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필
1. 개요
한국의 前 농구선수. 빅맨 치곤 극히 단신인(193cm)이었지만 뛰어난 탄력을 바탕으로 KBL의 토종 빅맨으로서 존재감을 보여주었으나, 2000년대 중반 자유계약제 도입으로 KBL 외국인 수준이 높아지면서 출전기회가 급격히 줄어들었던, '''토종 빅맨 잔혹사의 대표 사례''' 같은 선수다.
2. 선수생활
2.1. 고교-대학 시절
190cm만 넘으면 무조건 센터를 보던 1990년대 초반 한국농구계에서 매학년마다 190cm이 넘는 장신들이 즐비했던 휘문고[1] 는 당시 농구계에서 이단아같은 팀이었다. 대회 출전 때마다 우승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의 호화멤버 속에서 윤영필은 2학년 때까지 주로 벤치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길었고, 3학년이 되면서야 주전으로 출장하면서 중학교 동창 현주엽을 도와 휘문고가 1993년 전국대회 4관왕(춘계, 쌍용기, 전국체전, 학산배)에 오르는데 공헌한다.[2] 특히 팀의 에이스 현주엽이 1993 아시아 U-22 선수권대회 출전[3] 하느라 빠진 7월 종별선수권대회에서 맹활약하며 팀을 결승까지 이끌었지만 신기성의 송도고에 우승을 내주기도 했다.
초고교급 선수였던 현주엽의 그늘에 가리긴 했지만, 탈아시아급 탄력을 어필해왔던 윤영필은 구본근(197cm,대전고-연세대), 이은호(197cm,상산전자고-중앙대), 박도경(202cm,부산중앙고-중앙대), 변청운(193cm,대경상고-건국대) 등 당시 쏟아져 나오던 센터들을 모두 제치고 94학번 중 No.2 센터로 주목받았고, 최부영 감독의 심혈을 기울인 스카웃 끝에 대학 중위권 팀이던 경희대로 진학하게 된다. 경희대 입학 후 윤영필은 1학년때부터 주전센터를 차지하며 선배 장창곤(194cm,C/F), 후배 김성철(195cm,F) 등과 파트너를 이루었고, 4년간 경희대의 포스트를 굳건이 지켰다. 이창수(196cm,C)의 졸업 후 변변한 센터가 없던 경희대는, 윤영필의 입학 후 서장훈의 연세대, 전희철-현주엽의 고려대를 제외한 다른 대학들과의 골밑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며 다시금 대학 4강권에 진입할 수 있었다.
윤영필이 3학년 때인 1996년, 경희대는 강혁-김성철-윤영필 트리오의 무서운 활약을 바탕으로 1996 대학농구연맹전 1,2차대회에서 모두 준우승하는 등 연고대와 함께 대학농구 3강의 반열에 올랐고, 실업-대학팀이 모두 참가한 마지막 농구대잔치였던 1996-97 농구대잔치에선 대학부리그 3위에 이어 6강 플레이오프에선 실업부 2위 현대전자를 격파하는 대이변을 일으키며 4강에 진출, 농구대잔치 참가 이래 최고의 성적을 거둔다. 4강에서 만난 최강 연세대[4] 와의 경기에서도 경희대 특유의 활동량을 바탕으로 초반부터 밀리지 않는 경기를 펼쳤으나, 1차전 전반 중반 팀의 기둥 윤영필이 상대팀 에이스 킬러 김택훈의 팔꿈치에 맞아 병원에 실려가는 바람에 게임을 내주고 만다.[5] 부상이 심했던 윤영필은 4강 2차전에 결장했고 팀 에이스 강혁마저 김택훈의 팔꿈치에 쓰러지면서, 경희대는 2패로 허무하게 4강에서 탈락하고 만다.
졸업반이 된 윤영필은 팀 전력을 고스란히 보존한 자줏빛 군단을 이끌고 대학 팀들만 참가하는 것으로 바뀐 1997-98 농구대잔치에 재도전, 6강 결선리그에서 최강 연세대를 꺾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결승에서 재격돌한 휘문고 선배 서장훈은 겨우 192cm의 윤영필에겐 너무도 큰 벽이었고, 결국 결승전적 2패로 아쉽게 준우승에 그치며 자줏빛 군단으로서의 4년을 마감한다.
