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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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농구선수 출신 전 감독.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원주 동부 프로미 감독을 맡았지만, 승부조작 등을 이유로 영구제명되었다.
한국 농구를 대표했던 최고의 포인트 가드. 현역 시절 및 나이가 들어 프로에 와서도 최고의 기량을 뽐낸 당대 제 1의 가드였고, 감독으로도 성공적으로 커리어를 이어갔었다.
하지만 2013년 9월 3일에 승부조작 혐의의 처벌이 확정되었고, 9월 6일에 영구제명되어 프로농구계에서 완벽하게 퇴출됨에 따라 사상 첫 감독 출신 승부 조작범이 되었다. '''국내농구판 피트 로즈.'''[4][5] 현재 그에게 남아 있는 건 승부를 조작한 범죄자라는 낙인 뿐이다.
2. 프로 기록 및 수상기록[6]
'''정규 시즌'''
336경기 11.13점 2.79리바운드 6.55어시스트 1.70스틸 FG 47.22% 3P 40.50% FT 76.57% TS 60.1% eFG 58% PER 16.93
'''플레이오프'''
41경기 12.68점 2.17리바운드 4.10어시스트 1.51스틸 FG 47.87% 3P 40.10% FT 78.30% TS 60.7% eFG 57% PER 12.80
'''챔피언 결정전'''
17경기 15.71점 3.65리바운드 4.88어시스트 1.94스틸 FG 46.60% 3P 38.18% FT 73.44% TS 60.7% eFG 57% PER 15.99
- 1992~1993 농구대잔치 MVP
- 1997 한국프로농구 MVP
- 1999-2000 한국프로농구 모범선수상
- 1997 한국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MVP
- 1997-98 한국프로농구 올스타전 MVP
- 2011~12 한국프로농구 감독상
3. 선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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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 '''허- -택 트리오'''의 사진. 가운데에 있다.
3.1. 대학 시절
1남 2녀 중 셋째인데,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농구를 했다. 키도 농구선수가 되기엔 그리 큰 편이 아니라서 송도중학교 때는 농구부에서 밀려나서 일반 학생이 되었다. 이 때만 해도 꿈은 평범한 체육 교사였다고 한다. 그런데 송도고로 진학하고 송도고 농구부의 대부였던 전규삼 옹이 강동희의 팔 길이를 보고 농구부로 다시 부르면서 농구 선수로서의 삶을 이어가게 되었는데 이때는 '체육관에서 밤을 새면 성공한다' 는 말에 진짜 체육관에서 밤을 샜었다.
한국의 대표 가드를 모두 키운 전규삼 옹의 지도 아래 실력은 일취월장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졸업 무렵에는 모든 대학교에서 탐내는 고교 랭킹 1위의 가드가 되었다. 강동희의 진로를 두고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진 것은 당연했는데, 원래는 꼭 중앙대학교에 갈 마음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규삼 옹이 "호랑이(허재)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는 것이 맞다."고 조언하는 바람에 그대로 중앙대로 입학했다고.
재학 시절에는 정봉섭 감독 밑에서 수행을 거쳐 처음에는 김유택, 강정수, 허재와 같은 선배들을 보좌하는 역할이었다. 워낙 패스가 좋기 때문에 이들과 함께 중앙대는 대학 사상 처음으로 농구대잔치 결승에도 도전했다. 하지만, 결승에서는 현대에게 패배. 이들이 차례차례 졸업할 무렵에는 혼자 팀을 이끌면서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혼자서 활약할 당시에는 어시스트보다는 득점에도 주력하며 득점력도 갖춘 포인트가드임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역시 대학 졸업 무렵의 진로를 두고 고민이 컸는데, 중앙대로 처음 올 때 고민한 것처럼 기아자동차로 가는 것에 대해 고민이 심했다고 한다. 선배들이 많아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보일 기회가 있을지 고민한 것. 하지만, 기아자동차 및 중앙대학교의 설득과 스카우트비 공세(알려진 것은 6천만원인데, 여기에 집을 하나 더 사줬다고 한다. 말이 쉬워 6천만원이지 90년도에 6천만원이면 서울에 집 한채는 무난한 시기였다.)로 인해 결국 기아자동차로 가게 되었다.
