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 브레송
1. 개요
20세기에 활동한 프랑스의 영화 감독.'''" 모차르트가 독일 음악이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러시아 문학이듯, 브레송은 프랑스 영화다. "'''[1]
ㅡ 장 뤽 고다르
특유의 비타협적인 작업태도와 가톨릭적 주제의식으로 '''영화계의 성인(聖人)'''으로 불리우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영화를 논할 때 누벨바그 감독들과 함께 절대 빠지지 않는 감독 중 한 사람이다.
2. 소개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활약한 프랑스의 거장 감독.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영화에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으며, 알랭 레네와 더불어 현대 영화에서의 새로운 기류를 창출하였다. 때문에 영화적 미개척지에 대해 고심하던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의 누벨바그 세대들에게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2]
자연주의에서 영향을 받아, 사실적이고 건조한 연출과 비전문 배우를 위주로 가톨릭적 죄의식의 전이와 구원을 그려낸 작풍으로 유명하며, 연극에서 영향받은 배우 위주의 영화를 거부하고, 카메라의 즉각적인 기록성으로 이미지를 얻어 편집을 통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이른바 "시네마토그래프(''Cinématographe'')" 작법으로도 유명하다.
그리스도교적 죄의식과 결정론적 전개라는 특징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브레송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몇몇 작품은 아예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었다. 또한 소설가 조르주 베르나노스[3] 에게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위대한 감독 반열에 오른 거장임에도 불구하고 사생활에 대해선 (현재까지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 많은 시네필과 평론가들에게 일정 부분 불가사의로 남겨져있는 감독이기도 하다.
모든 작품이 우울한 편이라 일각에선 비관적이라는 평을 듣는데, 정작 브레송은 자기 작품을 비관적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질문자''' : 감독님의 영화는 어둡고 비관적인 방식으로 도덕[4]
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브레송''' : 명확하게 보는 것이 꼭 비관주의는 아닙니다. 그러면 그리스 비극도 비관적인 건가요?
2.1. 스타일
작품 편수가 많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브레송이 영화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건 바로 그의 '''독특한 미학''' 때문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그저 무미건조하고 금욕주의적인 미학으로 보이겠지만, 브레송은 과장되지 않고 사실적인 활력을 얻으려 이같은 미학을 추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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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특이한 미학을 내세운지라, 사람들에게 '예술영화의 거장' 같은 다소 거리감 있는 칭호도 자주 받는데, 정작 브레송 자신은 예술영화를 굉장히 싫어했다.「 바흐는 오르간 연주 후에 찬미하는 한 학생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중요한 건 적절한 순간에 정확한 음조들을 두드리는 거란다." 」 ''(p.146)''}}}
「 '예술 시네마'와 '예술 영화 작품'이라는 명칭의 공허한 관념. 예술 영화 작품들이란 예술적인 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가장 헐벗고 빈약한 작품들이다. 」 ''(p.138)''
「 영화 속의 느림과 침묵들이 영화관의 느림과 침묵(관객들의 지루함과 무감동)을 야기하는 작품들은 비난받으리라. 」 ''(p.128)''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 오일환·김경온 역, 2003년''
3. 생애
1901년 9월 25일 프랑스 중부 오베르뉴 [6] 퓌드돔주 브로몽라모트(''Bromont-Lamothe'')에서 태어났다.[7] 유년시절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화가가 되기 위해 미술 교육을 받았다는 정도만 간략하게 알려져있다. 다만 고등학교[8] 를 파리 근처에서 다녔던걸 보면 상당히 일찍 파리로 상경한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 파리에서 화가로 활동하는 중에 우연한 계기로 영화계에 입문하여 조감독부터 차근차근 일을 배웠다. 시간이 흘러 1934년, 단편영화 〈공적인 일〉로 감독 데뷔를 하게 되는데, 이후 발발한 제2차 세계 대전과 독일군에 의한 투옥 등으로 인해 한참이 지난 194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첫 장편영화 〈죄악의 천사들〉을 만들게 되었다.
종전 후 브레송은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를 통해 평단과 영화인들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사형수 탈출하다〉, 〈소매치기〉 등의 작품을 연이어 발표하며 큰 호평을 받았다.
1983년, '자신의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이라 공언한 〈돈〉을 발표한 후 사실상 은퇴를 선언하고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
1999년 12월 18일, 향년 98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 개인사 #===
세계 영화사에서도 손꼽히는 미학을 창출했는데도, 사생활에 관해선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아직 그의 삶을 요약·정리한 전기가 없는 것이 한 몫을 했는데, 때문에 브레송 전기 출판은 시네필들의 오랜 숙원 중 하나로 간혹 언급된다고 한다. 존 포드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전기를 쓴 비평가 태그 갤러거도 "나는 여전히 로베르 브레송의 전기를 기다린다."라며 그 소망을 내비친 적이 있다.
