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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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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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나치 독일의 잔인한 홀로코스트가 횡행하던 시절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네덜란드 소녀 안네 프랑크가 가상의 친구인 키티와 대화하는 형식[1] 으로 남긴 일기. 전쟁의 비참함을 후대에 일깨워 준 문화유산이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많은 학살이나 2차대전의 온갖 폐해들에 대해 쉬쉬하는 분위기가 이어져 인기 있는 책이 아니었으나, 후에 2차대전에 대한 온당한 평가가 이뤄지면서 전 세계인의 애독서가 되었다.
2. 특징
원제인 "Het Achter-huis(헷 아흐터르-하위스)" 는 "은신처" 라는 뜻이다.[2] 원제가 너무 추상적이어서 그런지 영어로 번역될 때는 "어린 소녀의 일기(The Diary of a Young Girl)" 라는 제목으로 변경되어 출간되었다.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안네의 일기"라는 제목은 1959년에 미국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제목인 "The Diary of Anne Frank" 에서 유래된 것이다. 한국판은 문학사상사에서 1995년 무삭제 완전판을 출판했다. 500여장중 150장이 삭제된 편집판만 읽어봤다면, 읽어볼 가치가 매우 높다.
전쟁의 참혹함과 나치 독일 치하 유대인들의 어려움만이 아니라, 그 시절 소녀의 풋풋한 감성을 엿볼 수 있는 책. 친구나 가족과 다툰 이야기, 첫사랑 이야기 등등 그녀가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담 등도 기록되어 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그들이 살았던 집을 생생히 구경할 수 있다. 일종의 가상현실인데, 마우스로 움직이기가 좀 불편하긴 해도 천천히 둘러보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특히나 아이들이 커 가는 것을 벽에 표시해둔 것을 보면… 책장 쪽 숨겨진 방을 들어간 뒤 프랑크 가족의 방으로 들어가면 나온다. 프랑크 일가가 체포될 당시 그 자리에 있던 SS장교가 오토 프랑크에게 '이런 곳에서 숨어 살면서 당신들은 행복했었냐?'라는 질문을 했는데, 그 말에 프랑크 씨는 이 표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고 한다.
안네 본인은 자유를 다시 되찾기도 전인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에서 1945년 2월~3월로 추정되는 시기에[3] 장티푸스로 추측되는 모종의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훗날 책으로 출간된 것은 프랑크 가족의 은신을 도왔던 동료 중 체포되지 않고 무사히 남았던 미프 히스(2010년 작고)가 그녀의 일기장을 소중히 보관하다[4] 유일하게 살아남아 돌아온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에게 전한 뒤 아버지가 이 일기를 출판사로 보낸 덕에 가능해진 것이다.
물론 그녀 스스로가 전후 자신의 경험담이 담긴 일기를 책으로 내겠다고 소망하기도 했다.[5] 안네가 직접 출판을 목적으로 사적인 부분은 편집하고 지인의 실명을 가명으로 바꾼 편집 작업을 했다.[6] 오토 프랑크가 그녀의 일기를 출판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죽은 딸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단, 오토 프랑크는 프랑크 가족의 이름만은 실명으로 놔뒀다.
여담으로, 오토 프랑크가 수용소에서 돌아온 후 일기를 받자마자 출간을 결심했던 것은 아니다. 오토 프랑크는 수용소에서 가족과 뿔뿔이 흩어져 가족들의 생사를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7] 몇 달 동안 가족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도중,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프랑크 자매와 함께 지냈던 생존자로부터 큰딸 마르고가 세상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딸 안네마저 세상을 떠났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고[8] , 그 이후에는 일기의 출간 작업에 매달리게 되었다.
안타까운 점은 안네가 숨을 거둔 것으로 추정되는 2~3월로부터 불과 '''몇 주''' 밖에 지나지 않은 1945년 4월 15일, 베르겐-벨젠 수용소가 영국군에 의해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딱 몇 주만 버텼어도 연합군에 구조되어 살아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만일 영연방군에 의해 구조가 되었어도 생존할 수 있었을 거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수용소가 해방되거나 수용소에서 탈출하여 영연방군, 미군, 소련군 등 연합군이나 마음씨 좋은 민간인들에 의해 구조되었어도 유대인과 집시 등 피수감자들이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은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실제로 수용소에 있던 포로들은 오랜 학대와 굶주림으로 인해 영양실조와 극심한 피로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아 신체가 제대로 된 소화기능도 잘 하지 못하는 상태인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병원에 가서 전문 의료인들의 체계적이고 사려 깊은 치료와 간호를 받아야 생존률이 어느 정도 확보되며, 또한 음식도 고열량 식품을 먹였다가는 목숨까지 위험한 경우가 비일비재했기에 죽이나 오트밀같이 소화가 잘되는 음식부터 먹이고 기운이 어느정도 차려져야 일반 음식을 소화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학 지식이 없던 연합군 병사들과 민간인들이 짧은 생각으로 전투식량, 초콜릿 바, 빵과 수프 등 고열량 식품이나 일상식을 그냥 주어서 이를 먹고 위장에 가해진 쇼크로 인해 배탈이 나는 등, 식량이 오히려 독이 되어 숨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9]
여기에 더해, 안네가 수감됐던 베르겐-벨젠 수용소는 더욱더 비참했다. 해방 당시 피수감자들의 상태는 너무나 심각해, 휴 글린 준장의 지도 아래 영국군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음에도 6만여명의 생존자들 중에서 13994명이 해방 이후 두 달도 채 버티지 못하고 죽어나갔다.[10] 이후 영국군은 안네와 마르고를 비롯한 수많은 포로들을 학대하고 죽음으로 내몬 요제프 크라머 수용소장, 프리츠 클라인 수용소 담당의 등 베르겐-벨젠 수용소의 주요 관리 인원들을 전원 체포하여 대부분을 교수대에 매달거나 감옥에 보냈다. 베르겐-벨젠 전범 재판에 대한 영문 위키의 설명
최초 출판자였던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출판할 때는 가족의 사생활이 침해되는 내용과 사춘기 소녀가 느끼는 성에 대한 내용, 그리고 안네 스스로의 성 지향성에 대한 고뇌[11] 등이 포함된 부분은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펴냈다고 초판본에 밝힌 바 있다. 해당 성에 대한 내용 중 안네는 ‘어른들은 애들한테서 성에 관한 얘기를 쉬쉬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되면 자기들 끼리 올바르지 않은 정보만 갖게 된다. 아들뿐만 아니라 딸에게도 성교육을 해야 한다.’는 통찰력 있는 말을 했다. 시대가 시대였겠지만, 이렇게 성에 관한 이야기를 통편집해버리는 것은 안네가 바라던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토 프랑크는 본인 욕, 판 단 욕, 뒤셀 욕은 죄다 편집했으면서 판 단 부인, 배우자 에디트 욕은 냅뒀다. 아마 거기까지 삭제하면 분량이 심각하게 줄어들었던 모양인데, 판 단 부인이야 일기에서도 공공연히 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있었을 정도로 좋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에디트에 관한 내용을 삭제하지 않은 이유는 배우자에 대한 욕을 남겨둠으로써 본인과 비교되게 만들고, 자신은 엄격하지만 자상하고 완벽한 아버지 이미지를 만들려 했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대체적으로 본인 이미지 세탁하려고 했다는 의견이 많고, 그가 비판받는 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수정 때문에 일기가 조작되었다는 논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12] .