3.2. 기아자동차 시절
이미 김유택과 한기범이 지키는 골밑에 더해 허재가 이끄는 가드진이 강했던 기아자동차는 여기에 강동희까지 오면서 도저히 질 수 없는 팀으로 변모했다. 강동희는 중앙대 시절처럼 다시 공격보다는 어시스트에 주력하는 포인트가드가 되었고, 강동희가 찔러주면 센터진이나 허재가 받아먹고, 강동희가 가로채기하면 속공으로 이어지는 그런 팀으로 변했다. 스포트라이트는 가장 화려했던 허재가 주로 받았지만, 강동희 역시 이에 뒤쳐지지 않는 활약을 보였다. 팀에서 가장 빛났던 세 선수의 이름을 따서 흔히 허-동-택 트리오라고 부르는 강력한 전설이 태동한 것이다.
대신 부수적인 문제가 두 가지 생겼는데, 하나는 유재학의 MVP 수상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7] 기아자동차가 완전히 중앙대의 판이 되었다는 점이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이 때문에 유재학이나 정덕화는 조기 은퇴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노력을 대충해도 이겼다는 거. 강동희 자신도 말술로 유명하고, 허재의 술이야 뭐 사고로 너무너무 유명했다. '''그런데도 이겼다'''(…). 자연히 나태해 질 수밖에 없던 것. 농구대잔치 6연패를 해 버리니 자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연세대학교를 위시한 대학세의 돌풍이 불어닥친 1990년대 초반에 자연히 해결되었다. 기아자동차는 1993-94 농구대잔치에서 그들의 직속 후배 격인 중앙대학교에 8강에서 지는 수모를 당한다. 정신차린 그들은 곧바로 1994-95, 1995-96 시즌을 모두 우승하면서 위력을 과시했다. 어쨌거나 강동희는 이 와중에 그나마 허재보다는 덜 사고를 쳤고, 그래서 덜 까였다. 그리고 화려했던 농구대잔치를 기반삼아 1997년에 프로가 생길 때, 프로팀의 주축으로 지목받은 것은 강동희였다.
외국인 선수의 도입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노쇠 기미가 보이던 김유택은 벤치멤버가 되었다. 포워드 자리에는 선배 못지 않은 김영만이 보강되었다. 허재가 최인선 감독과의 불화로 출전을 거의 하지 못할 때, 강동희는 팀의 주축으로 프로 원년인 1997시즌에 맹활약했다. 평균 15.6득점, 7.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고, 프로 초대 어시스트왕 및 MVP에 올랐다. 이 활약은 챔피언결정전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평균 18점을 넣으며, 역시 초대 챔피언결정전 MVP에 올랐다.
허재가 결국 팀을 떠나고, 김유택이 은퇴한 후에도 기아의 구심점으로 계속 남아 활약했다. 1997-98 시즌 올스타전 MVP, 기아 소속으로 어시스트 1위 4회. 이대로만 가면 누가 보더라도 기아의 전설로 은퇴할 것이 확실했다.
3.3. 선수 생활 말년
모기업 기아자동차가 부도가 난 후, 우여곡절 끝에 현대자동차로 인수되었고, 현대차 그룹은 스포츠단의 교통정리에 들어가 기아자동차 농구단을 모비스로 이관시킨다. 그래서 모비스 소속이 된 상황에서 새롭게 부임한 감독은 바로 연세대의 대부 격인 최희암. 아무리 그래도 설마 강동희를 어떻게 하겠냐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기아 색채 빼기에 들어간 것이다.
김영만이 우지원과 트레이드되었고, 입지가 좁아진 강동희도 결국 트레이드 시장에 나와 오성식과 트레이드되면서 졸지에 창원 LG 세이커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원래 팀과 재계약을 맺으면서 코치 보장을 했던 조건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강동희는 그렇게 배신감을 안고 팀을 떠나야 했다.
물론 우지원과 오성식은 최희암이 대학시절 지도했던 선수들이었다.
LG는 마침 중앙대 선수들이 많아서 활약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던 데다 강동희 자신의 활약도 전성기에 미치지는 못했고 그럭저럭 활약을 했을 뿐 절대 나쁘지는 않았지만, 결국 세월의 무게는 이기지 못하고 2003-04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였다.[8] 여기에 LG 구단은 그의 등번호 5번을 영구결번한다고 발표했다가 슬쩍 취소되었고, 모비스는 아예 기아자동차를 지웠기 때문에 어느 구단에도 결번되지 않았으며 몇년 뒤에는 승부조작으로 인해 구속영장이 신청됨으로서 '''오히려 이것이 신의 한 수가 되어버렸다.'''
