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마르 베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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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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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마르 베리만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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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Ingmar Ernst Bergman'''
'''잉마르 에른스트 베리만'''
(1918. 7. 14. ~ 2007. 7. 30.)
세계적인 예술 영화감독으로, 60-70년대의 대표적인 감독. 《제7의 봉인》[2] 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다.
1957년~1959년간 세계 영화제의 상을 휩쓸었다. 대표적으로 늙은 박사의 한 기묘한 꿈으로 시작된 룬드로의 로드트립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3] 삶과 죽음, 사랑과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인 《'''산딸기(1957)'''》가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타는 영광을 얻었다. 특출한 영화기술을 쓰지 않고서도 현실과 환상을 왔다갔다 하며 극을 이끌어 내는 연출의 묘미가 있다. 《제7의 봉인》을 포함한 작품들로 칸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의 상을 받고 그 뒤 전미 비평가 협회 시상식에서 감독상, 각본상을 휩쓸었다. 이 외에도 스웨덴 감독으로서 북미권 영화제인 아카데미에서 3번의 외국어영화상, 5번의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그 후 세계 영화사에 세운 공을 인정받아 칸, 베니스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처녀의 샘》은 웨스 크레이븐이 나중에 설정만 따와서 과격한 피투성이 영화로 만들었는데 1972년작으로 크레이븐의 데뷔작인 《분노의 13일》혹은 《왼편 마지막 집》(The Last House on the Left)[4] (그런데 이런 여성이 피해받는 복수극 이야기는 굉장히 흔하다. 한국에도 한품은 처녀귀신 이야기가 많지않은가).[5] 참고로 《처녀의 샘》은 이미 80년대 KBS 3TV 이름이던 시절의 EBS 일요특선 외화로 방영된 바 있다.
부모와 사이가 그닥 좋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는데 열 아홉 살에는 아버지[6] 와 주먹다짐까지 갔었다고 한다. 그 뒤 그들은 수십년간 의절한 상태로 지내다, 1966년 어머니[7] 가 사망한 후 화해하게 된다. 비록 서로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목사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기독교적인 주제를 바탕으로 시작하는 작품들도 여럿 있다.[8] 스웨덴은 예술영화에 한해 국가가 자금을 지원해주는 제도가 존재하였는데, 베르히만은 그 지원비로 1년에 한편씩 영화를 만들어낸다. '' ''
1976년 탈세 혐의로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외국으로 도피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여기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감독 본인에 따르면 1967년부터 불어난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재무 변호사를 국제 스카우트 연맹으로부터 소개받았는데, 잘못 처리되거나 아예 취소된 거래가 은근히 많았다는 것과, 자신도 회사의 재무 관리가 공정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고. 다행히 3개월 만에 중앙 국세청에서 기각을 해주었고 영화제작도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그뒤에는 자신의 부모가 어떻게 만나서 결혼했는지를 다룬 '최선의 의도(Den goda viljan)'[9] 등 TV시리즈를 감독하면서[10] 여생을 살았다. 페르소나를 찍었던 포뢰섬에[11] 정착해 말년을 보냈고 말년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사라방드 발표 직후 발표된 베리만 아일랜드라는 다큐멘터리에 담겨있다.
2017년 탄생 백주년을 맞이해 스웨덴 영화 연구소에서 전작을 대대적으로 4K 디지털 복원 후 DCP하는 작업을 거쳤으며[12] 복원 작업이 마무리된 2018년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전작 박스셋을 내놓았다.
잉마르 베리만 영화의 거울
현재 스톡홀름에도 그의 이름을 딴 Ingmar Bergmans Gata라는 이름의 길과 광장이 있다. 아주 짧은 길이지만 스톡홀름의 부촌, 명품거리로 유명한 외스테르말름에 있으며 바로 옆에 왕립연극극장(Dramaten)이 있다.
젊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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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마르 베리만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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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Ingmar Ernst Bergman'''
'''잉마르 에른스트 베리만'''
(1918. 7. 14. ~ 2007. 7. 30.)
1. 개요
'''"베리만은 현대 유럽 영화의 가장 독창적인 작가이다.” – 장 뤽 고다르'''
'''"그의 영화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며 인간 의식의 심연에 대해 이야기했다"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스웨덴의 영화 감독. 2003년 사라방드를 마지막으로 골반수술 합병증으로 2007년 사망. 한국에선 80년대 영화지에선 '잉그마르 베르히만'이란 이름으로 자주 소개되었었다.'''"막스 오퓔스 다음으로 제가 가장 존경하는 영화 감독을 뽑으라면 고민 없이 잉마르 베리만을 뽑겠습니다. 저는 그분의 영화를 전부 다 봤습니다. 《한 여름밤의 미소》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 스탠리 큐브릭'''[1]
2. 상세
세계적인 예술 영화감독으로, 60-70년대의 대표적인 감독. 《제7의 봉인》[2] 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다.
