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로
1. 개요
신약성경 27편 중에서 14편을 썼다고 알려진 주요 저자이자 신약성경 후반부의 주인공격 인물이며, 오늘날의 기독교가 있게 한 주인공이다. 그는 예수가 던진 이야기들을 신학에 기초해 정리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스라엘 밖으로, 로마 제국을 비롯한 각지에 전파했다. 그의 활동은 기독교가 보편하는 세계종교로서 성장하게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예수의 제자들도 기독교 전파에서 요부를 차지하지만, 예수의 행적을 체계 있게 정리하여 기독교의 사상에 관계된 토대를 다진 사도 바울로의 전도는 그 무게가 남다르다.35.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36. 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 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시편 44:22)"라는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로마서 8 : 35-39 (공동번역)
바울로는 기독교 박해자로서 시작해 회심한 후 사도로서 순교한다. 또한 사도들 중 최초로 '이방인의 사도'였다. 위 그림에서 보이듯 전통으로 머리숱이 적고 체구가 작은 인물로서 묘사되는데 성경에서도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먼 외모로 서술된다.
실제로 신약성서에서 권수 기준으로 80% 가까이, 단어 기준으로 1/3을 차지하는 것이 편지인데 이 중 대다수가 바울로가 저자로 명시되어 있으며 신약성서의 다른 저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글 표기가 바울로[1] , 바오로[2] , 바우로[3] , 바울[4] 등 네 가지나 된다.
그의 본명은 '사울(שאול, 샤울)'이다.[5] 이는 히브리어식이고 '바울로(Παῦλος, 파울로스)'라는 이름은 코이네 그리스어식 이름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 본명인 사울에서 바울로로 개명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알고 보면 히브리어식 이름인 사울 이외에 로마 제국내에서 통용될 수 있는 라틴어 어원의 파울루스(Paulus)와 이를 코이네 그리스어식으로 옮긴 바울로(Παῦλος, 파울로스)를 더불어 사용한 것이다. 바울로는 유대인이면서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이 있는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개종 이후에도 사울이라는 이름을 쓰고 바울로라는 이름은 전교하려고 여행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으로 쓴다. 즉 원래 유대계 로마 시민으로서 이름이 둘 있었고, 이방인들의 복음 사역을 위해 그리스/로마식 이름을 더 많이 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해당 이름은 현대 그리스어로는 파블로스(Παύλος)라고 하며, 라틴어 인명인 파울루스(Paulus)는 영미권의 남성 인명인 폴(Paul)의 어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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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로의 무덤은 로마에서 오스티아 항구로 가는 옛 도로인 ‘비아 오스티엔세(Via Ostiense)' 길가에 있었다. 4세기 초, 박해가 끝나고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칙명으로 이 무덤 위에 성당이 세워졌다. 성당이 당시 로마를 둘러싼 황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밖에 있었기에 ‘성 밖의 성 바울로 대성당’, 즉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Basilca di San Paolo Fuori le Mura)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오랫동안 전승에서만 대성당 지하에 있으리라고 추정되던 바울로의 무덤이 수년간의 고고학상 발굴 작업 끝에 2010년 대성전 지하 주 제단 아래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바울로의 무덤은 대성당 주 제단 아래 거칠게 다듬은 대리석 관의 형태로 발견됐고 그 위에는 "순교자 바울로 사도"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성인으로서의 축일은 베드로와 같은 6월 29일. 개종 축일은 1월 25일로 따로 지내는데 이 날은 바울로에게 세례를 준 성 아나니아의 축일이기도 하다. 상징물은 서한집과 큰 칼.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베드로와 함께 세워진 조각상이나 그 사람의 유해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앞에 세워진 조각상 모두 책과 칼을 든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성화에서는 반쯤 벗겨진 머리에 초췌한 얼굴인데 눈매는 부리부리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전통적인 묘사에서 이어온 묘사이며, 위경인 테클라 행전[6] 에 매우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평생 자신을 괴롭히는 가시'가 있다는데 학자 대다수는 이것을 시각장애나[7] 간질로도 여긴다. 그 사람이 과거 유부남이었을 수 있다는 소수설[8] 에 근거해 성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 갈라디아서 6:17-18에는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여기서 낙인은 그리스어 '''스티그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기적처럼 생겨난 성흔이라거나 중세의 수도자들처럼 예수라고 새긴 달군 쇠 인장이라는 해석까지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선교하는 과정에서의 갖은 박해[9] 에 따라 몸에 생긴 깊은 상처를 통해 생긴 살아 있는 증거들을 의미했다는 견해가 훨씬 많다.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2. 생애
2.1. 출생
베냐민 지파 소속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곳으로 유명한 아나톨리아의 항구도시 타르수스 태생이다.[10](상략) 나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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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번역 성서, 로마서 11장 1절
또 바울로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제국 시민권이 있었으며, 위기 상황이 닥칠 시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내세우며 이를 모면하는 장면이 성경에 꽤 나와 있다.[11] 바울로가 로마 시민권을 얻은 것은 그의 할아버지가 로마의 용병으로서 군에서 복무한 대가로서 그 가문에 주어졌다고 한다(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이것으로 짐작건대 바울로는 유대인 혈통이었으나 조부 대부터 로마인이 되었으므로 유대다운 소양은 물론 그리스어와 고대 그리스의 학문상 소양들을 익힌 듯하다.
