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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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鍾哲
1920년 11월 7일 ~ 1986년 11월 4일 (향년 65세)
1. 개요
2. 선거이력
3. 가족 관계


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이자 기업인이었다. 호는 백암(白巖)이다. 친동생으로 '''김종희'''[1], 김종식[2] 등이 있다. 따라서 조카인 현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에게는 큰아버지(백부, 伯父)가 된다. 종교성공회이다.
1920년 충청남도 천안군(현 천안시)에서 태어났다. 1942년 일본 메이지대학 상학과를 졸업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직후 우익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의 선전부장으로서 청년운동에 투신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동청년단 후보로 충청남도 천안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이병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충청남도 천안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0년 4.19 혁명이후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상돈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당 후보로 충청남도 천안시-천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정당 이상돈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이상돈 후보에 설욕하여 당선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76년 초까지 대한민국 국회 경제과학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남도 천안시-천원군-아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황명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정재원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1년 구 민주공화당 인사들을 중심으로 관제야당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여 총재가 된다. 본인이 적극적으로 창당을 주도했다기 보다는, 신군부에 의해 간택된 것에 가깝다. 애초에 신군부는 관제야당 총재로 유명 인사나 지역색이 강한 영호남 출신은 원치 않았고, 따라서 무색무취하고 충청도 출신인 김종철을 대표로 밀었다. 이후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치러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한국국민당은 선거인단 출마도 많지 않아, 김종철 본인도 자기가 사는 선거구에서 무소속 후보에게 투표해야 했을 정도였다고(...) 그나마 확보한 국민당 49명(0.92%) 선거인단의 2배에 달하는 선거인단 85명(1.61%)에게 득표를 받았지만, 이마저도 구색을 맞추기 위한 관제선거의 결과로 보면 될 것이다. 우스꽝스러운건 전국 득표율은 사실 174만표(1.1%) 그만도 못했다.
같은 해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려 하였으나, 정책지구[3]로 지정된 해당 선거구에 민주한국당 후보로 출마하려던 황명수가 반발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자, 황명수를 피해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선회하려 하였으나 당원들의 반발로 자신의 동생 김종식을 해당 선거구에 출마시켰다.[4] 결국 김종식은 민주정의당 정선호 후보와 무소속 황명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5년 2월 치뤄지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당내 인사들을 잘 설득시켜서 전국구 1번 입후보에 성공한다. 하지만 선거를 두 달 앞둔 1984년 12월, 건강이상으로 치료차 일본에 가게된다.[5] 한달 후 귀국하나, 선거를 지휘하지 못하고 집에서 두문불출 하게 된다. 건강 때문에 심지어 선거 당일날 투표도 하지 못한다. 결국 국민당은 20석으로 겨우 원내교섭단체를 유지하는 참패를 거뒀다. 본인은 전국구 1번인 덕분에 투표도 안했으면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나, 당연히 당내 반발 때문에 총재직을 사퇴한다. 이후 최치환 의원과의 당내 경선에서 승리한 이만섭 의원이 총재직을 이어받는다.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85년 4월에 열린 국회 개원식같은 중요한 행사에도 불참하는 등, 마지막 국회의원 임기 1년 반을 그냥 집에 가만히 누워서 보낸다. 그러다가 1986년 11월 4일 사망하였다.

2.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 천안군)

1,753(3.03%)
낙선(8위)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 천안군 을)

18,924(56.39%)
'''당선(1위)'''
'''초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 천안군 을)

10,791(29.93%)
낙선(2위)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 천안시-천원군)

19,792(33.96%)
낙선(2위)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 천안시-천원군)

56,075(73.01%)
'''당선(1위)'''
'''재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 천안시-천원군)
42,223(59.9%)
'''당선(1위)'''
'''3선'''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 천안시-천원군-아산군)
61,718(43.16%)
'''당선(1위)'''[6]
'''4선'''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남도 천안시-천원군-아산군)
41,491(26.27%)
'''당선(1위)'''[7]
'''5선'''
1981
제12대 대통령 선거

85(1.6%)
낙선(3위)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제1번)
-
'''당선'''
'''6선'''

3. 가족 관계



[1] 한화그룹 창업주이다.[2] 신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1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3] 전두환 정권 당시 관제야당 당수가 당선되기 쉽도록 해당 선거구에 다른 야당 후보를 출마하지 못하게 한 것[4] 전국구는 야당의 돈줄인데, 당 대표가 한 자리 차지하면 선거자금을 낼 인물이 한 명 줄어든다.[5] 언론에다가는 요통을 치료한다고 간단히 말했는데, 실제로는 꽤 병세가 심각했던 것 같다.[6] 신민당 황명수 후보와 동반 당선[7] 신민당 정재원 후보와 동반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