이후 세월이 흘러 1980년에 오토 프랑크가 사망하고 책의 저작권이 안네 프랑크 재단으로 넘어갔을 때, 원본에서 거의 편집을 가하지 않은 완전판이 발매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초판과 완전판 2가지가 따로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는 완전판이 문학사상사에서 나오고 있다. 문학사상사판은 번역 자체는 큰 문제는 없으나, 한국적 정서”에 맞춘답시고 일기에게 하는 말을 존댓말로 번역하여 일기에 대한 친근감이나 안네의 감정 자체가 많이 지워져버렸다. 참고로 초판만 읽은 사람이라면, 완전판을 읽을 가치는 매우 높다. 완전판에서는 나치의 잔혹함 외에도 안네가 스스로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어서 문학으로도 가치가 높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3. 등장인물
크게 프랑크 일가, 판 펠스(판 단) 일가, 프리츠 페퍼(알베르트 뒤셀), 그리고 조력자들로 나눌 수 있다.
3.1. 프랑크 일가
3.1.1. 안네 프랑크
'''안네 프랑크''' '''(Annelies Marie Frank)''' (1929.06.12 - 194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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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 프랑크 문서 참고.
3.1.2. 오토 프랑크
안네의 아버지이자 안네의 일기를 편집하여 출간한 사람이다. 자세한 내용은 오토 프랑크 문서 참고.
3.1.3. 마르고 프랑크
'''마르고 프랑크''' '''(Margot Betti Frank)''' (1926.02.16 - 1945.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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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의 언니. 성격은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닮았다고 묘사된다. 그래서 트러블이 많은 안네와는 달리 은신처 사람들하고는 대부분 별탈없이 잘 지내며, 안네하고도 서로 다툴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이가 좋은 편이다. 안네의 일기에 따르면 우등생을 먼저 진급시켜주거나 장학금제도가 있으면 늘 받았을 것이라고한다. 그래서인지 안네는 훌륭한 큰딸 마르고와 그렇지 않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고민도 했고, 당연히 마르고를 싫어한다고 쓰거나 심술궂다, 아무 생각이 없다며 감정적으로 글을 쓸 때도 있었다. 엄마 에디트, 아빠 오토 모두 마르고를 편애하는 면이 있었고, 본인도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적당히 착한 첫째 역할을 잘 수행하였다. 안네는 마르고가 주관없고 꿈이 없다며 한심해했다.[14] 사려깊고 잘 인내하는 성격이다. 안네가 페터랑 둘이서만 어울려 놀 때 청소년이 3명밖에 없어 마르고트가 소외된 것에 죄책감 가진 안네를 보고 편지를 보냈다[15] 엄마 아빠뿐 아니라 은신처식구인 판 단 부부와 뒤셸은 늘 안네와 마르고를 비교해대서 안네가 마르고를 원망도 많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네는 마르고에게 의존도 많이 했다. 마르고가 "엄마 아빠 간섭이 너무 심해져서 지겨워"라며 안네에게 마음을 터놓았을때 안네도 마르고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기쁘면서도 은신처로 오기 이전에 사이좋았던 가족이 거리를 두지 못해서 서로 사이가 나빠지고 있다며 답답해했다.
은신처에서 마르고는 미프의 이름을 빌려 라틴어 교재를 신청해 제출했는데, 선생님이 채점하고 이런 훌륭한 학생이 대체 누구냐며 편지를 보낼 정도로 학구열과 성적이 뛰어났고, 은신처 내에서 뒤셸(본명 프란츠) 에게 네덜란드어를 가르칠 정도로 똑똑하고 머리가 비상했다.[16]
발각 후 수용소로 끌려간 마르고는 앞서 언급한데로 안네와 함께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옮겨지게 되었고, 1945년 2월 경 장티푸스로 죽었다. 언니가 죽자 안네 역시 급속도로 절망해 곧 죽고 말았다.
마르고도 일기를 썼으나, 이 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마르고의 일기가 남아있었더라면 자매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부와, 안네가 남긴 일기의 내용과 크게 다르진 않았을 수 있지만 마르고의 관점에서 보는 주변인과 생활상 등도 교차검증해볼 수 있었을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17]
3.1.4. 에디트 프랑크
'''에디트 프랑크''' '''(Edith Frank née Holländer)''' (1900.01.16 - 1945.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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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의 어머니. 오토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
오토처럼 그 당시 기성세대답게 구시대적인 사고관을 가지고 있어서 안네와 자주 충돌했으며, 안네는 어머니를 그야말로 답답하고 속이 좁다고 묘사했다. 무삭제판에 따르면 성에 대해서도 보수적이고, 성미가 급하거나 꼼꼼하지 못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허황된 생각만 한다는 둥, 부정적인 묘사가 대부분. 물론 일기는 어디까지나 사춘기 소녀 안네의 시점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걸러서 들어야한다.[18]
일기에서는 어느 날 밤에 독일군이 밖에서 고사포와 기관총을 계속 쏘아대서 발각되는 걸 막기 위해 식구들이 모든 불을 끄고 숨어 있던 중에, 안네가 너무 무서우니 촛불이라도 켜 달라하자 발각될 것을 걱정한 오토가 안된다고 했지만 에디트는 바로 촛불을 켜 주었고, 오토가 불을 끄라고 말리자 "안네는 전쟁에 익숙한 군인이 아니에요."라고 했다. 오토는 그 말을 듣고는 더 이상 에디트를 말리지 않았다.
안네가 부모에게 마음을 닫아 가던 시기에 쓴 일기에서는, 아빠가 늦을 예정이니 대신 같이 잠자리 기도를 해 주겠다고 부드럽게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때 상처받은 듯한 반응으로 엄마는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는 서술을 보면 안네의 닫힌 마음을 본인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으며, 자기 나름대로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을 해 보았으나 잘 안 됐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베프의 회고에 따르면, 베프가 우연히 일기를 쓰고 있는 안네를 보게 되었는데, 에디트는 베프에게 ‘보다시피 우리 딸은 작가랍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비록 안네와 사이가 크게 좋지는 않았어도 속으로는 딸이 하는 것에 대해 나름 자랑스러워 하고 신경 써 주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게슈타포에게 발각된 이후 모든 은신처 사람들과 함께 아우슈비츠에 끌려갔고, 결국 1945년 1월 27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2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안네, 마르고, 판 단 부인이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옮겨졌을 때 혼자 아우슈비츠에 남겨진 것에 충격을 받아 정신착란을 일으켜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어 사망했다는 설, 다른 하나는 독일 경비병이 마르고를 강간하려 하자 몸을 던져 딸을 지키려다 그 병사에게 구타당하고 끌려간 후 죽었다는 설. 어느 쪽이든 매우 안타까운 죽음이다.