3.4. 국가대표
중앙대학교 시절에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된 이후, 강동희는 꾸준히 주전 포인트가드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물론 강동희가 국가대표로 한국의 우승을 이끈 적은 그리 많지 않다. 강동희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한국 농구는 중국에 가로막혀 아시아권에서 만년 2위에 머물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이 때만 해도 중국과 상대할 유일한 호적수는 한국이었고, 2000년대 후반처럼 서남아시아의 이란, 요르단, 레바논에게까지 밀리지는 않던 시기였다.
국가대표로도 강동희는 거의 비슷한 활약을 펼쳤다. 콤비를 이뤘던 허재가 잦은 사고로 국가대표에서 종종 밀린, 특히 방열 감독에 대한 항명 파동을 주도했다는 의혹을 사면서 국가대표에서 다소 껄끄러웠던 시기가 있었던 것에 비해 강동희는 이렇다 할 사고 없이 국가대표에서 꾸준히 뛰었다.
음주 파동으로 국가대표 농구팀이 제대로 욕을 얻어 먹은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어시스트와 스틸에서 괜찮은 활약을 보이며, 한국 대표팀을 대표해 그의 유니폼이 세계농구협회에 전시되어 있고,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인 1997년 아시아농구선수권 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베스트 플레이 메이커 상을 타기도 했다. 이 때, 국가대표팀은 28년만의 우승에 성공했다.
전반적으로 딱 실업 팀에서의 모습 그대로 활약한 편이고, 포인트가드 포지션에서 부동의 주전으로 활약했지만, 아무래도 중국의 벽을 넘기에는 다소 역부족이었다고 평할 수 있다.
3.5. 선수 시절의 플레이 스타일
강동희 플레이의 특징은 기본기가 탄탄했다는 점에 있다. 송도고 시절 전규삼 옹의 지도 아래 갈고 닦은 기본기는 팔이 긴 신체적인 특징과 만나면서 축복이 되었다. 긴 팔은 수비에 도움이 되었고, 공격에서는 한 발 더 빠른 패스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런 타고난 신체 조건 때문에 성공한 선수는 결코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강동희는 원래 농구를 못 할 뻔했던 선수다.
타고난 유연성에서 나오는 테크닉은 당대 으뜸가는 수준이었다. 그의 특기는 무빙 점프슛인데, 이는 아시아 최고라는 중국의 강력한 수비망을 무력화시켰다. 드리블, 슈팅, 패스 등 선수가 갖춰야 할 기본기에서 아직도 강동희 만한 선수를 찾기는 힘들다.
파워풀한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선수는 아니다.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상황에 맞춰 경기를 풀어나가는 유연성이 더 뛰어났던 선수다. 부드러운 움직임과 모르고 못 막는(알고도 못 막는 것이 아니라!) 패스와 상황을 읽어내는 능력으로 공격을 진두지휘했다. 이런 유연성은 상황에 맞춰, 동료에 맞춰 딱딱 패스를 내주며 강동희를 코트 최고의 야전사령관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덤으로 상당히 강력했던 3점슛까지. 여담으로, 강동희의 3점슛은 그 궤적이 매우 높게 올라가 수비수가 블록하기 상당히 까다로웠다.
특히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다리도 빨라 속공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신중한 성격으로 경기를 유연하게 풀어나가는 강동희지만, 속공을 만들어 낼 때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이를 풀어나가는 선수였다. 침착한 성격 때문에 승부사로서 어울리는 것은 아니라는 평도 있었지만, 승부사 역할은 허재가 거의 도맡았고 강동희는 아예 승부사가 필요없는 순간도 만들어 내는 선수였다.
4. 지도자 생활
4.1. 코치 시절
해외 연수를 다녀온 후 마지막 팀이었던 LG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가 코치를 시작할 무렵엔 은퇴 당시의 김태환 감독은 이미 팀을 떠난 상황이었고, 박종천 감독이 새로 부임한 상황. 그러나 박종천 감독 체제에서 6강 PO에 꾸준히 들던 팀은 9위로 추락했고, 박종천 감독은 완벽한 LG의 흑역사 감독으로 낙인찍힌다(…). 결국 박종천 감독은 자진사임하고, 새로 들어온 신선우 감독이 코칭스태프 전면개편을 감행하면서 본인도 LG에서 물러난다.
