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농구)
1. 개요
한국의 농구선수. 포지션은 센터.
2. 선수생활
2.1. 고교-대학시절
휘문고등학교 2학년 시절 선배 허중(G,180cm), 함은호(F,192cm), 김좌겸(C,196cm) 등과 함께 1996년도 시즌 3관왕에 올려놓는다.[1] 3학년때부터는 팀의 주축으로 뛰며 휘문고를 연맹회장기 우승으로 이끄는데, 이때 4강전에서 만난 상대가 고교 랭킹 1위를 놓고 다투던 라이벌 김주성의 부산동아고였다.
각각 휘문고(김태완), 부산동아고(김주성), 낙생고(정훈)의 에이스로 군림하던 2m대 장신자원들[2] 이 은 향후 한국농구를 이끌어나갈 인재들로 불리며 이들의 대학 진학은 아마농구팬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이중 김태완과 김주성은 전문가에 따라 랭킹 1위를 누구로 놓는지가 달랐을 정도로 각축을 벌였다. 다들 알다시피 김주성은 고1때부터 자신의 농구용품 등을 지원해주었던 중앙대로 진학하며 의리를 지켰고, 김태완은 의외로(?) 대학 중위권인 한양대를 택하면서 "대학 1학년때부터 주전으로 뛸수 있는팀"으로 입학하게 된다.
드디어 개막한 1998 시즌, 이들은 1학년임에도 각 팀 에이스를 차지함은 물론 모두들 어마무시한 활약을 펼쳤다. 임재현-황진원-조우현-송영진 등 탄탄한 기존 멤버에 슈퍼루키 김주성까지 가세한 중앙대는 MBC배에서의 부진을 딛고 대학농구연맹전 공동우승 및 1998 농구대잔치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김태완이 가세한 한양대 역시 김종학(198cm)-김태완(202cm)의 장신 더블포스트를 구축하며 대학농구연맹전에서 중앙대, 고려대와 공동우승을 차지하고 농구대잔치에선 프로선수들로 구성된 상무[3] 를 꺾고 결승까지 진출, 준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김태완은 라이벌 김주성 보다 우월한 탄탄한 체격조건(202cm, 106kg)을 바탕으로[4] 1998 농구대잔치 '''리바운드왕'''을 차지했고 '''대회 베스트 5'''에도 이름을 올린다.
하지만 김주성과 김태완의 격차는 2학년때부터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마르긴 했지만 몸에 근육이 붙으면서 좀더 탄탄해진 김주성은 중앙대를 1999시즌 4관왕, 2000시즌 전관왕으로 이끌며 서장훈의 뒤를 이을 국가대표 센터 후계자로 뽑힐 정도로 급성장한데 반해, 탄탄하다 못해 자기관리가 안되어 가끔씩은 육중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별 발전이 없었던 김태완은 2학년때는 4강에만 4차례 오르는데 그쳤고, 양동근을 신입생으로 받은 3학년때는 더욱 부진, 중앙대와 신흥강호 성균관대가 대학농구를 양분하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1학년때의 센세이셔널했던 데뷔와는 달리 김태완의 주가는 해가 갈수록 점점 떨어져만 갔고, 마침내 2002년 KBL 신인드래프트에서는 빅3, 로터리픽(4순위)은 커녕 전체 7순위로 지명받는 굴욕을 겪게 된다.[5]
대학시절 김주성과의 비교 글은 이 블로그에서 확인 가능하다.#
2.2. 프로 시절
KBL에서의 커리어는 그야말로 안습이다. 이 시절 송영진, 김동우, 정훈 등 많은 장신 유망주들이 프로에와서 좌절을 겪긴 했지만, 한양대 시절 국가대표팀까지 다녀왔던 김태완의 몰락은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안양 SBS 스타즈 데뷔첫해인 2002-03 시즌에는 팀내 외인인 페넬 페리(193cm)-안토니오 왓슨(205cm) 콤비는 물론 선배 윤영필(192cm)에도 밀리며 32경기 출전에 경기당 6분 44초만 소화하는 수준에 그쳐, 데뷔 첫 해에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끈 김주성과는 그 격차가 안드로메다급으로 벌어져버렸다. 다음시즌에도 외국인 선수들은 커녕 여전히 윤영필의 벽조차 넘지 못하고 팀내 4번째 빅맨으로 만족하며 전 시즌(54경기)의 절반도 채 안되는 26경기 출전에 경기당 7분 54초만 뛸 뿐이었다.