3.2. 판 단 일가(판 펠스 일가)
판 단(Van Daan) 가족의 본명은 판 펠스(Van Pels)로, 안네가 일기가 공식적으로 출판될 경우를 고려했기 때문에 일기에는 전부 안네가 지은 가명으로 쓰여 있다. [19] 이들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펠스 씨가 프랑크 씨와 사업상 인연을 맺어 은신처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3.2.1. 헤르만 판 펠스
'''헤르만 판 단''' / '''헤르만 판 펠스''' '''(Hermann van Daan / Hermann van Pels)'''
페터 판 단의 아버지이자 판 단 부인의 남편. 머리가 벗겨진 뚱뚱한 남자다. 오토 프랑크가 멋대로 편집한 안네의 일기판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언급이 없었는데, 나중에 출판된 무삭제판에서는 매우 폭력적인 아버지이자 권위적인 남편이었음이 밝혀진다. 안네에게 여자가 어쩌고 하며 가르치려 들었고, 음식에 집착하는 바람에 은신처 사람들끼리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또한 아들인 페터를 향해 윽박지르고 폭행해 페터를 조용하고 의기소침한 아이로 자라게 한 원인이 되었다. 담배가 없으면 매우 성질을 부려대서 먹을 것조차 부족한 은신처에서 연신 담배를 찾아댔다. 배우자의 의사를 무시하기 일쑤여서 판단 부인이 소중하게 여기는 모피 코트를 팔아달라고 미프에게 부탁하며 담배 하나 사달라는 걸 보고는 안네가 치를 떨며 일기에 적었다. 모피코트가 은신처 생활에서 필요없는 물건이니 먹을 걸 사오라는 얘기였지만 울며불며 막는 판 단 부인 앞에서 담배 얘기를 꺼냈다는 거 자체가 추억을 소중하게 여기는 안네에게는 나쁘게 보였던 것이다.
수용소로 끌려가고 한 달 뒤 엄지손가락 부상으로 가스실로 끌려가 그곳에서 사망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는 아우슈비츠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가스실 학살'''이었다.
3.2.2. 아우구스테 판 펠스
'''페트로넬라 판 단''' / '''아우구스테 판 펠스''' '''(Petronella van Daan / Auguste van Pels)'''
헤르만 판 단의 아내이자 페터 판 단의 어머니. 정치적 의견을 가지고 토론하는 것을 즐겼고, 매우 신경질적인 여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처음 은신처에 들어왔을 때 요강을 가지고 와서 주변 사람들을 웃게 했다. 참견이 심했고 잔소리를 많이 해서 안네와 자주 다퉜고, 툭하면 마르고와 비교했다. 심지어 ‘안네가 내 딸이었으면 좋았을텐데. 안네가 만약 내 딸이라면 이렇게 버릇없이 키우지 않았을 것이다.’란 말을 수시로 하여 안네가 질려했을 정도.
안네뿐만 아니라 프랑크 가족 모두에게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녀에 대하여 에디트는 비열하다고 평했고, 마르고는 하찮다고 평했으며, 오토는 추악하다고 평했다. 특히 안네와 에디트는 아우구스테가 못난 자기 남편과 비교되는 듬직한 오토에게 호감을 가진 것을 싫어했다
어느 날 식사를 했을 때 안네가 감자만 먹고 야채를 남겼을 때 계속 훈계를 늘어놓자, 참다 못한 오토 프랑크가 안네를 옹호해주며 판 단 부인의 접시에 담겨 있는 야채를 지적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담으로 그녀는 욕 솜씨가 아주 뛰어나 독일어와 네덜란드어를 섞어 말하는게 예술이었다고 한다.
한 번은 안네가 일기를 쓰는 것을 목격했는데, 놀란 안네가 얼른 일기를 덮자 마지막 페이지만 보여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필 마지막 페이지가 안네가 아우구스테에 대한 욕만 잔뜩 써놓은 페이지였기 때문에 안네가 거절했다.
훗날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고, 안네와 마르고와 함께 수용소에서 건강한 여성 3명으로 뽑혀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베르겐-벨젠에서 또다른 수용소로 옮겨진 정황까지는 확인되는데, 이후에는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만 확인되었을 뿐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확인된 바가 없다. 심지어 죽은 시기와 장소도 확인할 수 없어 1945년 4월 9일에서 5월 8일 사이에 독일 혹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측만 되고 있을 뿐이다.
3.2.3. 페터 판 펠스
'''페터 판 단''' / '''페터 판 펠스''' '''(Peter van Daan / Peter van Pels)'''
헤르만 판 단과 페트로넬라 판 단의 아들. 폭력적인 아빠와 신경질적인 엄마 사이에서 자라 소극적인 성격을 가졌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다락방에 틀어박혀 고양이 무쉬하고만 지냈다고 한다. 초반에는 안네가 시끄럽고 수다스럽다는 이유로 싫어했으나[20] 안네와 몇 번 얘기를 주고 받은 후 따로 만나서 얘기하고 놀 정도로 관계가 발전했다.
안네가 부모님과 친한 편이고, 자존감 높고 긍정적인 성격을 가진 것을 굉장히 부러워 했으며, 의존도 많이 했다. 안네와 키스도 몇 번 나누며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안네는 마르고도 페터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안네가 미안해서 한동안 마르고의 눈치를 보았는데, 마르고 본인이 나중에 자신은 페터에게 관심이 별로 없다며, 청소년 3명 중에서 자기만 소외되는 게 섭섭할 뿐이라고 직접 말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간 뒤, 1945년 1월에 "유대인들을 전부 독일로 옮기라"는 명령으로 인해 건강하지 못해 남겨진 오토 프랑크와 헤어지게 되었다.[21] 죽음의 행진을 거쳐 그는 오스트리아 린츠 근교의 마우타우젠(Mauthausen) 강제수용소[22] 의 부속 수용소인 멜크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그곳의 광산에서 끔찍한 중노동에 시달린 끝에 결국 병을 얻어 수용소 병동으로 보내졌다가 사망했다. 자세한 사망 일자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적십자 기록에는 5월 10일로 기재되어 있는데, '''비극적이게도 이는 수감자들이 수용소의 통제권을 장악한 지 6일, 독일이 항복을 선언한 지 이틀, 그리고 마우타우젠이 조지 S. 패튼 장군의 미 3군 분견대에게 해방된 지 5일이나 지난 이후였다.'''
은신처 식구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 네덜란드의 한 임시 수용소에 머물렀는데,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안네와 페터는 항상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지냈으며, 이별과 죽음을 직감했겠지만 두 사람은 행복해 보였다고 한다.
은신처 내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어머니와 싸우는 모습도 그려지고, 막말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게 반항하기도 한다.
안네와의 관계는 극도로 가까워져, 뽀뽀까지 하게되는데,(!!!) 안네의 어머니는 둘이 이렇게 친해지는 것을 꺼렸다.
