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대교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이더나?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바꿔 살아간들
천지 간에 너와 난데 변함이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라 북진통일/남북통일 그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 보자 얼싸 안고 춤도 추어 보자
현인의 곡, 굳세어라 금순아.
1. 개요
1932년 3월 착공하여 1934년 11월 완공한, 한마디로 '''일제강점기'''에 건설되어 오래 써먹다 재가설 이후 또 써먹는 부산 최초의 연륙교이자 국내 최초의 도개식 가동교이다. 이름대로 종착지는 영도구다. 원래 개통 당시에 정식 명칭은 부산대교였는데 지금의 부산대교가 개통하면서 영도대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리고 부산대교라고 불리던 때에도 일상적으로 영도다리 등으로 불리었기 때문에 정식으로 영도대교로 명칭을 변경할 때에는 별 혼란도 없었다.
2. 역사
2.1. 구 영도대교 시절
1920년대 영도는 인구가 6만에 이를 정도로 인구 밀집지역[3] 이었던 관계로 폭발하는 교통량을 나룻배로 때우기가 더 이상 불가능해짐에 따라 1934년 개설되게 되었다. 당시 부산의 도시철도 역할을 했던 부산전차 영도지선도 다리가 개통된 1934년부터 이 교량 위를 1968년 폐선시까지 달렸다.[4]
해상교통량도 꽤 많았기 때문에 개통 당시에는 하루 7번씩 들어올리는 그야말로 랜드마크였다.
이후 한국전쟁에는 워낙 영도대교가 부산의 랜드마크로 전국에서 나름대로 유명했기 때문에 피난민들이 이산가족을 찾기 위해 영도대교가 만남의 장소로 톡톡히 이용되었다. 이때 전국적인 랜드마크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영도대교 밑에는 점집도 굉장히 많았는데, 이를 점바치[5] 골목이라고 불렀다. 헤어진 가족들의 생사를 알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점을 본 것이다.
1980년 부산대교가 개통하기까진 영도의 유일한 연륙교로써 그 엄청난 교통량을 한몸에 받아내었다. 시내버스 및 대형 트럭은 물론이고 한때는 전차까지 다녔다...
일제시대에 놓은 다리를 아무 생각없이 무려 60년을 써먹다가 성수대교 붕괴사고이후 급하게 안전진단했더니 '''철거 혹은 긴급보수''' 필요크리. 부랴부랴 대대적 보수를 두어번 하게 되었지만 그래봤자 '''상시보수 필수'''인건 변함 없긴 했다. 물론 과적에 대한 단속도 강화되고 아예 대형트럭은 진입금지, 대형차는 시내버스만 다니게 되었다.
2.2. 해체 및 재가설
21세기 들어와 근대 문화재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영도대교의 문화재적 가치가 재조명되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부산은 역사가 오래된 항구도시인 걸 감안해도 제대로 보존된 근대문화재가 별로 없다는 비판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과거엔 영도대교 주변으로 문화재급 건물이 다양하게 있었으나 개발 등을 이유로 철거된 사례가 꽤 많다. 대표적으로 구.부산시청은 롯데타워 개발로 이전과 동시에 철거, 부산세관은 부산대교 접속도로 공사로 철거[6] , 구.부산유치원은 땅주인의 갑작스러운 철거, 남선창고는 예산문제로 매입을 못해 철거, 구.조흥은행 영주동은 대영로 확장공사로 철거, 부산역과 부산우체국은 화재에 전소되어 없어졌다. 이 외에도 수 많은 부산 원도심권의 근대 건축물들이 역사속으로 사라졌으며 겨우 보존되고 있는 건물은 부산기상청, 부산근대역사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임시수도기념관 건물 등이 남아있는데 밀도가 높다고 하긴 힘들다. 그러니 대표적 근대유산인 영도다리 복원은 포기할 수 없는 자원이었다.
그리하여 영도대교도 2006년 11월 25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지만.. 넘쳐나는 교통량과 자본엔 '''자비란 없었다.''' 지금 우회도로처럼 새로 놓거나 2층으로 복층교량을 놓는 등의 갖은 연구에도 결국, '''철거후 재가설'''이란 결정이 내려졌다. 그렇지만 영도대교를 아주 버리진 못하고 모양은 똑같이 복원(...)하기로 한다.[7]
2011년 5월, 영도대교 복원확장공사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이를 위해 우회 임시교량이 가설되어 통행했으며, 롯데건설이 롯데타운을 건설하는 조건으로 공사비를 전액부담(기부채납)한다.[8] 기존 4차선인 교량을 6차선으로 확장하고 도개기능을 살려 기념일에 한정하여 도개 할 방침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 최초였고 유일의 도개교로써 관광상품으로 기대되고 있다. 하지만 근대 문화재인 영도대교를 확장공사로 인해 사실상 철거 하기 때문에 복원공사도중 나오는 철거된 부자재를 선별하여 영도대교 근처에 건립될 기념관에 보관하고 교량 일부를 남겨두는 선에서 문화재청과 합의 후 공사했다.
