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 브레송

 

'''''Robert Bresson'''''
<colbgcolor=#000050><colcolor=#fff> '''국적'''
프랑스 [image]
'''출생'''
1901년 9월 25일
프랑스 제3공화국 퓌드돔주 브로몽라모트
'''사망'''
1999년 12월 18일 (향년 98세)
프랑스 파리
'''신장'''
178cm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소개
2.1. 스타일
3. 생애
4. 기타
5. 연출작 일람
6. 외부 자료


1. 개요


'''" 모차르트가 독일 음악이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러시아 문학이듯, 브레송은 프랑스 영화다. "'''[1]

장 뤽 고다르

20세기에 활동한 프랑스영화 감독.
특유의 비타협적인 작업태도와 가톨릭적 주제의식으로 '''영화계의 성인(聖人)'''으로 불리우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영화를 논할 때 누벨바그 감독들과 함께 절대 빠지지 않는 감독 중 한 사람이다.

2. 소개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활약한 프랑스의 거장 감독.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영화에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으며, 알랭 레네와 더불어 현대 영화에서의 새로운 기류를 창출하였다. 때문에 영화적 미개척지에 대해 고심하던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의 누벨바그 세대들에게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2]
자연주의에서 영향을 받아, 사실적이고 건조한 연출과 비전문 배우를 위주로 가톨릭적 죄의식의 전이와 구원을 그려낸 작풍으로 유명하며, 연극에서 영향받은 배우 위주의 영화를 거부하고, 카메라의 즉각적인 기록성으로 이미지를 얻어 편집을 통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이른바 "시네마토그래프(''Cinématographe'')" 작법으로도 유명하다.
그리스도교적 죄의식과 결정론적 전개라는 특징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브레송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몇몇 작품은 아예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었다. 또한 소설가 조르주 베르나노스[3]에게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위대한 감독 반열에 오른 거장임에도 불구하고 사생활에 대해선 (현재까지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 많은 시네필과 평론가들에게 일정 부분 불가사의로 남겨져있는 감독이기도 하다.
모든 작품이 우울한 편이라 일각에선 비관적이라는 평을 듣는데, 정작 브레송은 자기 작품을 비관적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질문자''' : 감독님의 영화는 어둡고 비관적인 방식으로 도덕[4]

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브레송''' : 명확하게 보는 것이 꼭 비관주의는 아닙니다. 그러면 그리스 비극도 비관적인 건가요?

''1984년 다큐멘터리 〈De weg naar Bresson〉 中''[5]


2.1. 스타일



''크라이테리온 ㅡ 「 브레송의 손들 」'' [스포주의]
작품 편수가 많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브레송이 영화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건 바로 그의 '''독특한 미학''' 때문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그저 무미건조하고 금욕주의적인 미학으로 보이겠지만, 브레송은 과장되지 않고 사실적인 활력을 얻으려 이같은 미학을 추구한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 [ 펼치기·접기 ]

일단 브레송은 평생 동안 과장된 스타일을 싫어했으며, 특히 배우 연기가 중심이 된 영화를 무척 싫어했다. 연기에 의존해서 영화를 만들면 그건 연극이지 영화가 아니라는 것. 브레송이 남긴 메모들을 엮어서 1975년에 출간한 책,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을 보면 그가 얼마나 연기 중심의 영화를 싫어했는지를 알 수 있다.

「 연극 무대 출신의 배우는 당연히 연극에서 규범, 윤리, 그리고 자기 예술을 향한 의무감들을 그대로 지니고 온다. 」 ''(p.66)''[17]

「 ○○의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에 관객의 환호성이 터진다. 이건 정말이지 저항할 수 없는 '연극'의 느낌이다. 」 ''(p.29)''

「 연극적 요소가 강한 영화 〈○○○〉에서, 위대한 영국 배우는 그 대사를 마치 자기가 하나하나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를 믿게 하려는 듯 생각을 더듬어 어름어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더욱 현실감 있게 만들고자 하는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전혀 엉뚱한 결과를 빚고 만다. 」 ''(p.44)''

「 배우가 "자기 본성에 앞서 진자 운동식으로 그저 움직이는 인물"에 머물 경우, 관객으로 하여금 살아 있는 존재 전체에서 풍겨나는 독특한 수수께끼 대신 단지 그 인물의 표정에 나타나는 표피적인 재능만을 찾게끔 만든다. 」 ''(p.52)''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 오일환·김경온 역, 2003년''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연극'이 싫어서라기 보다는, 그림·무용·사진 등의 다른 예술 매체가 영화에 끼치는 영향을 전반적으로 싫어한 것으로 보인다.