그런 바울로가 언제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갔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제자격인 루카가 쓴 사도행전에서는 가말리엘[12]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바울로는 당시 진보했던 그리스 철학은 물론, 정통 유대교의 율법학에도 능통할 수 있었다. 실제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 보면 그의 철학과 율법학이 상당히 뛰어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엄격한 바리사이파로 활동했던 바울로는, 초기 기독교 여러 공동체 박해에 선봉에 섰다. 그 박해 중 하나는 사도행전에서 스테파노의 순교 당시 유대인 측의 증인으로 선 것이다. 바울로의 열성 있는 박해 탓에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각처로 뿔뿔이 흩어지자 그는 흩어진 그 그리스도인들까지 열정 있게 추격해 잡아들이려고 할 정도였다.
2.2. 다마스쿠스 도상 회심
여러 정황으로 볼 때, 12사도에 포함되기는 고사하고, 생전의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은 없는 듯하다. 사도행전의 기록를 보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갑자기 번쩍이면서 하늘에서 환한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엎어졌다. 그리고 빛 가운데서 음성이 들려왔는데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박해)하느냐?"라는 음성이었다. 그래서 바울로가 "주여[13] ,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자 그 음성이 말하기를 "나는 네가 핍박(=박해)하는 예수이니라." 라고 들렸고 이에 사울은 두려워 매우 떨면서 말하길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나이까?"라고 하자 그 음성은 "일어나서 시내(도시)로 들어가라. 네가 무엇을 해야할지 일러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너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듣게 되리라."라고 하였다.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그 음성은 들었지만 그 음성만 듣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그저 서 있기만 하였다.[14]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동행하던 주변 사람들이 사울의 손을 잡고 인도하여 다마스쿠스로 인도하였다. 그 후 사울은 앞을 보지도 못한 채 다마스커스로 오다가 겪은 경험이 놀랍고 충격스러워서 사흘 동안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자 환상 중에 나타난 예수의 인도로 기독교 신자 아나니아(하나니아스)의 기도로 눈을 뜨게 되었고 그 후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마식 이름인 바울로(파울로스, 바오로, 바울)를 사용하였다. 이후 다마스쿠스의 유대교 회당에서 예수를 적극으로 전파했다.
이 변화로 바울로는 정통 유대교인들에게 배신자로서 취급되어 살해 위협을 받고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넘어 다마스쿠스를 탈출해 목숨을 겨우 건졌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연도를 짐작할 수 있는데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제11장을 보면, 유대교인들이 '아레타스 왕'의 관리와 결탁하여 바오로를 죽이려 했다고 토로하고 있어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 4세가 로마 제국 측으로부터 다마스쿠스 통치권을 이양받은 서기 37년에서 아레타스가 죽은 서기 40년 사이로 좁혀진다. 이후의 행적은 불확실하지만, 아라비아로 가서 지냈다는 갈라티아서의 내용으로 봐서 그곳에서 은둔하면서 자신을 가다듬었던 걸로 보인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아라비아를 아라비아 반도가 아니라 요르단 강 동안에 소재한 아라비아로 해석할 때는, 바울로가 요르단 강 동안에서 지내면서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2.3. 제 1차 선교여행
이후 바울로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자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전적을 생각해 바울로를 믿지 못하여 만나기를 꺼렸지만, 바르나바(개역한글, 개역개정 성경의 바나바)가 중재하여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다고 한다. 그러고서 바르나바와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곳의 교회에서 활동한 듯하다.