여담으로 페터는 유리문이 있는 주방에서 샤워를 하기 때문에 씻는 모습이 다 보인다는데 본인은 그리 신경쓰지 않았던 모양.
3.2.4. 무쉬(Mousch)
페터가 데려온 고양이. 판 단과 뒤셀이 이 고양이를 가지고 계속 시비걸고 넘어졌는데 페터가 끝내 지켰다. 배가 불러 있어서 안네가 암컷이 아니냐고 물었는데, 알고 보니 뼈다귀를 하도 주워 먹어서 배가 불렀던 것이고 사실 수컷이었다.[23] 나중에 집을 나가 버려서 페터가 상심했다. 그러나 그 후 다락방 모래구석에서 애인과 함께 발견되어 은신처 식구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안네도 집에 두고 온 모르체(Moortje)라는 고양이가 있었기에 좋아했다.[24]
3.3. 프리츠 페퍼
'''알베르트 뒤셀''' / '''프리츠 페퍼''' '''(Albert Dussel / Fritz Pfeffer)'''
은신처에서 새로 받아들인 유대인 치과의사. 베라 비티네(Vera Bythine)라는 여자와 이혼한 사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샤를로트 칼레타(Charlotte Kaletta)라는 프랑스인 애인이 있었지만 홀로코스트 와중에 이별했다. 가끔 애인이 식량을 선물로 보내주곤 했는데, 은신처 사람들이 목숨을 구해줬음에도 혼자만 열심히 화장실에서 처먹어댔다. 이 때문에 안네가 '페퍼가 굶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며 화를 냈다. 평판이 매우 안 좋아서 은신처 식구들이 처음에 걱정했다.
오토 편집판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편집판에서는 그저 무심한 치과의사일 뿐이었는데, 무삭제판을 읽으면 이런 남자와 2년을 같이 살아준 안네가 거의 부처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첫날 은신처 합류 날짜를 멋대로 바꿔서 안네가 ‘염치는 갖다버린 신참’이라고 했다. 은신처로 들어오기 전, 겉으로는 신사인 척 다했지만 막상 은신처 식구로 받아들여지고 나자 매우 제멋대로 굴었다. 본인이 그곳에 있음을 들키면 안 되는 은신처에서 연신 편지를 보내질 않나, 심지어 나치가 금서로 정한 책을 미프에게 구해오라고 부탁해 하마터면 미프가 잡혀갈 뻔했던 적도 있었다[25] . 신경질적이고 사람의 속을 살살 긁어서 은신처 식구들 간의 갈등을 일으켰고, 생각 없이 말을 내뱉어서 마르고가 화를 냈을 정도였다. 판 단 네와 시시건건 시비가 붙었으며, 16살 안네와 방을 같이 쓰면서 코를 골거나 이를 갈고 옷을 아무데서나 갈아입는 등 배려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 책상을 쓰는 문제에서 안네에게 "넌 겨우 어린애가 일기 쓸 뿐이잖니? 네 공부는 하찮은 거잖아. 난 치과의사라서 할게 많아[26] "라며 망언을 하기도 했고, 이에 안네가 항의하자 오토는 책상 사용시간을 안네에게 불리하게나마 시간을 정해 주었다. 첫날부터 아이들이 화장실을 너무 오래 쓴다며 짜증내 놓고는 본인은 방 문제로 싸우고 난 뒤 화장실을 오래 사용하는 식으로 복수했다.[27] 게다가 안네와 책상문제로 얘기하고 나서 책상을 쓰지 않을 때도 책상에 앉아 12시간을 버텨댔다. 안네는 54살이나 먹은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속이 좁고 찌질하며 쓰레기 같다고 뒤셀을 평했다. 한편 미프는 그에 대해 "마음씨가 좋고 잘생겼으며 매력적"이라고 평가했는데, 이는 같이 안 살아본 사람의 증언임을 감안해야 한다.
마르고가 은신처에서 그에게 네덜란드어를 가르쳤는데, 마르고의 평에 따르면 조금도 공부할 생각이 없고 게으르기 짝이 없어 실력이 늘지도 않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28] 항상 불평불만을 해대면서도 성격은 소심했던지라, 에디트를 붙잡고 또 불평불만을 하다 에디트에게서 ‘모두가 당신의 불평을 지긋지긋해 한다.’ 라는 말을 듣고 불면증이 올 정도로 예민하게 굴었었다.
프랑크 가족, 판 단 가족과 같이 게슈타포에게 연행되어 강제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1944년 12월 20일에 독일 함부르크의 노이엔감메(Neuengamme)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이렇게 읽어 보면 어째 은신처 사는 사람들(특히 어른들) 성격이 죄다 배배 꼬였다 싶다. 모두가 예민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극한 상황임은 감안해야 할 테지만.
3.4. 조력자
조력자들은 오토 프랑크의 소유 회사[29] 에서 일하던 직원들이다. 은신처인 프란센라흐트 263번지는 원래 오펙타 사무실이었는데 이 곳에서 일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유대인들을 숨겨주었다. 그리고 이들 역시 미프와 베프를 제외한 모두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수용소에 끌려가는 고초를 겪었다. 다행히 이들은 그나마 은신처 사람들과 달리 모두 무사히 종전을 맞이해 평온한 여생을 보낼수 있었다.
오토 프랑크의 회사 직원. 상냥하고 착한 성격이다. 게슈타포에게 발각되어 유대인을 숨겨준 죄로 은신처 식구들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끌려갔지만, 강제 노역을 하다가 중간에 위출혈이 도져서 적십자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암스테르담에서 계속 일했는데, 1959년에 갑자기 책상 위에 쓰러져 급사했다. 안네가 일기에서도 썼듯 평소에도 클레이만은 위궤양 등의 병으로 상당히 고생했었는데, 결국 지병의 악화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오토 프랑크와 함께 안네의 일기를 알리는 데 적극적이었던 사람 중 한 명이었고, 영화화 작업에 오토와 함께 고증에 힘썼으며, 생전에도 기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인터뷰를 응했다고 한다.
은신처 시절 문고리가 고장났는지 확인해 보겠답시고 문고리를 계속 돌려서 은신처 식구들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했다. 빅토르가 제안한 은신처의 비밀문을 제작한 사람이다. 그런데 문 위틀이 너무 낮아서 은신처 식구들이 자주 머리를 찧고 다치는 일이 빈번해 위틀에 톱밥자루를 못질해서 붙여놓았다고 한다.
오토 프랑크의 회사 직원. 역시 상냥하고 착한 성격이다. 게슈타포에게 발각되어 유대인을 숨겨준 죄로 은신처 식구들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자기들 때문에 무고한 직원들까지 끌려가게 되었다고 자책하는 오토에게 "우리들은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니 후회하지 않는다"고 위로하는 대인배다운 모습을 보였다. 이동 도중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을 때 그 혼란을 틈타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은신처의 문을 책장으로 가리는 비밀문을 제안한 사람. 전쟁이 끝난 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해 그곳에서 살다가 1981년에 세상을 떠났다.
