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볼 시대
Deadball Era
1. 개요
야구의 시대 구분. 일반적으로 야구 초창기부터 1920년까지를 가리키는데, 특히 1900년부터 1920년대가 가장 두드러졌다. 이 시기는 전체적으로 투고타저가 극심하였고, 특히 타자들의 장타력이 땅을 기었기 때문에 스몰볼이 극도로 유행하였다. 영상을 자세히 보면 뉴욕 양키스와 시카고 컵스가 많이 보인다.
2. 이유
2.1. 야구공의 문제
초기 야구공은 제약이 거의 없었다. 극초기 야구공은 대부분 심으로 납을 사용하였으며, 그 주변을 실로 감고 가죽으로 둘렀다. 납 대신에 납으로 만든 총알을 쓰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돌조각을 심으로 사용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심은 고무로 변했다. 하지만 이 공들은 대단히 가볍고 부드러웠다. 1840년대의 공들은 너무 가볍고 부드러웠기 때문에, 당시 규칙은 '''주자의 몸에 공을 던져서 맞히면 아웃'''이었다.[2] 당연히 그런 공들로는 타구든 송구든 비거리가 나올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그 어떤 외야수도 공을 던져서 내야로 보낼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1849년, 유격수라는 완전히 새로운 포지션이 탄생하게 된다. 심지어 투수가 직접 자기가 던질 공을 만들기도 했을 정도로 공의 모양과 크기도 랜덤이었다. 이는 1860년대에 이르러서야 규격화 되고 무거워지게 된다. 이 때문에 등장한 것이 태그 아웃이다. 직접 주자를 맞힐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1876년에야 현재와 같은 무게와 크기로 규정된다.
하지만 여전히 공인구라는 개념은 없었다. 규정이 된 것은 크기와 모양, 무게였지 '''반발계수는 기준에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구단이나 투수들은 야구공의 반발계수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었다. 심에 고무를 많이 넣고 실을 단단히 감으면 반발력이 상승했고, 심에 고무를 조금 덜 넣고, 실도 느슨히 감으면 반발력은 뚝 떨어졌다. 구단은 투수전을 하고 싶으면 반발력이 약한 공을 사용했고, 타격이 좀 더 자신있으면 반발력이 강한 공을 사용했다. 이 때, 반발력이 약한 공을 부르는 표현이 바로 데드볼이었다.
1910년 고무심의 가운데에 코르크를 넣은 공이 등장한다. 이 공으로 반발력이 커지고 장타가 늘어났다. 하지만 '''공격력이 너무 늘었다는 불평'''으로 실을 느슨하게 감도록 강제하면서 공의 반발력은 다시 내려갔고, 일시적으로 증가했던 홈런과 장타는 예전으로 돌아갔다.
2.2. 야구 규칙의 문제
사실 규칙 면에서 보았을 때, 1900년대 이전의 야구는 현대 야구와 직접 비교하는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사실상 다른 스포츠다. 스트라이크가 몇개가 되어야 아웃이 되는가라거나, 사구에 필요한 공의 개수라거나, 스트라이크의 개념에서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 단적으로 극초기에는 타자가 치기 편한 위치를 정해주면 투수가 거기로 공을 언더핸드로[3] 던져 줘야 했다. 사실상 아리랑볼이 강제된 격. 이 때 타자가 헛스윙을 해야 스트라이크였으니, 실질적으로는 홈런더비의 형태로 야구를 했다고 보면 된다. 그 외에도 규칙에 따라 타고투저가 변한 것은 수도 없이 많다. 예를 들어서 투수와 타자와의 거리가 50피트에서 60피트 6인치로 늘어나면서 타율이 급상승하고 이전의 투수들 상당수가 퇴물이 되었다.
2.2.1. 파울의 처리
이건 현대까지 유지되고 있는 규칙 변화이다. 내셔널 리그는 1901년, 아메리칸 리그는 1903년 새로운 규칙을 도입했다. 바로 '''야수가 집지 않은 파울볼은 2스트라이크 이전에 한해서 스트라이크로 처리한다'''라는 규칙이었다. 이전까지 파울은 스트라이크가 아니었다. 이 규칙이 도입되면서, 내셔널 리그의 타율은 1901년 0.279였던 것이 1902년 0.267로 하락했고, 아메리칸 리그는 1902년 0.275였던 것이 1903년 0.255로 하락했다.
2.2.2. 야구공의 교체 규칙
일단 1800년대의 규칙 변화를 보자.
간단히 말해서 어지간하면 야구공을 교체하지 말고 그냥 쓰라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히 말해서 돈 문제이다. 당시 야구공은 3~5달러 정도였는데, 이것은 2010년대 기준으로는 80~90달러 정도의 가치이다. 구단주들은 어지간하면 새 공을 사는데 돈을 쓰고 싶어하지 않았고, 이걸 규칙에 넣은 것이다.