1957년~1959년간 세계 영화제의 상을 휩쓸었다. 대표적으로 늙은 박사의 한 기묘한 꿈으로 시작된 룬드로의 로드트립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3] 삶과 죽음, 사랑과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인 《'''산딸기(1957)'''》가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타는 영광을 얻었다. 특출한 영화기술을 쓰지 않고서도 현실과 환상을 왔다갔다 하며 극을 이끌어 내는 연출의 묘미가 있다. 《제7의 봉인》을 포함한 작품들로 칸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의 상을 받고 그 뒤 전미 비평가 협회 시상식에서 감독상, 각본상을 휩쓸었다. 이 외에도 스웨덴 감독으로서 북미권 영화제인 아카데미에서 3번의 외국어영화상, 5번의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그 후 세계 영화사에 세운 공을 인정받아 칸, 베니스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처녀의 샘》은 웨스 크레이븐이 나중에 설정만 따와서 과격한 피투성이 영화로 만들었는데 1972년작으로 크레이븐의 데뷔작인 《분노의 13일》혹은 《왼편 마지막 집》(The Last House on the Left)[4] (그런데 이런 여성이 피해받는 복수극 이야기는 굉장히 흔하다. 한국에도 한품은 처녀귀신 이야기가 많지않은가).[5] 참고로 《처녀의 샘》은 이미 80년대 KBS 3TV 이름이던 시절의 EBS 일요특선 외화로 방영된 바 있다.
부모와 사이가 그닥 좋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는데 열 아홉 살에는 아버지[6] 와 주먹다짐까지 갔었다고 한다. 그 뒤 그들은 수십년간 의절한 상태로 지내다, 1966년 어머니[7] 가 사망한 후 화해하게 된다. 비록 서로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목사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기독교적인 주제를 바탕으로 시작하는 작품들도 여럿 있다.[8] 스웨덴은 예술영화에 한해 국가가 자금을 지원해주는 제도가 존재하였는데, 베르히만은 그 지원비로 1년에 한편씩 영화를 만들어낸다. '' ''
1976년 탈세 혐의로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외국으로 도피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여기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감독 본인에 따르면 1967년부터 불어난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재무 변호사를 국제 스카우트 연맹으로부터 소개받았는데, 잘못 처리되거나 아예 취소된 거래가 은근히 많았다는 것과, 자신도 회사의 재무 관리가 공정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고. 다행히 3개월 만에 중앙 국세청에서 기각을 해주었고 영화제작도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그뒤에는 자신의 부모가 어떻게 만나서 결혼했는지를 다룬 '최선의 의도(Den goda viljan)'[9] 등 TV시리즈를 감독하면서[10] 여생을 살았다. 페르소나를 찍었던 포뢰섬에[11] 정착해 말년을 보냈고 말년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사라방드 발표 직후 발표된 베리만 아일랜드라는 다큐멘터리에 담겨있다.
2017년 탄생 백주년을 맞이해 스웨덴 영화 연구소에서 전작을 대대적으로 4K 디지털 복원 후 DCP하는 작업을 거쳤으며[12] 복원 작업이 마무리된 2018년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전작 박스셋을 내놓았다.
잉마르 베리만 영화의 거울
현재 스톡홀름에도 그의 이름을 딴 Ingmar Bergmans Gata라는 이름의 길과 광장이 있다. 아주 짧은 길이지만 스톡홀름의 부촌, 명품거리로 유명한 외스테르말름에 있으며 바로 옆에 왕립연극극장(Dramaten)이 있다.
3. 여담
- 삼남매 중 둘째였다. 첫째 형은 외교관이 되었고, 여동생인 셋째는 소설가가 되었다.[13]
- 《화니와 알렉산더》는 자전적인 영화라고 한다.
- 예술영화를 많이 감독하였고, 주로 서정적인 내용의 영화들을 만들었지만 정작 감독인 본인은 촬영장 안팎에서 흉악한 성격으로 악명 높았다.[14] 나이가 들면서 줄어들긴 했으나 배우와 스태프에게 의자를 던지는 건 기본이었다고. 뮤즈였던 리브 울만(딸이 한 명 있었다. 결혼신고는 안 했음)과 동거했을 때의 일인데 그녀가 베리만에 대해 질문하는 실수를 저질러서, 베리만이 미친듯이 쫓아왔다. 그녀는 화장실에 문을 잠그고 숨었는데 베리만은 문을 발로 차서 구멍을 냈다. 그 과정에서 슬리퍼가 울만의 머리위로 날았고, 노르웨이의 위대한 여배우가 머리에 털 슬리퍼를 얹은채 변기 옆에 웅크리는 모습을 보자 화내는 걸 잊고 웃었다고... 그리고 곧바로 화해하였다.