「 어느 한 예술로 탄생되어 그만의 특징으로 유지된 특정 장르는 다른 예술과의 교류가 힘들다. 」 ''(p.56)''

「 어떤 예술이 자신만의 고유한 형식이 아닌 다른 예술의 틀을 빌려 왔을 때처럼 더 저속하고 더 비효율적인 것은 없다. 」 ''(p.78)''

「 장르가 다른 두 예술 분야의 표현 수단들로 무엇인가를 강하게 표현하기는 불가능하다. 이것이냐 아니면 저것이냐, 그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 ''(p.57)''

「 얼마나 많은 영화들이 음악으로 대충 때워졌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영화를 음악으로 범람시킨다. 그렇게 해서 그 이미지들 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 ''(p.157)''

「 나의 관객은 책의 독자도, 공연극의 관객도, 전시회의 관람객도, 콘서트의 청중도 아니다. 나는 그들의 문학적 안목과, 연극적 취향과, 회화적 기호와, 음악적 센스의 욕구에 부응할 필요가 없다. 」 ''(p.120)''

이같은 주장들은, 브레송이 다른 예술들을 너무나도 싫어해서 말한 게 아니라(...) 한 예술이 다른 예술을 모방할 필요가 없다는 브레송의 생각이 투영된 결과에 가까웠다. 브레송에게 있어서 예술의 본질이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인데, 이미 만들어진 반영물을 또 반영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

「 나의 영화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시골에서, 집에서 생생하게 발견하는 아름다움 혹은 슬픔 등등을 가져야 할 것이다. 도시의, 시골의, 집의 '''사진'''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슬픔 등등이 아니라. 」 ''(p.85)''

「 창조한다는 것은 사람과 사실들을 변형하거나 발명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사람들과 사실들 사이에, 그리고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새로운 관계들을 엮는 것이다. 」 ''(p.29)''

「 우리의 눈과 귀가 강하게 원하는 것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이다. 」 ''(p.127)''

이러한 관점에서, 브레송은 그 어떤 예술 분야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영화 그 자체' 를 추구하였으며, 일반적인 영화를 뜻하는 "시네마(''Cinéma'')"라는 단어에 비교하여 자신의 영화들을 "'''시네마토그래프'''(''Cinématographe'')"라 부르며 구분지었다.

「 영화에는 두 종류가 있다: 연극의 방법을 사용하고(배우, 연출 등) 복제하기 위하여 카메라를 돌리는 영화들; 시네마토그래프의 방법들을 사용하고 창조하기 위해서 카메라를 구사하는 영화들이 그것이다. 」 ''(p.20)''

「 '''시네마토그래프란 움직이는 이미지들과 소리들을 가지고 하는 글쓰기이다.''' 」[18]

''(p.20)''

「 진실과 거짓의 혼합물은 거짓을 드러내고 만다(사진적 연극 혹은 '''시네마'''). 거짓도 그것이 일관적일 경우 진실로 비쳐진다(연극). 」 ''(p.35)''

「 많은 비평은 시네마와 시네마토그래프 사이에 경계선을 긋지 않았다. 그런 비평은 배우들의 불충분한 개성과 연기에 이따끔 눈을 여는가 싶다가도 이내 다시 닫는다. 이는 스크린에 투사되는 것 모두를 대충 사랑하라고 강요하는 비평일 뿐이다. 」 ''(p.92)''

이를 통해 영화가 수많은 사람들이 공들여 만드는 종합 예술이라는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나, 브레송은 "영화는 이미지와 소리의 조합이다" 라고 주장하며, 이미지와 소리를 얻어내는 '촬영' 단계와 이를 조합하는 '편집' 단계, 그리고 이 단계들을 관통하는 '감독의 직관'이 영화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여겼다.