그 상황에서 그를 데리고 간 것이 원주 동부 프로미의 전창진 감독이다. 학연이나 지연으로는 아무 연이 없고, 오직 하나 강동희가 대학 졸업할 때, 삼성전자 프런트던 전창진이 강동희를 스카우트하려고 만난 것이 전부라고 한다. 그런데 과감하게 전창진은 그를 끌어들였고, 자신의 오른팔로 삼았다. 보직도 단순한 코치가 아닌 수석코치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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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006 시즌 TG 삼보에서 동부로 인수되는 속에 보조코치가 아닌 수석코치직과 함께 가드 라인 지도를 시작하게 된다. 포인트 가드 보다 슈팅 가드를 더 활용하는 전창진 감독의 색을 유지하면서 자신은 기아 시절 함께했던 막내인 표명일과 백업으로 대학 후배인 이세범에게 투맨 게임을 치밀하지만 세밀하게도 가르친다. 슈팅 가드 또한 자리를 잡지 못했던 강대협과 전창진 감독의 농구선배로 이왕돈의 아들로 유명한 이광재에게도 투맨 게임을 치밀하면서도 세밀하게 가르친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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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008 시즌 동부 프로미의 KBL 통합우승에 공헌하면서 보조코치였던 김승기와 함께 대문짝처럼 알리게 된다.
전창진 밑에서 감독 수업을 착실하게 받은 후, 2009년 전창진이 부산 kt 소닉붐으로 떠나자 감독 자리를 물려 받았다.
성인완 단장은 강동희 수석코치를 동부 프로미의 제2대 감독으로 내부승진으로 선임을 했다.
이미 전창진 감독은 1999년부터 코치로 왔던 농구고향과 같은 원주를 떠날 때 마음이 편했던 건 바로 강동희였다.
사실 전창진과 강동희는 대학과 프로에서 인연조차 없었는데 내부승진을 한 건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 중간다리는 역시 허재. 사실 허재는 감독이기보다는 단장도 아닌 사장 스타일.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없다. 힌트는 전창진과는 고등 선배이고 강동희와는 대학-실업-프로 후배.)
이미 전창진 감독은 강동희 수석코치의 내부승진을 성인완 단장님에게 말했으며 정이 있어서 그런지 약간의 밀당을 했지만 뒤끝없이 강동희 덕분에 그나마 편한 마음으로 원주를 떠나 부산 사직으로 코치 시절을 시작으로 감독이 된 2002년을 포함해서 1999년부터 2009년까지 11년간 정들었던 원주를 떠나 이적을 하게 된다. 어느 감독이든 코치 특히 수석코치 경험 없이 감독을 보면 바로 끝난다.
이 사건은 일명 전창진 사단의 수석코치 출신 감독의 성공신화로도 이어진다. [10]
허재는 직접 코치를 하지 않았지만 대선배였던 김유택 선수와 함께 플레잉코치 출신으로 농구고향 원주에서 사실상 현역 겸 감독으로 활약했다. [11]
참고로, 전창진은 부산 kt 소닉붐으로 이적하면서 김승기를 동부 시절에는 보조코치였으나 kt에서는 수석코치로 두고 손규완도 선수에서 슈터코치로 두었다. 이후 자신은 구설수로 인해 가까스로 전주 KCC 이지스로 떠났지만 안양 KGC 인삼공사로 데리고 가면서 남아있었던 김승기와 손규완은 보직이 하나씩 올라갔다.
또한, 중앙대-기아의 색이 짙은 마지막인 김영만도 자신이 동부 감독 시절에 선수 마지막이었지만 은퇴를 허재가 있는 전주 KCC 이지스에서 배려를 하면서 지도자로 숨은 헌신을 했다. 즉, 전창진 사단과 강동희 사단의 중간이 바로 김영만이다. 표명일과 이세범도 모두 전창진 사단과 강동희 사단 모두에 있다.
4.2.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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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 선배인 허재는 이미 서장훈 대신 2008 KBL 드래프트에서 1순위의 행운과 함께 하승진을 보유하면서 이후 추승균과 이상민 대신 임재현에 이어 그리고 센터 서장훈 대신 스몰 포워드 강병현으로 2008-2009 플레이오프 우승을 했고 또 한번의 2009 KBL 귀화 드래프트에서도 1순위로 전태풍을 영입하는 등 뽑기와 거래의 신으로 등극하면서 기쁨을 누렸지만 길지 못했으며 대신 한숨을 더 내쉬었다.
