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퍼니 하더웨이

 

[image]
'''멤피스 타이거즈 No.25'''
'''멤피스 타이거즈 감독'''
'''앤퍼니 "페니" 디온 하더웨이
(Anfernee "Penny" Deon Hardaway)
'''
'''생년월일'''
1971년 7월 18일 (53세)
'''출신지'''
테네시 주 멤피스
'''신장'''
201cm (6' 7") [1]
'''체중'''
88kg (195 lbs)
'''포지션'''
'''포인트 가드''', 슈팅 가드[2]
'''드래프트'''
'''1993년 드래프트 NBA 1라운드 3순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지명''' [3]
'''출신대학'''
멤피스 대학교[4]
'''소속팀'''
'''올랜도 매직 (1993-1999)'''
피닉스 선즈 (1999-2004)
뉴욕 닉스 (2004-2006)
마이애미 히트 (2007)
'''지도자'''
멤피스 대학교 감독 (2018-)
'''등번호'''
'''1번''', 7번
'''수상내역'''
'''올-NBA 퍼스트 팀 2회 (1995-1996)'''
NBA 올스타 4회 (1995-1998)
올-NBA 서드 팀 1회 (1997)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94)
NBA 루키 챌린지 MVP (1994)
'''1996 애틀란타 올림픽 금메달'''
1. 개요
2. 성장기
3. 고등학교/대학교 시절
4. NBA커리어
4.1. 올랜도 매직
4.1.1. 93-94시즌
4.1.2. 94-95시즌
4.1.3. 95-96시즌
4.1.4. 96-97시즌
4.1.5. 97-98시즌
4.1.6. 98-99시즌
5. 과대평가?
6. 이야깃거리


1. 개요


'''PENNY '''

'''Ballin is What I was born to do.'''

농구를 하는 것은 내가 태어난 이유다.

ㅡ 그의 시그니처 모델에 새겨져 있는 말.

NBA 농구선수. 한때 그랜트 힐과 더불어 NBA의 '''차세대 아이콘'''으로 큰 인기를 누렸던 선수였다. 그러나 각종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쓸쓸히 퇴장한 비운의 선수. 지금도 올드팬들은 그의 이름을 거론할 때마다 안구가 촉촉하게 젖어든다. 별명은 '''Penny'''.

2. 성장기


하더웨이는 테네시멤피스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워낙 귀여웠던 모양인지 페니의 할머니 루이스 여사는 손자를 '''Pretty Baby''' 라고 부르며 매우 예뻐했다. 그런데 루이스 여사는 남부 출신이었는지 저 프리티 발음에 남부 억양이 들어가 있어서 이게 사람들에게는 Penny라는 단어로 와전되어 어쩌다가 별명이 저렇게 굳어졌다.
할머니의 사랑은 받았지만, 페니는 부모에게서 버림받았다. 아버지는 가출했고, 어머니는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 새살림을 차렸다. 결국 루이스 여사는 어린 페니를 먹여살리기 위해서 온갖 일을 다했다. 그런데 페니가 어느 정도 자랐을때 페니의 어머니가 페니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루이스 여사는 이에 대해 '''"모유 한 번 먹여준 적도 없으면서 뻔뻔하게 어딜 기어들어와?"''' 라며 내쫓아버렸다. 페니는 이때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사랑과 헌신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다고. 페니 역시 할머니를 매우 사랑했기 때문에 절대 나쁜길로 빠지지 않았다. 페니가 어렸을때 살던 곳은 엄청난 우범지대였다. 하지만 페니는 나쁜 길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저 농구와 미식축구를 하면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페니가 할머니의 말을 얼마나 잘 들었는지 대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페니는 어릴적 미식축구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친구들과 미식축구를 하다가 크게 다치고 돌아와 할머니를 놀라게 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페니가 미식축구 선수가 되겠다고 하자 루이스 여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손자를 설득했다.

'''"저런 덩치들에게 깔리면 넌 죽고 말거야. 차라리 농구를 하렴. 농구도 미식축구 못지 않게 정말 재미있단다."'''

할머니를 너무 사랑했던 페니는 할머니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결국 미식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접었다. 그래도 미식축구를 좋아하는 건 성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5]

3. 고등학교/대학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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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피스에 위치한 트레드웰 고등학교의 에이스로 맹활약했다. 이때 '''평균 36.6점, 10.1 리바운드, 6.2 어시스트, 3.9 스틸, 2.8 블록슛''' 이라는 가히 사기적인 기록을 찍어내며[6] 전미에 손꼽히는 고교선수로 각광받게 된다. 많은 대학들이 페니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페니와 할머니 루이스는 고향팀인 멤피스 대학교에 가기를 원했고, 멤피스 대학 역시 페니를 강력하게 원했다.[7]
하지만 이 때 페니는 '''공부를 거의 안 해서''' 학교성적이 대학에 갈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SAT점수도 멤피스 대학교가 원하는 기준에 미달이었다. 이러다 보니 주니어 칼리지에서도 몇 군데 왔다갔었다고. 하지만 루이스 여사는 완강히 멤피스 대학교를 고집했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학과장의 추천입학이 남았다. 다행히 학과장은 페니의 입학을 허락해주었다. 물론 이게 불공평하다고 엄청난 항의를 받아야 했다.하지만 이후 페니의 마지막 학점을 보면 A- 였다고 한다. '''즉, 공부를 못 했던게 아니고 안 했던 것.''''
그 후 페니는 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공부에도 열성적으로 임했다. 하지만 1학년 때 페니는 거의 농구를 하지 못했는데, 어떤 괴한이 페니의 다리에 총을 발사했기 때문이었다. 2학년 때는 래리 핀치(1951~2011)[8]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부상을 딛고 맹활약을 펼치면서, 드림팀1의 연습상대인 '''USA Basketball Developmental Team''' 에 선발되었다. 이때 선발된 멤버들은 크리스 웨버, 바비 헐리, 자말 매쉬번, 앨런 휴스턴, 로드니 로저스, 에릭 몬트로스, 그랜트 힐 등 전미 최고의 대학선수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연습경기에서 드림팀을 '''이겼다.''' 물론 다음 연습경기에서 무자비하게 깨졌다.[9]
3학년 때 평균 22.8점, 8.5 리바운드, 6.4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네이스미스상과 존 우든 어워드의 강력한 후보로 올랐다. 그리고 그는 NBA로 가기로 결심한다. 이는 프로에서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고 싶었고, 할머니를 더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1993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3순위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되었다. 하지만 1순위로 올랜도 매직에 지명된 크리스 웨버[10][11]와 트레이드되어 페니는 올랜도 매직의 유니폼을 입게된다.

