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근

 



'''성균관대학교 총장'''
제2대
이훈구

'''제3대
이선근'''

제4대
변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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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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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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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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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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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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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장 직무대행
김진삼
15대
서길수


[image]
李瑄根
1905년 5월 11일 ~ 1983년 1월 9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역사학자,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전주(全州)[1], 호는 하성(霞城)이다.

2. 생애


1905년 경기도 풍덕군 동면 망포리[2](현 황해북도 개풍군 신흥리)#에서 이연교(李淵敎)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7년 아버지가 설립한 쌍빈의숙(雙斌義塾)을 졸업하고,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13회로 졸업했다. 1923년 일본 와세다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했다. [3]
1929년 와세다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조선일보에 입사하였으며, 정치부장, 편집국장 등으로 근무했고 경신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1931년에는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으며, 1932년 고려시보사에서 주간을 맡았다. 1934년에는 한성도서주식회사 상무취체역에 취임했다.
1937년부터는 만주국에 가서 관동군에 군량미를 대는 만몽산업주식회사의 상무취체역 및 전무취체역에 취임하여 본격적으로 친일로 전향하였다. 1939년에는 만주국 협화회의 협의원을 지냈고, 1942년에는 만주 오상현(五常縣)[4]의 대동농사학교(大東農士學校) 교장에 취임하여 광복 직전까지 근무했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같은 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조선청년동맹 위원장, 조선청년당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다. 1946년 2월에는 한성일보 주필에 취임했으며, 1947년 대동청년단 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이승만총재로 추대하고 자신은 그 부단장 겸 기획위원장, 훈련원장, 대동청년단의 기관지인 대동시보사 부사장에 취임하였다. 또 같은 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주임교수에 임용되었으며, 학생처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8년에는 반탁학생총연맹 고문에 취임하였고, 1949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장서리를 지냈다. 1950년 2월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본부 정훈감에 보임되었고 대학학도의용대 총지휘관을 겸임하였다. 1952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고,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복직하였다.
1954년 4월에는 문교부 장관에 임명되어 1956년 6월까지 지냈으며, 장관 재임 중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조선왕조실록 영인작업을 맡기도 했다. 그러다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개입하여 민주당으로부터 고발당하였고, 결국 그 해 6월 5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그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켜 불명예 퇴진하였다.
이후 1956년 동아대학교 교수, 1957년 성균관대학교 제3대 총장 및 한국사립대학연합회 회장, 1959년 11월 26일부터 1960년 5월 3일까지 대한상무회 회장, 1962년 경희대학교 교수 및 대학원장을 지냈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1969년 영남대학교 총장 및 대한민국 문화재위원장, 1972년 문화재보호협회장, 1974년 동국대학교 총장, 1976년 대한교련(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1978년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초대 원장을 지내면서 유신 체제를 적극 찬양하였다.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후에도, 다시 전두환의 집권을 찬양하였다.
1968년 대만 중화학술원으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1970년 경희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1971년 미국 인디애나주 볼 주립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 익녕군파 15세 근(根) 항렬. 아버지 이연교(李淵敎)는 14세 연(淵) 항렬.[2]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개성군 흥교면 지현리가 되었다.[3]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4]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우창(五常)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