2009-2010 시즌에는 처음으로 감독 지휘봉을 잡으면서 본인의 색깔을 더하기 시작했다. 전창진이 만들어 놓은 조직력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킨 것. 트리플 타워를 이용한 드롭 존 디펜스는 역대급으로 꼽히며, 강호의 입지를 꾸준히 이어가며, 2010-11 시즌에는 챔피언 결정전까지 진출[12] 했다. 비록 챔프전에서 KCC에 막혔지만, 강동희 감독이 항상 환영만 받지는 않았던 게 외국인 선수 선발에 있어서 굳이 단신용병을 꼭 뽑았다는 것인데 첫해에는 마퀸 챈들러(197cm) & 게리 윌킨슨(202cm) 조합의 용병을 뽑았다가 골밑에서 제대로 고생하기도 했다. 챈들러는 스코얼러로 기대를 했지만 운동을 전혀안해 몸상태가 엉망인 상태로 와서 전혀 골밑에서 보탬이 못되었고 게리 윌킨슨은 식물용병이었다. 이러니 김주성이 과부하가 걸려서 고생까지 했다. 그 이후에도 2명 선발 제도일 때 꼭 한명은 190cm대 중후반의 포워드 타입의 선수를 뽑아서 까이기도 했다. 김주성은 5번보다는 4번에서 뛰어야 위력을 발휘하는 선수이니만큼 용병제도가 2명보유 1명출전으로 바뀌는 2013시즌부터는 이 용병을 뽑는데 있어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기도 한 대목이다. 장신 두 명을 뽑아야 김주성을 5번으로 쓰는 걸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주성도 나이가 많이 들었으므로 5번에서 무리한 플레이를 할시 과부하의 위험성도 있는지라...
신인선수를 선발할 때는 유난히 가드를 많이 뽑는다는 특징이 있다. 덕분에 가드왕국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백업센터로 쓸만한 장신 선수 지명에 소홀하다는 비판도 있다. 벌써 몆 년째 백업센터는 김봉수 하나로 버티고 있다.
단점이라면, 주전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것이다. 그래도 부임 초기보다는 백업의 활용이 높아지긴 했다. 결국 역대 최단 경기, 최고 승률로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다만 최근 국내 각종 스포츠에 부는 승부조작의 기운 때문에 상대적으로 빛을 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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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012 시즌에는 '''아예 역대 최고 승률까지 노릴 기세.''' 감독으로도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해 정규리그 16연승에 2007-2008 시즌 이후 4년만에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우승 이후 맞대결로 인해 늦게 축하를 해준 멘토 전창진 감독은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했고 허재는 작정하고 애정이 섞인 말로 부러워했다. 김영만 수석코치도 선수에서 코치로 정규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4강 PO에서 모비스를 3승 1패로 누르고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했지만, 또 다시 챔피언결정전에서 안양 KGC인삼공사에 2승 4패로 패하고 준우승[13] . 선수 시절에도 허재에 가려 2인자 이미지가 강했는데[14] , 어째 감독으로서도 콩라인의 기운이 엄습하고 있다(…). 그래도 정규시즌 성적이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2011-12 시즌 감독상은 탔다. 허재보다 더 빨리 탔다.
그리고 2012년 5월 7일 혼혈 드래프트에서 이승준을 득템하는데 성공해서 콩라인 탈출의 청신호가 켜졌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부족한 백업센터만 보강한다면 물 샐 틈 없는 백업진을 보유하게 되니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2012~2013시즌에서 제대로 대형 참사를 내고 있는 중이다. 김주성의 노쇠화와 이승준의 특성을 감안 안하고 포워드형 용병인 브랜든 보우먼과 멸치 수준의 웨이트를 가진 저마리오 데이비슨을 뽑았다가 전부 바꾸고 고생하는 중. 그래서 농구 관련 커뮤니티에서의 동부 팬들은 강동희 감독을 '''깡통감독'''이라고 까고 있는 중이다. 더군다나 브랜든 보우먼이 삼성 이적 후 인터뷰에서 미루어볼 때 고생을 했다는 내용 때문에 또 이래저래 까일 거리가 하나 느는 중이다.
기본적으로 농구관 자체가 '''빠른 선수만 고집하는 스타일'''이라는게 2012~2013시즌에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고 이런 똥고집이 이번시즌 삽질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중이다.
초반 삽질 이후 강팀답게 UTU를 시전하려고 했으나, 핵심 멤버인 김주성이 발목부상을 당하면서 또 다시 하위권으로 처지고 말았다.