4. NBA커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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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올랜도 매직



4.1.1. 93-94시즌


루키시즌에는 팀에 주전 포인트가드로 스캇 스카일스[12]가 있었던 관계로 슈팅가드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후에 팀은 페니의 패싱능력과 창의적 플레이를 높게 사게 되고 스카일스를 밀어내고 페니를 주전 포인트가드로 기용한다. 신인임에도 82경기 전 경기를 선발출전해 평균 16.0득점 5.4리바운드 6.6어시스트 2.3스틸이라는 훌륭한 기록으로 올 루키 퍼스트팀에 뽑혔으며, 그 해 올스타 이벤트부터 신설된 루키 올스타전의 초대 MVP에 오르기도 했다.

4.1.2. 94-95시즌


샤킬 오닐과 콤비를 이루어 본인도 전년도보다 일취월장한 기량을 선보여 '''올 NBA 퍼스트팀'''에 선정된다. 페니가 슈퍼스타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 팀도 마이클 조던[13]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를 꺾고 파이널 무대를 경험. 상대는 6번시드로 간신히 파이널에 올라온 휴스턴 로키츠.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젊은 패기의 올랜도가 우세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올랜도는 하킴 올라주원의 맹활약에 4전 전패했다. 페니는 파이널동안 맹활약했지만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하킴 뿐만 아니라 클라이드 드렉슬러를 막지 못했는데 드렉슬러와의 매치업에서 파워의 중요성을 느꼈는지 플레이에 무리가 되지않는 선에서 벌크업을 하여 95-96시즌을 맞이 한다.
https://youtu.be/_ai60RFEaJw
파이널 3차천.19득점, 15어이스트.
https://youtu.be/3ePq1_5COSI
파이널4차전. 25득점, 6리바운드, 5어시스트.

4.1.3. 95-96시즌


95-96시즌에는 샤킬 오닐이 엄지손가락 부상 탓에 개막전부터 결장했다. 그래서 샤크가 복귀한 12월 15일까지 페니가 팀의 에이스 역할을 맡았다. 페니는 그야말로 신들린 듯한 활약으로 팀을 시즌 초반 17승 5패로 이끌었다. 개막전부터 28득점을 올리며 팀을 승리로 이끌더니 개막 4번째 경기인 뉴저지 네츠전에서는 무려 42득점을, 그로부터 얼마 후에 만난 시카고 불스전마저 36득점을 쏟아부으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시즌 불스는 당시 최다승 기록인 72승 10패를 거둘 당시였는데 이 시즌에 당한 첫 패가 바로 페니가 이끌던 매직에게 당한 것이었다. 오닐이 결장하여 에이스 역할을 하던 22경기동안 페니가 올렸던 평균 득점은 무려 27점대였다. 이런 페니의 신들린 활약 덕에 올랜도는 샤크의 공백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고, 팬들은 마이클 조던의 뒤를 이을 슈퍼스타가 탄생했다며 열광했다.[14] 올랜도 매직은 이때 프랜차이즈 최다승인 60승을 기록하면서 플레이오프에 안착했다. 1라운드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3전전승, 애틀란타 호크스를 4승1패로 가볍게 이기고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올랐다. 하지만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자신들이 굴욕을 안겨줬던 '''시카고 불스'''[15]에게 4전 전패로 개발살나며 허무하게 탈락했다. 시리즈 전적이 4전 전패이지 1차전을 제외한 경기들은 접전 끝에 패했다. [16]
https://youtu.be/7QVNn0jVXcg
정규시즌 vs CHI. 36득점.
https://youtu.be/zANqQUlyv3A
정규시즌 vs LAL.
https://youtu.be/IJe3WVK8N34
정규시즌 vs SAS. 35득점.
https://youtu.be/DzdxeQTeNf8
동부 세미파이널 vs ATL 4차전. 29득점, 11어시스트
https://youtu.be/gsEwfI2-QlM
동부 파이널 vs CHI 1차전. 38득점.
이 시즌이 종료되고 샤킬 오닐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이적하면서 페니는 자연스럽게 팀의 리더가 되었다.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드림팀3 멤버로 뽑혔고 금메달도 획득했다. 페니는 결승전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17득점을 올렸다.[17]
https://youtu.be/NwNdsjlYJFk
96 애틀란타 올림픽 결승전 vs 유고슬라비아. 17득점 4어시스트