오토 프랑크의 회사 직원. 다른 직원들처럼 상냥하고 착한 성격으로, 미프와 함께 은신처 식구들에게 식품을 조달했다. 요하네스가 병이 나고 미프가 아플 때 혼자 은신처 식구들을 위해 심부름을 해야 했는데, 판 단 부부의 잦은 심부름에도 짜증을 내지 않고 도와준 천사였다. 몇 번 한계에 부딪쳐 거절한 적은 있으나, 그마저도 다 봐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게슈타포한테 은신처를 발각당했을 때 미프를 포함해 끌려가지 않은 유이한 인물이다. 전쟁이 끝난 후 결혼하고 4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 한 명의 이름을 안네라고 지었다. 이렇듯 베프도 다른 조력자들처럼 안네의 일기를 소중히 여긴 인물임은 분명하지만, 언론 노출을 싫어했기 때문에 생전에 인터뷰는 거의 하지 않았다. [30] 스위스로 이주한 후엔 오토와 친하게 지냈고, 오토가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1983년 신장병으로 작고.
오토 프랑크의 비서 출신. 원래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는데, 제 1차 세계대전 후 식량난 때문에 네덜란드로 이주한 오스트리아계 네덜란드인이다. 나치당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거부했고, 남편 행크와 함께 프랑크 가족과 판 단 가족이 은신처로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게슈타포가 쳐들어 왔을 때 기지를 발휘해[32] '''안네의 일기가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해 준 은인'''이다. 안네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했던 사람이었고, 안네의 어머니 에디트가 안네가 작가가 될 거라며 자랑했기에 안네가 일기를 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안네가 돌아오면 돌려줘야 한다며 일기를 보관하고 있었다가 [33] 후에 돌아온 오토 프랑크에게 일기를 넘겨주었다. [34] 이렇게 안네의 일기를 세상에 나오게 해준 공로로 미프는 네덜란드 왕실로부터 귀족 작위를 수여받았다. 이후 100세가 넘게 장수하였고, 은신처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21세기에 세상을 떠난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은신처 조력자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공식 홈페이지도 있으며, 생전에는 편지 답장도 해줬다고 한다.
미프 히스의 남편. 은신처로 떠나기 전날 미리 짐을 은신처에 가져다 주는 등 [35] , 프랑크 가족과 판 단 가족이 은신처로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시 의회에 약간의 연줄이 있어서 옷이나 식품을 가져다 주기도 했으며, 새로운 뉴스를 가지고 들어오는 역할을 맡았다. 종종 점심시간에 들르기도 했다. 미프와 함께 은신처에서 같이 밤을 지낸 적도 있다. 은신처 사람들 중에서는 두 번째로 장수했다.
미프의 친지. 1943년부터 요한 포스콰일의 뒤를 이어 회사의 창고를 관리했던 사람이다. 은신처 식구들을 밀고한 유력한 용의자들 중 하나이다. 본인은 끝까지 부정했다. 1971년 사망. 일기에서도 가끔 언급되는데, 속을 알 수 없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등장해 은신처 사람들이 싫어했다. 용의자 설도 합쳐져 안네의 일기 팬들에게 까이는 인물 중 하나.
베프 포스콰일의 아버지. 회사의 창고를 관리했던 사람. 관리자로 있던 도중 병으로 인해 판 마런에게 관리자 역할을 넘겼다. 바로 그 유명한 회전 책장을 만든 사람. 손재주가 아주 훌륭했다고 한다. 1937년에 위암에 걸렸고 병세 때문에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11월에 사망했다.
4. 은신처 사람들을 밀고한 자는 누구인가?
은신처 사람들을 밀고하여 수용소로 끌려가게 한 밀고자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체포 당시 경찰들이 은신처의 비밀스러운 구조를 훤히 꿰뚫고 있었으므로 밀고자는 은신처 사람들과 매우 가깝게 지낸 사람일 것이며, 아마도 그 정도면 안네의 일기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1. 가장 유력한 인물은 회사 창고 관리인 '''빌럼 판 마런'''.
평소에 돈이 쪼들리는 편이었고, 은신처 사람들이 발각당한 후 독일 당국이 그에게 건물 열쇠를 준 뒤에는 자기가 사장인 양 회사 일에 간섭해댔기 때문이다. 단순히 하급 직원에 불과했던 그가 열쇠를 맡게 된 경위도 미심쩍은 점이다. 일기에서도 안네는 "판 마런의 행적이 조금 수상하다"고 적었다. 일기에 따르면 은신 생활 중 도난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은신처 사람들과 회사 직원들은 "판 마런이 관련되어 있는 거 아니냐"고 의심했지만 증거가 없어 의심으로 그쳤다. 그리고 판 마런 본인은 죽을 때까지 이를 부인했다. 물론 "내가 팔아넘겼소" 라고 했다가 뭔 꼴을 당할지는 말 안해도 다 알겠지만...... 살려고 숨은 사람을 팔아먹었다는 비난은 둘째치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자. 딱 한 명만 빼고 모두 비참하게 죽거나 살해됐고, 심지어 그 중 셋은 미성년자다. 그러니 "내가 팔아넘겼소" 라고 말하는건 "나 사회에서 인간 말종으로 매장당하고 싶어 환장했소"[36] 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2. 또 다른 유력한 용의자는 창고의 청소를 맡고 있던 여성 '''리나 하르토크'''.병역을 기피한 아들을 숨겨두고 있었기 때문에, 만일 은신처 사람들이 발각당해서 수용소에 끌려가면 자신의 아들도 끌려갈까봐 늘 불안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10여명의 유대인을 밀고하면 매우 큰 공을 인정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아들과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은신처 식구들을 밀고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안네의 일기가 출간된 이후 네덜란드 경찰이 밀고 사건을 재수사하던 중 경찰에 전화를 건 밀고자의 목소리가 여성의 목소리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하르토크가 더욱 의심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사망하여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3. 2000년대 이후에 요주의 밀고자 후보로 지목되고 있는, 오토 프랑크의 동업자였던 '''안톤 할러'''.처음 할러를 밀고자로 지목한 사람은 오토 프랑크의 전기를 저술한 캐럴 앤 리로, 할러가 돈을 받고 유대인들을 밀고한 전적이 여러 번 있었던데다 은신처를 습격한 독일 경찰들 중 할러의 친구도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웠다. 참고로 할러는 오토 프랑크가 돌아온 후 자신이 나치와 거래했던 사실을 숨겨달라는 대가로 오토에게 주기적으로 많은 돈을 주었다.
사실 은신처 식구들은 은신 도중 몇 번의 위기를 겪었다. 사무실에 강도가 침입한 사건도 있었고, 건물주가 조력자들에게 알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집을 팔아버려 새 건물주가 집을 찾아온 일도 있었다. 다행히 열쇠가 없다고 해서 넘어갔지만.이렇게 밀고자로 추측되는 인물들이 여러 명 거론되고 있지만, 여러 번 경찰 수사가 이루어졌음에도 밀고자가 누구인지는 결국 밝혀낼 수 없었다. 게다가 사건의 직접적인 관련자들이 모두 사망한 현재 시점에서는 밝혀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
참고로, 당시 유대인을 신고하면 유태인 한 사람당 1.40길더를 포상금으로 주었다고 한다. 길더는 유로 도입 이전에 네덜란드에서 쓰인 화폐인데, 이게 현재 가치로 대략 1945년 네덜란드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직후 고정 환율 2.652길더/USD과 당시 $1의 가치가 $13,26 인 것을 감안해서 대략 $7로 환산된다(2016년 기준). 단, 해방 직후 환율은 나치 치하의 네덜란드 길더 가치와 매우 다를수 있다.
