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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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흥은 1903년 1월 20일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성사리(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에서 서당 훈장이었던 아버지 장대환(張大煥)과 어머니 은진 송씨 송원수(宋圓洙)의 딸 사이의 다섯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591년(선조 24) 별시 무과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 때 황해도에서 종8품 봉사(奉事)로 순절한 장희한(張希翰)의 11대손으로, 어려서 부친의 밑에서 학문을 배웠고 15살 때 사서삼경을 통달했다고 한다.
1925년 2월 의열단 단원 오세덕을 따라 한국청년동맹회[3] 에 가입했으며, 1927년 8월 여운형의 추천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 중국군에 입대하였다. 또한 동기생인 의열단장 김원봉의 권유로 의열단에 가입했고, 이와 함께 난징헌병사령부에 소속되어 단원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1931년 이후 난징동사령부에 재직하면서 조선민족혁명당 특별 당원으로 입당했으며, 일제 밀정이 수집한 정보를 탐지하여 당 고위층에 전달해 대책을 수립하도록 했다. 1933년 난징에서 중국관내 각 혁명단체를 통합한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 결성을 적극 후원했으며,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당할 때 참여하여 감찰위원으로 활동했다. 1935년 5월에 중국군 난징장정총대기요간부(南京壯丁總隊機要幹部)로 재직했으며, 신한독립당계 청년 50여 명이 뤄양분교를 졸업한 뒤 난징 태산여관에 숙식할 때 지청천의 요청을 수락하고 그들을 장정 명단에 편입시켜 생활 필수품을 보급받게 했으며 1년여 간 매월 급여 80원 중 50원을 지원했다.
한편 장흥은 1935년 5월에 중국군 헌병사령부 상위(上尉)가 되었고 1940년 12월 헌병 제8단 소교단(少校團), 1942년 10월 동제2영 소교영장(少校營長) 등으로 복무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의 신변보호를 위하여 진력했다. 특히 저우에 주둔한 일본군내 한적사병 정희섭(鄭熙燮)·성동준(成東濬)·김수남(金壽男) 등 수십명을 집단 탈출시켜 광복군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이후 1942년부터 1945년까지 강서, 호북, 호남 등지에서 헌병영장에 재입하여 포로 관리 및 한적사병 분리 수용과 보호 임무를 수행했으며, 한적사병을 광복군으로 전출, 편입시킴과 동시에 징모처(徵募處)의 임무도 수행했다.
8.15 광복 후, 그는 광복군 참모 겸 선무단장으로서 한인 교포를 조국으로 수송시키고 치안을 유지하고 일본군 무장을 해제시키는 등의 일련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귀국 후에는 대동청년단체에 가담해 훈련소장을 맡았고 초대 헌병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1949년 백범 김구 암살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부친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던 그는 급히 상경해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수사하려 했지만, 그가 김구와 가까운 사이인 점을 꺼린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사흘 만에 경질되었고 전봉덕 헌병부사령관이 후임 헌병사령관이 되었다.
4.19 혁명 이후 전봉덕 당시 헌병부사령관 겸 후임 헌병사령관에 의하면 이틀뒤에 해임되었다고 한다. 한민당 계통이라는 말은 오타로,실제로는 한독당 계열로 지목되었다고 한다. 경향신문 8월 12일 기사에 의하면, 이승만과 신성모는 보고전에 알았다고 한다.(최초 보고자는 김태선) 그리고 하루만에 해임되었다고 하는데 동아일보 8월 13일 기사에 의하면 사흘뒤에 해임되었으며, 5,6일뒤에 특무부(CIC)대장 김창룡에게 한독당원아니냐며 추궁받았다고 한다. 역대 기무사령부 소개에 의하면,51년에 특무부 대장이 된 김창룡이 어떻게 49년 당시 CIC대장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김창룡 사후 약력소개기사에서도 나온다. 여기서 나오는 4282년은 1949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발언을 13일 경향신문 기사에서도 한다는 것이다. 공식기록은 3일 뒤 헌병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장흥은 사후 회고록에서 김구 암살사건은 신성모가 배후이고 김지웅도 연관되어 있으며, 88구락부도 김구 암살의 배후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1999년 기사 그러나 이것은 고정훈이란 자의 음모론에 불과하며, 장흥은 속아넘어간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
장흥은 헌병사령관에서 해임된 뒤 제6사단장을 맡았으며, 전역 후 원호위원장을 맡아 원호 대상자의 예우, 지위 향상 등 기초 법규를 제정, 정리, 시행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말년에는 서울에서 여생을 보내다 1983년 2월 6일에 사망했다. 사후 국립서울현충원 제1장군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장흥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