4.1.4. 96-97시즌


96-97시즌 개막 후 2, 3번째 경기를 일본 도쿄에서 치뤘다. 당시 상대팀은 뉴저지 네츠. 각 각 23점, 29점을 올렸고 모두 승리했다. 도쿄돔에 농구코트를 제작하여 어마어마한 인파들이 몰렸는데 대부분 페니를 보러왔다고 보면된다. 이 시즌 네츠는 그야말로 리그 최약체였고 스타선수 자체가 없는 팀이 였으니 nba사무국에서 오직 하더웨이 스타성만 믿고 일본 투어를 개최한 셈이다.
https://youtu.be/1Dl7BSubtl4
29득점.
하지만 리그 개막 후 얼마 못가서 부상으로 들락날락한 시즌. 중반 부터 완전 복귀하여 59경기만 뛰었고 평균 20.5점, 4.5 리바운드, 5.6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all - nba 3rd팀에 존 스탁턴과 함께이름을 올렸다.
https://youtu.be/rHJjmJTNFTA
정규시즌 vs HOU. 31득점.
https://youtu.be/rPteBshWgm0
정규시즌 vs CHI. 23득점.
https://youtu.be/ywA4JY3BL9o
정규시즌 vs 76ers. 30득점, 6어시스트.
플레이오프에는 올랐지만 성적은 45승 37패(동부 7위)로 작년에 비해 곤두박질 쳤고, 시즌 중간에 감독이었던 브라이언 힐이 경질되기도 했다. 마이애미 히트와[18]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2패로 끌려가던 올랜도는 페니가 3, 4차전에 연속으로 40득점을 기록하는 미친 활약상으로 시리즈를 타이까지 끌고 갔다. 당시 마이애미 히트 감독이었던 팻 라일리는 페니의 활약에 대해 '''"모자라도 벗어서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라고 하며 극찬했다. 루키 시즌 부터 이 시즌 플레이오프 까지가 사실상 페니 전성기라고 보면 된다. 불과 4시즌 경력(21세~25세)으로 퍼스트팀 2회, 서드팀 1회, 올림픽 금메달, 준우승의 성과 및 나이키 시그니처 모델까지 굉장한 임팩트를 주었고 수많은 국내외 팬을 생성한 보기 드문 선수였다.
PO(2승 3패) 1라운드 탈락 올랜도 매직(동부 7위 45-37) vs 마이애미 히트(동부 2위 61-21)
1차전 (패) 39분. 37.5% - 33.3%(1/3) - 0%(0/3) 4리바운드, 3어시스트, 4스틸, 4블락, 4턴오버, 13점
2차전 (패) 39분. 50.0% - 20.0%(1/5) - 62.5(5/8) 1리바운드, 2어시스트, 1스틸, 1블락, 1턴오버, 26점
3차전 (승) '''47분'''. 53.3%(16/30) - 25.0%(1/4) - 90.0%(9/10) 8리바운드, 2어시스트, 2스틸, 1턴오버, '''42점'''
https://youtu.be/Z8rpFE1CUiQ
4차전 (승) '''48분(!)'''. 52.2%(12/23) - 50.0%(4/8) - 81.3%(13/16) 7리바운드, 4어시스트, 4스틸, 3블락, 1턴오버. '''41점'''
https://youtu.be/WyxcjbJP1z0
5차전 (패) '''47분'''. 36.4%(8/22) - 40.0%(4/10) - 76.5%(13/17) 10리바운드, 6어시스트, 1스틸, 2블락, 2턴오버, '''33점'''
https://youtu.be/YookrcA1jfI
아무리 지금과 달리 페이스가 느린 시대였어도 47,48,47분 출장은 당시 정규시즌 59경기 출전에 그칠정도로 부상결장이 많았던 페니에게 너무 가혹했다.
이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페니는 평상시와 다른 전략으로 승부를 걸었다. 미들점퍼 비율과 3점시도 비율을 2배이상 높였고 돌파역시 상당히 과감하게 해서 자유투시도도 상당히 증가했다. 평소 큰 신장을 이용한 포스트업 공격, 오픈 3점 등 효율성 있는 플레이에서 80년대 마이클 조던, 매직 시절 트레이시 맥그레디, 00년대 중반 코비 브라이언트같이 원탑 에이스 GO 플레이를 펼쳤다. 3점을 책임져 주던 닉 앤더슨, 데니스 스캇의 상대적 부진, 호래이스 그랜트가 부상으로 아예 빠지는 등 득점, 리바운드 등 전 부분에서 누수가 생겼기에 페니의 부담이 증가했으며 리딩은 대럴 암스트롱에게 부분적으로 일임했다. 이 플레이오프 이후 차기 시즌 예상에서 한 단계 스텝업된 페니를 조던과 함께 득점왕 라이벌로 지목하는 프리뷰 기사 등도 상당히 많았을 정도 였으나.... 이 모든 것이 '''정말''' 거짓말 처럼 사라졌다.
아무리 95/96시즌 샤킬 오닐이 초반 20경기 결장을 하고도 매직이 동부 2위의 좋은 성적을 올렸어도 결국 그 이후 시즌에 대비하여 보강이 필수적이였다. 지금과 달리 당시 매직은 그야말로 불스와 함께 최고인기팀 중 하나였을 정도로 매력적인 프랜차이즈였기에 좋은 선수들 영입이 비교적 쉬운편이였지만 팀은 페니 1명만 보고가는 어이없는 생각을 했다. 즉 오닐 공백을 전혀 보완할 생각이 없었는데 결국 이런 결정이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중반의 운명을 바꾸고 말았다. 오닐이 빠진 공백은 이미 30대 중반을 넘어선 로니 세이커리가 담당했지만 이는 일시적인 보강에 불과했으며, 결국 세이커리는 딱 1시즌(96/97시즌)만 좋은 활약을 보였고 노쇠화의 길에 들어섰다.

4.1.5. 97-98시즌


97-98 시즌 왼쪽 무릎부상을 당해 19경기 정도만 출장하는 데 그쳤다. 개막 후 두 경기에서 30득점 이상 올리는 등 좋은 페이스를 이어갔으나 부상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코트에 복귀 하는 등 이런 루트를 1월까지 이어갔다. 즉 컨디션 자체가 엉망이었다. 이 때 부터 슬슬 부상의 악령이 씌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코비 브라이언트, 앨런 아이버슨, 케빈 가넷, 팀 던컨에게 NBA중심 자리를 넘겨주는 본격적인 시즌[19][20]이 되었다. 물론 페니 인기는 여전해서 부상으로 19경기 출전하고도 조던과 함께 동부 올스타 선발로 뽑혔으니 아직 많은 팬들은 일시적 부상으로 기대했으나.. 당시 히트 소속이였던 팀 하더웨이가 페니는 부상으로 제 컨디션도 아닌데 주전으로 출전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https://youtu.be/RXAMJqgudjU
정규시즌 vs CHI. 20득점, 6리바운드, 3어시스트.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97/98시즌 하이라이트로 추정된다. 이 경기를 보면 알겠지만 포지션을 SG로 옮겨서 주요 매치업 상대가 마이클 조던이다.