4.1. 사실 밀고자는 없었다?
2016년 12월 16일 AFP 통신에 보도된 바로는, 안네 프랑크 하우스 박물관 측에서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은신처가 나치 독일에 의해 발각된 이유가 밀고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됐다고 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은신처를 덮친 것은 SS나 게슈타포 같은 유대인 색출과 납치를 담당하던 기관들이 아닌, SD라 불리는 나치 방첩대였다. 당시 SD는 식권 위조나 징집 기피자를 색출해내는 치안 활동을 담당했고, 유대인 색출은 주 업무가 아니었다는 점.
2. 은신처가 발견되기 얼마 전 SD가 은신처가 있는 건물에서 일하던 두 남성의 배급권 불법 거래를 잡아냈고, 이에 따라 두 남성의 활동 근거지에 대한 정밀 수색에 나섰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3. 당시 은신처가 위치한 지역의 전화선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전화로는 밀고가 불가능했다는 점.
위와 같은 3가지 이유가 거론됐다. 종합하면 누군가의 밀고로 은신처가 발각된 것이 아닌, 직전에 붙잡힌 배급권 불법 거래자들의 활동 근거지들을 수색했는데 그 중 한 곳이 은신처가 위치한 건물이었고, 건물을 수색하다가 우연히 은신처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이며, 안네 프랑크 하우스 박물관의 로날드 레오폴드 관장도 "이런 연구 결과가 밀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며, 다른 가설들도 고려돼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역사에 만약은 없을지라도, 만약 위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여러모로 재수없이 걸려서 은신처 생활이 파탄난 꼴이니 심히 안타까울 뿐이다.
5. 출판
안네가 쓴 일기의 원본은 두 가지 형태론 존재한다. 하나(version A)는 안네가 크리스마스 때 받은 일기장과 두 공책에 쓴 일기이다. 또 다른 하나(version B)는 안네가 라디오에서 일기가 전쟁 기록물로 제출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버전 A를 다시 작성한 것이다. 버전 B는 버전 A에서 내용이 추가되거나 생략된 형태이다.
5.1. 네덜란드어
1947년 6월 25일에 암스테르담의 출판사에 의해 Het Achterhuis. Dagbrieven van 14 juni 1942 tot 1 augustus 1944[37] 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버전A와 버전B를 짜맞춘 형태이고 에필로그에 작가의 운명이 소개되어 있다. 출판사 직원의 조언에 따라 안네의 성에 대한 솔직한 생각이 생략되어 있으며 초반 부분도 많이 생략되어 있다.
1986년에는 무삭제판이 출간되었다.
5.2. 한국어
5.3. 나머지 언어
6. 기타
- 1959년에 20세기 폭스사에서 "안네 프랑크의 일기(The Diary Of Anne Frank)" 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했고, 명작으로 1959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과 미술상, 촬영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칸 영화제와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한국 기준으로 저작재산권이 만료되어서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1편, 2편. 한국에서도 공중파로 더빙 방영한 바 있다.
- 1995년에 일본 매드하우스에서 아키노리 나가오카가 감독을 맡아 극장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으나 처절하게 망했다. 그런데, 이후로 2010년대 일본이 노골적으로 피해자 행세를 하고자 안네의 일기를 만화책으로 마구 여럿 내고 안네 프랑크 재단을 아베 전 총리가 방문하며 일본은 유태인을 도왔다고 노골적으로 피해자 행세를 부각시켜 한국이나 중국같은 피해 국가들에게 불쾌감을 보이게 하고 있다....
- 2001년판 ABC의 미니시리즈 안네 프랑크(Anne Frank: The Whole Story)도 있다. 현재 유튜브에서 영어원판 그대로 끝까지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안네 프랑크 재단과 일이 틀어져서 안네의 일기를 소재로 한 이야기임에도 일기나 은신처 생활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은신처로 옮기기 이전의 생활과 수용소 연출이 사실적이고 훌륭하게 잘되어 있고, 안네 역할 배우인 한나 테일러-고든이 실제 안네와 닮았는데 연기까지 훌륭하게 소화하여 안네가 실제로 겪은 일들과 고통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안네가 수용소로 끌려간 뒤인 7개월동안 어떤일을 겪었는지 고증을 통해 다시 만들어졌기에 인간 안네 프랑크를 볼 수 있다.블로그 참조
- 인디 뮤지션인 제프 맨검이 영향을 받아 전설적인 포크 락 앨범 In the Aeroplane Over the Sea를 써냈다.1998년에 발표됐지만 오늘날까지 최고의 명반으로 추앙받으며 특히 4chan 등지에서의 제프 맨검 찬양은 대단하다.
- 과거에 국내에서 출판된 안네의 일기 번역본은 대체로 멀쩡히 안네의 사진을 표지로 썼지만, 왜인지 전혀 엉뚱한 인물을 가져다 쓴 표지가 이상한 판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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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안네 프랑크 재단이 알았으면 모욕죄로 고소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세계에서 쏟아지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정식으로 출간되어 서점에 진열되었던 책이 아니고, 80-90년대에 거리에서 리어카에 담아놓고 팔던 것이다. 정식으로 출간된 책의 내용을 그대로 베꼈는지 번역 등에 전혀 문제가 없었음에도, 어떻게 된 건지 저렇게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표지의 책들이 제법 있었다. 내용도 보지 않고 그냥 가까이 있는 아무 사진을 표지로 쓴 듯.
만약 안네 프랑크 재단이 알았으면 모욕죄로 고소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세계에서 쏟아지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정식으로 출간되어 서점에 진열되었던 책이 아니고, 80-90년대에 거리에서 리어카에 담아놓고 팔던 것이다. 정식으로 출간된 책의 내용을 그대로 베꼈는지 번역 등에 전혀 문제가 없었음에도, 어떻게 된 건지 저렇게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표지의 책들이 제법 있었다. 내용도 보지 않고 그냥 가까이 있는 아무 사진을 표지로 쓴 듯.
- 삼성출판사에서 만화판을 출판했는데, 오류가 제법 많다. 마르고가 마르고트로 표기되었고, 안경을 쓰지 않았다는 등.
- 비슷한 책으로 '엘렌의 일기'가 있다. 이 책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 파리에서 엘렌 베르라는 여자 대학생이 쓴 일기로, 1942년부터 1944년에 체포될 때까지 쓴 것이다. 대학생이 쓴 거라[38] 훨씬 문장이 정제되어 있고, 안네의 일기와 다른 각도에서 시대상을 보여주는 등[39] 독자적인 개성이 있다는 평이 많다. 다만, 이 책은 프랑스에서도 2008년이 되어서야 출간되었기 때문에 안네의 일기보다는 덜 유명한 편이다.
