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전선(말레이시아)

 



Barisan Nasional
1. 개요
2. 역사
2.1. 창당 전 (1969년 ~ 1973년)
2.2. 창당과 전성기 (1973년 ~ 2008년)
2.3. 붕괴의 시작 (2008년 ~ 2018년)
2.4. 2018년 총선과 몰락
2.5. 망했어요 (2018년 ~ )
2.6. 미래?
3. 각주


1. 개요


말레이시아의 정당 연합으로, 구 동맹당(AP)의 후신이다. 약칭은 BN. 1973년부터 2018년까지는 연립여당이었으며, 현재는 제1 야권연합이다.
현재 구성원은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말레이시아중국인협회(MCA), 말레이시아인도인회의(MIC) 3당이다. 한때는 10개 넘는 수많은 정당들이 있었으나, 2018년 총선 패배 이후 상당수가 탈퇴하였다.

2. 역사



2.1. 창당 전 (1969년 ~ 1973년)


구 동맹당은 UMNO, MCA, MIC 3당으로 구성된 연합이었으며, 각각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인을 대변하는 정당이 하나로 뭉쳐 민족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하지만 1969년 총선에서 부진했으며 그간 쌓여온 인종 간의 갈등이 절정에 달하다 5.13 사건이 발발해 전국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에 툰쿠 압둘 라만 총리가 빠르게 수습에 나섰으나, 오히려 레임덕이 걸려 1년 만에 사퇴했다.
1970년 총리직을 승계한 압둘 라작 전 부총리를 중심으로 여권발 정계 개편 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동맹당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된 상황에서 이 상태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에 따라 연합의 확대·개편 논의가 오가기 시작했다. 마침 별다른 성적을 보이지 못하며 부진하던 군소 정당인 민중운동당(GERAKAN)과 인민진보당(myPPP)이 세력 확대를 노리고 있었고, 고심 끝에 이들은 정부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당초에는 5당 연합이 확실했으나, 말레이·이슬람 수호 및 세력 확대를 명분으로 UMNO와의 협력을 노리던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이 막판에 합류하였다.

2.2. 창당과 전성기 (1973년 ~ 2008년)


1973년 1월 1일 압둘 라작은 동맹당의 공식 해체를 선포하였고, 동시에 신(新) 여권 연합의 결성을 선포했다. 이 연대의 이름을 "국민전선"으로 결정하였고, 로고는 평등을 상징하는 저울이 선정되었다. 약 1년 반을 비공식적인 연맹으로 있다가, 1974년 6월 1일 선관위에 정식으로 등록되었다.
말레이시아라는 나라답게 말라야에 중심을 두고 있었으나, 압둘 라작 정권은 합류한지 약 10여 년이 된 사라왁, 사바로의 확대를 원하고 있었고, 때마침 현지 지역 정당인데 나름 중앙 정부와의 협력을 꾀하던 통일원주민유산당(PBB), 사라왁 통일인민당(SUPP), 사바 동맹당(SAP)이 추가적으로 합류를 결정했다.
이렇게 순조롭게 나가는 듯 싶었으나... 가장 보수적인 주인 클란탄 주는 PAS가 차지하던 상황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UMNO와 PAS 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결국 총선을 1년 앞둔 1977년 PAS가 축출되면서 위기를 맞이하는 듯 싶었으나, 무난하게 대승을 거두면서 본인들로서는 아쉬워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클란탄 기반을 날린 덕에 1990년대부터 클란탄에서는 고전하게 되었다.
1980년대 사바 통일당(PBS) 등이 추가적으로 합류했고, 이 과정에서도 위기가 있어 축출되는 등 혼란이 있기는 했으나, 실제로 선거 당락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심지어 1987년에는 당권 경쟁에서 밀려난 틍쿠 라잘레이 함자를 중심으로 46년 정신당(이하 46당)이 창당되었으며, 이 당이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당시 총리와 갈등을 빚던 툰쿠 압둘 라만 전 총리의 지원까지 받는 등 위기가 있었으나, 그래봤자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1]
BN은 1990년대에 접어들어 냉전 붕괴 등 각종 악재가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건재했으며, 1998년 부총리 안와르 이브라힘이 파멸되고 안와르 일가를 중심으로 인민정의당(PKR)이 창당되고 이들이 홀로 뛰던 야당인 민주행동당(DAP)과 손을 잡아 불안이 예상되었으나, 결국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되레 야권은 잦은 분열과 갈등을 빚다가, 2004년 총선 때는 최악의 떡실신을 당한다.[2]
하지만... 전성기가 더 가지는 못했다.