4.1.6. 98-99시즌


98-99 시즌에는 단축시즌(50경기)[21][22]이긴 하지만 전경기를 출전했다. 확실히 이전의 폭발력은 많이 사라졌고 전성기 시절에 비해서 상당히 느려졌으며 공격시 적극적으로 플레이하지 못하는 모습이 부분적으로 생겼다. 아무래도 전 시즌 아웃급 부상을 당했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였고 본래 클래스가 있는 선수였기에 팀을 전시즌 플레이오프 탈락팀에서 무려 동부 3위로 플레이오프에 올렸고 여전히 센스있는 플레이와 에이스 본능은 살아있어서 접전경기에서는 강한 모습을 여전히 보여주었다. 페니는 평균 15득점에 5어시스트 (데릭 로즈도 큰 부상이후 복귀한 불스에서 비슷한 스탯을 기록했다.)정도로 1차 스탯은 크게 하락했음에도 적어도 이 시즌 까지는 스타성을 유지했으며 무엇보다 수직적인 팀 성적 상승에 페니가 있음은 당연했다.
https://youtu.be/VkHnoX_YWcE
정규시즌 vs DET. 30득점, 3어시스트, 5스틸.
https://youtu.be/8ND5SsBzxeg
정규시즌 vs NY. 30득점, 8어시스트.
https://youtu.be/8y2nB2WXRQQ
정규시즌 vs LAL. 22득점, 13어시스트. 샤크가 매직을 떠난 후 코비 브라이언트와 함께 처음으로 페니와 맞대결한 경기.
하지만 앨런 아이버슨이 한단계 성장한 식서스와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업셋(1-3)을 당해 허무하게 탈락했다.
https://youtu.be/3rQ32xftPQE
플레이오프 vs PHI 1차전. 19득점, 5리바운드, 6어시스트
/ 아이버슨 30득점.
https://youtu.be/AiMFabbaHPw
플레이오프 vs PHI 2차전. 22득점, 7리바운드, 4어시스트
/아이버슨 13득점.

4.2. 피닉스 선즈


결국 올랜도 매직은 페니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피닉스 선즈로 트레이드 시켰다. 비록 이전의 폭발력은 사라졌지만 팬들은 당시 피닉스 선즈의 포인트가드였던 제이슨 키드와의 백코트를 이루는 것에 기대를 드러내며 백코트2000이라 부르기도. 이적 후 첫 시즌, 정규시즌 평균 17득점 올렸고 플레이오프에서도 팀 에서 가장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이미 페니는 예전의 페니가 아니었다. 더욱이 00-01시즌 다시 무릎수술을 받으며 운동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03-04시즌 들어서는 주전자리를 조 존슨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루키 시즌 ~ 96-97 플레이오프 까지가 최전성기이고, 98-99시즌 ~ 99-00 레이커스와의 서부준결승까지가 사실상 페니가 경쟁력있던 시절이였다.

4.3. 뉴욕 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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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004 시즌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페니는 스테판 마베리와 함께 뉴욕 닉스으로 트레이드 되었다. 하지만 대접은 피닉스 때보다도 더 나빴다. 2004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준수한 활약을 하긴 했지만 2004-2005 시즌 그의 위치는 벤치 멤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당시 팀의 단장이었던 아이재아 토마스는 페니를 거의 전력 외 취급하고 그의 락커룸도 없애버려 그를 분노하게 했다. 2005-2006 시즌에 뉴욕 닉스에서 스티브 프랜시스를 영입하기 위한 카드로 페니는 당시 뉴욕 닉스의 유망주였던 트레버 아리자와 함께 친정팀인 올랜도 매직으로 돌아갔다.
페니는 이때 과거에 자신이 달았던 1번 유니폼을 달 생각에 기뻐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올랜도 구단은 '''그런 페니의 기대를 철저히 저버리고 1번 유니폼을 트레버 아리자에게 줘버렸고, 페니는 방출시켰다.''' 차세대 리그의 아이콘이었던 페니 하더웨이는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속에 사라져갔다. 2007년 올스타전때 타미카 캐칭과 함께 쓸쓸하게 올스타전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에 많은 팬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던 페니였으나...

4.4. 마이애미 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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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이애미 히트와 계약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많은 팬들을 놀라게 했다. 비록 비보장 계약이긴 했지만 팬들은 그가 다시 코트에서 뛸수 있게 되었단 사실에 기뻐했다. 페니 본인도 복귀를 위해 훈련을 해왔다고. 덩크슛을 성공시킬 수 있을정도로 몸상태를 회복했다고. 시범경기에서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며 기대감은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팬들의 기대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페니는 불과 16경기만에 다시 방출되었고, 사실상의 완전은퇴를 하게 되었다.
현재는 은퇴선수 자격으로 NBA에서 주관하는 여러 가지 행사와 월드이벤트에 간간히 모습을 비추며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아쉽게 부상으로 명예의 전당 후보에도 못오르고 커리어를 마감했지만 워낙 인기가 좋았던 선수라 꾸준히 쉽게 근황을 알 수 있다. 다른 일부 레전드 선수들이나 더 좋은 커리어를 보낸 웬만한 선수들 보다 기사거리가 더 자주나오고 이 나무위키 문서도 꽤나 자세하게 작성된 커리어와 그 이후 생활까지 기술되어있다. 또한 90년대 조던, 바클리와 함께 나이키 대표 모델 인지라 은퇴 후 7~8년이 지난 이후에도 페니 5, 6 가 새롭게 나오는등 여전히 이목을 끄는 선수임을 알 수 있다.[23]
한국 시간 2018년 3월 20일, 모교 멤피스 대학교의 감독으로 부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멤피스는 최근 성적이 좋지 못해 NCAA 토너먼트에도 참가하지 못하던 와중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그를 감독으로 선임했다고 한다. 그런데 2년차 시즌 내쉬빌 출신 고교 최대어였던 센터 제임스 와이즈맨을 리크루트 성공하는 대어를 낚아 놓고, 막상 개막 3경기 만에 와이즈맨을 멤피스로 데려오기 위해 이사비용을 페니가 준 것이 드러나 NCAA 규정위반으로 와이즈맨이 출장정지를 먹고 와이즈맨은 학교 복귀를 거부하고 2020년 NBA 드래프트 준비에 집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와이즈맨 없이 팀은 연승행진을 이어가고 있지만 원래 계획상 핵심이었던 와이즈맨을 잃었기에 2년차 시즌 학교가 원하는 성적을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5. 과대평가?