그러다가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바르나바와 바울로를 선택하여 선교사로 파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려고 본격적으로 길을 떠나게 된다. 유대식 이름이었던 사울에서 헬라식인 바울로 이름을 바꾼 것도 이때부터다. 초기에는 키프로스와 소아시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우선 키프로스의 수도인 파포스(바보)에 있는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예수를 전했다. 이 때 총독의 앞에서 자신을 망신 주려는 마술사를 저주하여 눈을 멀게 한 일화도 존재한다. 이 후 베르게(버가)에 이르렀을 때 마르코가 여로를 버티지 못하고 하차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일은 후에 2차 여행에서 바울로와 바르나바가 길을 갈라져 떠나는 계기가 된다.
어쨌든 타우르스 산을 건너 피시디아 안티오키아로 도착한 바울로는 회당에서 지속적으로 설교를 하면서 신도들을 늘려나간다. 이에 유대인들은 귀족들과 세력가들을 충동질해 바울로에게 축객령을 내리려고 했...는데, 이미 바울로는 일 다 끝내고 떠날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바울로는 다음 목적지인 이고니온에서도 열심히 선교활동을 이어나간다. 그런데 본격적인 문제가 이 때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피시디아에서 바울로를 반대했던 그 유대인들이 아예 바울로를 따라다니면서 그 지역 사람들을 선동하며 훼방을 놓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는 선동당한 사람들이 바울로를 잡아 돌로 쳐 죽이려고 달려들기에 이른다. 때문에 바울로는 이고니온에서는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루스드라로 떠나야 했다.
루스드라에서는 조금 황당한 일이 있었는데, 루스드라에서 한 선천적으로 병이 있어 서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설교를 아주 잘 경청하는 걸 보고는 바울로가 그를 걷게 한 일이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바울로를 헤르메스, 바르나바를 제우스의 현신이라고 소리치며 두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려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대경실색한 두 사람이 아니라고 항변하여 다행히 무사히 지나가긴 했다.
그런데 그 후, 위에서 얘기한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또 따라와서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그런데 하필 그 때 바울로를 발견한 사람들이 문답무용으로 바울로를 잡아 돌로 치고 밖에 내버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소식을 듣고 뒤늦게 바르나바 등이 달려왔을 때, 죽은 줄 알았던 바울로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이 후 몸을 추스른 바울로는 더베로 가서 다시 선교활동을 하고, 그 후 루스드라, 이고니온 등의 왔던 길들 다시 되짚어 출발지인 안티오키아로 귀환하는 것으로 제 1차 선교여행을 성공적으로 끝마친다.
2.3.1. 1차 여행 후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바울로 일행은 여기서도 수난을 겪는다. 유대교 출신의 교인들이 안티오키아에서 설교를 한 일이 있었는데, 그 내용인즉 할례는 모세의 법에 정해진 의식이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바울로 일행들과 언쟁이 벌어지는데, 문제는 이 다음이었다. 갈라티아에 유대인들이 들어와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이것을 부정한 바울로는 사기꾼이라는 소리가 나돌고 있으며, 심지어 갈라티아 교회의 사람들 중 일부는 그걸 믿고 할례를 받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로는 크게 실망하여 갈라티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니, 이것이 바로 복음 대헌장이라 불리는 '갈라디아서'이다.[15] 그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지, 아예 갈라디아서 서두부터 노골적으로 '''"분명히 내가 그렇게 예수를 가르쳤는데 딴 소리가 들어오니까 금방 그걸 또 믿고 배신하는걸 보니 참 놀랍다"'''며 비판하고 있다.
2.4. 제 2차 선교여행
1차 여행 항목에도 짧게 나와 있지만 출발 전부터 작은 트러블이 발생했다. 1차 여행 때 마르코(마가)가 중도에 하차한 것 때문에 바울로와 바르나바가 마르코를 데리고 갈 지 말 지 크게 다툰 것이다. 이로 인해 여행 팀이 두 팀으로 갈라지게 되고,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해로를 통해 키프로스로 다시 향했으며, 바울로는 실라(본명은 실루아노스)를 데리고 킬리키아(길리기아) 쪽으로 향하게 된다.