「 한 이미지에 고정적인 절대 가치란 없다. 」

「 이미지와 소리는 사용 목적에 따라 그 의미와 힘이 결정될 것이다. 」 ''(p.38)''

「 이미지와 이미지들 사이에서, 소리와 소리들 사이에서, 이미지와 소리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교류가 영화 속 인물들과 사물들에게 시네마토그래프적인 삶을 부여해 준다. 그리고 이런 미묘한 교류 현상에 의해서 작품 구성은 통일감을 얻게 된다. 」 ''(p.65)''

이러한 의미에서, 브레송은 배우를 선택할 때에 연기력과 유명세가 아닌 "영화에 알맞은 외모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보았으며, 또한 그들의 무의식적이고 자연스러운 움직임만을 이끌어내기 위해 의도적인 표정 연기나 감정 표현을 절대로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 우리 움직임들의 90%는 기계적인 습관과 자동주의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런 움직임들을 의지와 사유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부자연스럽다. 」 ''(p.41)''

「 자동주의에 대해서, 역시 몽테뉴의 견해를 빌릴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카락들에게 곤두서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우리의 살갗에게 욕망이나 불안감으로 떨리라고도 명령하지 않는다; 손은 툭하면 우리가 지시하지 않은 곳을 향한다." 」 ''(p.152)''

「 시네마토그래프에서는 이런 식보다 저런 식으로 몸짓을 하고 대사를 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은 비논리적일 뿐이고 의미도 없다. 」 ''(p.23)''

※ 오해하면 안 될 것이, 브레송은 의도적인 '''연기'''를 싫어했던 것이지 '''감정'''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브레송의 영화에서도 웃음이나 울음이 나오지만, 배우의 연기가 아닌 영화적 기법이나 본능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
자신만의 방식을 관철시키고자, 그는 자신의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을 언제나 "연기자(''Acteur'')"가 아닌 "'''모델'''(''Modèle'')" 이라고 불렀으며, 초기작을 제외하곤[19] 단 한 번도 유명 배우를 캐스팅하지 않았다. 유명 배우는 본인만의 연기 방식이 굳어있기에 부적합하다고 여긴 것이다. 때문에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 이후 브레송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모두 무명 연극배우나 일반인이었으며, 개중엔 작가나 화가 또는 피아니스트 같은 사람도 있었다.
※ 예외적으로, 브레송 영화에 출연한 이후에 유명 배우가 된 경우가 있는데, 〈당나귀 발타자르〉로 데뷔하고 장 뤽 고다르의 뮤즈로 활동한 안 비아젬스키와 〈온순한 여인〉으로 데뷔하여 향후 유럽 영화계에 큰 족적을 남긴 도미니크 산다가 있다. (사족으로, 에바 그린의 아버지 월터 그린과 고모 마리카 그린도 각각 〈당나귀 발타자르〉와 〈소매치기〉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같은 의미에서, 브레송은 미장센을 거부하였다. 화면 내 어떤 물건들을 보여줄지 감독이 의도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꾸밈'에 불과한 일이기 때문이었다.[20]

「 배우는 없다. 배역은 없다. 미장센은 없다. 삶 속에서 포착된 모델의 사용만이 있을 뿐이다.

'''보이기'''(배우) 대신에 '''존재하기'''(모델). 」 ''(p.18)''

「 꾸밈이 없는 현실은 모두에게 진실로 통한다. 」 ''(p.125)''

물건들을 의도적으로 배치하는 대신, 브레송은 눈 앞에 사물을 어떻게 '찍을지' 고민하였으며, 다른 감독들이 이야기 전달을 위해 의도적으로 촬영장에서 여러 조작을 가하는 것과 다르게, 브레송에겐 배우와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핵심적인 문제였다. 이에 따라 브레송은 평생 동안 콘티 없이 촬영에 임했으며, 그날의 조건과 풍경에 따라 직관적으로 카메라녹음기를 통해 이미지와 소리를 담아내길 원했다.

「 하늘에서 내려온 기적적인 기계들(카메라와 녹음기). 부자연스런 작품들을 자꾸 되풀이하여 만들기 위해서만 그 기계들을 사용한다면 그런 일은 50년도 지나기 전에 미친 짓으로, 부조리한 짓으로 판명될 것이다. 」 ''(p.142)''

「 "참으로 놀라워라, 안 그런가, 인간이 인간이라니!"

