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야고보
[image]
1. 개요
예수가 뽑은 '''12사도 중 한 사람.''' 제베대오의 아들. 사도 요한의 형. 별칭 보아네르게스(천둥의 아들). 사도 중 최초 순교자. 헤롯 아그리파 1세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으로 처형당했다고 한다. 베드로, 사도 요한과 더불어 예수가 각별히 대우한 제자.[1] 스페인의 수호성인.
또 다른 사도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동명이인이라 혼동을 피하기 위해 흔히 ‘대(大) 야고보’라고 부른다.[2] 여기서 나오는 대 야고보라는 이름은 천주교와 정교회 등에서 사용하고, 개신교에서는 그냥 야고보라고 칭한다.
로마 가톨릭에서의 축일은 7월 25일이며, 동방정교회에서의 축일은 4월 30일이다. 회화에서는 종종 말을 타고 한 손에는 순례자의 종을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무어인을 무찌르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상징물은 책·칼·외투·가리비·모자·지팡이·자루·호리병이며, 수의사·약사·기수·식료품 상인·순례자·스페인·과테말라·니카라과의 수호성인이다.
참고로 가리비가 상징이 된 이유는, 대 야고보의 사망에 얽힌 전승때문. 예루살렘에서 참수당한 그의 시신을 제자들이 빈 배에 싣었더니 이 배가 이베리아 반도까지 무사히 떠내려갔으며, 시신과 배에 가리비가 잔뜩 달라붙어 시신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는 전승에서 유래된다.
2. 상세
대 야고보(이하 야고보)는 제베대오와 살로메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로, 동생 사도 요한과 함께 아버지를 도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어부로 일하고 있다가 예수를 만나 같은 직업의 다른 형제인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함께 그의 부름을 받았다. 예수의 부름을 듣자 그들은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예수를 따라갔다(마태오 복음서 4:21-22). (사람을 낚는 어부 참조)
성령 강림 이후 다른 사도들처럼 야고보 역시 사마리아와 유대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심지어 이베리아 반도까지도 다녀갔다는 전승도 전해진다.[3] 44년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을 탄압하던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에 의하여 체포되어 파스카 축일 전날 참수형으로써 순교하였다.
야고보의 유해는 처음에는 예루살렘에 안장되었으나, 정확히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해서는 행방이 묘연하여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9세기 즈음에 하늘에서 한 별빛이 내려와 숲 속의 한 동굴을 비추어 사람들이 그 안으로 가보니 야고보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야고보의 유해는 에스파냐의 서북부 지역 갈리시아의 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4] 로 이장되어 모셔졌고, 당시 국왕 알폰소는 그 묘지 위에 150년에 걸쳐 웅대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건축하였다.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보면 그의 유골함이 전시되어 있다.
그 후 844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력을 뻗친 이슬람교 세력에 로마 가톨릭 세력이 대항하기 위하여 일어난 클라비호 전투에서 야고보가 에스파냐군 앞에 나타나는 기적을 일으켜 말 탄 전사 형상으로 나타나 이슬람군을 무찔렀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에 대한 신심으로, 대 야고보는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이자 레콩키스타의 상징이 되었으며, 에스파냐를 중심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금세 세계적인 순례지[5] 가 되었다. 이 순례길을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라고 하며 현재도 인기있는 순례자 코스이다.
2.1. 과격함
복음서에 있는 2가지 사건이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성격을 보여 주고 있다. 하루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6] 가 예수에게 하늘 나라에서 자신들이 각각 예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도록 해달라고 간청했다. 예수가 “너희는 너희가 청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구나! 너희는 내가 마시고자 하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느냐?” 며 묻자 그들은 자신있게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이에 예수는 “죽음의 잔을 마시고 고통의 세례를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나의 오른편이나 왼편에 앉는 특권은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이들을 위한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다른 사도들이 이 형제의 야심에 분개하자, 예수는 그들에게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7]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라고 훈계하여, 권력의 목적은 봉사하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마태 20:27-28).
