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

 


1. 개요
2. 사건
2.1. 배경
2.2. 발생
2.3. 이후
3. 여담


1. 개요


1991년,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 일원동 일대 택지개발지구의 토지를 특정 개발조합에 불법적으로 분양한 사건이다.
흔히 수서비리나 수서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로는 '''6공 최대의 비리'''로 불렸을 만큼 매우 큰 사건이었다.[1] 지금도 노태우 정부 최대의 권력형 비리로 기억되는 사건.

2. 사건



2.1. 배경


노태우 정부는 경제성장에 따른 부동산 가격 폭등을 잠재우고 서민과 중산층 대상 주택보급 확대를 위해 1기 신도시 건설 등 '주택 200만호 건설'을 추진했고, 그 일환으로 1989년 3월 21일 서울특별시강남구 수서동, 일원동 일대를 '수서택지개발지구'로 지정하였다.
당시 수서지구는 법적으로 국가나 민간업자가 개발해 공급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강남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경제성이 매우 좋고 확실했기에 여러 단체가 조합을 결성해 특별공급을 청원하는 민원을 끝없이 제기해왔다. 하지만 건설부(현 국토교통부)와 서울특별시는 지속적으로 특별공급 불가 입장을 밝힌 상태였다.
게다가 당초 수서지구는 '''무주택자에게 분양할 용도'''로 지정되었던 상황이었다. 주공아파트 같은 것을 건설할 예정이었다는 소리.

2.2. 발생


그런데, 1990년 11월 건설부가 갑자기 입장을 "유권 해석으로 공급이 가능할 수도 있다"라며 바꾸었다. 그리고 1991년 1월 21일 서울시마저 택지공급을 하겠다고 입장을 바꾸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문제는 택지공급을 받은 조합에 농협, 경제기획원, 서울지방국세청, 언론, 군부대 등 다수 유력한 기관 및 기업체 26여곳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2월 2일에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수서지구의 택지를 분양하는 과정에 청와대 및 정치권이 개입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을 시작으로, 2월 3일, 청와대와 당시 야당이었던 평화민주당이 수서지구 분양 관련 건으로 서울시에 협조공문을 보냈다는 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특혜는 사실로 드러났다. 2월 5일 노태우 대통령은 특별감사를 지시해 이를 덮으려 했지만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야당까지 연루되었다는 점에서 그 스케일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검찰은 2월 7일 수사에 들어가 곧바로 한보그룹 산하 한보건설이 연루되어 있음을 밝혀낸다. 2월 9일부터 17일까지 검찰은 서울특별시장, 건설부장관, 경제수석을 비롯한 공무원 여럿과 국회의원 여럿, 한보그룹 관계자들을 소환시켰으며 이중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을 비롯한 9명이 구속되었다.
당시 밝혀진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는데, 당초 건설부와 서울시는 특별분양 불가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음에도 불구, 한보그룹의 다방면 로비로 인한 상부의 압박으로 인해 결국은 입장을 바꾸고 특혜분양을 하는 방향으로 업무를 추진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보그룹은 청와대, 대한민국 국회 건설위원회, 건설부 등 관계부처에 다방면으로 뇌물을 건넸다.
대한민국 검찰청은 한보의 다방면 뇌물 살포로 인해 사건이 벌어졌음을 발표했지만 서울시에 외압을 넣은 주체는 밝히지 못했다. 더 정확히는 외압을 넣은 기관이 청와대라는 심증[2]이 있었지만, 그 청와대가 수서사건에 개입했는지를 밝혀내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청와대와 집권 민자당은 물론 야당 관계자들도 여럿이 엮여 있었기 때문에, 평민당도 대단히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이러다 보니 짜맞추기식 수사라는 비판이 많았고, 재야와 학생운동 세력들이 강력한 규탄 시위를 이어가는 등 민심이 매우 험악해졌다. 당시 원외 정당인 민중당과 재야세력들은 특검 체제를 도입해 더 강력한 수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3]
검찰은 구속한 9명 중 장병조 전 청와대비서관, 이원배 신민주연합당/이태섭 민자당 의원을 구속해 징역 5~6년을 구형하였으며 나머지는 집행유예로 석방처리, 7명에게 추징금을 부과했다.
이 사건으로 한보그룹은 공중분해 위기를 맞았지만 노태우 정권의 비호로 인해 잘 넘기고 다시 고속성장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관선 서울특별시장이었던 고건[4]은 원칙을 고수하면서 불법분양 외압에 맞서다가 괘씸죄(...)로 경질되고, 박세직이 후임 시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박세직은 부임하자마자 일사천리로 특혜분양 계획안에 사인을 해줬다(...).