결혼은 두 번 했는데, 첫째 결혼에 관해선 1926년에 했다는 것 외엔 전혀 알려져 있지 않고, 둘째 결혼은 〈당나귀 발타자르〉 촬영 당시 조감독으로 참여한 '마리 마들렌(''Marie-Madeleine van der Mersch'')'과 하였는데, 〈당나귀 발타자르〉 시작 장면에서 잠깐 간호원으로 엑스트라 출연한 적이 있다.
두번째 아내 마리 마들렌은 결혼 후 '밀렌 브레송(''Mylène Bresson'')'으로 개명하고, 이후 브레송 영화에 '''모두''' 참여하며 남편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한다.[9] 2014년에 유럽권 영화 행사에서 모습을 보인 것이 마지막 대외 활동이며, 남편 사후에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산 것으로 보인다. 허나 조강지처처럼 보이는 밀렌 브레송은 현재 브레송 연구자들에게 작은 걸림돌이 되고 있기도 하는데, 남편이 직접 쓴 시나리오와 영화 자료들을 개인 소유로 일절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결혼 외에 부문에 관해서인데, 브레송이 과연 침착하고 금욕적인 수도자 같은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지적이고 고집 센 호색한이었는지가 여태까지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주로 나오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여자를 밝히는 영악한 난봉꾼이었다'''
- 〈당나귀 발타자르〉 촬영 당시(66세) 주연 배우였던 안 비아젬스키(18세)에게 구애를 했다는 얘기가 있다. (출처에 따라 연인 관계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촬영 직후 비아젬스키는 인터뷰 차 촬영장에 자주 놀러오던 장 뤽 고다르와 결혼해서, 사실 여부가 불분명해졌다.
- 〈무셰트〉 촬영 당시(67세) 주연 배우였던 나딘 노르티에(18세)에게 구애를 했다는 얘기가 있다. (출처에 따라 연인 관계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서로 너무 자주 붙어다니다보니 이런 소문이 나온 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 브레송의 조감독 출신인 루이 말이나 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의 증언에 따르면 소통을 잘 안하는 타입의 감독이였다고 한다. 테이크도 상당히 많았고, 몇몇 영화에서는 두번째 부인이자 조감독인 마리 마들레인이 대신 지시를 내려줘야 할 정도였다고. #
- 1983년 칸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보였던 언동이나 감독상 수상 당시 타르코프스키에게 가해진 푸대접에 항의해 상을 바닥에 패대기치는 시위를 벌였던걸 보면 자아가 강한 타입으로 보인다.
- 그의 촬영 현장을 다룬 인터뷰나 다큐멘터리에서, (식사 때를 제외하곤) 단 한 번도 사적인 얘기를 하지 않는다.
- 둘째 부인 밀렌 브레송이 〈당나귀 발타자르〉 이후 모든 촬영장에서 함께 했다.
- 함께 일한 제작진의 공통된 증언으로, 인간적으론 친절했지만 촬영장에선 정말 촬영에만 집중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 함께 일한 배우들 중에서 촬영장에서 부적절한 대우를 받았다고 말하는 이가 없다. 오히려 너무 직업적인 관계였다는 증언이 종종 있다.
- 앞서 제시한 여배우들과의 염문설도, 서로 붙어다니면서 대화를 자주 나눴다는 얘기가 와전된 게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아무튼, 호색한인지 수도자 같은 사람인지 아니면 둘 다 였는지는, 그에 대한 자료가 다 공개되지 않는 한 밝혀지지 않을 듯 싶다. 현재까지 분명한 건 적어도 로베르 브레송이 지식인으로서의 자각과 그만한 재능이 있었다는 것 뿐.(영상 01:59부터)
'''기자''' : 나딘 노르티에, 로베르 브레송 영화에 출연하는 소감이 어떤가요?
'''나딘''' : 어떠냐고요? ...대단하다는 생각은 안 들고, 그냥 재밌어요.
'''기자''' : 몇 살이죠?
'''나딘''' : 18살이요.
'''기자''' : 14살 소녀를 연기하는 게 어렵지 않나요?
'''나딘''' : 아뇨.
'''기자''' : 별로 힘들지 않나요?
'''나딘''' : 안 힘들어요.
'''기자''' : 브레송의 첫 만남은 어땠나요?
'''나딘''' : 그냥 직업적으로 만났고, 그게 전부에요.
'''기자''' : 지금은요?
'''나딘''' : 똑같아요.
1967년 〈무셰트〉 촬영장 취재영상 中
페드로 코스타가 언급하길, 어릴때 남창이었다는 루머를 촬영감독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
4. 기타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생전에 가장 존경한 감독이었다고 한다. 물론 브레송도 이를 알았으며, 가끔씩 서로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 인연 때문인지, 로베르 브레송은 타르코프스키의 장례식에도 얼굴을 비췄다고 전해진다.