최부영 감독이 휘문고 시절부터 많은 공을 들여 스카웃한 만큼 애정을 많이 쏟았던 선수로, 1996-97 농구대잔치 4강에서 앞니가 부러져 실려갔을때 최희암 감독에게까지 가서 크게 화를 내며 항의했었고, 1997-98 농구대잔치 결승에서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을때 최감독이 울먹이면서 "우리 영필이 우승 한 번 하고 졸업했어야 하는데~"[6] 라고 인터뷰한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2.2. 프로 시절
"현주엽 드래프트"로 불렸던 1998년 KBL 첫 드래프트에서 윤영필은 김택훈, 이은호, 신기성 등과 유력한 2순위 후보였다. 결국 청주 SK에 이어 전체 2순위를 뽑은 안양 SBS 스타즈의 선택을 받은 윤영필은, 데뷔 첫 시즌엔 팀 선배이자 국가대표 파워 포워드 정재근의 존재로 인해 주로 식스맨으로 출전해야만 했고 서장훈-현주엽(청주 SK), 신기성(원주 나래), 이은호(인천 대우) 등 다른팀 루키들에 비해 큰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
두번째 시즌인 99-00 시즌 초반에도 팀이 클리프 리드(190cm,PF)-데이먼드 포니(203cm,C)의 외인 빅맨 듀오를 선발하는 바람에 좀처럼 출장기회를 얻지 못했으나, 시즌 중반 이들 외인 듀오가 당시 김인건 감독과의 불화로 태업을 하다 동시에 퇴출되었고, 교체 외인으로 가드-센터 조합인 퀸시 브루어(192cm,SG)-데릴 프루(200cm,C) 콤비가 합류하면서, 토종 빅맨인 윤영필의 출장시간이 늘어나게 된다. 더군다나 팀의 舊 에이스였던 정재근이 시즌내내 부상에 골골대면서 부진했던 탓에, 당시 김인건 감독은 시즌 후반부터 신인 김성철과 2년차 윤영필을 주전 3-4번으로 출전시켰고, 시즌내내 하위권을 맴돌며 부진했던 안양 SBS는 이들 경희대 콤비와 외인 에이스 브루어의 활약 덕분에 막판 연승을 달리며 극적으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리그 5위)한다. 윤영필은 정규리그 평균 '''8.6득점-4.1리바-0.9어시-1.6스틸'''을 기록[7] , 유력한 기량발전상 후보로 꼽히기도 했지만 결국 출장시간이 좀더 길었던 창원 LG 박훈근이 수상했다. 대신 윤영필은 99-00 시즌 '''야투성공률 1위(62.9%)''' 타이틀을 가져간다.
플레이오프 6강전에서 만난 리그 4위 원주 삼보 엑써스와의 경기에서, 윤영필은 4경기 평균 14.75득점을 기록하며 상대적으로 약했던 원주 삼보의 골밑을 적극 공략했고, 원정 1,2차전을 모두 잡는 등 3승 1패로 업셋을 일으키며 안양 SBS를 4강까지 진출시킨다.
프로 두시즌을 치르고 상무에 입대한 윤영필은 대학 시절 악연이 있던 김택훈과 함께 상무의 골밑을 지키며 팀을 2000 농구대잔치 결승까지 이끌지만, 결승에서 중앙대의 송영진-김주성 트윈타워에 털리며 준우승에 그친다.
매직히포 현주엽까지 입대하면서 전력이 강화된 상무는 2001-02 농구대잔치 결승에서 또 다시 중앙대와 맡붙게 되는데,[8] 이 경기에서 상무는 김주성 하나를 막기 위해 현주엽, 정훈종, 김택훈, 윤영필 등 빅맨 4명을 총동원했고, 이 중 김택훈, 윤영필이 5반칙 퇴장을 당할 정도로 김주성 하나를 집중수비한 끝에 중앙대를 87:84 3점차로 간신히 꺾고 상무의 농구대잔치 첫 우승을 달성한다.
하지만 제대 후 복귀한 02-03 시즌 당시 KBL은 대부분의 팀들이 외국인 선수 두 명을 모두 빅맨으로 선발하고 있었고,[9] 이는 윤영필의 소속팀 안양 SBS도 마찬가지였다. 페넬 페리(193cm,PF), 앤서니 글로버(195cm,PF) 등 외인들에 밀려난 윤영필은, 외국인 선수를 한 명만 기용할 수 있는 2쿼터에만 주로 출전하는 "2쿼터의 사나이"로 출전하여 같은 신세가 된 토종 빅맨 이창수(울산 모비스), 박훈근(대구 동양), 송영진(창원 LG) 등과 매치업하게 되었고, 이 바람에 평균 출장시간은 10분 남짓으로 줄어든다. 자유계약 선발 외국인들이 몰려기 시작한 첫 시즌인 04-05 시즌, 안양 SBS는 단테 존스 열풍 속에서 윤영필이 나름 2쿼터를 잘 지켜주면서 플레이오프 4강까지 올랐고, 윤영필은 그간의 활약을 보상받으며 시즌 종료 후 40% 상승한 1억 4천만원의 연봉에 안양 SBS와 FA 재계약을 맺는다. 하지만 다음 시즌부터 다른 팀 외국인 선수들의 기량이 안드로메다급으로 높아지면서 윤영필 같은 단신 빅맨으론 수비 자체가 되지 않았고, 그나마 외곽슈팅 능력이 나은 이현호가 2쿼터용 빅맨으로 중용되기 시작한다. 07-08 시즌 다시 외국인 선수 선발제도가 트라이아웃으로 바뀌면서 외인들의 수준이 다소 낮아지긴 했지만, 32세의 노장이 된 윤영필은 팀의 젊은 빅맨들인 이현호, 김일두 등에 완전히 밀려났고 평균 출장시간은 5분 미만으로 떨어진다.