2013년 6월, 상당수의 상판은 설치가 완료되었고 도개교부분도 설치, 7월에 도개부 시험가동 후 11월 23일 영도대교 생일에 맞춰 정식 재개통을 할 예정이다. 이후 개통일자가 27일로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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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26일, 47년 만에 다리를 다시 들어올렸다. 10월 1일에는 드디어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고, 영도 진입방향은 차량통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임시교량 철거를 위해서인지 영도 진출방향은 임시교량을 이용하기 시작하였고 수일 후, 양방향 통행이 허용되었다.
2013년 11월 27일 공식 재개통했다. 무엇보다도 27일 이후부터 오후 2시부터 2시 15분까지[9] 다리를 들어올린다. 구경 가고픈 사람은 시간을 잘 외우도록 하자.
도개기능 가동시간은 원래 12시(정오)였으나 영도구 측 상권이 활성화하지 못하고 주민들이 통행 단절을 겪자 도개시간을 변경해달라는 요구를 부산시가 받아들여 2015년 9월부터 14시(오후 2시[10] )로 조정되었다. 과거 12시에 다리를 들어올렸을 때 부산 시내버스 8번, 85번, 508번이 부산대교로 임시 우회하였으나 2015년 9월에 모두 영도대교 경유로 환원되었으며, '''모든 노선들은 다리를 들어올릴 때 멈춰서 기다렸다가 내리면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11] 여기에 부산대교를 경유하는 노선들이 적고[12] 남항대교와 부산항대교를 경유하는 버스가 부산 버스 1011로 2015년 11월에 개통되긴 했는데 배차간격이 상당히 길고 입석금지라 해운대, 명지 등지에서 만석으로 온다면 영도주민들은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불만이 크다. 때문에 매일 도개하지 말고 주말이나 공휴일에만 도개하는 것으로 바꾸거나 격일로 도개하자는 여론이 일고 있다.
이번 확장공사로 왕복 4차선에서 6차선으로 변경되었으며, 인도 폭도 예전보다 훨씬 넓어졌다.[13] 더불어 대형 화물차도 다닐 수 있게 되었긴 했는데, 훌륭한 대체재가 있는데다 보통 화물차들은 도시고속도로로 간다는 것을 감안하면 차 밀리는 남포동을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영도대교를 굳이 건너 갈 컨테이너 화물차들은 없다.
현재도 영도대교는 영도의 시내버스 노선 대부분이 지나며 영도구민이 걸어서 넘어가는 주요 교량으로써도 애용되고 있다.
3. 도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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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절반으로 갈라서 한 쪽만 들어올렸다. 한 쪽만 들어올리기 때문에 형식 면에서는 일엽형 도개교라고 한다. 항목 참조.
사람 좀 모이면 6만명이 한 번에 모였을 정도. 214m 가운데 육지 쪽 31m를 전동식으로 들어올려 그 밑으로 1천t급 선박이 드나들 수 있게 돼있었고, 당시 도개시간은 하루 7회로 각 20분씩이었으나 1935년 6월부터는 하루 15분으로 줄었고 횟수도 하루 2회로 줄었다. 그러나 1966년 9월 다리 밑으로 상수도관을 매달면서 '도개(跳開)'를 완전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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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영도대교 해체와 재건을 거쳐 47년만인 2013년 11월 27일, 영도대교 재개통과 함께 '''도개를 재개했다'''. 사진은 26일 새벽 시험 가동 모습. 하루 1회 도개를 진행하며 오후 2시에 진행한다.
국내 유일의 도개교인 만큼 관광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도개시 1천톤급 선박이 운행가능하긴 하나 실제 이용될지는 미지수. 영도대교를 거치지 않고 태종대 앞 바다로 우회하려면 '''정말 멀기''' 때문에 이용 가능성도 크다. 또한 영도대교 재개장에 발맞춰 인접한 부산 도시철도 1호선 남포역에서도 '''우리나라 유일의 도개교'''라는 점을 강조하는 쪽으로 안내방송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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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관광객들이나 중구 상인들은 도개를 좋아하지만, 정작 영도 주민들은 이런저런 불편을 겪고있는 듯 하다. 말이 15분이지 영도 주민들 입장에서는 엄청 긴 시간이며[15] , 영도대교 도개로 인해 길이 가로막힐 때에는 부산대교 정체가 심해진다. 차를 가진 사람들은 목적지에 따라 남항대교와 부산항대교로 우회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도보 및 오토바이와 자전거, 대중교통 이용 시민들. 당연히 자동차전용도로라서 이용할 수 없다. 영도구 기점 대부분의 노선들이 영도대교를 경유하고 있고 부산대교를 경유하는 노선은 드물다.
