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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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 당시 활약한 대한민국 국군의 장성.
6사단의 춘천-홍천 전투와 9사단의 백마고지 전투에서의 맹활약으로 특히 유명하다. 이들 전공으로 대한민국 국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요셉이다.
2. 군 경력
- 1946년 1월 28일 육군 참위로 임관
- 1949년 3월 육군 대령 진급
- 1950년 7월 15일 육군 준장 진급
- 1954년 2월 육군 중장 진급
- 1962년 1월 육군 대장 진급
- 1965년 4월 전역
3. 전쟁 전
1921년 5월 22일 충청남도 대전군 유성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 쥬오(中央) 대학에 법학부로 재학 중 일제에 의해 학병으로 징집되었다가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복무 중 8.15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독립한 조국으로 귀국한 그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1월 28일 졸업함과 동시에 육군 참위(당시의 계급으로, 현재의 소위에 해당)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 그는 전북 이리에서 중대장 김백일 부위(당시의 계급으로, 현재의 중위에 해당)[2] 를 비롯하여 이한림, 정래혁과 함께 3연대[3] 창설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49년 1월에 1연대장, 두 달 뒤인 1949년 3월에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약 3년 만에 소위로부터 대령까지 그야말로 '''초고속 진급'''한 것. 이는 현대의 감각으로서는 사뭇 생소하게 여겨지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 시대상을 살펴야 한다. 이러한 진급을 한 군인들은 보통 일본군이나 국부군, 또는 만주군에서 장교로서 복무한 경력이 있었다. 즉, 애초부터 처음 임관한 햇병아리 장교가 아니란 것. 따라서 신생 군대의 편제 유지를 위해, 고급장교가 필요하다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광복군과 국부군에서 활약했던 최용덕 장군의 경우, 육군 소위로 임관한 지 6개월 만에 대위로 특진하고, 두 달 뒤에는 '''초대 국방부 차관'''으로 영전했다.[4]
1949년 5월 강태무, 표무원이 이끄는 춘천 부근 6여단 8연대의 2개 대대 병력이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작업에 걸리게 되자 월북했고, 그 책임으로 연대장이 바뀌어 김종오가 그 자리에 올라갔는데, 북한이 여세를 몰아 추가도발을 하자 이를 격퇴하고 전과를 올려 군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김종오 장군은 6.25 전쟁 발발 불과 2주 전인 1950년 6월 10일 춘천시 - 인제군 지역의 38선 경비임무를 담당하는 제6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다.
4. 전쟁 중
4.1. 화려한 전공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6사단을 지휘, 춘천-홍천 전투에서 사단 작전지역 내에 존재하는 천연 장애물인 소양강과 북한강, 홍천 큰말고개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 '''북한의 전쟁 초기 전략을 좌절시키고 동시에 국군 주력부대들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UN군이 참전할 수 있을 시간을 버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 인하여 향후 전쟁의 양상을 반전시키는 계기를 마련되었는데, '''이미 상황이 끝나 UN군이 참전할 가치를 못 느꼈다면 대한민국은 현존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니 그의 공로는 대단히 크다.'''
이후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지연전을 계속 벌이던 와중 일어난 동락리 전투(음성무극리전투)에서 휘하 7연대[5] 2대대[6] 가 단독으로 적 1개 연대를 기습, 전멸시켜 승리로 이끌었다. 참고로 이 전투는 국군이 최초로 인민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그 뒤 계속 남하하며 수안보, 이화령 전투 등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계속 지연시켰고, 이러한 전공을 인정받아 그는 1950년 7월 15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그 뒤 낙동강 부근에 최후의 방어선이 형성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한 영천 전투가 벌어지는데, 그의 6사단은 신녕(新寧) 지구에서 북한군 8사단에 '''재기 불능 상태'''가 되어버릴 정도로 막대한 타격을 주어 아군에게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공헌했고, 덕분에 김일성이 직접 '''남조선의 사단 중 제대로 된 사단은 6사단밖에 없으니 그걸 깨부셔야 한다!'''는 언급을 할 정도로 피아 모두에게 유명해졌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국군과 UN군이 북진을 공격적으로 하는 와중 7연대 1대대가 10월 26일에 최초로 압록강변 초산을 점령해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기도 하였으나[7] 이 무렵 그는 교통사고를 당해 후송당했다.
4.2. 연이은 시련
문제는 사단장이 부상당한 때에 중공군이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결국 6사단은 초산에서 후퇴하다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특히 7연대는 엄청난 타격을 입고 병력만 분산철수해서 전투력을 거의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이것이 김종오 장군의 첫 번째 대패배였는데, 일단 책임은 중공군의 개입을 가볍게 본 맥아더를 위시한 UN군 총사령부에게 있었지만, 본인 입장에서도 정말 기분 좋지 않은 일이었다.
부상에서 회복된 후에는 3사단장을 맡았지만, 곧바로 참가한 현리 전투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패배의 책임은 그의 상관인 3군단장 유재흥에게 돌아갔지만, 역시 여기서도 사단이 통째로 붕괴되고 모든 장비를 버린 채 혼란에 빠진 병력들이 무질서하게 산으로 흩어져서 후퇴하는 등의 추한 모습을 연출했고, 이는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 그에게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중공군의 남하로 전선이 교착됨과 동시에 휴전협상이 진행되자 휴전 후 유리한 고지를 획득하기 위해 고지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52년 5월 김종오 장군은 중부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인 철원지역을 담당하는 9사단장에 임명됐다.