이 규칙 때문에 공이 망가지지 않은 이상 계속 사용했으니 공은 더러워졌고, 부드러워졌다. 때문에 반발력은 내려갔고, 더러워진 공은 타자도 야수도 보기 어려웠다. 심지어 경기중에 공을 교체하게 되면 투수는 일부러 내야수들에게 넘기고, 내야수들은 씹는 담배가 포함된 침을 뱉어둔 글러브로 그 공을 돌리면서 공을 더럽혔다. 그래서 방금 교체된 공도 검은 색으로 변해서 사용되었다. 이 경우는 자동으로 아래의 스핏볼 효과가 있었다.
2.2.3. 스핏볼의 허용
스핏볼은 간단히 말해서 야구공을 변형시켜서 하는 부정투구이다. 사실 스핏볼이라고 하지만 종류도 다양하고 발전상도 다양하다.
- 스핏볼(spit ball)
- 스커프볼(scuffball)
- 공에 사포나 손톱 가는 줄 등을 통해서 흠집을 낸 다음에 던지는 투구법이다. 특히 사포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에머리 볼(emery ball)이라고도 불린다. 흠집이 난 공을 던지면 표면의 차이로 인해서 표면을 흐르는 기류의 균형이 무너져서 흠집이 난 방향으로 휘어진다. 때문에 투수는 휘어지게 하려는 쪽 반대 방향에 흠집을 내고, 거친면을 잡고 던지면 OK. 흠집을 여러개 내놓으면 공이 아주 제멋대로 움직인다.
- 스커프볼은 클라크 그리피스가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리피스가 사람들 보는 앞에서 대놓고 공을 갈아대었기 때문이다. 사포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투수는 러셀 포드인데, 이 방법으로 26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야구위원회는 스핏볼과는 달리 공에 직접 손상을 주는 스커프볼에 대해서는 대응이 빨랐다. 공의 수명을 줄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스커프볼은 이미 1915년에 일찌감치 부정투구로 규정된다.
- 샤인볼(shine ball)
2.2.4. 퀵피치의 허용
타자가 준비를 하기 전에 투수가 공을 던지는 것도 허용되었다. 이것을 퀵피치라고 불렀는데, 당시에는 투수기술로 취급되었다. 때문에 타자가 처음부터 임전 상태로 타석에 들어서지 않으면 스트라이크 하나 먹고 시작하는 것이었다. 패트 플래허티, 조 맥기니티, 클라크 그리프스 등이 퀵피치의 달인이었다. 이후 이 '기술'은 보크로 취급되게 변한다.
2.2.5. 타자들의 문제
간단히 말해서 타자들이 장타를 포기했다. 모두가 방망이를 짧게 잡고 맞히는 것에 집중했으며, 그 다음은 발로 승부했다. 이 때문에 이 시기를 대표하는 타자가 바로 타이 콥인 것이다.
실제로 라이브볼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타자들의 홈런수는 극적으로 늘어나지 않았다. 베이브 루스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당시 타자들은 공의 반발력이 늘어난 다음에도 그만큼 홈런수를 향상시키지는 못했다.
이 사진에서 콥과 루스의 배트 쥐는 법이 루스 이전과 이후의 차이이다. 루스는 새끼 손가락으로 놉을 감쌀 정도로 배트를 길게 잡고 있고, 콥은 그보다 훨씬 짧게 잡고 있다.
3. 결과
간단히 말해서 극심한 투고타저가 이어졌다.
명투수들이 넘쳐났고, 월터 존슨, 사이 영, 크리스티 매튜슨,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모데카이 브라운 등이 이 시대를 대표한다. 투수들은 홈런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투구수도 적었고, 공을 무리해서 던지지도 않았기 때문에 완투는 기본이었다. 이 시기에 주력급 선발투수라면 50경기는 등판했고, 최소 20승 정도는 당연히 올렸다.
대부분의 인플레이 타구는 내야 땅볼이었고, 1루수는 풋아웃의 2/3 정도를 기록했다.