이런 불편을 그나마 해소하기 위해 영도발 철도역, 버스터미널행 버스들을 부산대교로 우회시켰는데, 도개시간이 조정되는데다 다른 길로 다닌다는 영선동, 대교동 주민들의 항의로 원래 노선대로 환원되는 바람에 동삼동, 청학동 주민들도 꼼짝없이 갇히게 되어 또 다른 갈등을 낳고 있다. 원래 부산대교로 다니는 노선을 타도 정체로 인한 소요시간 증가로 짜증이 나는건 덤. 남항대교와 부산항대교로 가는 버스는 2015년 11월에 개통한 1011번과 2018년 2월 초에 개통된 1006번이 유이한데, 영도에서 남구 대연동, 해운대구 센텀시티, 혹은 사하구 지역 등으로 가는 장거리 이용객들에게는 유용하겠지만 남포동, 부산역행 등 단거리 이용주민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게다가 이 두 노선은 급행버스라 다른 버스에 비해 요금을 더 내야한다. 이마저도 만석이라면? 답이 없다.
다리를 도개하는 중에 딱히 다리를 들어올려야만 다닐 수 있는 배가 일부러 지나가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에 한번뿐이라... 가끔 특별한 날 이벤트성으로 항만소방서에서 소방정을 지원해줘서 다리 밑을 지나는 경우가 있기는 하며, 운이 좋다면 해양경찰 항만경비정이 북항에서 남항 혹은 감천 경비구역으로 넘어갈 때 항해거리 단축을 위해 가끔 시간 맞추어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을 수 있다.
2018년 7월, 태풍 쁘라삐룬이 오기 전에 해양경찰 측에서 남항에 있는 수많은 대형선망배들에게 모조리 북항으로 피항권고를 보내어 때아닌 영도대교 도개가 있었으며 수십수백척의 배가 영도다리 밑을 지난 적이 있다(...).
4. 경유 노선
- 부산 버스 6 (영도산복도로 ↔ 남포동 ↔ 괴정시장)
- 부산 버스 7 (영도고신대 ↔ 남포동 ↔ 수산가공단지)
- 부산 버스 8 (태종대 ↔ 보수동 ↔ 서부터미널)
- 부산 버스 9 (영도중복도로 ↔ 감천사거리 ↔ 수산가공단지)
- 부산 버스 11 (다대포 ↔ 하단 ↔ 영선동)[16]
- 부산 버스 30 (태종대 ↔ 남포동 ↔ 송도)
- 부산 버스 66 (태종대 ↔ 서면 ↔ 당감주공)
- 부산 버스 71 (영도고신대 ↔ 남포동 ↔ 수산가공단지)
- 부산 버스 82 (영도산복도로 ↔ 부산진시장 ↔ 전포화신아파트)
- 부산 버스 85 (영도산복도로 ↔ 부산역 ↔ 전포사거리)
- 부산 버스 88 (태종대 ↔ 서면 ↔ 당감주공)
- 부산 버스 113 (영도중리 ↔ 대티고개 ↔ 신평공단)
- 부산 버스 186 (태종대 ↔ 국제시장 ↔ 서부터미널)
- 부산 버스 190 (한국해양대 ↔ 부산역 ↔ 남부민동)
- 부산 버스 508 (영도고신대 ↔ 부산역 ↔ 중앙공원·민주공원)
- 부산 버스 영도5 (동삼그린힐 ↔ 신영도롯데낙천대 ↔ 남포역)[17]
5. 이야깃거리
6.25 전쟁 이후 부산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잃어버린 가족을 찾기 위해 영도다리에 매일 같이 모인 것으로 유명하다.
2013년 7월에 47년 만에 다리를 들어올렸다고 하는데, 사실 그전에 2000년대 중후반경 모 TV 프로그램에서 '영도다리 도개가 아직도 작동할까?' 라는 주제로 촬영한 적이 있었다. 당시 관리주체의 협조를 받아 다리를 도개한 적이 있었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47년 만에 들어올린 건 아니다.