- 활동 초기에 히치콕과 르누아르를 존경했다고 밝혔다. 비평가들은 이중에서 히치콕과 가장 스타일이 비슷하다고 판단한다.[12] 또한 20세기 중반에 비평가들이 오슨 웰스를 공격할 때, 간접적으로 그를 옹호했다고 한다.
- 영화를 짧게 만들었던 편이다. 2시간 넘어가는 영화가 없고,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가 115분으로 가장 길다. 1시간 10분~30분 정도가 평균.
- 하도 독특한 미학을 추구했던지라 흥행에선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때문에 활동 내내 제작비 문제로 고생했다고 한다. 다행히 후원자들이 있어 활동에 큰 차질은 없었지만, 말년에는 그마저도 여력치 않아,[13] 마지막 작품인 〈돈〉은 MK2 설립자인 마린 카미츠와 프랑스 정부에서 지원을 받아서야 겨우 만들었다고 한다.
- 마지막 작품인 〈돈〉을 공개하기 전까지 '1907년 출생'으로 알려졌다가 칸 영화제에서 '1901년 출생'으로 정정되었는데, 때문에 당시 나이(83세)에 걸맞지 않은 실험적인 작품성과 동시에, 지팡이 없이 잘 걸어다니는 그의 건강에 이목이 집중되기도 하였다(...)[14]
- 철두철미한 사고방식 때문에 다른 예술에 무관심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데, 의외로 브레송은 연극과 전시회 등을 자주 즐기는 예술 애호가였으며, 종종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도 보았다고 한다. 1983년 칸 영화제에 발맞춰 진행한 TV인터뷰에서는, 007 영화를 아주 재밌게 봤다는 소감을 내놓기도 했다. 물론 '시네마토그래프적 관점'에서 재밌었다고(...)
(영상 12:05부터)
'''진행자''' : 마지막 질문입니다. 솔직하게 대답해주세요. 제임스 본드 영화를 보았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사실인가요?
'''브레송''' : 예. 깜빡했는데 중요한 걸 얘기해주셨네요.
제 조카들이 영화관을 가자고 하길래, 가서 〈007 유어 아이즈 온리〉를 보았습니다. 저도 제임스 본드를 보고 싶었는데, 정말로 경이로웠습니다. 아마 그 시네마토그래프적 작법 때문일 겁니다. 그 어디에서도 못 보던 거였고, 여전히 지금도 흥분되네요. 정말 훌륭했습니다. 그날 연달아 한 번 더 보고, 다음날 또 한 번 더 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1983년 칸 영화제 특보로 진행된 TV 인터뷰 中
- 잔 다르크 최후 재판을 다룬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영화는 그로테스크 풍자극이라고 싫어했다. 드레이어의 영화는 무성 영화로 주역 배우인 마리아 르네 팔코네티의 오버 액팅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 점이 불편했던 모양. 그래서 자기 식으로 잔 다르크 최후 재판에 대한 영화를 직접 만들었다.
- 성 때문에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친인척 관계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다. 때마침 서로 나이도 비슷하고 또한 카메라로 유명해졌다는 점에 공통점은 있지만,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 틸다 스윈턴이 브레송의 열렬한 지지자로 유명하다. 좋아하는 영화를 꼽으라면 〈당나귀 발타자르〉가 빠지지 않을 정도. 평자들 사이에서는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라프가 틸다의 연기론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는 얘기가 나온다.[15]
1960년대에 브레송은 성경 《창세기》를 영화화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1963년에는 적극적으로 미국·유럽 등을 오가며 제작자와 투자자들을 만났지만, 결국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프로젝트는 중단되고 말았다. (주로 제작비 문제였다고 한다)
그런데 남아있는 자료를 확인해보면, 평소 브레송과 다른 성향을 보여 연구자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받는다. 원래 미국 유명 배우는 거들떠도 안 보던 브레송이 아담 역에 버트 랭카스터를, 하와 역에 나탈리 우드를 캐스팅하려 했으며, 당대 할리우드의 최고 기술력을 통해 영화를 만드려고 했다는 것. 뜬소문이 아닌 실제 자료로 남아있는 기록이라, 만약에 만들었다면 어떤 영화가 탄생했을지 호기심을 자아내는 대목이다.
브레송 본인도 《창세기》 영화화 계획이 아쉬웠는지, 이후에도 종종 인터뷰를 통해 한두 마디 덧붙이며 지속적으로 언급했다.
혹자는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가 말년에 진행한 '예수 전기 영화' 프로젝트와 함께, 유럽 영화사의 안타까운 일화 중 하나로 여기는 듯 하다. #
5. 연출작 일람
공식적인 작품수는 '''13편'''이며, 단편까지 더하면 14편이다. 공교롭게도 장 피에르 멜빌의 작품수와 같다.[16]
6. 외부 자료
-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 : 로베르 브레송의 저서
- 「브레송, 혹은 불가능한 계보학」 : 정성일 평론가가 쓴 브레송 감독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