2.3. 붕괴의 시작 (2008년 ~ 2018년)


2008년은 안와르의 집행 유예가 종료되는 해였고, 총선이 바로 몇달 전에 치러졌다. 그래봤자 BN의 승리였지만...
선거를 앞두고 DAP와 PKR이 '''구 BN의 구성원'''이었던 PAS를 끌어들여 인민동맹(PR)을 결성했고, 안와르의 복귀 문제를 두고 일어난 지지자들의 결집 + DAP를 불안하게 여기던 말레이인의 공포심이 PAS를 통해 사그라들면서 PR이 '''개헌 저지선을 넘기는 데 성공'''했다. 그간 원내 ⅔ 이상의 의석은 무난하게 차지하던 BN으로서는 참패나 다름 없었으며, 이 사태로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 총리가 사임했다.
2009년 압둘 라작의 아들인 나집 라작이 총리에 취임했다. 나집은 기존의 부미푸트라 정책의 완화 및 1Malaysia를 통한 민족 간의 단결로 표심 확장과 당 쇄신을 위해 힘썼으나, 나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PR의 영향력을 정면으로 이겨야 하는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럼에도 2013년 총선은 BN의 견고한 승리로 끝났지만... 의석 수가 감소한 것은 그렇다 쳐도 득표율이 PR에 뒤지면서 '''BN이 사상 처음으로 득표율 1위에 실패하는 굴욕 of 굴욕'''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당초 여론조사에서 PR이 1위를 기록했던 것과는 달리 일단 정권을 유지했다는 점이다.[3]
여하튼 나집 총리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이 사건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으며 이어 안와르가 재수감되면서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2015년 중후반 무렵 일명 1MDB 게이트가 수면 위로 오르기 시작하면서 지지율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비당권파가 축출되는 등 혼란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4] 하지만 PR이 또 내분을 겪다가 와해되고, 2016년 사라왁 주 지방선거에서 BN이 초압승을 거두면서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5]
그리고 이 상태에서 2018년 총선을 맞이하게 된다.

2.4. 2018년 총선과 몰락


DAP, PKR이 통일원주민당(PPBM)[6]국민신뢰당(PAN)[7]과 새로 연대해 희망동맹(PH)이라는 신야권연합을 결성했으며 마하티르 전 총리를 총리 후보로 내세우는 파격 행보를 보였으며, 지지율 면에서 BN을 살짝 앞서는 등 PH에 유리한 구도가 형성되는 듯 싶었으나, 2013년 총선의 선례가 있었으며 역으로 PAS와의 결별, 각종 논란에도 BN의 무난한 승리 등 선거 자체는 BN에게 '''철저하게 유리'''했다. 오히려 PH는 90대로 초고령인 마하티르를 총리 후보로 입후보한 것 등에서 상황이 편하지 않았고, 언제 또 불거질지 모르는 내분 문제 등으로 승리는커녕 일각에서는 아예 떡실신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PH가 제노포비아적 국민성을 노려 외노자 추방 등 노골적인 포퓰리즘 공약을 내세워 유권자들을 자극하기 시작했고, 이어 BN이 스캔들 논란 등으로 불안에 빠지자 이 때다 싶어 가짜뉴스를 남발하면서 유권자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반면 BN은 본인들에게 유리한 구도가 형성되었다 싶어 안일하게 임했는데, 즉 빼도 박도 못 하는 '''자만'''이었다. PAS가 PR에서 이탈한 후로 시너지 효과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빠진 BN은 혹시나 하는 불안에 일부를 중심으로 PAS를 다시 끌어들이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길 것"이라는 자만감에 빠져 이에 소극적으로 대처했으며, 심지어 잦은 야권발 가짜뉴스에 이를 막는다 치고 "가짜뉴스 방지법"을 제정했으나, 이마저도 적극적으로 이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2013년 총선의 선례가 있었던 나머지, "득표율은 뒤져도 우리가 이긴다"는 생각에만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2016년 대한민국 총선거,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사례처럼 '''자만은 화를 부르는 법'''이라는 사실을 끝내 알아채지 못했다.
결국 2018년 5월 9일 총선에서 121:79로 BN은 '''사상 유례 없는 참패를 당하고 만다'''. 개표 초반만 해도 예상대로 BN이 앞서면서 예상이 맞아 떨어지는 듯 싶었으나, 선거 중반 쯤 PH가 앞서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고, 막판에는 PH가 크게 리드하기 시작하면서 전국이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2.5. 망했어요 (2018년 ~ )