사실 슈퍼스타치곤 비율스탯이 평범한 편이라 스탯만 보고 평가하는 이들에게 과소평가[24]받기도 한다. 스탯상 최전성기였던 95-96시즌의 스탯은 21.7점 7.1어시스트 4.3리바운드로 올스타급 스탯이긴 하나, 30점을 밥먹듯 찍던 마이클 조던이나 한때 13~14개에 달하는 괴물같은 어시스트를 찍던 존 스탁턴에는 한참 못 미치고, 90년대 초반까지 조던과 라이벌 관계 였던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비교해도 초라해보인다. 그렇지만 이는 전형적으로 스탯만 보고 평가하는 오류인데, 당시 페니의 득점력은 스카티 피펜이나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불스도 위협적으로 느낄 정도였으며 실제로 매직과 불스가 플레이오프에서 붙었을 때도 팀은 털렸지만 조던과 피펜을 상대로 시즌평균보다 높은 25.5점을 기록했다. 또한 전술했다시피 95-96시즌 샤킬 오닐이 개막전부터 22경기를 연속으로 결장해 자연히 이 기간동안 페니가 팀의 에이스 역할을 하게 됬는데, 포인트가드임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동안 무려 평균 27득점을 기록하며 팀을 17승 5패의 호성적으로 이끌었다. 전년도의 활약이 샤킬 오닐과 함께 뛴 혜택을 본 게 아닌가 하는 일말의 의심마저 일축해 버렸음은 물론, 이 기간동안 해당 시즌 72승에 빛나는 불스까지 36득점을 퍼부어 털어버리면서[25] 에이스 본능을 과시했다. 이 기간동안 페니가 보여준 엄청난 퍼포먼스 때문에 팬들과 미디어는 드디어 조던의 뒤를 이을 슈퍼스타가 나타났다며 열광의 도가니였다.

게다가 그 다음 시즌엔 막강한 수비를 자랑하는 히트를 상대로 플레이오프에서 연속 40점을 올렸는데, '''팻 라일리의 팀을 상대로 연속 40점을 올리는''' 업적은, 라일리의 팀을 매년 털었던 마이클 조던[26]도 달성한 적이 없었다. 특히 무리하게 선수를 다루는 감독을 만나면서 문제의 부상이 시작되었다는것. 이미 부상이 있었지만 부상에도 뛰게하는 등의 무리한 경기를 펼치는 경우가 많았고 실제 소심하고 착한 성격의 페니는 어쩔수 없이 받아들였다는게 문제. 좀더 자기를 생각하고 쉬었어야 할 시즌까지 몽땅 뛰었다는게 문제로 결국 부상이 심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럼에도 왜 스탯이 초라하냐면 전성기 당시 페니의 경기당 기록을 보면 대량득점을 할 때도 있지만(주 옵션인 샤킬 오닐등이 없을때나 공격옵션들이 모두 죽쑤고있을때만 다득점)필요할때만 득점하거나 득점이 유독 적을 때는 어시스트 수치가 높은데, 득점이나 어시스트 중 하나에만 집중하기 보다는 워낙 다재다능해 많은 분야에 공헌했다는 점. 한창 기량이 올라올 때 경기당 평득이 30에 가까운 샤킬 오닐과 뛰었다는 점. 오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에이스로 자리잡을 때쯤 부상에 발목잡혔다는 점. 스탯을 그닥 중시않을정도로 이타적인 플레이 등을 들 수 있다.
90년대 초반까지 흐름은 공격농구와 빠른 페이스였으나 조던 1차 복귀 시점 부터 느린 페이스에 수비농구로 흐름이 바뀌었기에 다시 한번 공격농구의 흐름이 도래한 현재 시점에서 1차스탯 볼륨은 페니뿐만 아니라 대다수 PG, SG 선수들의 스탯은 지금과 달리 적은 수치이다.(마이클 조던은 제외..)[27] 반면 센터, 파워포워드 진은 워낙 압도적인 선수들이 즐비했기에 평균 20득점-10리바운드 선수들이 상당히 많다.사실 이 부분들은 객관적인 수치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동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팬들이 이해하기 힘들고, "그래봤자 평득 21점 이 커리어하이인 선수 아니냐, 추억보정으로 과대평가된 것"이라고 하기 쉽다. 그러나 페니는 '''저 초라한 스탯을 기록하고도 95-96시즌 MVP투표 3위에 올랐다.''' 그가 제친 대상 중에는 27-11에 가까운 스탯을 기록한 하킴 올라주원과 팀동료인 샤킬 오닐도 있었다. 게다가 최전성기였던 게리 페이튼, 전성기에 비해 한참 꺾였지만 그래도 위력적이었던 존 스탁턴을 제치고 무려 '''퍼스트팀'''에 오르기도 했다. 이는 스탯이 어쨌든 간에 당대 전문가들은 그를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하나라고 뽑은 것 이다.
다만 공격에 비해 수비는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구멍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탑 클래스 선수로써는 좀 평범한 스탯을 찍었다. 하지만 그가 커리어 내내 포인트가드 포지션이었고 자신보다 작고 빠른 선수들을 막아야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이 때문에 매번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춰야 했기 때문에 무릎이 성할리 없었겠지만. 거꾸로 작은 선수들이 페니의 큰키에 불편을 호소할정도로 전성기 시절에 대부분의 포인트가드들이 그를 싫어했다. 특히 코트비전에 의한 가로채기가 일품이었는데 처음 데뷔당시부터 이미 스틸은 수준급으로 경기당 2.3을 찍은 상태였다. 당시 96/97시즌까지 왠만한 스탯에서 상위권에 페니의 이름을 보게되었으나 브라이언 힐 감독의 경질이후부터 서서히 내려가던 스탯이 어느 감독이후로 곤두박질 치는걸 보게되는데 거기서 부터 페니의 문제가 시작되었음을 알수 있다.