아마도 카메라와 녹음기는 보들레르가 한 이 말을 모델 앞에서 서로 나누었을 것이다. 」 ''(p.135)''

「 낚시꾼이 자기 낚싯대 끝에 뭐가 걸릴지 모르듯이 너 역시 네가 잡게 될 것에 대해 무지하라. 」 ''(p.135)''

「 ...카메라와 녹음기여,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들기만 하는 지성으로부터 나를 멀리 데려가 다오. 」 ''(p.160)''

이렇듯 브레송에게는 배우의 연기나 계산된 연출이 아닌, 오직 자연스런 촬영과 꾸밈없는 편집만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는데, 이러한 신념 속에서도 여전히 불필요하거나 과장된 표현을 경멸하며, 배우들의 절제된 동작 안에서 우러나오는 풍족함을 추구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생전에 '미니멀리즘'이란 말을 그다지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영화계의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감독으로서 취급을 받게 되었다. 의도치 않은 편견이 씌워진 셈.

「 한 대의 바이올린으로 충분할 때 두 대의 바이올린을 사용하지 마라. 」 ''(p.31)''

「 "악마가 그의 입에 튀어올랐다" : 이런 이미지를 묘사해야 할 때, 악마가 입속에서 튀어오르게 하지는 말 것. 」

「 "모든 남편들은 흉악하다" : 이런 이미지를 묘사해야 할 때, 수천 명의 흉악한 남편들을 보여 주지는 말 것. 」 ''(p.61)''

바흐는 오르간 연주 후에 찬미하는 한 학생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중요한 건 적절한 순간에 정확한 음조들을 두드리는 거란다." 」 ''(p.146)''


바흐는 오르간 연주 후에 찬미하는 한 학생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중요한 건 적절한 순간에 정확한 음조들을 두드리는 거란다." 」 ''(p.146)''}}}

하도 특이한 미학을 내세운지라, 사람들에게 '예술영화의 거장' 같은 다소 거리감 있는 칭호도 자주 받는데, 정작 브레송 자신은 예술영화를 굉장히 싫어했다.

「 '예술 시네마'와 '예술 영화 작품'이라는 명칭의 공허한 관념. 예술 영화 작품들이란 예술적인 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가장 헐벗고 빈약한 작품들이다. 」 ''(p.138)''

「 영화 속의 느림과 침묵들이 영화관의 느림과 침묵(관객들의 지루함과 무감동)을 야기하는 작품들은 비난받으리라. 」 ''(p.128)''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 오일환·김경온 역, 2003년''


3. 생애


1901년 9월 25일 프랑스 중부 오베르뉴 [6] 퓌드돔주 브로몽라모트(''Bromont-Lamothe'')에서 태어났다.[7] 유년시절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화가가 되기 위해 미술 교육을 받았다는 정도만 간략하게 알려져있다. 다만 고등학교[8]를 파리 근처에서 다녔던걸 보면 상당히 일찍 파리로 상경한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 파리에서 화가로 활동하는 중에 우연한 계기로 영화계에 입문하여 조감독부터 차근차근 일을 배웠다. 시간이 흘러 1934년, 단편영화 〈공적인 일〉로 감독 데뷔를 하게 되는데, 이후 발발한 제2차 세계 대전독일군에 의한 투옥 등으로 인해 한참이 지난 194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첫 장편영화 〈죄악의 천사들〉을 만들게 되었다.
종전 후 브레송은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를 통해 평단과 영화인들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사형수 탈출하다〉, 〈소매치기〉 등의 작품을 연이어 발표하며 큰 호평을 받았다.
1983년, '자신의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이라 공언한 〈돈〉을 발표한 후 사실상 은퇴를 선언하고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
1999년 12월 18일, 향년 98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 개인사 #===
세계 영화사에서도 손꼽히는 미학을 창출했는데도, 사생활에 관해선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아직 그의 삶을 요약·정리한 전기가 없는 것이 한 몫을 했는데, 때문에 브레송 전기 출판은 시네필들의 오랜 숙원 중 하나로 간혹 언급된다고 한다. 존 포드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전기를 쓴 비평가 태그 갤러거도 "나는 여전히 로베르 브레송의 전기를 기다린다."라며 그 소망을 내비친 적이 있다.
결혼은 두 번 했는데, 첫째 결혼에 관해선 1926년에 했다는 것 외엔 전혀 알려져 있지 않고, 둘째 결혼은 〈당나귀 발타자르〉 촬영 당시 조감독으로 참여한 '마리 마들렌(''Marie-Madeleine van der Mersch'')'과 하였는데, 〈당나귀 발타자르〉 시작 장면에서 잠깐 간호원으로 엑스트라 출연한 적이 있다.