'''세력이 분열하고 반대 세력의 선동이 난무했는데도, 우리는 이를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 리오넬 조스팽, 2002년 프랑스 대선 출구조사 후 은퇴 선언 中[8]

'''구 동맹당 시절을 포함해 무려 61년간 건재했던 BN은 설마 하며 딴눈을 팔았다가 결국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고 만다.'''
물론 의석 수의 감소는 진작에 예견된 일이었으나, 그래도 당초에는 가까스로 과반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PAS의 참여 및 지지를 받아내는 식으로 정권을 겨우 연장할 것으로 보였다. 허나 현실은...
일단 UMNO 단독으로 명목상 원내 1당 지위는 차지하고 있었으며, 내각제인 말레이시아에서는 원내 1당에 정부 구성권이 우선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BN을 주도하고 있던 UMNO가 우선적으로 나서 정부 재구성에 나섰다. 그러나 브라질처럼 다당제인 말레이시아에서 형식적으로 UMNO가 원내 1당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을 지는 몰라도, 연합체 자체로 따지면 PH가 원내 1당이었던지라, 정부 구성권은 끝내 PH에게 주어지고 말았다. 결국 PH의 총리 후보인 마하티르가 총리에 취임하면서, BN 정권은 끝내 붕괴되었다.
총선 결과를 세부적으로 보면, 기어이 부정할 수 없는 망했어요가 맞다. 수도 쿠알라룸푸르는 아예 '''국회의원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 했고''', 주의회를 세부적으로 보면 상당수의 주가 PH의 승리로 끝났다. 느그리슴빌란 주의 경우 비록 UMNO가 무난하게 원내 1당 자리를 유지했고 BN의 의석수가 과반에 근접했으나, 그 과반 자리를 PH가 가져가 정권을 잃었다. 믈라카, 조호르, 페락 등 BN이 멀쩡히 차지하던 말라카 해협 일대의 주들도 죄다 PH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마하티르의 연고지 + PPBM의 창당으로 지역 기반 붕괴를 맞이한 크다는 아예 떡실신했다. 당초 29:29로 정권을 유지할 것으로 보였던 사바의 경우, 초기 제프리 키팅안 당선자의 BN 합류로 무사 아만 주수상의 연임이 확실했으나, 지역 주민들의 뭊매를 맞다 철회하는 등 혼란이 빚어지게 되면서 보류로 남게 되었다. BN은 유일하게 퍼를리스, 파항, 사라왁만 사수했으며, PH가 아예 떡실신한 트릉가누도 PAS로 넘어가 결국 최종 3개의 주만 차지하게 되었다.
언급했듯이 BN은 각종 호재 덕에 승리가 예상되었고, 실제로 선거 결과에서도 BN이 아주 떡실신할 결과가 나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허나 PR에서 이탈한 PAS를 끌어들이지 못한 것이 결정타가 되었는데, 독자 노선을 걷게 된 PAS는 BN에게 제대로 고춧가루를 뿌리고 말았다. 상당수의 지역구(국회의원 + 주의원)에서 PH 후보가 50% 미만의 득표율로 어부지리로 당선되는 경우가 속출했으며, BN 후보들은 PAS가 대략 10% ~ 20%를 갈라먹은 결과 낙선하다시피 했다. 문제는 쿠알라룸푸르 티티왕사의 국회의원이던 조하리 압둘 가니 등을 비롯한 UMNO의 거물급 인사들마저 여기에 걸려버렸고, 때문에 그간 나름 인물로 꼽히던 이들도 훅 가버렸다.[9]
그나마 형식상 원내 1당 지위라도 사수했고, 50석 이상 얻은 UMNO나, 20석 내외라도 얻은 PBB는 몰라도, 다른 정당들은 3석 미만밖에 건지지 못하면서 떡실신했고, GERAKAN 등은 아예 원외 정당으로 추락했다. MCA도 현역 국회의원인 위카시옹을 제외하고 아무도 당선시키지 못했다.
선거 이후 BN은 빠르게 분열되기 시작했다. BN 후보로 당선된 주의회 의원 몇 명이 PH로 당적을 갈아타고, 구성원의 하나였던 통일파속모모군카다잔두순무룻조직(UPKO)는 아예 PH에 가맹했다.[10][11] 대한민국보다 낮은 정치 수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빼도 박도 못 하는 철새행위가 난무하기 시작한 것이다. PBS를 비롯한 사바의 지역 정당들이 추가적으로 빠르게 탈퇴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PH에 가맹하지는 않았으나 대신에 통합사바연맹(USA)이라는 새로운 연대를 결성했다.
심지어 6월 12일 사라왁의 지역 정당들이 탈퇴를 선언하면서 사라왁에서 '''아예 BN이 붕괴'''되었다. 사라왁은 지역 특성을 이유로 UMNO, MCA, MIC가 진출하지 않은 상태라 PBB 등의 지역 정당을 밀어 주었는데, 문제는 이들이 탈퇴했으니, 아예 BN 자체가 날아간 것이다. 이들은 사라왁 정당연합(GPS)을 결성했다.
23일 마지막 다민족정당이던 GERAKAN이 탈퇴를 선언하면서, BN은 도로 동맹당이 되고 말았다.
탈퇴 러쉬가 끝난 이후에는 PAS와의 재연대가 검토되고 있다. 마침 슬랑오르 주의회 의원 3명이 임기 중 사망하면서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는데, 이 중 숭아이칸디스, 발라콩은 BN이 나가고, 스리스티아는 PAS가 출마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연대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전원이 낙선했으나, 스리스티아는 67:23에서 59:41로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했으며, 무엇보다도 정권 1년차답게 허니문 기간인지라, 이것으로 "효과 없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주의회라 그런지 투표율이 낮았다.
10월 13일 느그리슴빌란 주 포트딕슨의 국회의원이던 다냘 발라고파 압둘라의 사퇴로 '''정권교체 후 첫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되는데, 이는 때마침 석방된 안와르의 원내 진입을 위해 다냘이 자발적으로 사퇴한 것(...)이다. 안와르가 PH 후보로 출마를 확정하면서 BN에서는 모하마드 하산(이하 톡 맛) 전 느그리슴빌란 총리대신[12]을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의외로''' 보이콧을 선포했다. 당초 PAS 또한 보이콧에 동참하는 듯 싶었으나, PAS는 참여를 선언했고, UMNO 소속의 또다른 지역 거물이자 톡 맛의 전임자인 모하마드 이사 압둘 사마드가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를 선언하면서, BN - PAS 간의 연대에 다소 차질이 빚어지게 되었다.
BN이 왜 보이콧을 선포했냐는 알 수 없지만, 대체적인 분석은 이게 역으로 BN의 부활에 결정적인 원인이 되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안와르는 그간 오랫동안 원외에 있어 발언권이 약했는데, 그런 안와르를 원내에 진입시키면 발언권이 강해질 것이고, 이는 PPBM의 지도자인 마하티르와 PKR의 지도자인 안와르 간의 갈등을 다시 지피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BN이 지역의 거물을 내세우면, 오히려 안와르가 원내 진입에 난항을 겪을 수도 있고,[13] 이는 되레 안와르에게 동정심을 자극시켜 오히려 PH에게 유리한 구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PH의 분열을 바라보며 재집권을 노릴 수 있는 나름의 전략인 것.