6.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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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약에라는 단서가 별 의미가 없긴 하지만 여전히 올드팬들 중에서는 "만약에 페니가 무릎부상없이 커리어를 보냈다면 어땠을까?" 라고 늘 상상하며 안타까워한다. 아마도 NBA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별 의미는 없는 넋두리일지도.
  • 함께 뛴 샤킬 오닐은 같이뛴 최고의 가드진이 누구냐고 질문을 받았을때 가장 처음으로 페니와 브라이언 쇼의 백코트라고 했다. 참고로 샤킬과 같이뛴 가드진은 정말 화려한데 코비 브라이언트, 드웨인 웨이드, 스티브 내쉬 등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먼저 언급된 사람이 바로 페니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오닐과 호흡이 가장 좋았고 각 각 92년, 93년 데뷔로 사회 초년생이자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기억이 오닐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94-95시즌은 무려 파이널에 진출했고, 그 이듬해 역시 동부 결승에 올랐으니 두려울게 없었던 당시 올랜도였다.[28]
  • 플레이스타일은 가히 만능. 득점뿐만 아니라 다재다능함까지 갖추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플레이뿐만 아니라 동료들까지 살려주는 플레이의 창의성이 뛰어나 전문가들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였다. 포인트가드답게 경기운영능력과 볼 핸들링 능력은 탑 클래스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팀을 생각하는 이타적인 마인드는 보너스. 전술한대로, 이 선수가 슬램덩크의 정우성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하는데, 실제 플레이는 가장 윤대협에 가깝다. 윤대협만큼의 피지컬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롱런할 수는 없었지만.[29]
  • 한창 NBA에서 활약할 당시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특히 그가 NBA에 데뷔하던 시기가 마이클 조던의 첫번째 은퇴 이후 첫 시즌이었기 때문에 뛰어난 기량과 높은 상품성을 갖춘 페니는 차세대 리그를 선도할 아이콘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나이키는 조던을 대체할 아이콘으로 페니를 전폭적으로 밀었다. 에어 조던시리즈처럼 당시 그의 시그니쳐 농구화인 에어 페니를 내놓았고, 에어 페니의 파란색/흰색 조합은 당시 간지 유니폼 중 하나였던 올랜도 매직 유니폼과 궁합도 잘 맞아서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 나이키는 그를 위해 페니의 전용로고까지 만들어주었다. 에어 페니 시리즈는 최근까지 새로운 모델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과거 큰 히트를 친 에어 페니 시리즈, 애틀란타 올림픽에 신은 줌 플라이트 96, 펌포짓등의 모델들은 지속적으로 레트로 모델이 나오고 있고, 출시될 때마다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아직까지도 페니시리즈가 나오고 있을정도에다 그가 신었던 나이키 신발이라는 이유로 리트로 되는 경우는 페니가 처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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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 페니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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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 에어페니 시리즈 최근 줌페니로 바뀌어 계속 출시되고있고 지속적으로 리트로도 되고있다.'''
  • 2017년 1월 중 한국에서도 다시 한 번 상기 사진 왼쪽 상단의 에어 폼 포짓 1 로얄 블루가 20주년 기념으로 오리지널 색상과 97/98 시그내처 에어 페니 4가 동시에 출시되었다. 1997년 출시 당시 판매가는 185,000원으로 현재의 시점에서 봐도 상당히 고가의 농구화이며 파란색 갑피 전체가 매우 인상적이고 만져보면 생각과는 다르게 말랑말랑 하다. 특히 페니는 폼 포짓 1을 96/97시즌 막바지 부터 에어 페니 2 대신 폼 포짓 1 화이트모델을 신기 시작했고 마침내 플레이오프 1라운드 히트와의 시리즈에서 로얄 블루를 착용했다. 1,2차전은 어웨이 경기로 블루와 검정 기반의 유니폼 색에 매치하기에는 이상이 없었으나 3,4차전의 올랜도 홈 경기에서는 하얀색 홈 팀 유니폼에 착용하기에는 신발 전체에 블루 비중이 너무 높아 NBA규정에 위반되어 신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이 왔고 페니는 센스를 발휘해서 검정색 매직으로 세로로 파인 홈 부분들에 검정색 매직(샤피라는 브랜드의 필기구)으로 블루색상의 비율을 줄이는 기지를 발휘해서 착용했다.이런 스토리가 있는 모델을 놓칠 리 없는 나이키는 역시 일명 샤피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고 최근에는 2015년에 에어 페니 6와 함께 페니팩으로 두 족 함께 묶어서 판매하는 방식으로 무려 60만원 가까운 가격으로 재출시되었다. 최근 농구선수 중에는 워싱턴의 마퀴프 모리스, 클리블랜드의 이만 셔퍼트 등의 선수들도 가끔 폼 포짓 1을 착용하는 걸로 보아 기능성에서도 20년 전 모델임에도 꽤 괜찮은 기능성을 보유한 듯 하다.
  • 나이키 테크팩 상하의 페니 모델도 있다. 2019년 현재 모교 대학 감독인데 파란색을 기본으로 페니 로고과 멤피스 대학 로고가 있는 옷을 입은 사진을 본인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물론 PE버전으로 추측되기에 당연히 국내에서 구할수 없다.
  • 그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냐면 한번은 페니가 눈 위쪽에 상처가 나서 밴드를 붙였는데 이게 패션 아이템으로 유행하는 현상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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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런식으로.
  • 샤킬 오닐과 함께 닉 놀테 주연의 블루 칩스(국내 출시명은 샤킬 오닐의 NBA챔프)라는 영화에 출연했다. 단역은 아니고 조연. 극중 닉 놀테가 감독으로 있는 대학농구팀의 주축 농구선수 3인방중 한 명을 맡았다. 아직 청소년티가 많이 가시지 않은 페니의 모습을 감상할수 있다.