- 비슷한 인물로 헬가 딘이 있다. 부프트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을 때, 그곳에서 1943년 6월부터 7월까지 한 달동안 일기를 썼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용소 생활을 자세하게 묘사했고, 수용소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녀가 일기에 남긴 마지막 문장, "오늘 아침 아이들이 전부 사라졌다. 다음은 우리 차례다."가 유명하다. 그리고 이 문장을 쓴 다음날, 그녀는 폴란드에 있는 소비보르 절멸수용소로 이송되어 살해되었다. 하지만 이 사실이 2004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밝혀져서 안네보다는 덜 알려져 있다.
- 한때 네오 나치들과 일부 반유대주의자들이 이 일기를 '유대인들이 창작해낸 가짜다' 라는 망언을 했지만, 완전판 나올 당시 원본이 공개되면서 잠잠…해지긴 개뿔, 아직까지도 우기고 있다.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2013년 3월 3일자 방송에서 원본이 공개되었다는 설명은 않고 '아직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라는 설명을 하기도 했다[40] .
- 2014년 2월 25일에 일본의 각종 도서관에서 이 안네의 일기를 비롯하여 각종 홀로코스트 관련 서적이 인위적으로 손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41] 도쿄에서만 300권이 넘는 서적이 파손되었다고 한다. 이에 경악한 이스라엘과 유대인 단체들이 진상조사를 촉구하였고, 이에 일본 정부와 일본 경찰이 수사에 들어간 끝에, 마침내 범인이 잡혀 수사 중이다. 링크 범인은 "안네의 일기는 대필"이라는 해묵은 개드립을 시전하는 중. 그런데 장갑까지 껴서 지문을 남기지 않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는데도 불안정한 언동을 보여, 정신상태가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상황인지 확인해보고 있다고.
- 2018년 5월 16일에는 안네의 일기에서 두 페이지 분량의 봉합된 일기가 발견되었다고 AP 통신에서 전했다. # 안네 본인이 누가 볼까 해서 스스로 직접 봉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망친 페이지를 이용해 ‘야한 농담들’을 적어보겠다”면서 매춘, 결혼 등을 소재로 한 몇몇 얘기들을 단편적으로 적어 놓았다. 당시 사춘기 소녀의 관점으로 적힌 것이기에 외설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고 , 학자들도 웃긴 농담 수준으로 볼만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후 출판본에 번역되어 나올 확률이 높다.
[1] 한국에는 그런 문화가 잘 전해지지 않았지만, 서양에서는 일기장을 한 명의 친구로 여기며 그 친구에게 편지를 쓰거나 말을 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오늘의 일기"로 시작하는 것을 서양에서는 "일기장에게(Dear Diary)"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2] 안네 프랑크가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일기를 공모전에 출품하려 했을 때 쓰려 했던 제목이다.[3] 영국군에 의해 해당 수용소가 해방되기 고작 몇 주 전이다.[4] 무삭제판 후기에 따르면, 절체절명의 순간에 미프가 기지를 발휘해 일기와 안네의 글이 담긴 종이들을 간신히 빼돌렸다고 한다.[5] 덤으로 전시회에 내려는 목적도 있었다. 1944년 네덜란드 망명 정부가 BBC 방송을 통해 "종전 후 전쟁 당시의 기록을 모아서 전시회를 할 것"이라는 라디오 방송을 했는데, 이를 들은 안네가 "나의 일기를 여기에 제출하겠다"면서 매우 개인적인 내용들을 많이 삭제했다.[6] 예를 들자면, 안네의 단짝 친구 Hanneli Goslar의 경우, Lies Goosense 라는 가명으로 바뀌었다. 이 단짝 친구인 한넬리 또한 안네와 같은 유대인이었기때문에 강제수용소로 끌려갔고 안네와 같이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재회하기도 했다. 안네와 다르게 한넬리는 수용소에서 살아돌아왔고 1947년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예루살렘으로 이민을 갔고 2020년에도 생존해있다.[7] 다만 아내의 죽음은 수용소에서 우연히 만난 네덜란드인에게 전해들어 알고 있었다고 한다.[8] 생존자의 말에 의하면, 안네의 언니 마르고가 수용소의 생활에 견디다 못해 사망했고, 수용소 사람들은 안네를 위해 그 사실을 공연히 비밀로 하기로 했다. 하지만 안네는 그 사실을 이미 눈치챘고, 수용소에서 하나뿐인 가족을 잃자 이내 안네가 삶의 희망을 잃은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9]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서도 블라덱과 친구 쉬베크가 우유와 닭을 먹고 탈나는 얘기가 나온다. 심지어 당시 이 둘은 체력이 괜찮은 편이었음에도 탈이 났다.[10] 즉, 의사와 간호사로 구성된 전문 의료진들의 노력에도 무려 약 4분의 1에 달하는 사람들이 영양실조와 후유증으로 숨을 거둔 것이다. 수용소의 상태가 얼마나 열악했는지, 나치독일의 만행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11] 여자 친구와 함께 잠을 자다 입을 맞췄다던가, 비너스와 같은 아름다운 여자의 몸을 보면 황홀감을 느낀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적어놓았다. #[12] 물론 알아둬야 할 점이 있는데, 안네의 일기뿐만 아니라 사망자의 일기 등 사생활이나 개인정보가 기록된 물건이 공개될 경우에는 어느 정도 편집되거나 비공개하여 내놓기도 한다. 이는 고인에게 명예를 지켜주기 위한 행위이면서 존중해주는 차원으로 하는 것인데, 정작 이 조작론은 네오 나치나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니 무시하도록 하자.[13] 번역본에 따라서 마고 또는 마르고트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 네덜란드어 발음은 마르고에 가깝다.[14] 안네의 1인칭 시점임을 감안해야한다.[15] 편지에 의하면 마르고트는 "나를 이해해줄 사람은 더 똑똑하고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그게 페터는 아니다. 그저 그런 사람을 못 만나서 안타까울 뿐이다. 너와 페터는 그런면에선 잘 어울린다.” 라고 적었다. 안네는 언니가 상냥하고 마음이 넓다며 감탄했다.[16] 그러나 정작 뒤셸은 배울 의지가 없고 게을러서 마르고조차 뒤셸을 보고 공부가 조금도 늘지 않을 정도로 전혀 열의가 없는데 왜 가르쳐야되는지 모르겠다며 혹평했다.[17] 물론 안네의 일기나마 남겨질 수 있던 것도 미프 덕이며, 그것도 간발의 차이였다. 그 상황에 마르고의 것까지 챙길 여유는 전혀 없었다.[18] 안네 본인도 이 부분은 나중에 후회했다. 