또한 두 형제는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자신들을 영접하지 않은 불친절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내며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하고 말했다. 예수는 그 말을 듣고 그들을 호되게 질책하였다(루카 복음서 9:54).
이러한 타고난 과격한 성격 때문에 예수는 요한과 야고보 형제를 아울러 ‘천둥의 아들’이라는 뜻의 보아네르게스(Boanerges)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지만(마르 3,17), 야고보는 베드로 및 요한과 더불어 타볼 산에서의 변모와 야이로의 딸 소생과 겟세마네#s-1에서의 피땀을 흘린 기도를 보고 사람들에게 증언할 특권을 누리며 총애를 받던 세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마태오 복음서 7:1; 마르코 복음서 1:29-31; 마르 5:37; 마르 13:3-14; 14:32-35). 그런 야고보도 예수가 이스카리옷 유다에게 배신당하여 군인들에게 붙잡혀 끌려갔을 때는 지레 겁을 먹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어디론가 도망가 숨어버리고 말았다.
2.2. 의외로 엘리트
사실 근대의 연구에 의하면 사도 요한과 그의 형 사도 성 야고보는 사제가문이고, 아버지 제베대오는 유대교 사제이며, 요한과 야고보는 사제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라는 결과가 있다. 당대의 유대교 사제들은 성전에서 봉직하는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따로 갖고 있던 직업이 있었고 그것으로 먹고 살았는데[8] 요한과 야고보의 아버지 제배대오의 경우에는 그것이 어부였던 것. 사제들이 생계를 위해 별도의 직업을 갖는 것은 특이한 상황이 아니며, 초기 기독교 교회를 세우다시피 한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해박한 엘리트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여행을 다닐 때는 천막 장사를 하며 비용을 충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게다가 이들은 꽤나 부유한지 복음서들, 특히 마태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베드로와 안드레아형제가 그물만 버려두고 따랐다고 나오는데 반해, 이 둘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리스도를 따라간다. 즉, 베드로 형제의 경우에는 자기 소유의 배가 없었던 반면에, 요한 형제는 자기 소유의 배 가 있었던 것. 또한 이들은 예루살렘에 자신 가문에 속한 별장이 있었는데, 이 별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곳, 다시 말해서 최후의 만찬을 행하신 곳이다.
또한 이들은 대사제의 친척이었고, 그렇기에 대사제와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붙잡히시고 붙잡혀 가실 때에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가 따라가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에서 요한을 두고 '''"그 제자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예수님과 함께 대사제의 저택 안뜰에 들어갔다"'''라고 명시한다.[9] 이 연구결과들은 공신력이 있는 것으로, 현대 가톨릭교회의 최고의 신학자 중 하나로 꼽히는 베네딕토 16세가 자신의 저서 <나자렛 예수>에 인용할 정도로 공신력이 있는 것들이다.
[1] 한 보기로 예수가 구약성경의 대표격인 모세, 엘리야와 만나는 '거룩한 변모' 장면을 베드로, 요한과 함께 목격한 3명이었다.[2]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소 야고보라 부른다.[3] 기독교 초기 전승에 따르면 대 야고보는 순교 전 예루살렘을 멀리 떠난 적이 없다. 스페인은 유대 지역에서 너무 멀 뿐더러 바오로 또한 로마서에서 스페인을 ‘다른 사람이 기초를 세우지 않은’ 지역이라고 언급하는 등 야고보의 이베리아 전도는 9세기 이후 후대의 창작이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4] 산티아고는 성 야고보의 스페인어식 표기이다.[5] 가톨릭 3대 성지라 하면 예루살렘, 로마, 그리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꼽는다.[6] 또는 그들의 어머니라고도 함[7] 이 문구는 감리회의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배재학당의 교훈이 되었고, 배재고등학교로 이어지기도 했다.[8] 이것은 율법학자들도 마찬가지였고,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이 사제들을 따라한 것이다. 사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이스라엘은 사제적 백성임을 강조했고 그렇기에 사제들에 대한 율법과 관습을 자신들이 지켰는데, 그 때문[9] 18장 1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