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수(농구)

 


'''김봉수의 수상 및 영예 '''
[ 펼치기 · 접기 ]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color=#373a3c> '''2008'''

'''원주 DB 프로미 스카우터'''
'''WONJU DB PROMY'''
'''김봉수'''
<colbgcolor=#00703c> ''' 출생 '''
1984년 8월 1일 (40세)
''' 국적 '''
대한민국 [image]
''' 신체 '''
199cm|체중 105kg
''' 직업 '''
농구선수(센터 / 은퇴)
스카우터
''' 학력 '''
마산동중학교 (졸업)
마산고등학교 (졸업)
명지대학교 (졸업)
''' 프로입단 '''
2007년 드래프트 (2라운드 4순위, 원주 동부)
''' 병역 '''
[image] 상무 농구단 (2008~2010)
''' 소속 '''
''' 선수 '''
[image] 원주 DB 프로미 (2007~2017)
'''프런트'''
[image] 원주 DB 프로미 (2017~2019 / 매니저)
[image] 원주 DB 프로미 (2019~ / 스카우터)
1. 소개
2. 선수시절
3. 은퇴 이후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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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농구선수이며, 원주 동부 프로미 소속으로 2016-2017시즌까지 활약 후 은퇴하였다. 은퇴 후에는 동부의 매니저로 활동할 예정이다.
골밑에서 버티는 힘이 좋기 때문에, 파워가 있는 외국인 및 국내 빅맨들을 막는 수비 전문 선수로 기용됐었으나, 우월한 피지컬과 파워에 비해 공격력이 매우 아쉬운 선수로 평가받았었다.

2. 선수시절


[image]
강을준 부임 이후 맞이한 명지대 농구부 2차 전성기의 주축멤버였다.[1]
당시 멤버가 동기 송창무, 김영수를 비롯, 이시준(前 이원수), , 윤여권 등 KBL에서도 알짜로 뛰게 될 선수들로 구성되어 강력한 디펜스 중심의 농구를 펼쳤으나, 김봉수의 대학시절인 2003~06년도가 이른바 황금세대[2] 시절이다보니 매번 대학 4강~6강 언저리를 맴돌기만 했다.
다만 3, 4학년때 농구대잔치에서 명지대를 2년 연속 4강에 진출시키고, 05, 06년도 종별농구선수권대회[3]를 연속 우승함으로써 명지대 농구부 창단 이래 최초의 트로피를 가져오기도 한다.
프로에서는 주로 백업빅맨으로 뛰면서 외인 및 국내 빅맨 수비 시 파워면에선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으나, 스피드와 운동능력 부족으로 인해 애런 헤인즈제스퍼 존슨 등 테크니션에게 속수무책으로 털리는 약점을 노출한다. 함지훈의 엉덩이 파워에 밀리지 않는 몇 안 되는 토종 센터지만, 피벗 한 번에 쉽게 벗겨지며 득점을 허용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오세근에 따르면 KBL에서 뛰고 있는 현역 선수들 중 '''김봉수의 힘이 가장 세다고 한다.'''[4]
상무 소속이던 2008년 농구대잔치 4강전에서 중앙대 오세근[5]을 집중 마크하여 중앙대의 농구대잔치 3연패를 저지했던 게 커리어 사상 가장 빛나는 장면이었다.[6] 신입생 때부터 파워만으로도 이미 아마농구판을 제패했던 오세근이, 프로 후보선수였던 김봉수에게 힘에서 밀리면서 턴오버를 연발, 경기 막판 접전상황에서 5반칙 퇴장까지 당하는 굴욕을 맛본다.(이 대회 이후 오세근은 기술적으로도 또 한 번 스텝업한다.)
역시 상무 소속이던 2009년 홍콩 동아시안게임[7]에 국가대표(대학, 상무 소속의 사실상 2진[8])로 출전하여 결승에서 쩡웬딩 등 주전멤버가 그대로 포진한 대만 국가대표팀[9]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KBL 드래프트에서 2 라운드로 원주 동부 프로미에 지명되었다.
전창진 감독이 김주성의 백업 빅맨 보강을 위해 지명했으며 루키 시즌을 마치고 바로 군복무를 한 이후 강동희 감독 시절에 출장을 많이 했다.
주로 김주성의 백업 센터로 활약했지만 출전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간간히 코트에서 활약을 했다.
2010-2011 시즌 53경기과 정규리그 우승을 했던 2011-2012 시즌 46경기에 출장했도 2012-2013 시즌에는 54경기 전 경기에 출장했다.
이후 김영만 감독이 부임했지만 더 이상 출전시간을 부여받지 못하면서 2016-2017 시즌까지 활약한 이후 은퇴를 하게 된다.

3. 은퇴 이후


2017-2018 시즌 은퇴했던 친정인 원주 DB 프로미에서 프런트로 제2의 농구인생을 시작했다.
DB 프로미의 매니저(주무)로 선수단 지원을 하다가 2019년부터 스카우터로 직책을 옮겼다.

4. 관련 문서


[1] 1차 전성기는 조성원, 박상관, 조성훈, 정재헌, 박재일 등이 뛰던 1992~95 시즌 대학 4강 시절.[2] 연세대 - 김태술, 양희종, 이광재, 중앙대 함지훈, 박상오, 윤호영, 강병현, 경희대 김민수, 건국대 정영삼. 당시 연세대와 중앙대가 패권을 다투고 경희대가 다크호스, 차재영, 유성호의 고려대는 암흑기이던 시절이었다.[3] 매년 7~8월경 초중고 및 대학농구 비시즌 기간동안 열리며, 대학부에는 연,고,중대는 거의 불참하고 중하위권 팀들만 주로 참가한다. 이른바 우승컵 없는 대학팀들(명지대, 건국대, 성균관대, 단국대 등)의 이삭줍기 대회.[4] 참고로 그 다음 가는 선수는 송창무라고.[5] 대학 2학년임에도 2008 베이징 올림픽 세계예선 당시 국대 주전급이었다. 슬로베니아에 12점차로 석패하고 캐나다에 아쉽게 대역전패했던 그 대회.[6] 김봉수 본인은 상무시절 주전센터로서 08, 09년 농구대잔치를 2년 연속 제패한다. 그러나 제대 후엔 다시 벤치로...[7] 1993년 상하이 대회를 시작으로 동아시아 총 9개국(한국, 중국, 일본, 북한, 대만, 몽골, 홍콩, 마카오, )이 참가하던 일종의 권역별 종합경기대회. 2013년 톈진 대회를 끝으로 폐지되었다.[8] 같은 해 8월에 2009 톈진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아시아 7위의 톈진 참사가 있었던 그대회)가 있는 관계로, 12월에 열린 동아시안게임에는 상무와 대학팀 소속의 (국가대표가 아닌) 선수들로 선발하여 김선형(중앙대), 박찬희(경희대), 유병재(상무), 김승원, 박형철 (이상 연세대), 김현민(단국대) 등이 출전하였다. 김봉수는 여기서도 주전센터였으나 부상으로 결승전에 출전하지 못했다.[9] 2009 톈진 아시아남자농구 선수권 순위결정전에서 주희정, 방성윤, 김주성, 하승진 등이 있는 국가대표팀 1진을 꺾고 6위를 차지했던 바로 그팀이다. 결국 대한민국은 아시아선수권 대회 사상 최악의 성적인 7위에 머물렀고, 이에 대해 농구팬들은 2006년 도하 참사(당시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5위에 머물며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아시아권 대회에서 4강 밖으로 밀려난 첫 대회)에 이어 톈진 참사라 불렀다. 형님들의 패배를 동생들이 복수해준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