시즌 종료 후 두 번째 FA가 된 윤영필은 안양 KT&G와의 협상이 결렬되며 FA 시장에 나왔고, 전시즌 대비 40%가 감소한 8400만원으로 깎인 연봉에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와 FA 계약을 맺는다. 하지만 전 시즌에 국보급 센터 서장훈을 영입한 인천 전자랜드에 윤영필의 자리는 없었고, 출장 기회를 잡지 못해 D리그를 뛰는 등 초라한 말년을 보내다 2009년 은퇴했다.
전희철, 현주엽, 송영진 등 국가대표 출신 파워 포워드들은 물론, 박훈근, 이현호 등 많은 토종 빅맨들이 프로에 오면서 3번으로 포지션을 변경한 데 반해, 193cm의 단신이었음에도 정통 빅맨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던 윤영필은 아이러니하게도 '''"KBL 외국인선수 제도의 희생양"'''의 예시로 항상 나오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윤영필, 이은호 등의 희생 덕분에 2017년 현재 '외국인 선수 2명 동시 기용은 두 쿼터 이내', '장단신 외국인 선발' 같은 보완된 제도가 나올 수 있었다. 만약 10년 전처럼 NBA, 유로리그 출신 외국인 빅맨들이 마구잡이로 영입되는 상황이 다시 벌어진다면, 현재 김준일, 장재석, 김현민 같은 선수들도 윤영필과 마찬가지 운명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3. 은퇴 후
현재 상촌중학교에서 체육교사[10] 로 근무하고 있다. 중학생 아들이 외할아버지 이회택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따라 축구 선수의 꿈을 키우고 있다.
4. 여담
휘문고 2학년때 1992-93 농구대잔치 올스타전 덩크슛 컨테스트에 휘문고 동기 현주엽, 황인성(185cm)과 함께 번외로 출전한 적 있다. 당시 고교생 답게 완전 빡빡머리다.
윤영필은 별명으로 영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점프볼 영상
5. 관련 문서
[1] 1989년 입학: 박준영(195cm,F), 석주일(190cm,F) / 1990년 입학: 서장훈(207cm,C), 윤제한(192cm,F) / 1991년 입학: 현주엽(195cm), 윤영필(193cm)[2] 휘문고는 1993년 참가한 총 6개 대회 중 4개 대회에서 우승, 2개 대회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야말로 상대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3] 22세 이하 대회이면 1993년 기준 대학 4학년까지 출전하는 대회인데도, 당시 고3이었던 현주엽이 뽑혔을 정도로 기량이 특출났다.[4]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서장훈이 완벽히 물이 올랐고, 황성인-조동현-조상현-김택훈으로 이루어진 베스트 5의 공격력이 엄청났다. 뭐 골밑에 서장훈이 리바운드를 다 잡아주니 3점 슈터들은 맘놓고 쏘기만 하면 되는지라...[5] 이때 윤영필은 앞니 3개를 잃고 의치를 넣어야했다;;;[6] 윤영필의 경희대 시절 4년간 대학농구연맹전 준우승 2차례와, MBC배 준우승 1번, 농구대잔치 준우승 1번까지는 했지만, 우승은 한번도 못했다. 윤영필이 졸업한 1997년에야 경희대는 MBC배에서 사상 첫 우승을 따냈고, 이는 이창수 재학시절이던 1991년 전국체전 금메달 이후 6년만의 전국대회 우승이었다.[7] 안타깝게도 이게 커리어 하이 시즌이었다. 이후 완전히 식스맨으로 돌아섰기 때문에.....[8] 송영진이 졸업하고 4학년이 된 김주성 혼자 골밑을 지키고 있었다.[9] 국보급 센터 서장훈을 FA로 영입한 서울 삼성과, 루키 김주성을 뽑은 원주 TG만 예외로, 각각 스윙맨인 아비 스토리(192cm,SF), 데이비드 잭슨(192cm,SG)을 뽑았다.[10] 정식 교사는 아니고 기간제 교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