일기 중에 어머니를 신랄하게 비난했던 대목을 두고 스스로 '끝까지 못 읽겠다'며 반성하는 대목이 있다.[19] 안네 본인 이름의 경우도 처음엔 안네 아울리스, 안네 로빈이라는 가명을 붙였다.[20] 안네도 페터를 "게으르고 별로 재미 없을 것 같다"고 안 좋아했다. 첫인상 묘사도 굉장히 심심해 보인다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적혀 있다.[21] 수용소에서 헤어지기 전까지 페터가 오토 프랑크를 잘 챙겨주었다고 한다. 사실 친아버지인 헤르만 판 펠스가 먼저 가스실로 끌려가 사망한 상황에서 페터에게 오토 프랑크의 존재는 아버지와 같았을 것이다. 참고로 은신처에 있을 때도 페터와 오토 프랑크는 사이가 좋았다. 페터가 아버지와 한 판 하고 삐졌을 때 오토 프랑크가 페터를 달래기 위해 여러 번이나 다락방을 오르내렸다는 이야기도 있다.[22] "계도 불가능한 정치범"들로 분류된 사람들이 끌려온 3등급 노동수용소이다. 1938년 빈과 린츠에 화강암 석재를 공급하고자 한 비너-그라벤 사의 요구로 세워졌다. 이 회사는 SS(나치 친위대) 소유의 DEST(독일 토목 및 석재 유한공사) 소속이었으며 대표인 오스발트 폴 또한 후에 친위대 대장까지 진급하는 열성 친위대원이었다. 이를 위해 다하우 수용소의 일부 인원이 재배치되어 건설하였다. 마우타우젠 수용소와 구젠 1, 2, 3 수용소를 중심으로 하여 오스트리아 전역의 101개의 보조수용소(Außenlager)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콤비나트를 형성하고 있었다. 절멸수용소들과 같은 가스실은 없었으나 노동을 통한 절멸(Vernichtung durch Arbeit)을 추구하던 곳인 만큼 수감자들은 이곳에 부속된 벽돌 공장, 군수공장에서 끔찍한 중노동과 학대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DEST 소속 회사들뿐만 아니라 바이엘, 마우저, 하인켈, 메서슈미트 등 독일 유수의 대기업들 및 수많은 오스트리아 향토 기업들은 이곳의 이러한 참상에도 아랑곳 않고 저렴한 노예 노동력을 착취했다. 그 과정에서 총 '''12~32만 명의 수감자들이 이곳에서 살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45년 소련군이 오스트리아로 몰려오자 나치는 수감자들을 동원해 방어선을 건설함과 동시에 남은 수감자들을 지하공장에 집어넣은 후 붕괴시켜 전부 죽여버리고자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학살 명령은 수행되지 않았고, 수감자들은 폴란드, 러시아, 프랑스, 스페인계 수감자들을 주축으로 봉기를 준비했다. 이후 SS가 물러가고 그 자리를 오합지졸인 빈 출신 국민돌격대원들이 채우면서 수용소의 실질적인 주도권은 수감자들에게로 옮겨갔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무장하여 인근 독일군 패잔병들의 공격을 격퇴하다 1945년 5월에 미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이후 이곳은 1970년에 박물관으로 재개장했고, 현재까지도 끔찍한 나치 정권의 범죄를 증언하는 역사적 장으로서 남아있다.[23] 무삭제판에서는 페터가 안네에게 무쉬의 생식기를 보여 주며 성교육을 해줬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다른 남자애가 성기를 가리키며 설명했다면 다시는 얼굴도 안 봤겠지만 페터가 너무 진지해서 당황스럽긴 했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24] 안네가 그녀의 친구였던 토시에에게서 받은 것으로, 은신처로 올 때 살짝 토시에네 집에 몰래 돌려주고 왔다고 나와 있다.[25] 책을 어찌 구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책을 구하고 돌아오다가 SS 차량에 치일 뻔했고, 운전수에게 미프가 욕을 했다고 한다. 만약 끌려갔으면...[26] 환자 카드를 들고 와서 그걸 정리했다고 한다. 도대체 어디다 쓰려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27] 은신처에서는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화장실을 쓸 수 없기 때문에 화장실 시간은 매우 예민한 문제다.[28] 다만 이는 나이 54세에 은신처에 갇혀 있는 상황임을 감안해야 한다. 전쟁이 끝나고 네덜란드에 살 계획이 아니라면 54세에 네덜란드어를 배울 필요가 아예 없을수도... 뒤셀의 원래 직업이 치과의사였다는 점을 기억하자.[29] 오펙타(OPEKTA)는 이름의 회사였다[30] 안네의 일기 출간 이후 오토 프랑크와 네오나치 사이에 있었던 소송 증인으로 출석했을 때 과도한 관심에 시달렸으며, 유족들에 따르면 생전에 전쟁 시절 얘기 자체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31] 독일식 본명은 헤르미네 잔트루시츠Hermine Santruschitz.[32] 게슈타포가 은신처를 습격했을 때 안네가 쓴 일기를 서류철에 재빨리 쓸어담았고, 나중에 게슈타포가 추궁하자 자기 문서라고 우겼다.[33] 다만 일기 내용은 몰랐다고 한다. 훗날 인터뷰에서는 "일기 내용을 알았다면 나의 신변을 위해 없앴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34] 안네가 자신의 일기를 공모전에 내려고 했던 걸 생각하면, 안네의 꿈을 이뤄준 은인이다.[35]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옷, 구두 등을 챙겨 은신처로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다윗의 별을 단 유대인이 짐가방을 잔뜩 들고 길을 나서면 바로 신고당하는 게 당시 상황이었기에, 이렇게 짐을 나눠서 옮겨야 했다. 실제로 오토는 이런 상황을 대비하고 짐을 조금씩 미리 은신처에 쌓아두었는데, 마르고에게 소환장이 도착하는 바람에 예상했던 것보다 일찍 은신처로 숨었다. 판 단 가족도 열흘 정도 일찍 들어온 케이스. 안네는 이 때문에 "은신처로 이사하던 날, 옷을 그야말로 껴입을 수 있을 만큼 껴입어서 걷는 것도 버거웠다"고 일기에서 불평을 했다.[36] 매장 당하는 수준으로 안끝났을 가능성도 높다. 전쟁 후 서유럽 지역에서의 나치 청산 작업을 생각하면 높은 확률로 형사 처벌까지 받게 되었을 것이다.[37] 비밀의 별간 1942년 6월 14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의 일기 편지[38] 아직 중학생이었던 안네와 달리, 엘렌은 소르본 대학교를 다니던 영문학도였다. 첫 페이지부터가 폴 발레리를 방문하는 장면일 정도.[39] 엘렌의 일기에서는 홀로코스트로 끌려간 사람들의 친족들을 책임지는 일을 하는 장면이나 시오니즘에 대한 비판이 종종 드러난다. 안네의 일기보다는 확실히 세상에 대한 인식이 확고한 성인이 썼다는 게 잘 드러나는 편이다.[40] 이 방영분에서 나온 논란이 되는 근거가 네오 나치들이 주장하는 것들을 그대로 따왔다[41] 일각에서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가 사실은 거짓'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지는 틈을 노린 극우의 만행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