''〈당나귀 발타자르〉 간호원 役 마리 마들렌''
두번째 아내 마리 마들렌은 결혼 후 '밀렌 브레송(''Mylène Bresson'')'으로 개명하고, 이후 브레송 영화에 '''모두''' 참여하며 남편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한다.[9] 2014년에 유럽권 영화 행사에서 모습을 보인 것이 마지막 대외 활동이며, 남편 사후에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산 것으로 보인다. 허나 조강지처처럼 보이는 밀렌 브레송은 현재 브레송 연구자들에게 작은 걸림돌이 되고 있기도 하는데, 남편이 직접 쓴 시나리오와 영화 자료들을 개인 소유로 일절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결혼 외에 부문에 관해서인데, 브레송이 과연 침착하고 금욕적인 수도자 같은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지적이고 고집 센 호색한이었는지가 여태까지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주로 나오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여자를 밝히는 영악한 난봉꾼이었다'''
  • 〈당나귀 발타자르〉 촬영 당시(66세) 주연 배우였던 안 비아젬스키(18세)에게 구애를 했다는 얘기가 있다. (출처에 따라 연인 관계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촬영 직후 비아젬스키는 인터뷰 차 촬영장에 자주 놀러오던 장 뤽 고다르와 결혼해서, 사실 여부가 불분명해졌다.
  • 〈무셰트〉 촬영 당시(67세) 주연 배우였던 나딘 노르티에(18세)에게 구애를 했다는 얘기가 있다. (출처에 따라 연인 관계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서로 너무 자주 붙어다니다보니 이런 소문이 나온 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 브레송의 조감독 출신인 루이 말이나 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의 증언에 따르면 소통을 잘 안하는 타입의 감독이였다고 한다. 테이크도 상당히 많았고, 몇몇 영화에서는 두번째 부인이자 조감독인 마리 마들레인이 대신 지시를 내려줘야 할 정도였다고. #
  • 1983년 칸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보였던 언동이나 감독상 수상 당시 타르코프스키에게 가해진 푸대접에 항의해 상을 바닥에 패대기치는 시위를 벌였던걸 보면 자아가 강한 타입으로 보인다.
'''침착하고 금욕적인 수도자였다'''
  • 그의 촬영 현장을 다룬 인터뷰나 다큐멘터리에서, (식사 때를 제외하곤) 단 한 번도 사적인 얘기를 하지 않는다.
  • 둘째 부인 밀렌 브레송이 〈당나귀 발타자르〉 이후 모든 촬영장에서 함께 했다.
  • 함께 일한 제작진의 공통된 증언으로, 인간적으론 친절했지만 촬영장에선 정말 촬영에만 집중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 함께 일한 배우들 중에서 촬영장에서 부적절한 대우를 받았다고 말하는 이가 없다. 오히려 너무 직업적인 관계였다는 증언이 종종 있다.
  • 앞서 제시한 여배우들과의 염문설도, 서로 붙어다니면서 대화를 자주 나눴다는 얘기가 와전된 게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영상 01:59부터)

'''기자''' : 나딘 노르티에, 로베르 브레송 영화에 출연하는 소감이 어떤가요?

'''나딘''' : 어떠냐고요? ...대단하다는 생각은 안 들고, 그냥 재밌어요.

'''기자''' : 몇 살이죠?

'''나딘''' : 18살이요.

'''기자''' : 14살 소녀를 연기하는 게 어렵지 않나요?

'''나딘''' : 아뇨.

'''기자''' : 별로 힘들지 않나요?

'''나딘''' : 안 힘들어요.

'''기자''' : 브레송의 첫 만남은 어땠나요?

'''나딘''' : 그냥 직업적으로 만났고, 그게 전부에요.

'''기자''' : 지금은요?

'''나딘''' : 똑같아요.

