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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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원경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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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옛 시가지
영어
Santiago de Compostela (Old Town)
스페인어
Ciudad vieja de Santiago de Compostela
프랑스어
Vieille ville de Saint-Jacques-de-Compostelle
국가·위치
스페인 갈리시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5년
등재기준
(i)[1], (ii)[2], (vi)[3]
지정번호
347
스페인어
Catedral de Santiago de Compostela
갈리시아어
Catedral de Santiago de Compostela
영어
Cathedral of Santiago de Compostela
프랑스어
Cathédrale de Saint-Jacques-de-Compostelle
독일어
Kathedrale von Santiago de Compostela
포르투갈어
Catedral de Santiago de Compostela
이탈리아어
Cattedrale di Santiago di Compostela
1. 개요
2. 역사
3. 건축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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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북서부 지역 갈리시아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위치한 가톨릭 성당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주교좌성당이며,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양식이 조화를 이룬 건축물.
12사도 중 하나인 대(大) 야고보의 유해가 매장된 곳이자 성 야고보의 길(El Camino de Santiago)로 불리는 성지순례의 종착지로, 로마예루살렘과 더불어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진 중세 가톨릭의 3대 성지이다.

2. 역사


본래 이 갈리시아 지방은 고대 로마 시대의 이리아 플라비아(Iria Flavia)[4] 라는 히스파니아 식민 도시가 자리잡은 곳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전승에 의하면, 사도 대 야고보는 서기 44년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12사도 가운데서 제일 먼저 순교하기 전, 스승 예수의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유지를 받들어 당시 로마 제국[5]의 최서단인 히스파니아의 이리아 플라비아까지 가서 선교하고 돌아왔다.[6]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뒤, 그를 따르던 초대 교회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그의 유해를 보존하려고 했다. 13세기 작품인 야코부스의 황금전설의 묘사에 따르면, 대 야고보의 두 제자가 해안에 기적적으로 마련된 배에 사도의 유해를 싣고 그가 마지막으로 선교한 이리아 플라비아 지방에 도착해 그곳에 안장하게 되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 4세기에 이르러 그리스도교는 종교의 자유를 얻고, 이 이리아 플라비아 지방에도 그리스도교 교구가 설정되었다.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6세기부터, 학자들의 추정에 의하면 이미 최소한 4세기부터 이리아 플라비아 교구는 ‘성 야고보의 땅(Locus Sancti Iacobi)’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 사실 때문에 지금도 많은 가톨릭 신자들과 순례자들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보존된 사도의 유해가 진짜 유해임을 확신하고 있으며, 이미 19세기 레오 13세 교황에 의해 이를 확언하는 교서가 반포된 바 있다. 그러나 이리아 플라비아 지역 교회가 누렸던 이 영예는 로마 제국, 서고트 왕국의 연이은 멸망에 이어 찾아온 이슬람 세력의 이베리아 지배로 잊혀지게 된다.
시간이 흘러 9세기 에스파냐에 다시 가톨릭 국가가 일어나 갈리시아를 수복한 뒤, 고대의 야고보 사도에 대한 신심이 되살아나게 되었다. 서기 814년 은수자 성 펠라지오가 한밤중에 별빛이 들판 위에서 기묘하게 춤추는 현상을 보고서는, 그곳으로 가보니 이슬람 지배 하에서 잊혀졌던 대 야고보의 무덤이 있었던 곳이다. 콤포스텔라라는 이름은 이 이야기에서 유래한 Campus stellae(별들의 들판)에서 나온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7] 이 소식을 들은 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2세는 유해를 봉안하기 위한 성당 건축에 착수해 829년 첫 성당 건물이 세워졌다. 이것이 이리아 플라비아(파드론) 땅에 세워진 첫 기념 성당이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노르드 해적들의 약탈로 도시가 파괴되면서 파드론 북쪽에 위치한 콤포스텔라 성채로 유해와 성당을 옮길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레온의 알폰소 3세의 명령에 따라 879년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 세워지니 이것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전신이다.
레콘키스타 과정에서 이슬람 세력의 공격에 휘말린 적도 있었다. 서기 997년 후우마이야 왕조의 재상 알 하지브 알 만수르는 갈리시아를 침공하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성당을 파괴하고 대문과 종을 뜯어가 코르도바의 대모스크를 장식하는데 썼다. 그러나 기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어느 정도는 배려해 성 야고보와 유해와 성유물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8][9] 1075년 성당을 재건하면서 이전보다 더욱 크게 지어 1211년 마침내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이 완성되었다. 이 대성당은 이후 시대가 지나면서 유행한 다양한 양식이 반영된 장식이 덧붙여졌는데, 지금의 바로크 양식의 외관과 인테리어는 18세기에 확립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3. 건축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던 대성당의 정면(facade)는 훗날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오브라도이로 광장에 면한 서쪽 정면은 페르난도 데 카사스 이 노보아(Fernando Casas y Novoa, 1670~1750.12.25)가 1740년에 완성했으며, 북쪽 정면은 루카스 페로 카베이로(Lucas Ferro Caaveiro, 1669~1770), 클레멘테 페르난데스 사렐라(Clemente Fernández Sarela, 1716~1765), 벤투라 로드리게스(Ventura Rodríguez, 1717.7.14.~1785.9.26.)가 완성했다. 프라테리아스 광장에 면한 남쪽 정면은 거장 에스테반(Esteban)이 1103년에, '영광의 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서쪽 정면의 출입문은 거장 마테오(Mateo)가 1188년에 만들었다.