4.3. 백마고지 전투
김종오 장군은 6.25 전쟁 중 가장 치열한 격전이 일어났던 곳들 중의 하나인 백마고지 전투를 진두지휘하였다. 1952년 10월 철원 북방의 395고지(후에 백마고지로 명명됨)를 확보하고 있던 9사단은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고 12회에 걸친 뺏고 빼앗기는 처절한 사투를 벌여 10월 15일 최종적으로 중공군을 격퇴, 이 고지를 사수하였다.
그는 적시적절한 예비대 투입과 부대 교대, 강력한 포병 및 항공전력을 이용한 입체적인 화력 지원, 그리고 필승의 신념을 고취시킨 정신교육 등으로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줌으로써 철의 삼각지를 점령하려는 적의 전략적 목적을 좌절시키는데 성공했다.
백마고지 신화를 창조해낸 그는 이후 휴전 때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보직 정예 초급간부 육성에 매진하였다.
5. 전후
휴전 후 그는 1군단장에 임명되었고 1954년 2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이후 그는 교육총본부(현재의 교육사령부의 전신) 총장,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김종오 장군은 육군참모총장 재직시인 1962년 1월 국군 사상 다섯 번째로 대장으로 진급하였다.[8] 1965년 4월 19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머지 않은 1년 후인 1966년 3월 30일 오전 9시 25분, 신당동 자택에서 지병인 폐종양으로 사망하였다.[9] 향년 46세.
그는 임종하면서 "더 일할 나이에 조국통일도 못 해보고 눈을 감으니 한스럽고 죄송할 뿐이다. 모름지기 평생의 소원인 통일 성업을 꼭 이루어 주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6. 평가
6.25 전쟁 당시 '''한국군 명장'''중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로 1983년 국방부 선정 4대 영웅으로 이름을 올렸다.#
개전 당시 주요 사단장 중 1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초기 패전이 있었으나[10] 다부동 전투, 평양입성 등의 전공이 있었던 반면 김종오 장군이나 이성가 장군은 초전의 명성(춘천, 강릉 전역)에 비해 쓰라린 패배가 한 번씩 있었다. 유재흥 7사단장은... (개전일 당시 7사단은 4500명 정도 병력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앞에 몰려든 북한군은 48000명. 7사단이라는 존재가 사라지지 않고 흩어져서라도 퇴각한게 다행인 상황이었다.)
다만 백선엽 장군의 경우 자신의 제1보병사단을 사단장 취임부터 군단장에 임명될 때까지 한순간도 손에 놓지 않고 지휘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익숙한 정예병력을 이끌었으며, 미군 1군단 소속으로 공동작전을 하거나 미군부대를 임시로 편입한 경우가 많아서 화력지원이나 보급면에서 수월한 장점이 있었다.
반대로 김종오의 경우 자신의 정예부대인 제6보병사단은 앞서 언급한 UN군 수뇌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초산에서 사실상 붕괴되어버렸고, 이후 착임한 제3보병사단은 전쟁 발발시 부대 절반이 붕괴되었다 복구되었는데 중공군의 개입 시점에 또 타격을 입어 다수의 병사가 신병으로 구성된 상태에서 방금 착임한 사단장이었으므로 부대장악을 할 시간이 부족했다. 게다가 현리 전투 당시에도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의 손에 넘어가기 전까지는 자신이 맡은 방면의 전선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종합하자면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상부의 착오로 인해 큰 피해를 본 것이다.
100살까지 장수하면서 자신의 전공을 알릴 기회가 많았던 백선엽 장군에 비해, 불과 40대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김종오 장군은 전공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후세의 기억에서 덜 조명을 받는 비운의 명장인 셈.
[1] 제7대 연합참모국장 겸임[2] 인력풀이 매우 적던 건군 초기였기 때문에, 중위 중대장 - 대위 대대장은 물론 대령 사단장도 흔했다.[3] 현재 해당 연대는 7사단 예속이다.[4] 사실 최용덕 장군은 국부군 공군 소장 출신으로 소위 임관 자체가 좀 불합리한 인사였긴 했다. 군경력이 비슷한 김홍일 장군의 경우 특별임관 형식으로 곧장 준장에 임명됐기 때문.[5] 현재의 제7보병여단. 6.25전쟁 발발 이전부터 현재까지 편제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부대이다.[6] 음성무극전승대대[7] 사실 국군 사단 중 압록강변까지 도달한 부대는 이 연대를 제외하면 없기에 지금도 6사단 내에서 초산 연대로 별칭된다.[8] 첫 번째는 백선엽 대장, 두 번째는 정일권, 이형근 대장 공동(육군총참모장을 역임한 정일권 장군과 대한민국 국군 군번 1호의 주인공인 이형근 장군의 우열을 가리기 어려워 동년 동시에 진급시킴) 네 번째는 박정희 대장이었다.[9] 현역 때도 증상이 있어 미국 월터 리드 육군병원에서 두 차례 수술 받았다. 당시 유족으로 부친(당시 68세)/모친(당시 67세)/처/4남 1녀의 자식들이 있었다.[10] 이전판에서는 건제를 잃은 적이 없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건제를 잃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한강도하 당시 1사단 예하연대들은 연락되는 예하중대가 절반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본인 회고록에 따르면 한강 이남에 모인 1사단 병력이 1000~2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개전일 기준으로 8000명이 넘던 1사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