1967년 〈무셰트〉 촬영장 취재영상 中

아무튼, 호색한인지 수도자 같은 사람인지 아니면 둘 다 였는지는, 그에 대한 자료가 다 공개되지 않는 한 밝혀지지 않을 듯 싶다. 현재까지 분명한 건 적어도 로베르 브레송이 지식인으로서의 자각과 그만한 재능이 있었다는 것 뿐.
페드로 코스타가 언급하길, 어릴때 남창이었다는 루머를 촬영감독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

4. 기타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생전에 가장 존경한 감독이었다고 한다. 물론 브레송도 이를 알았으며, 가끔씩 서로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 인연 때문인지, 로베르 브레송은 타르코프스키의 장례식에도 얼굴을 비췄다고 전해진다.
[image]
타르코프스키와 브레송[10][11]
  • 활동 초기에 히치콕르누아르를 존경했다고 밝혔다. 비평가들은 이중에서 히치콕과 가장 스타일이 비슷하다고 판단한다.[12] 또한 20세기 중반에 비평가들이 오슨 웰스를 공격할 때, 간접적으로 그를 옹호했다고 한다.
  • 영화를 짧게 만들었던 편이다. 2시간 넘어가는 영화가 없고,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가 115분으로 가장 길다. 1시간 10분~30분 정도가 평균.
  • 하도 독특한 미학을 추구했던지라 흥행에선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때문에 활동 내내 제작비 문제로 고생했다고 한다. 다행히 후원자들이 있어 활동에 큰 차질은 없었지만, 말년에는 그마저도 여력치 않아,[13] 마지막 작품인 〈돈〉은 MK2 설립자인 마린 카미츠와 프랑스 정부에서 지원을 받아서야 겨우 만들었다고 한다.
  • 마지막 작품인 〈돈〉을 공개하기 전까지 '1907년 출생'으로 알려졌다가 칸 영화제에서 '1901년 출생'으로 정정되었는데, 때문에 당시 나이(83세)에 걸맞지 않은 실험적인 작품성과 동시에, 지팡이 없이 잘 걸어다니는 그의 건강에 이목이 집중되기도 하였다(...)[14]
  • 철두철미한 사고방식 때문에 다른 예술에 무관심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데, 의외로 브레송은 연극과 전시회 등을 자주 즐기는 예술 애호가였으며, 종종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도 보았다고 한다. 1983년 칸 영화제에 발맞춰 진행한 TV인터뷰에서는, 007 영화를 아주 재밌게 봤다는 소감을 내놓기도 했다. 물론 '시네마토그래프적 관점'에서 재밌었다고(...)

(영상 12:05부터)

'''진행자''' : 마지막 질문입니다. 솔직하게 대답해주세요. 제임스 본드 영화를 보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사실인가요?

'''브레송''' : 예. 깜빡했는데 중요한 걸 얘기해주셨네요.

제 조카들이 영화관을 가자고 하길래, 가서 〈007 유어 아이즈 온리〉를 보았습니다. 저도 제임스 본드를 보고 싶었는데, 정말로 경이로웠습니다. 아마 그 시네마토그래프적 작법 때문일 겁니다. 그 어디에서도 못 보던 거였고, 여전히 지금도 흥분되네요. 정말 훌륭했습니다. 그날 연달아 한 번 더 보고, 다음날 또 한 번 더 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1983년 칸 영화제 특보로 진행된 TV 인터뷰 中

  • 잔 다르크 최후 재판을 다룬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영화는 그로테스크 풍자극이라고 싫어했다. 드레이어의 영화는 무성 영화로 주역 배우인 마리아 르네 팔코네티의 오버 액팅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 점이 불편했던 모양. 그래서 자기 식으로 잔 다르크 최후 재판에 대한 영화를 직접 만들었다.
  • 성 때문에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친인척 관계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다. 때마침 서로 나이도 비슷하고 또한 카메라로 유명해졌다는 점에 공통점은 있지만,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 틸다 스윈턴이 브레송의 열렬한 지지자로 유명하다. 좋아하는 영화를 꼽으라면 〈당나귀 발타자르〉가 빠지지 않을 정도. 평자들 사이에서는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라프가 틸다의 연기론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는 얘기가 나온다.[15]
===# 창세기 프로젝트 #===
1960년대에 브레송은 성경 《창세기》를 영화화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1963년에는 적극적으로 미국·유럽 등을 오가며 제작자와 투자자들을 만났지만, 결국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프로젝트는 중단되고 말았다. (주로 제작비 문제였다고 한다)
그런데 남아있는 자료를 확인해보면, 평소 브레송과 다른 성향을 보여 연구자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받는다. 원래 미국 유명 배우는 거들떠도 안 보던 브레송이 아담 역에 버트 랭카스터를, 하와 역에 나탈리 우드를 캐스팅하려 했으며, 당대 할리우드의 최고 기술력을 통해 영화를 만드려고 했다는 것. 뜬소문이 아닌 실제 자료로 남아있는 기록이라, 만약에 만들었다면 어떤 영화가 탄생했을지 호기심을 자아내는 대목이다.
브레송 본인도 《창세기》 영화화 계획이 아쉬웠는지, 이후에도 종종 인터뷰를 통해 한두 마디 덧붙이며 지속적으로 언급했다.
혹자는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가 말년에 진행한 '예수 전기 영화' 프로젝트와 함께, 유럽 영화사의 안타까운 일화 중 하나로 여기는 듯 하다. #