5. 승부조작
2013년 프로농구 승부조작 파동이 일면서, 승부조작 연루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되었다. 강동희 검찰소환 만약 연루 혐의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선수가 아닌 지도자가 승부조작에 연루된 사례인데다[15] , 그가 농구계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여간 큰 게 아닌지라 상당한 파장이 예상되었다.
본인은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지만...2013년 3월 7일 출두하여 2011년 3월 플레이오프에서 수천만원을 받고 4차례에 걸쳐 승부조작을 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당일 늦은 오후 강동희가 승부조작을 시인하였고 검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는 일부 매체들의 보도가 있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2차 조사까지 들어갔으며, 자정을 앞둔 시점에서도 계속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결국 3월 8일 새벽 2차 조사가 끝난 후 검찰에서는 강 감독이 승부조작에 개입한 사실을 확인하고 구속영장을 청구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자세한 내용은 2013년 프로농구 승부조작 사건 항목 참조.
2011년 6월에 YTN에 나와 "프로축구 승부조작 사건은 가슴이 아프다."라고 이야기했는데 정작 강동희 본인은 이미 3개월전에 조작을 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3월 11일,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본인은 혐의를 계속해서 부인하고 있으나 담당 판사는 도주 위험 및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였다고.# 3월 12일 결국 승부조작에 대한 책임을 지고 동부 감독에서 사퇴하였다. 천하의 개쌍놈 확정 이후 김영만[16] 코치가 원주 동부 프로미의 감독대행이 되었으며, 2013~2014 시즌 동부는 이충희 감독을 맞이하게 되었다. [17]
강동희의 승부조작에 대한 1차 공판이 2013년 4월 22일 오전 10시에 의정부지방법원에서 실시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1차 공판에서 기소된 2011년 4700만원을 받고 4경기 조작한 혐의 중 2월 26일 경기에서 700만원을 받은 사실을 시인했다. 그러나 나머지 3월 11, 13, 19일 경기에 대한 혐의는 부인하였다.
이후 증인대질과 증거조사를 위해 2013년 5월 6일에 실시한 2차 공판 대질심문에서 브로커는 강동희가 4경기를 조작했다고 진술하는 바람에 브로커와 치열한 법정공방이 예상된다.#
3차 공판은 2013년 5월 20일에 치뤄졌으나 혐의사실만 치열하게 공방만 벌여서 공판이 무성과로 끝났다. 결국 4차 공판이 확정되었으며 2013년 6월 11일 오후 5시에 동법원 3호 법정에서 실시될 예정이다. 이 공판에는 강동희측 증인으로 강동희의 밑에서 원주 동부 프로미의 코치를 하던 김영만이 재판에 출석하여 증언을 하기로 되어 있다. 김영만 코치는 "포스트시즌 진출이 확정될 경우 주전급 선수들의 출전 시간을 줄이는 것이 관례"이고 "감독이 선수 몰래 고의적으로 패배를 유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증언했으나...
결국 8월 8일 1심에서 징역 10개월, 추징금 4700만원 판결이 내려졌으며, 강동희에 이어 검찰도 항소를 취하. 징역 10월이 확정되었다.[18] 그리고 KBL에서는 같은 달 6일 상벌위원회를 열어 이 판결을 근거로 강동희를 제명 조치했다. 영구제명이라는 용어는 KBL 규정 상으로만 존재하지 않을 뿐, 승부조작의 해악을 생각한다면 사실상 영구제명이나 마찬가지였다.
6. 이후
2016년 KBO에서 승부조작 사건이 불거지면서, kt wiz에서 승부조작 예방을 위한 강사로 위촉되었다. 본인 인터뷰에 따르면 승부조작이 위험하고 쉽게 빠질 수 있는 유혹이며, 한번 빠져들면 절대 나올 수 없다는 본인의 경험을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 반발이 많지만, 이런 식의 교육은 흔히 있는 것이다. 음주운전 범죄자나 도박중독자, 마약 중독자가 음주운전, 도박, 마약 근절 교육에 강연을 하는 게 그 사례.[19] 더구나 교육을 받는 선수들의 종목과 강사가 한때 몸담았던 종목은 다르지만 한때 한 종목의 전설적인 선수이자 감독이었던 그가 승부 조작으로 인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그 자체도 충분히 좋은 반면교사이기도 하다. 더욱이 경험자로서 승부조작 브로커들의 접근 방법, 대처 방안들을 후배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비록 본인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을 지라도 후배들을 자신과 같은 범법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막는다는 점에서 무조건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다.