- 그의 흑역사 중에는 열여섯 살 때 교환학생 자격으로 독일로 간 적이 있는데 일요일 아침 예배마다 목사가 들려주는 나의 투쟁 이야기를 듣고 모두가 하일 히틀러라고 외쳤다고 한다. 물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면서 정치에는 절대 관심을 두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 찰스 브론슨과 만난적이 있다. 브론슨이 화공효과를 위해 몸에 피주머니(전기신호를 보내면 터진다) 를 두르자, 베르히만은 그걸 보고 "멋져요. 이렇게 하는 건 줄 몰랐어요!"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브론슨 왈 "그럼 당신 영화에서는 총기 장면이 안나오나요?"[15]
- 베리만의 친딸인 안나 베리만[16] 은 미녀였고 TV와 영화에서 배우로 활동했는데, 자유분방한 성격이라서 노출이 심한 에로틱한 영화들에도 여러 편 출연하였다. 심지어 1970년대 중후반엔 덴마크의 전설적인 포르노 영화 시리즈물인 Zodiac-films 시리즈[17] 중 두 편인 "I Skorpionens Tegn"와 "I Skyttens Tegn"에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포르노 영화인 만큼 당연히 그녀의 실제 성교 장면들도 그대로 나온다. 1960~70년대의 북유럽은 성에 대해 워낙 개방적이고 관대했던 시절이라서 대감독의 친딸이 그런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서 별로 비판받지도 않았다고 한다.
- 철학적인 예술영화를 만든 거장으로 유명하지만, 의외로 영화를 관람하는 취향은 다양했다고 한다. 《펄프 픽션》이나 《쥬라기 공원》 같은 영화들도 좋아했고, 집에서 손주들과 《진주만》[18] 을 관람하기도. 그리고 《섹스 앤 더 시티》를 빼먹지 않고 보는 열혈 시청자였다! 《블루스 브라더스》도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과거의 예술주의적, 작가주의적인 대부분의 감독들이 이런 미국의 상업 영화들을 혹평하고 폄하하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다양한 취향을 갖고 있던 감독인 것이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상징적이고 환상적인 기풍을 자유자재로 연출한다면서 굉장히 부러워한 감독이기도 하다. 타르콥스키는 《희생》을 통해 베리만에게 경의를 표한 바 있다.
4. 작품(TV시리즈 포함)
- 위기/사랑에 내리는 비 (1946)
- 항구의 거리/음악은 나의 미래 (1948)
- 감옥 (1949)
- 긴장 (1950)
- 여름 이야기 (1951)
- 여자들의 꿈 (1952)
- 모니카의 여름/톱밥과 금속 조각 (1953)
- 사랑 수업 (1954)
- 한여름 밤의 미소 (1955)
- 제7의 봉인/산딸기[B] (1957)
- 마술사/생명에 가까이[20] (1958)
- 처녀의 샘[A] [*B ]/악마의 눈 (1960)
-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1961)[*A ]
- 겨울 빛(1963)[21] /침묵(1963)[22]
- 이 모든 여인들 (1964)
- 페르소나 (1966)
- 늑대의 시간/수치 (1968)
- 정열/의식 (1969)
- 접촉 (1971)
- 외침과 속삭임 (1972)
- 결혼의 풍경 (1973)[B]
- 고독한 여심/마술 피리 (1975)
- 저주받는 여자들의 꿈 (1976)
- 뱀의 알 (1977)[23]
- 가을 소나타 (1978)[B]
- 마리오네트의 샘 (1980)
- 화니와 알렉산더 (1982)[*A ][B][24]
- 리허설이 지난 후/카린의 얼굴(1984)[25]
- 축복받은 자들(1986)
- 어릿광대 앞에서(1997)[26]
- 사라방드 (2003)
[1] #[2] 2012년 무려 55년만에 한국에서 개봉했다.[3] 본래 학위식 때문에 룬드로 비행기를 타고 가려했지만 죽음을 연상시키는 듯한 꿈을 꾸고 시간이 오래걸려도 자동차로 가기로 맘 먹은 것. 이 여행에 자신의 며느리가 동행하는데 며느리는 남편 에발드에게 임신한 사실을 얘기하며 아이를 갖고자 했으나 아들 에발드는 아내에게 자신이 원치 않는 아이로 태어나서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은 적도 없고 아이를 사랑할 마음이 없으니 아이를 지우길 바랬다고 얘기한다. 본인이 차가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음을 생각하기 시작하는데 다름아니라 영화 중간에 보면 가는 길에 들른 박사의 늙은 어머니또한 사람을 차갑게 대하는 모습이 보인다. 