5. 연출작 일람


공식적인 작품수는 '''13편'''이며, 단편까지 더하면 14편이다. 공교롭게도 장 피에르 멜빌의 작품수와 같다.[16]
'''연도'''
'''제목'''
'''분류'''
1934
'''공적인 일'''
데뷔작, 단편영화
1943
'''죄악의 천사들'''
첫 장편영화
1945
'''볼로뉴 숲의 여인들'''

1951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
베니스 영화제 국제상
1956
'''사형수 탈출하다'''
칸 영화제 감독상
1959
'''소매치기'''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
1962
'''잔 다르크의 재판'''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1966
'''당나귀 발타자르'''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
1967
'''무셰트'''
칸 영화제 경쟁부문
1969
'''온순한 여인'''
산세바스티안 영화제 은조개상
1971
'''몽상가의 나흘밤'''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
1974
'''호수의 란슬로트'''
칸 영화제 비경쟁부문
1977
'''아마도 악마가'''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1983
'''돈'''
칸 영화제 감독상, 은퇴작

6. 외부 자료



[1] #발언 출처 [2] 떄문에 종종 브레송도 누벨바그 세대로 분류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브레송은 그 윗세대이면서도 이론적 영향을 미친 케이스이고, 덧붙여서 알랭 레네는 누보로망과 연계되어 있던 좌안파로 분류된다.[3] ''Georges Bernanos'' - 20세기 프랑스의 대문호. 소설 《사탄의 태양 아래》와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등으로 유명하다.[4] ''Morale'' ㅡ 프랑스어로 윤리 또는 행동방식을 뜻하기도 한다.[5] #영상[스포주의] 몇몇 브레송 영화의 결말부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6]오베르뉴론알프.[7] 클레르몽페랑 서쪽 산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워낙 이름없는 동네인지라, '로베르 브레송의 출신지' 라는 사실이 이 지역의 유일한 자랑거리라고 한다(...)[8] 프랑스 내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Lycee Lakanal'' 출신이다.[9] 허나 결혼 후에도 영화 크레딧에는 '마리 마들렌'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된다.[10] 1983년, 칸 영화제 감독상을 공동 수상하며 찍은 사진. 당시 수상자가 오슨 웰스였기에, 관련 사진을 찾다보면 '''웰스-브레송-타르코프스키''' 세 사람이 모두 찍힌 사진도 찾을 수 있다. [11] 황금종려상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 이때 경쟁작들이 쟁쟁했던 지라, 수상결과를 두고 뒷소문이 많았다.[12] 특히 히치콕의 후기작들에서 브레송과 흡사한 면이 보인다.[13] 특히 〈아마도 악마가〉는 우울하기 그지 없는 내용으로, 개봉 당시 프랑스에서 환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14]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의 맨살》에도 당시 반응이 그대로 실려있다.[15] 실제로 틸다는 〈당나귀 발타자르〉에 등장하는 당나귀를 지칭하면서 '연기하지 않고 온전히 드러내기 때문에 이상적인 연기자'라고 말한 바 있다.[16] 멜빌이 레지스탕스 활동 시절 〈바다의 침묵〉과 〈그림자 군단〉을 더불어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 역시 영화화하기로 계획했으나, 브레송이 먼저 선보이자 11년 후 〈레옹 모랭 신부〉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