추가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당시 있었던 몇 가지 사실을 언급했다.
- 최초 승부 조작은 "1쿼터에 주전 선수들을 빼준다면 술값을 내준다"는 말에 승부 조작에 대한 의식 자체가 없었고, 어차피 휴식을 위해 주전들을 뺄 계획이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응한 것이 시작이었다.
- 이후 3차례의 승부 조작을 더 해 총액 3700만 원을 받았으며, 그 시기 터진 프로 축구 승부 조작 사건을 보고 그때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 3700만 원을 브로커에게 돌려주고 없던 일로 하려고 했으나, 그 때부터 2년 간 브로커에 협박으로 시달렸다.
이후에도 대전 KGC인삼공사 선수단 강연에도 참석하는 등 승부조작 방지 교육 전담으로 나선 모습을 보여주었다.[20]
2019년 11월에는 춘천시장애인체육회 농구팀의 기술 고문을 맡기도 했다. 2019년 7월 24일에 실린 점프볼 기사에는 인천에서 후술할 농구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2020년 7월 28일, 강동희의 사면 공론화와 관련된 기사에서 한 농구 관계자가 사면에 대한 전, 현직 농구인들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며 아마추어 감독과 일부 프로 구단 등은 이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니 이제 KBL에 사면 탄원서를 제출하면 된다고 말했고, 의지와 상관없이 추진하여 그동안 표면에 드러나지 못한 것이 여론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공감대 형성을 제외하고는 부정적인 여론 우려로 KBL에 사면 탄원서를 제출한다고 해도 이뤄지는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2020년 9월 10일에 방송되었으며 허재의 제안으로 출연한 SBS 인터뷰 게임에서 승부조작 사건에 대해 언급하며 사죄의 뜻을 밝혔고, 어머니와 아내, 농구 레전드였던 서장훈, 김영만, 박지현 그리고 중앙대학교 시절 은사였던 정봉섭 전 감독을 만나 용서를 구하기까지도 했다.
7.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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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희 농구교실'이라는 자기 이름을 딴 유소년 농구 육성클럽을 운영하고 있었다. 현역 때부터 이미 본인의 이름을 내걸고 시작한 것이 훗날 그가 감독이 될 때도 계속되었다. 물론 직접 지도할 수는 없었겠지만,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교실이니 신경을 쓰긴 썼다. 다만 인터뷰에서는 자신은 이름만 빌려줬고 1년에 송년회나 사인회에만 참여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승부조작 사건에 휘말리자 강동희 농구교실에서는 발빠르게 대처를 하였고 결국 KBC(Korea Basketball Club) 농구교실로 이름이 개명되었다.[21]
그래도 해당 농구교실은 승부조작 사건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고, 현재도 있다. 강동희 본인 말로는 후배들에게 이름을 빌려주었지만 사업자 등록도 하지 않았고, 세금 등 각종 문제도 생겨서 본인이 다시 정식으로 법인 등록을 하고 직접 운영한다고 밝혔다.
1997년,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했을 때 제작진들이 엉뚱한 사람을 찾아 당황했는데, 이는 프로그램 역사상 유일한 NG라고... 그리고 재연 영상에서 강동희의 어린시절을 연기한 아이가 또한 승부조작 가담으로 제명된 안재욱이라고 한다.