절치부심을 위해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한 김태완은 함께 장신유망주로 각광받았던 정훈, 김종학 등과 다시 만나게 되고, 박지현, 옥범준 등과 함께 상무를 2005 농구대잔치 우승으로 이끌며 화려하게 재기하는...것 처럼 보였으나....
제대후 복귀한 원 소속팀은 이름만 안양 KT&G 카이츠로 바뀐게 아니라, 유도훈 감독 부임 이후 주희정의 리딩아래 주야장천 달려대는 런앤건 농구로 팀컬러가 바뀐 후였고, 대학시절부터 느리기로 유명했던 김태완은 후보 빅맨 자리마저 김일두, 이현호 등 단신 빅맨들에게 완벽하게 밀리면서 2007-08, 2008-09 시즌 2년간 총 10경기 밖에 못 뛰었다.[6]
2008-09 시즌 종료 후 팀에서 방출된 김태완은 KBL 2군 드래프트에 지원하여 대구 오리온스에 1순위로 지명되지만, 2군리그에서조차 그 존재감은 희미했고 이후 대구 오리온스 2군팀이 해체되면서 쓸쓸히 선수생활을 접었다.
2.3. 국가대표
한양대 4학년이던 2001년 3월, 2001 오사카 동아시안게임에 출전하기 위한 국가대표팀(대학선발)에 뽑혀 양동근, 김주성, 정훈, 김동우, 송영진 등과 함께 출전한다. 이 대회에서 대표팀은 최종 순위 4위에 그치며 메달 획득에 실패하지만, 이 대회가 아직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예선 중국전에서 야오밍과 왕즈즈가 모두 출전한 중국 국가대표팀을 맞아 대학선발팀이 접전을 펼친끝에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김태완도 바로 이 중국전에서 빅맨으로 뛰면서 팀 승리에 공헌한다.
같은해 7월 열린 2001 상하이 아시아선수권에서는 송영진의 부상 대체 선수로 메인 국가대표팀에 합류, 생애 처음이자 유일한 A매치를 치렀다. 김태완은 주전 더블포스트인 김주성-서장훈의 후보선수로 출전, 이들의 파울관리 및 체력비축 정도로 뛰었으나 비중은 매우 적었고, 팀은 최종순위 3위에 그치며 세계선수권대회 출전권을 따지 못했다.
상무 소속이던 2005년에는 같은 상무소속인 박지현, 정훈, 김종학과 함께 2005 마카오 동아시안게임에 또한번 대표팀(대학선발+상무)에 뽑혀 김태술, 양희종(이상 연세대), 김민수(경희대) 등과 함께 출전했다.[7]
[1] 하지만 이때 팀의 에이스는 포인트가드 허중이었다. '허재의 재림'이란 소리를 들을정도였으니...[2] 정훈은 실측키가 199cm였지만 이때만해도 앤퍼니 하더웨이의 신장인 201cm로 불렸다. 당시 농구팬들에겐 정훈은 장신가드의 로망 그 자체였기때문에, 항상 페니와 비교당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리수;;;[3] 하지만 이때의 상무는 김병철, 김희선, 김정인 등 가드자원만 많고 장신자원들이 전혀 지원하지 않아 190cm의 박재일(동양)이 센터를 보는 상황이어서 골밑이 많이 약했다.[4] 김주성은 대학교 1학년때까지 205cm에 70kg라는, 난민수준의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5] 중앙대 김주성(1순위)-박지현(4순위), 성균관대 트리오인 정훈(2순위)-진경석(3순위)-이한권(5순위)는 그렇다 치자. 고려대에서도 그저 그런 활약뿐이었던 "닌자거북이" 가드 한정훈(6순위)에게마저 밀렸다는 건, 김태완의 위치가 떨어졌는지를 극명히 보여준다. 사실 드래프트 시점인 2002-03 시즌 즈음부터 토종빅맨에 대한 기대감이 완전히 사라진 때이긴 했다. 모든 구단들은 김주성 말고는 KBL에 적응할만한 빅맨은 없을것이라 판단했기에 김태완의 가치가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한정훈 같은 슈팅 가드는 로테이션이라도 쓸수 있으니까.. 실제로 김태완은 KBL에서 4시즌만 뛰고 팀에서 방출된 반면, 한정훈은 총 8시즌을 뛰고 은퇴했다.[6] 그나마 출전한 경기는 만만치 않게 느린 하승진의 전주 KCC 경기들 정도였다.[7] 한국은 또다시 최종 4위에 그쳐 메달을 따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