2.3. 이후


1995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되면서, 노태우의 비자금을 수사하다가 수서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게 되는데, 1990년 11월경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수서지구 택지 특별분양을 받기 위해 4차례에 걸쳐 150억여원의 비자금을 노태우 대통령에게 건넸으며 노태우는 이 비자금을 받는 대가로 서울시에 압력을 넣어 한보가 관여된 특정 조합에 특별분양하도록 한 게 밝혀졌다. 게다가 이후 사고처리에 있어서 검찰은 각본수사를 벌여 사전에 구속될 사람을 미리 정하고 수사를 했다는 증언까지 나오게 된다.
그러니까 당초 분양 불가였던 택지였는데 한보그룹이 이를 탐내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뇌물을 먹이고, 관계부처와 정치권(여당은 물론 심지어 야당[5])에도 꾸준히 뇌물을 살포하면서 로비를 벌인 결과 분양받는 데 성공했으며, 노태우는 한보를 봐주기 위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각본수사를 만드는 등 빨리 사건을 무마시키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후 정태수는 감사의 표시로 1993년 금융실명제 실시 직후 노태우의 비자금 606억원을 실명으로 전환해 주었다.
이로 인해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은 집행유예 연한을 넘기지 못한 상태[6]에서 또 다시 구속되었지만 고령으로 인한 신체부자유를 사유로 들어 구속집행정지 상태로 재판을 받았으며, 이후 병보석으로 구속에서 완전히 풀려났다. 1996년 8월 27일 대법원은 수서사건을 포함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조성에 대한 재판에서 정태수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7]
이 사건으로 존폐 위기를 겪었던 한보그룹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여러 사업에 진출하면서 전화위복이 되는 듯했으나, 결국은 적자만 더 심해졌다. 주력업종이던 주택건설에서 손을 떼고 한보철강의 당진제철소 건설에 올인했으나, 결국 자금난으로 파산하면서 1997년 외환 위기의 서막을 열었다. 원래 더러운 기업으로 악명높았는데, 수서비리을 제대로 해결못한것이 결과적으로 스노우볼이 되어 IMF경제위기 라는 더 큰 후폭풍을 만들어낸셈.

3. 여담


수서사건 이후 한보그룹은 아파트 사업에서 손을 뗐다가, 1996년에 정태수 회장 구속에 의한 2세 체제로 승계되면서 다시 아파트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1년도 안 되어 한보사태라는 매우 추악한 사건을 또 남기고 부도를 내고 말았다.
당시 최대의 권력형 비리이자 6공 노태우 정부 당시의 대표적인 정경유착 사건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한보그룹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1997년에는 한보사태를 터뜨려 버리면서 이미지마저 저 너머로...
한편 수서지구의 분양된 땅은 회수, 공영 개발방식으로 변경되어 서울주택도시공사가 개발하게 되었다. 현재는 SH의 수서아파트 1~10단지를 비롯[8], 1996년까지 141개동 12,494세대 규모의 아파트가 지어졌다.

[1] 이 타이틀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가져가게 된다. 사실 이 사건은 6공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이래 최대의 비리 스캔들로 꼽힌다.[2] 91년 2월 3일 청와대가 수서지구 분양 건으로 서울시에 협조공문을 보냈다는 것에서부터 예상은 되긴 했었다.[3] 이 사건이 대한민국에서 특별검사제 도입을 주장한 최초의 사례이다.[4] 이후 31대 민선 서울시장으로 재취임하였다.[5] 한보에게 포섭된 이원배 의원의 주선으로,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이 한보 측 몇몇 조합원들을 만나 지원을 약속했다고 한다. 물론 김대중이 이런 흑막을 알고 그런 건 아니지만... 흑역사가 된 셈. 출처: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5', p.142.[6] 당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구형받았다.[7] 이 비자금 건은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도 엮여 징역을 구형받을 정도로 스케일이 큰 재판이었다.[8] 이중 수서7단지와 10단지는 서민아파트 이미지가 풍긴다는 주민들의 반발로 인해 각각 수서신동아아파트와 수서까치마을로 이름이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