2.6. 미래?


BN의 빠른 분열로, 얼마 못 가 BN 자체가 와해될 것이라는 설도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아예 구성원들이 PAS를 포함한 조화의 힘(GS)에 가맹하거나, 또는 새로운 연대를 조직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물론 지켜봐야 하지만.

3. 각주


[1] 역으로 46당은 선거에서 고전하다가 끝내 UMNO로 재합당되었다.[2] 참고로 이 선거는 UMNO/BN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기록한 선거이다.[3] 당연히 PR은 부정선거라며 반발했으나, 재야세력들이 워낙에 이중잣대를 벌였던 지라 얼마 못 가 파묻혔다.[4] 비당권파 중에는 마하티르 전 총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하티르는 이후 통일원주민당(PPBM)을 창당한다.[5] 본디 총선과 지선은 동시에 치르나, 사라왁만 별개로 치른다.[6] UMNO 탈당파[7] PAS 탈당파[8] 해당 선거는 좌파의 분열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일단 좌파의 분열이 초래한 것은 맞다. 하지만, 과도한 분열에도 좌파는 오만빙자하게 굴었으며,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9] 여담으로 조하리의 경쟁자가 PPBM 후보였던 리나 하룬으로, 어부지리로 당선된 직후 마하티르 정권의 장관으로 입각한다.[10] 물론 사바유산당(WARISAN)과 마찬가지로 지역 정당을 이유로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옵서버의 형태로 가입한 거나 다름 없다.[11] 이게 결정타가 되어 사바마저 PH로 넘어가고 만다.[12] 느그리슴빌란에서는 더할 것 없는 거물이고, PH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의외로 신뢰도가 높다.[13] 언급했듯이 느그리슴빌란은 BN이 접전 패배했다. 때문에 거물들이 나서면 안와르에게 불리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