4. 종식
1911년부터 기존의 고무심만 사용한 공 대신 코르크심을 사용해 반발력을 높인 공인구를 사용하도록 규정이 바뀌었는데, 바로 그해 평균득점이 전해에 비해 1.31점, 게임당 홈런수는 0.11개 상승했다. 그리고 1920년에는 현재 하는 것과 같이 공이 땅에 바운드만 되어도 새공을 쓰게 하고, 부정투구를 금지하는 쪽으로 규정을 변경했다.[8] 그리고 그해, '''베이브 루스가 50홈런을 돌파'''하면서 데드볼 시대의 종식과 라이브볼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5. 기타
5.1. 대혹사의 시대
스포츠 과학이 없고 기본적인 인권 개념이 훨씬 낙후된 시대였기에[10]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혹사가 상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초창기 에이스들은 시즌 전경기를 (대략 70여 경기 정도) 선발로 출장하는게 기본이었고 무조건 완투했다(...). 지금보다 훨씬 팔에 무리가 덜 가는 구종 때문에 당시의 혹사가 과소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지만, '''엄연히 야구는 선수들에겐 직업이었고 있는 힘을 다해 던졌다.''' 아프면 그냥 참고 하는 것이 상식이었고, 특히 그 시절에는 감독한테 항의할 수도 없으니 통증은 어떻게든 참아가면서[11] 말 그대로 팔이 고장날 때까지 던지고 더이상 던질 수 없으면 은퇴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메이저리그 역대 한 시즌 최다 이닝 소화가 다름아닌 '''680'''이닝인데, 이 미친 기록의 주인공인 윌 화이트는 이러고 나서 당연히 은퇴하고 그 뒤 식료품 가게 사장이 되었다. 그 외에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무수히 많은 투수들은 '''몇시즌도 못 던지고''' 사라져갔다. 낙후된 인권과 스포츠 과학의 부재에서 비롯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12]"경기중 근육이 비틀리고 갈리는 게 느껴졌고, 공을 던질 때마다 팔이 어깨에서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통증에 밤을 지새우는 게 다반사였다."[9]
―에드 월시. 메이저 리그 역대 최저 평균 자책점 (1.82) 기록의 보유자. 통산 커리어. 부상으로 일찍 은퇴.
이런 학대 수준의 투수 관리는 메이저 리그의 수익이 올라가고 선수들이 고액 연봉자가 되면서 해결된다. 예전처럼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기엔 선수들의 몸값이 너무 세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스포츠과학이 발달하면서 "그냥 쟤 팔이 약해서 고장난 것임"이란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변명은 더이상 통할 수가 없게 되었다.
역대 한시즌 최다 이닝 상위 20위[13] 를 보면 투수들이 모두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퍼지거나 재활을 반복하다가 은퇴한 것을 볼 수 있다.링크 순위권에 들지도 못한 선수들은 말할 것도 없다. 사이 영,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등의 투수들은 시대를 잘 타고 나서 상상을 초월하는 대기록을 남겼다는 의견 이전에 그냥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이 설득력이 더 크다. 현대 야구로 치면 평균 시속 150km를 넘는 속구를 26년간 던지며 선수생활을 했던 놀란 라이언이 좋은 예시.
[1] 후에 타자로 전향해서 레전드가 된다.[2] 부상 위험을 생각해서 안전한 공을 만들었다. 공이 잘 날아가지 않는것도 이익인데 수비 입장에서는 현대와 달리 주자를 피해 송구해야하는 수고도 없이 막 던져도 되니 무척 편했다.[3] 당시에는 오버스로도 금지였다.[4] 땀이나 머릿기름, 바셀린, 파라핀 등 발라서 마찰력이 떨어지는 것이면 뭐든 상관없다.[5] 스트릭렛은 스핏볼을 전파하는데 제법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 140년 메이저리그 역대 통산 방어율 1위가 바로 이 사람이다. [7] 블랙삭스 스캔들로 영구제명된 투수중 한명이다.[8] 스핏볼만은, 오직 당시 사용하고 있던 투수 17명에게만 은퇴할 때까지 사용할 수 있게 허가되었다. 마지막 합법적 스핏볼 사용자는 빌리 그라임스로 1934년 41세로 은퇴했다.[9] Kashatus, William C. (2002). Diamonds in the Coalfields: 21 Remarkable Baseball Players, Managers, and Umpires from Northeast Pennsylvania. Jefferson, North Carolina: McFarland & Company. ISBN 978-0-7864-1176-4.[10] 당장 여성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투표권이 없었고 노동조건은 저임금과 착취가 일상이었던 19세기 후반보다는 나아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좋다고 하기에는 무리였던 시절이었다.[11] 제대로 된 진통제가 있을리 만무했으므로, '''술과 마약(!) 등 온갖 약물에 찌들어가며 고통을 잊어야 했다.'''[12] 그리고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최다 승리가 찰스 레드본인데 한 해에 60승(...), 678.2이닝을 던져 한 해 최다 승 1위, 최다 이닝 2위를 기록했다. 결국 10시즌만에 은퇴. 다만 베테랑 위원회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첫 번째 선수'''가 되었다.[13] 1위 680 이닝 , 2위 678.2 이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