정식 명칭은 영도대교지만 부산 사람들은 '''영도다리'''라고 많이들 부르며, 우스개소리로 부산 출생 인원의 대부분은 영도다리에서 주워 온다는 말도 있다.[18] 사실 '엄마 다리 밑'에서 아이가 태어나서 주워왔다는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말장난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실제 한국전쟁 당시 부산, 그중에서도 특히 영도에 피난민들이 상당수 몰려들면서 부모가 죽거나 기타 등의 이유로 고아가 된 아이가 다리밑에 버려지는 일이 실제로 많아서 그런 말이 생겼다라는 설도 있다 카더라. 바리에이션으론 '넌 사실 영도다리 밑에 호떡집 아줌마 아들이다'가 있다.
영도대교는 자살의 장소였다 카더라는 이야기도 제법 돈다. 우리가 남이가의 사례만 봐도... 지금이야 훨씬 큰 부산대교[19] 나 남항대교[20] , 광안대교[21] 가 있으니 상대적으로 만만해(...) 보이기는 하나, 지금도 가끔식 취객이 자살 소동을 부리기도 한다.[22] 실제로 추락사고도 가끔씩 있다.
이후 2016년에는 옥새런의 그 양반이 인생샷 사진을 건진 것으로 또 유명(?)해졌다.
90년대 후반엔 철거 후 '''2층 현수교 재가설''' 드립도 있었다. 1층은 도로고 2층은 카페를 포함한 도보전용이라나...하지만 얼마 못가 철거가 백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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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부터 중앙동 롯데타운의 교통혼잡 유발로 인해 확장된거고 관광효과도 노리는 터라 롯데백화점에서도 나름 기대를 하는 것인지 재개통 기념(?)으로 순금 영도대교 모형을 경품으로 걸었다(...).
영도다리 북단 아래에는 '유라리광장'이라는 공원이 있다. 또한 영도다리 남단 바로 앞에 오피스 건물과 영도경찰서가 있다.
매년 9월이나 10월에 영도대교 부근에서 한국의 근대 문화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참여형 축제이자 국내 유일의 다리 축제인 '영도다리 축제'가 개최된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2016년 20대 총선 당시 이곳에서 옥새런 인생샷을 찍었다(...). 위에서 설명한 그 오피스 건물 202호에 김무성 의원 지역사무실이 있다.(2016년 입주)
남포동 방면 마지막 차선은 롯데백화점 광복점 진입차량들에 의해 자주 정체되니 주행 시 주의하여야 한다.
6. 바깥고리
7.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6호
영도와 부산을 잇는 연육교인 영도대교는 1932년 3월에 착공하여 1934년 11월에 개통된 길이 214.7m, 폭 18.3m의 우리나라 최초의 연육교이다. 하루 총 6회씩 도개하여 부산의 명물로 자리하였고 1966년 9월 증가하는 차량 통행으로 인하여 도개 기능이 멈추게 되었으나, 2013년 11월 27일에 기존 4차선을 6차선으로 복원․개통하여 매일 오후 2시에 도개를 하고 있으며, 부산의 명소로 옛 명성을 다시 찾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부산시민과 애환을 함께 해 온 영도대교는 8.15해방과 6.25전쟁 이후 생활고에 지친 피난민들이 애환과 망향의 슬픔을 달랬었던 장소였다. 전쟁 당시 영도대교에 가면 친인척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영도대교 인근은 피난민으로 가득 메웠고, 이들의 사연을 듣고 상담하는 점집들이 성업하는 등 우리나라 근대사와 함께 해온 구조물인 동시에 근대 부산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 다리이다.
영도대교의 건설은 부산항 물류장 확충과 간선도로의 개설과 함께 근대 부산의도시발달에서 중요한 사업이었다. 특히 영도는 영도대교의 건설로 인하여 부산 도심과 육로로 연결되고 전차가 개통되는 등 도시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영도구의 도시 발달사를 증언하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다.
영도대교는 교량 뿐 아니라 영도대교를 구성하는 건축물들도 건축적인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교대의 경우 정교하게 다듬어진 화강석으로 바른 층 쌓기를 하여 교대를 형성하고 모서리 돌은 직사각형 화강석으로 모접기 등을 하는 등 정교한 디테일을 갖고 있다. 아울러 교대 좌우측의 화강석 계단, 교량 입구의 교문주와 난간 등은 영도대교의 구성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교량 입구 광장인 다리목광장은 영도대교의 얼굴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근대 교량의 형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영도대교는 현재 우리나라에 잔존하는 유일한 단엽식 도개교(bascule bridge)로 희소가치가 매우 높은 교량이다. 또한 일반적인 도개교와는 달리 안벽부에 도개장치를 설치하고 있는 등 도개교량의 형식에서도 특이성이 인정되는 등 한국 교량사(토목)에 있어서도 유례가 없어 근대 교량사를 연구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교량으로 그 보존가치가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