박사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차가운 심성을 자기가 똑같이 아들에게 물려줬던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 뒤 이탈리아에 여행가기 위해 히치하이킹을 하는 세 남녀를 차에 태워주는데, 이 사라라고 하는 여자(비비 안더슨 분)는 박사의 젊은 시절 첫사랑과 똑같은 이름을 가졌는데 얼굴마저 닮았다. 두 남자는 서로 다른 성격을 가져 자주 다투지만 둘 다 사라를 사랑하고 있는 삼각관계이다.사라는 이 둘 중 어느 누구를 선택해야할지 몰라 둘 다 데리고 다니고 있는 것. 이러한 구도는 마치 자기 자신이 젊은 시절 사랑했던 사라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자기 자신보다 더 적극적이었던 동생 시그프리드가 사라의 마음을 훔쳐 결혼했던 과거를 연상시킨다. 박사는 이로 인해 자신이 차가운 성격을 갖게 된건 이 일 때문이 아닌지 돌이켜 본다. 룬드를 향해 더 달려가다가 운전미숙으로 차를 망가트린 아내와 남편을 만나 그들을 태워준다. 근데 이 남편이라는 작자는 아내의 실수나 치부를 남들 앞에서 조롱하듯이 얘기하며 상처를 준다. 결국 아내는 폭발하여 차에서 내린다. 근데 이 모습, 마치 박사 본인이 지금은 죽은 아내한테 보였던 예전 모습이 아닐지 고민에 빠진다. 박사의 집에서 일하는 가정주부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4] 국내엔 비디오판으로만 소개되었다가, 2009년 리메이크되어 국내에도 원제를 번역한 원래 제목대로 개봉한 영화이다. 9만 달러로 만들어 미국에서만 200만 달러 이상을 벌었다고 한다. 다만 정식으로 리메이크한건 아니다.[5] 영화 자체의 모티브는 중세 스웨덴의 구전시가인 '페르 튀르손의 두 딸들(Per Tyrsson's daughters in Vänge)'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막바지에 아버지가 맹세해서 세웠다고 전해지는 교회는 '셰르나 교회'(Kärna kyrka)라는 곳인데 1834년에 재건축되었기 때문에 원형이 남아있지 않다.[6] 에리크 베리만(Erik Bergman), 그 당시 루터교회 목사였다.[7] 카린(Karin), 에리크와 결혼하기 전에는 간호사였다.[8] 위에서 언급된 '제7의 봉인'도 사실은 그의 종교관이 녹아들어간 작품이다.[9] 차후에 영화 감독인 빌 어거스트가 베리만이 쓴 각본을 가지고 동명의 영화(The Best Intentions, 1992)를 만들었으며, 이 작품은 92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10] 이후로는 텔레비전 쪽으로 활동영역을 옮겼다.[11] 김태용과 탕웨이가 결혼식을 올린 장소기도 하다. 스웨덴 내에서는 휴양지로 유명한 곳.[12] 작업 자체는 2014년부터 꾸준히 해온걸로 보인다. 대표작들은 2010년대 초 이미 복원이 완료된 상태.[13] 작풍이 비슷하다는 평을 받는다. 다만 서로 협업은 안 한 듯.[14] 사실 서정적이라고 해도, 상당히 독기 어린 영화들이 많았다. 《늑대의 시간》처럼 대놓고 공포 영화도 있을 정도.[15] 늑대의 시간에서 권총을 쏜 게 나온적이 있다. 사람이 안 맞긴 했지만... 베리만은 주로 대화 위주의 실내극 영화로 찍었던 감독이다. 폭력 묘사도 구타나 칼질 정도.[16] Anna Bergman[17] 포르노 배우들이 아닌 기존의 일반 메인스트림 배우들이나 패션모델, 그리고 일반 여성들 대상으로 오디션을 통해 뽑은 신인을 캐스팅하여 일반 영화처럼 스토리가 있는데 섹스 장면은 완전 포르노 수준으로 만들어서 화제를 모으며 당시 덴마크 극장가에서 대히트를 쳤던 흥행작들이다.[18] 애들이 어려서 야한 장면은 빨리 돌리기로 넘기면서 봤다고(...)[19] 2015년 10월 1일부터 풀린 현행 화폐[B] A B C D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 작품[20]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 작품. <인생의 가장자리>라는 제목으로도 번역되나 국내 미개봉으로 제목이 정해지지 않음[A]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 작품[21] 스웨덴어 원제는 성만찬 참석자들이란 뜻이다.[22] 엔도 슈사쿠의 소설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23] 세금 문제가 해결된 후 서독에서 올 로케이션 촬영한 작품이지만 감독 본인은 실패작이라고 회고했다.[24] 기생충, 와호장룡과 나란히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수상작 중 오스카 최다 수상작(4관왕 - 외국어영화상, 촬영상, 의상상, 미술상)을 달성한 영화이다.[25] 후자는 14분 단편이며 감독의 어머니에 관한 다큐이다.[26] 미국에선 1999년에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