1차 여행 때는 안티오키아에서 출발해 위쪽으로 C자를 그리면서 향했는데, 이번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곧바로 위로 올라가 루스드라에 도착하게 된다. 여기서 루스드라에서 바울로와 합류한 제자가 바로 티모데오이다. 이로 인해 바울로 팀의 활동이 더 활발해지게 된다. 바울로는 소아시아 방향의 비두니아 쪽으로 가고 싶어했는데, 성경에 따르면 '예수의 영이 가지 못하게 막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바울로는 비두니아와 동서 반대편에 있는 드로아[16] 에서 잠시 머무르게 된다. 이게 무슨 일인고 하니, 바울로의 환상에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 도와달라고 하니, 바울로는 '우리를 마케도니아로 보내시는 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이 때 의사 '루카(누가)’를 만나게 되는데, 이 사람은 이후 1차 선교여행 때 지병을 얻게 된 바울로의 주치의이자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이윽고 배를 타고 마케도니아의 필리피아에 도착한 바울로 일행은 거리에서 한 귀신들린 소녀를 만나게 되는데, 이 소녀가 바울로 일행을 만날 때마다 그들을 향해 "이 사람들이 하느님의 종이다"라고 몇날 며칠을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바울로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그 귀신을 쫓아버리는데, 여기서도 문제는 역시 발생했다. 이 소녀를 이용해 복채를 벌어먹던 자들이 행정관에게 바울로를 고소한 것이다. 이 행정관은 바울로의 변론을 제대로 들을 생각도 않고 옷을 벗기고 채찍으로 치라고 명하게 되니, 바울로와 실라는 졸지에 매타작을 당해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그 날 한밤중, 바울로와 실라가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자 '''별안간 지진이 일어나 감옥이 박살이 나 죄수들이 몽땅 풀려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망연자실하여 '난 죽었다'를 외치며 자결하려는 간수장[17] 을 소리를 질러 말리고 그의 배려로 치료를 받은 바울로는 간수장과 그 가족들에게 기도를 해 준다. 다음날 행정관이 석방조치를 내리자 바울로는 "로마 시민을 재판도 없이 채찍질하고 이제 와서 그냥 나가라고 하는 것이냐? 직접 와서 우릴 데려가라고 하시오."라고 요구한다.[18] 이 사실을 알게 된 행정관은 당장 달려와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제발 나가달라고 빌었고, 바울로는 별 말 없이 관청을 떠난다.
이 후, 바울로는 필리피아를 떠나 테살로니키로 가게 되는데, 여기서도 여느 때처럼 선교활동을 하려니 이번엔 또 다른 유대인들이 나타나 불량배까지 동원해 바울로를 박해하기 시작한다. 이 때 바울로는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야손의 도움으로 밤에 몰래 피신하여 베뢰아로 가게 된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테살로니키의 사람들보다 훨씬 신사적이어서(...) 설교를 더 잘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식이 또 테살로니키에 있던 그 유대인들의 귀에 들어가자 '''이들도 베뢰아까지 쫓아와''' 악성 루머를 퍼뜨리기 시작한다. 결국 바울로는 티모데오와 실라를 상황 보고역으로 베뢰아에 남겨두고 혼자 배를 타고 신들의 천지이자 전도난이도 최종보스급이라 할만한 '''아테네'''로 향한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날마다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간의 토론이 벌어졌는데, 바울로는 테모디오와 실라가 올 때까지 매일 회당에서 사람들과 토론을 즐겼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등 쟁쟁한 그리스 학자들 앞에서 한 연설에는 바울로의 학문상 배경이 잘 드러난다. 그러다가 바울로의 설교를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우린 잘 못알아듣겠는데, '아레오바고(아레오파고스)'[19] 라는 대형 연극장이 있으니까 거기서 대대적으로 설명 좀 해주쇼"라고 하니 바울로는 속으로 기회가 왔다 쾌재를 올리며 아레오바고로 향한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바울로는 그리스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했다고 한다.
바울로의 노력으로 그리스인(헬라인)들도 기독교에 귀의했지만,[20] 기독교 내부의 유대인들은 그리스인들도 할례를 위시한 유대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열렸고 바울로는 그리스인들에게 유대인들의 율법을 강요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회의는 그리스인들에게 유대인들과의 친교를 목적해 음식과 할례 문제에 조심하자는 차원에서 마무리되었다. 이 후 바울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스로 향한다.22 바울로는 아레오파고 법정에 서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여러 모로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23 내가 아테네 시를 돌아다니며 여러분이 예배하는 곳을 살펴보았더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한 채 예배해 온 그분을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24 그분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사람이 만든 신전에서는 살지 않으십니다.
25 또 하느님에게는 사람 손으로 채워드려야 할 만큼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6 하느님께서는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어 온 땅 위에서 살게 하시고 또 그들이 살아갈 시대와 영토를 미리 정해 주셨습니다.