  • 심지어 나이키에서는 1995년에 페니의 인형 버전인 '릴 페니(Lil Penny)'를 등장시킨 광고를 선보이기도 하였고릴 페니와 페니가 함께한 광고는 98년도 까지 꾸준히 방영되었다. 나이키 초창기 대표모델인 조지 거빈도 같이 찍은 광고도 있을 정도였다.
  •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국내에서는 앤서니 하서웨이(Anthony Hathaway)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소개하는 정보도 많았다. 유명 배우인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30]와 앤서니 홉킨스(Anthony Hopkins) 때문에 잘못 알고 있었던 것으로도 생각되지만, 일단 본명인 앤퍼니 하더웨이보단 별명인 페니로 더 알려진 게 가장 큰 이유. 페니 전성기 시절 해서웨이는 헐리우드 데뷔조차 하지 않았고 아직 어린나이였기에 유명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페니의 하락세와 하서웨이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2001년 부터 그렇듯 확률이 매우 높다.
  • 지금은 암투병중인 친구를 대신하여 중학교 농구팀 감독을 맡고 있다.[31] 2019년 현재는 멤피스 대학교 농구 감독으로 재직중.
  • 코비 브라이언트도 페니의 팬이었다. 1994년 플레이오프때 사진을 요청했으나 페니가 귀찮아해서 거절했다고.... 그 이후 2년 6개월 후 코비는 NBA 데뷔.[32]
  • 2021학년도 수능특강 영어 23강 03, 04번의 지문에 척 데일리와 함께 언급되었다.
[1] 맨발 신장 198cm (6' 6") [2] 페니 하면 매직의 뒤를 잇는 장신 포인트가드의 대명사 같이 인식되지만 막상 1번으로 뛴건 커리어 초창기 3~4년에 불과하다. 문제는 페니의 커리어 초기 4년이 너무나 강렬하다는거...[3] 드래프트 당일 1순위로 올랜도 매직에게 지명된 '''크리스 웨버'''와 트레이드 되어 샤킬 오닐이 이끌던 올랜도 매직에서 커리어를 시작한다[4] 멤피스 대학교에서 하더웨이가 달고 뛰던 25번은 현재 영구결번이다[5] 사실 미국의 소위 말하는 4대스포츠 중에서 부상이 가장 잦은 스포츠는 미식축구, 그 다음이 농구다. 페니가 성인이 돼서도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졌다는 점, 부상이 엄청나게 잦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식축구를 했으면 부상으로 인해 선수생활이 NBA에서보다 더 짧아졌을 가능성도 높다.[6] 여담이지만 미국에서는 진짜 프로진출을 진지하게 노리는 운동부들과 동아리 정도로만 운동을 하는 학생선수들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NBA급 선수들은 다른 선수들과 수준 차이가 엄청 나서 고등학교 때 진짜 말도 안되는 스탯을 찍는 경우가 많다. 한 마디로 양학. 고졸로 nba에 직행한 코비 브라이언트, 케빈 가넷은 각각 30.8점 12리바운드 6.5어시스트 4스틸 3.8블럭, 25.2점 17.9리바운드 6.7어시스트 6.5블럭을 기록했으며 마이클 조던은 4학년 때 29.2점 11.6리바운드 10.1어시스트로 트리플 더블을 찍었는데도 원하던 대학인 노스캐롤라이나 스테이트에 진학하지 못했다.[7] 당시 페니를 스카웃 하려고 했던 농구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페니는 너무 착해서 주변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을까 걱정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루이스 여사가 '''"당신, 누구 말을 믿는 거야? 나야? 아니면 기자들이야?"''' 라는 말을 듣고 페니를 데려올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고.[8] 그는 대학 시절인 1973년에 모교 멤피스대를 NCAA 전국대회 결승까지 올린 주역이며, 전 샌안토니오 스퍼스 주전 PF 래리 키넌의 1년 선배다.[9] 당시의 선수들이 훗날의 토크쇼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경기에서 드림팀 선수들은 나름 핸디캡을 적용한다고 초반에 일부러 쉬엄쉬엄 뛰다가 어느 정도 점수 차이가 벌어지면 그때 제대로 뛰어서 따라잡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연습 경기라 풀타임이 아니어서 점수 차이가 벌어지고 드림팀이 이제 막 제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경기가 끝나버렸다고 한다. [10] 웨버 또한 커리어 내내 부상과 싸운 선수였다. 신인상 이후 돈 넬슨과 역할차이로 루키 시즌 이후 워싱턴으로 이적하게되었고 결과적으로 웨버와 GSW에게 모두 악영향을 미쳤다. 파워포워드이면서도 매직 존슨이 우상이였던 웨버는 주로 외곽에서 공을 잡고 자유롭게 플레이 하고 싶어했지만 골밑에서 센터로 쓰고 싶어했던 넬슨과 마찰이 생겼음은 당연했다. 그러나 워싱턴 이적 후 부상으로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치지 못했으며 비로소 96/97시즌이 되어서야 다시 한 번 그 명성을 되찾았다.[11] 워리어스 역시 웨버, 라트렐 스프리웰, 팀 하더웨이를 중심으로 어느덧 베테랑이 된 멀린이 보조자 역할을 담당하여 상당히 화려한 선수 구성과 공격적인 농구로 현재 워리어스 못지 않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으나, 웨버가 떠난 후 팀의 구심점을 잃고 팀원간의 불화로 현재 스테판 커리 시대가 오기까지 긴 암흑기에 들어갔다. 물론 06-07시즌 배런 데이비스 중심 시즌과 몬타 엘리스가 이끈 기간도 있지만 철저히 워리어스는 지금과 달리 비주류 중의 비주류 팀이였다.[12] 통산 11점 6.5어시스트를 기록한 평범 그 자체였던 포인트가드였으며 오히려 이후 감독으로 더 성공한 케이스. 통산기록이 저 정도이면 평범이 아니라 준수한 기록이다. 그러나 90-91 시즌에는 NBA역사에 남을 대기록을 세웠는데, 한 경기에서 무려 30어시스트를 기록한 것. 역대 최고의 어시스트 기계였던 존 스탁턴조차 한 경기 최대 기록은 28개에 불과(?)하다. 참고로 이때 스카일스는 17.2점 8.4어시스트를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아이러니한 건 스카일스와 페니의 전성기 실력이나 위상은 비교도 안됐음에도 (스카일스는 올스타에도 한번 뽑혀 본적이 없지만 페니는 한 때 강력한 MVP후보였다) 페니가 말년에 워낙 많이 깎아먹어서인지 페니의 통산 스탯은 15.2점 5어시스트로 스카일스와 별로 차이도 안 난다.[13] 복귀한 시즌이라 폼이 예전같지 못했다. 특히 돌파를 하다가 공을 뺏기고 넘어지는 등의 플레이가 상당히 많았다. 