어느 정도로 리얼리즘을 중요시 여겼냐면, 셰익스피어마저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있다하여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을 정도.
그래서 연출자가 일일이 개입하는 것보다 배우의 모든 것을 포용하고 인정해서 잠재력을 끌어내는 연출을 좋아했다. 리얼리즘을 극에서 구현하려면 당연히 배우가 하는 말과 동작이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연출자가 하나부터 열까지 이래라저래라하면 자연스러움이 나올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사실주의 성향의 희곡을 많이 쓴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좋아했다고 한다.[17]
그런 맥락에서 신파극을 아주 싫어했다. 과장된 연기가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데에 많이 부족하다고 여겨 연극의 격을 더럽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8]

5. 이야깃거리


  • 예명 '해랑(海浪)'은 본명 '해량(海良)'이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 새로 이름을 지을 때 '량(良)' 옆에다 삼수변을 넣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사실 '해량'보다는 '해랑'이 발음하기도 더 편해서 그렇잖아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해랑’으로 잘못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 위에서 언급했듯, 해방 이후 우익진영에 서면서 좌익 연극인들과 적대관계가 되어 그들의 표적이 되었다. 어느 날은 술마시다가 갑자기 좌익 연극인 6명이 불쑥 와서는 다짜고짜 시비를 걸어 싸움이 붙었지만 인원수에 밀려 일방적으로 맞았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일본 유학 시절 같이 연극한 친구와 하숙을 같이 했던 친구도 있었다고 한다. 이념 앞에서는 우정도 소용없었던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 당시 사회적으로 군기가 만연한 시절에 배우들에게 큰 소리 한 번 안내고 인격적으로 대했던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 타계 직전까지 연극 《햄릿》 연출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이 때 당시 전성기를 누리며 상당히 바빴던 유인촌에게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출연을 부탁했고 유인촌은 마지못해 출연했다고 하는데 유인촌은 ‘그 마지막’이라는 말이 단순히 나이드셔서 그러신가보다 했고 ‘정말’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회상했다.
  • SBS힐링캠프최민식 편에서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 시절 제자였던 이경규가 밝힌 일화이다. 이해랑이 "한국 연극계가 발전이 없는 이유가 뭔지 알아? 바로 다들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야"라고 말했고, 스승의 말을 가슴에 새긴 이경규는 프로그램 녹화 시 단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다고 술회했다.
  • 슬하에 3남 2녀를 뒀는데, 대를 이어(?) 연극계에 투신한 자녀는 한 명도 없었다. 이 중 장남 이방주는 고려대학교 졸업 후 현대그룹에 입사, 현대차현대산업개발 사장을 역임했고, 차남 이민주는 연세대학교 졸업 후 1975년 조선무역을 창립, 사람이 안으면 심장이 뛰는 '하트 투 하트' 곰인형을 런칭해 대박을 터뜨린 뒤 수많은 M&A로 부를 축적, 국내 50대 현금부자에 이름을 올렸다.

6. 수상


  • 서울시 문화상 (1955)
  • 대한민국예술원상 (1963)
  • 5월문예상 연예부분 본상 (1964)
  • 3·1연극상 (1969)
  • 국민훈장 모란장 (1972)
  • 동랑 유치진연극상 (1985)
  • 5·16민족상 (1986)

7. 대중매체에서


  • 정진각[19] - 2004년 EBS 《명동백작
[1] 현재 서울특별시.[2] 1934년 6월 창립된 재일 조선인 학생극단.[3] 덕흥대원군 기준 14대손 '해(海)' 항렬. 소설가 이해조, 전 국무총리 이해찬과 같은 항렬이다.[4]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전군의 양자. 생부는 정조의 동생이자 은전군의 형 은언군.[5] 안동 김씨 세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860년에 파양당했다.[6] 중학교를 5군데 다녔다. 휘문중학배재중학중동중학 → 료요중학 → 가네자와 중학 졸업. # 참고로 후술할 평생의 친구 김동원을 배재중학 시절에 처음 만났다.[7] 이 때 같이 활동한 사람이 황순원, 김동원이다.[8] 1916 ~ 2006. 한국의 로렌스 올리비에라는 별명을 가진 배우로 1932년부터 1994년까지 활동. 유치진, 이해랑 등과 극단 극예술협회를 창단하여 많은 연극, 영화에 출연하고 한국 최초로 햄릿 역을 맡아 '영원한 햄릿'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가수 김세환의 아버지.[9] 1987년까지.[10] 1981년까지.[11] 1967년까지.[12] 1973년까지.[13] 1981년[14] 1984년부터 1987년까지.[15] 현재 문화체육관광부.[16] 중문인 혜화문 옆에 있다.[17] 그 중에서도 《세 자매》를 제일 선호했다고.[18] 그렇다고 신파극을 한 연극인들까지 싫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몇 명은 절친하게 지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연출가 박진이다.[19] KBS명성황후》에서 천희연 역을, 《불멸의 이순신》에서 신호역을, 그리고 《무인시대》에서 한뢰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