4. 기타


  •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라는 이름의 크고 아름다운 향로를 성당 내부에 매달아 사제 8명이 줄을 당겨서 분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10] 세계에서 제일 거대한 향로로 알려진 보타푸메이로는 갈리시아어로 '연기를 내뿜는 것'이라는 뜻이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는 11세기부터 향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5세기에 프랑스루이 11세가 새 향로를 마련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기부해 1554년 은제 향로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180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 군대가 이 향로를 약탈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약 40여 년에 지난 후 1851년 금은세공사 호세 로사다가 청동놋쇠로 만들고 으로 도금한 보타푸메이로를 제작해 성당에 설치했다.

평소에는 성당 부속 도서관에 보관하다가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에는 꺼내와 쇠줄에 매달아서 분향한다. 80kg짜리 향로가 길다란 쇠줄에 매달린 채 익랑 천장에서 맞은편 익랑의 천장에 닿을 듯 말 듯 거대한 원호를 그리며 흔들리는 모습이 장관. (2010년 11월 6일 베네딕토 16세가 방문했을 때의 모습 ) 2014년 7월 25일에는 펠리페 6세 국왕과 레티시아 왕비도 이 미사에 참례했다.(기사) 쇠줄이 걸린 도르래는 1604년에 설치한 것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다만 향로나 도르래와 달리 쇠줄은 주기적으로 교체해야 하는데, 자칫 줄이 끊어져 향로가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사고는 1499년 영국 헨리 7세의 장남 아서 왕자[11]와 결혼하기로 결정한 아라곤의 캐서린이 이 곳을 방문했을 때 일어난 것으로, 분향을 위해 향로를 흔들자 향로가 성당 창문을 뚫고 그대로 날아가버렸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었다.
2019년 1월 28일부터 2021년 야고보 성년을 앞두고 보수공사를 진행함에 따라 약 1년 반 가량 이 보타푸메이로를 볼 수 없었으나, 2020년 코로나19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복원 작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순례자를 위한 미사 후 분향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 2018년 1월 16일부터 인천교구 상동본당의 주임신부였던 이찬우 요셉 신부가 은퇴 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상주하며 순례길에 나선 한국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봉사를 시작했으나,(은퇴 후 산티아고 봉사 자청한 이찬우 신부)[12] 현지의 비협조로 인해 2018년 2월 4일 도로 귀국하였다.
  • 2019년 스페인 하숙에 출연했던 차승원, 유해진, 배정남도 까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길의 마지막 종착지인 이곳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가서 성당을 둘러봤다.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4] 현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시에서 남쪽으로 25km 떨어진 파드론(Padrón)이라는 도시이다.[5] 고대 지중해 일대의 세계관은 로마 제국이 곧 세계라는 인식이 있었다.[6] 가톨릭 백과사전에 따르면 이 전승 자체가 9세기는 되어야 믿을 만한 기록에서 등장하기 시작하며, 초기 교회 전승이나 로마서의 스페인에 대한 언급, 이베리아까지의 거리로 볼 때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거나 없는 수준이라고 학계에서 평가된다.[7] 정설은 아니며 공동묘지라는 뜻의 라틴어 compositum이 로망스어로 변화하면서 생긴 단어로 보는 시각이 많다. 야고보 사도의 제자들이 박해를 피해 사도의 유해를 공동묘지 한가운데에 숨겼을 것과 위의 도깨비불 현상을 고려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8] 사실 이슬람교의 입장에서도 남의 묻힌 무덤을 함부로 훼손하는것은 크나큰 죄이다. 무슬림들이 화장을 엄금하고 매장만을 고집하는 것을 생각해보자.[9] 그리고 1236년 카스티야가 코르도바에 입성한 후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3세는 원래 대성당의 대문과 종이었던 대모스크의 대문과 종을 다시 뜯어가 톨레도 대성당을 장식하는데 썼다.[10] 원래 이 향로의 용도는 순례를 마친 순례자들이 성당에 들어올 때 악취와 땀 냄새가 성당 안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11] 헨리 8세의 형.[12] 기사 링크의 카페는 2018년 2월 23일 폐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