물론 다음 시즌부터 처절하게 복수하지만...[14] 오히려 이런 페니의 맹활약이 사후적으로 매직 보드진이 오닐을 과소평가하는 계기가 되었고 시즌 종료 후 오닐에게 재계약 금액을 낮게 제시하였다. 데뷔 동기인 알론조 모닝이 총액 1억 달러로 계약했고 무엇보다 주완 하워드역시 비슷한 액수로 워싱턴과 재계약했다. 당시 오닐은 4년 5천만 달러 수준금액으로 재계약 제시를 받았으니 자존심에 상처가 생긴 것은 당연지사. 오닐은 지체없이 레이커스로 떠났다. 참고로 이 당시 팀 샐러리캡 규모는 2천 5백만 달러 ~ 3천 만 달러 수준. 즉 음반, 영화 때문에 레이커스로 갔다는 의견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아무리 오닐이 엔터테이너 기질이 다분했어도 가장 중요하게 여긴것은 농구이다. 이미 많은 인터뷰에서도 나왔듯이 본인이 최고 선수 중 한 명 이라는 자부심 볼 수 있는데 부가적인 활동 때문에 LA로 이적한 것은 결코 아니다.[15] 참고로 불스는 이시즌 NBA 역대 최다승 2위 기록인 72승 시즌[16] 이 시리즈 부터 그랜트는 차기 시즌 PO에서도 매번 부상으로 빠지면서 팀이 한계에 직면했다. 당시 불스나 이듬해 히트같은 강팀을 상대로 주요 선수가 빠지면 사실상 승산은 없다. 한 가지 더 추가하면 그랜트는 연간 1천 만 달러 이상 받는 선수로 당시 하킴 올라주원, 패트릭 유잉, 알론조 모닝등 엘리트 선수와 같은 수준이였고 리그 탑 10에 드는 연봉이였다.[17] 당시 드림팀에서 가장 좋은 활약을 보여준 선수들은 페니, 밀러, 피펜, 데이비드 로빈슨 이였다. 당시 레니 윌킨스 감독은 베테랑 중심의 보수적인 로스터를 운영했고 막내 선수들이였던 힐, 페니, 오닐은 특히 더 적은 플레잉타임을 할당 받았다.[18] 당시 히트는 팀 하더웨이, 알론조 모닝, 댄 말리, 자말 매쉬번 등 화려한 선수층과 평균 94.8득점, 89.3실점으로 마진 +5.56으로 동부 2위, 전체마진 4위등 매우 강력한 전력을 자랑했다. 이 당시 NBA는 골밑 중심의 느린 페이스 시대였기에 평균 100득점 넘는 팀은 8개팀에 불과했다.[19] 그랜트 힐도 MVP급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다. 물론 개인성적과 기량은 96-97과 비슷했고 리그 넘버 1 SF 자리를 유지했지만 플레이오프 자체를 나가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어린 선수들이 확치고 오는데 힐은 리그 '''슈퍼스타''' 다운 임팩트를 주기에는 어딘가 부족했다.[20] 이 시즌을 기점으로 베테랑 선수들의 기량하락과 은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시즌 종료 이후 직장페쇄까지 겹쳐서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선수들이 넘쳤다. 이 시즌 종료 후 조던, 드렉슬러가 은퇴했고 하킴, 유잉, 바클리, 로드맨, 케빈 존슨, 미치 리치몬드등 80년대 중후반드래프트 선수들의 노쇠화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으며 데이비드 로빈슨은 98/99시즌 부터 에이스 자리를 팀 던컨에게 양보했다. 숀 켐프와 빈 베이커는 체중관리 실패로 빠르게 정상에서 내려왔다.[21] 직장폐쇄, 즉 주완 하워드, 글렌 로빈슨, 케빈 가넷 등 당시 젊은 선수들의 폭발적인 연봉 상승으로 각 팀 들의 급여체계 근본적으로 흔들려서 선수들이 파업을 한 것이 아닌 팀들이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시즌을 연기한 시즌으로 선수들 프리시즌이 엉망이 되었고 당시 팀당 득점 대다수가 80점대 수준에 머무르는 고구마 경기가 진행되었다. 단축기간 동안 선수들이 모여 훈련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니 선수 개인이나 팀 전력 모두 이전 시즌에 비해 눈에 띄게 효율성이 떨어졌고 저득점 경기가 연일 발생했다.[22] 단축시즌 및 마이클 조던의 은퇴와 불스왕조 해체로 큰 위기가 왔으나 빈스 카터제이슨 윌리엄스라는 정말 '''역대급으로 화려한 플레이'''를 펼친 신인들이 출몰하여 nba를 위기에서 구했다고 해도 거짓말이 아니였다.[23] 조던은 그 자체가 브랜드가 된 선수이니 예외로 하고 코비, 르브론 등 역대급 선수들만이 시그니처 모델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짧은 전성기를 보낸 페니의 케이스 유례를 찾기힘든 나이키 영업정책으로 볼 수 있다.[24] 이런점은 미래에 데릭 로즈역시 후세에 따라달닐 가능성이 매우높다. 국내 일부팬들은 비교적 최근인 로즈 MVP도 그 해 MVP는 르브론이 받았어야 하는게 아니냐는 소리가 나돌았다. 사실 이건 말도 안되는 억지인게 해당 시즌 MVP 투표 2위는 르브론이 아닌 드와이트 하워드의 차지였고, 르브론은 전년도보다 하락한 개인기록과 기대치 이하의 팀 성적 덕택에 MVP 투표 3위에 그쳤다.[25] 이 시즌 불스가 당한 10패 중 첫 패가 바로 페니가 이끌던 매직에게 당한 것이었다.[26] 여담이지만 조던은 라일리의 팀을 상대로 플레이오프에서 단 한번도 시리즈를 내준 적이 없다. 레이커스를 지휘하던 시절은 플옵에서 만난 적이 없고 92년에 라일리가 닉스로 옮겼을때 처음 만났는데 7차전 만에 승리, 이듬해는 닉스가 불스보다 성적이 더 좋았음에도 6차전 만에 꺾었으며, 라일리가 96시즌부터 팀을 옮기고 2년 연속 만났는데도 각각 세 경기, 다섯 경기만에 승리했다.[27] 사실 마이클 조던도 워낙 실력이 넘사벽이어서 스탯이 꽤 높은 편이었지, 그의 진짜 실력 및 당시 리그 내 위상에 비해서 스탯이 상당히 낮게 나왔다. 당시 조던은 독보적인 리그 최고의 선수이자 최강의 득점원이었으나, 리그 전체적인 페이스가 워낙에 느려서 평균득점은 97시즌에 29점, 98시즌엔 28점 언저리에 불과했다. 이런 흐름은 99년에 평균 '''26.8점'''인 아이버슨이 득점왕에 오르며 정점을 찍는다.[28] 18-19시즌 기준으로 본다면 조엘 엠비드벤 시몬스 콤비가 원투 펀치로 동부를 제패하고 결승에 올랐다고 보면 된다.[29] 윤대협은 테크닉과 플레이스타일이 워낙 독보적이라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지 만화 기준 센터도 가능한 190cm의 장신에 몸싸움능력을 갖춘 포워드의 몸뚱이였다.[30] 하지만 이 배우의 데뷔는 99년에 방영된 미드다...[31] http://nbamania.com/g2/bbs/board.php?bo_table=maniazine&wr_id=123489&sca=&sfl=wr_subject&stx=%ED%95%98%EB%8D%94%EC%9B%A8%EC%9D%B4&sop=and&scrap_mode=[32] https://nbamania.com/g2/bbs/board.php?bo_table=maniazine&wr_id=172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