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넌 강동희였어'''의 주인공이었다. 원본은 윤종신이 작곡한 성시경의 '''넌 감동이었어'''[22]
8. 관련 문서
[1] 중앙대 4학년때 첫 선발[2] 대회 직후 허재와 함께 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3] 프로에 들어올땐 이미 한국 나이로 33이었다. 그럼에도 상당히 좋은 기록을 세우고 은퇴했다. 승부조작으로 모든 걸 망치긴 했지만 선수 시절 그가 잘했던 선수인 건 맞다..[4] 메이저리그에서 피트 로즈 역시 선수시절에는 유명하고 뛰어났으나, 감독 시절 승부조작으로 제명당한 공통점이 있다. 다만 제명 이후의 행보는 극과 극.[5] 피트 로즈의 경우에는 감독으로서 소속팀에 돈을 걸었던 것 외에 직접 승부조작을 시도했다고 드러난 것이 없다. 때문에 승부조작이 아닌 도박 중독 때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승부조작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더라도 감독이 도박에 베팅한 자체만으로도 중대한 문제로 제명당한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강동희는 '''직접 승부조작에 가담했던 것이 밝혀져 실형을 선고받았던 범죄자'''이다.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강동희의 죄질이 피트 로즈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도 있다.[6] 프로에 들어올땐 이미 한국 나이로 33이었다. 그럼에도 상당히 좋은 기록을 세우고 은퇴했다. 승부조작으로 모든 걸 망치긴 했지만 선수 시절 그가 잘했던 선수인 건 맞다..[7] 1988-89 농구대잔치에서 우승한 기아자동차의 가드인 유재학이 MVP를 타게 되는데, 이 때 방열 감독이 고생한 한기범을 챙기지 않았다는 오해로부터 시작해 급기야 중앙대와 비중앙대의 전면적인 갈등으로 이어진다.[8] 내심 고향인 인천으로 가서 한 번 더 뛰어보고 싶어하기는 했지만, 이는 이뤄지지 않았다.[9] 감독 승진 이후는 나중에서 말하지만 포인트 가드만 보면 박지현과 이다. 슈팅 가드에도 황진원도 세밀한 지도를 받게 된다.[10] 유재학도 사실 사단보다 인맥인데 전창진은 다르다. 김진도 사단의 개념이 아니지만 김동광 또한 사단의 개념이 짙다. 지도했던 스승인 최인선도 인맥으로 활용했다.[11] 이론을 보면 역시 강원 철원이 고향인 LG 초대 감독 출신이었으나 김진 후임의 오리온스 몰락사에 이어 강동희의 몰락사로 이어진 동부 후임 감독으로 또 흑역사.[12] 게다가, 당시 정규리그 1위 팀이었던 kt를 제압했다.[13] 참고로 안양 KGC인삼공사의 입장에서는 '''첫 우승'''이다.[14] 이 점은 강동희 자신도 허재와 같이 한 인터뷰에서 인정한 바 있다. 당시 강동희의 멘트. "난 이전부터 다 맞추면서 살았잖아요. 형은 누구를 위해 기분을 맞추고 상대의 감정을 읽으려 한 적이 없었어요. 왜냐고? 농구대통령이었으니까. 난 2인자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맞춰가는 데에 익숙한 편이에요."[15] 만약 그가 혐의를 시인할 경우, '''국내 프로스포츠 감독으로선 최초'''로 승부조작에 가담한 사례로 남는다. 결국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16] 물론 그 감독대행이 지금의 김영만 감독이다. 후임 이충희마저도 물러난 이후에 정식 감독으로 동부를 이끌게 되었다.[17] 이충희 감독은 김진의 대구 동양 오리온스-대구 오리온스의 흑역사와 심지어는 명문구단인 전창진의 동부 프로미의 흑역사라는 대굴욕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이 모든게 구설수가 유독 많았던 최고 명장인 전창진을 만난게 아닌가라는 안타까움이 더 전해지기도 한다. 동부도 사실 김영만을 내부승진을 이후에 하게 되었지만 바로 하기전에 구단에서는 부담감을 가졌다.[18] 참고로 수감 기간에는 구속 기간이 포함되기 때문에 강동희는 10개월의 형량을 그대로 살 필요는 없고 2013년 3월에 구속되어 이미 6개월 가까이 수감됐기 때문에 나머지 4개월만 더 복역하면 된다. 2014년 초(아마도 1월말~2월초)에 만기출소했다.#[19] 도박 중독자로서 나락까지 떨어졌던 개그맨 황기순 역시 강원랜드에서 도박 중독의 위험성을 알리는 강연을 하고 있고 방송에 나올 때 마다 도박의 무서움에 대해 설파한다. 마약 중독으로 감옥까지 여러 번 갔다온 가수 현진영 역시 자진해서 정신병원에 입원 후 공개 치료를 했고 끊은 후 마약 퇴치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본다면 강동희의 승부 조작 근절 강연을 나쁘게 볼 것은 아니다. 전 야구선수였던 박현준역시 이러한 승부조작예방 강연을 뛰기도 했다.[20] 강연하는 강동희 옆에 안준호 전 감독이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이걸 볼 때 공적으로는 도움을 못 줘도 사적으로는 농구인들이 챙겨 준 듯.[21] 여기서 본래 KBC의 K는 본래는 Korea가 아니라 본인의 영문 이름에서 따왔다.[22] 라디오 스타에서 희철의 잔드립으로 한 번 더 언급된 바 있다. 이때 작곡가인 윤종신은 특유의 주워 먹기 개그로 "김유택, 한기범이 그랬다."며 너스레를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