27 이리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
28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 하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또 여러분의 어떤 시인은 '우리도 그의 자녀다.'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29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느님을, 사람의 기술이나 고안으로 금이나 은이나 돌을 가지고 만들어낸 우상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30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무지했던 때에는 눈을 감아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는 사람에게나 다 회개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31 과연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분을 시켜 온 세상을 올바르게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고 또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그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 사도행전 17:22~31 (공동번역)
코린토스에서 '아퀼라’와 '브리스길라'라는 로마 출신 유대인 기독교도 부부를[21] 만난 바울로는 부부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는데 이 부부 또한 바울로에게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바울로의 생업이 천막 제작이었는데, 남편인 아퀼라도 마침 천막 제작업을 하는 사람인지라, 바울로는 같이 천막 제작을 도우며 회당에서 선교활동을 지속하게 된다. 그러기를 6개월, 드디어 마케도니아에서 티모데오와 실라가 도착해 교회가 안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런데 아직 테살로니키 성도들에게 아직 미성숙한 면이 보인다는 보고를 들은 바울로는 장문의 편지를 두 통 써서 테모디오 편에 보내 성도들에게 가르치게 해 주는데, 이 편지가 바로 '데살로니가 전·후서'이다.
코린토스에서도 유대인들은 역시 바울로를 반대했는데, 바울로는 아예 자기 옷을 털면서[22] '이제 니들은 벌을 받든지 어떻게 돼도 난 모른다.'라며 두 번 다시 회당에 가지 않는다. 그렇게 코린토스에서 가르치기를 1년 6개월을 하고 있었는데, 웬일로 유대인들의 회당장인 크리스보가 바울로에게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자 분노한 유대인들은 크리스보를 파면하고 '소스데네'라는 자를 회당장으로 앉혀 바울로를 신임 총독 갈리오에게 고소하게 하는데, 이 후의 일이 또 골때린다. 유대인들이 총독에게 '하느님을 섬긴다는 놈이 율법을 어기라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둥 온갖 고소문을 읊고 나자 바울로의 차례가 되어 변론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갈리오가 변론을 중지시키고는 하는 소리가 '''"이게 무슨 중범죄나 안좋은 일이면 내가 들어야 하는게 맞는데, 지금 고소문 들어보니까 너희 유대인들끼리의 종교 문제 아냐? 굳이 나까지 건들지 말고 니들끼리 처리해라. 난 니들 사정 가지고 재판관 노릇하고 싶지 않으니까."'''...되시겠다. 한마디로 고소를 각하한 것. 회당장 소스데네는 그 자리에서 속 터진 유대인들한테 몰매를 맞았다(...).
이렇게 허탈한 재판이 끝난 후, 유대인들에게 몰매를 맞고 나서 마음이 바뀐 '''소스데네까지 새 성도로 맞아들이는''' 일까지 있은 후에 바울로는 1년 6개월의 여정을 마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간다.
2.5. 제 3차 선교여행
준비를 마친 바울로는 드디어 안티오키아를 출발한다. 이번 제 3차 선교여행은 바울의 네 번에 걸친 여행 중 최장거리로 꼽힌다. 바울로는 제 2차 여행 때 불발됐던 에페수스 행을 계획했지만, 에페수스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있으니 일단 뒤로 미루고 우선 갈라티아와 프리기아로 향한다.
시점을 잠시 돌려서 바울로의 다음 목적지인 에페수스에서는 아폴로라는 언변이 뛰어난 청년이 회당에서 예수에 대해 설교하며 가르치고 있었다. 아폴로의 지인이었던 브리스길라 부부는 아폴로의 설교를 듣다가 아폴로가 세례 요한의 세례 밖에는 모르고 사도행전의 초반에 나왔던 12사도들에게 성령의 불꽃이 내려온 그 세례는 모르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다. 이후 아폴로는 부부에게 그 세례에 대해서 다시 배우게 된다. 이후 성령에 대해 알게 된 아폴로는 그 길로 코린토스로 떠나 더욱 열심히 교육활동에 힘쓴다.
한편 아폴로가 에페수스를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이어서 바울로가 에페수스에 이른다. 바울로는 여기서 열심히 선교활동을 했는데, 그 중 몇몇 사람들이 예수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들에게 예수와 성령에 대해 가르친 뒤,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방 출신인 그들에게도 12사도에게 내려온 것처럼 성령이 내려 방언과 예언을 시작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이 사람들의 숫자가 '''정확히 12명이었다.''' 바울로는 그 후로 3개월 동안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친다. 하지만 바울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바울로를 비난하자 그는 신자들을 데리고 떠나 두란노(티란노스) 서원으로 가서 강의활동을 했다.[23]
그러던 중 코린토스에서 변고가 들려왔는데, 코린토스 교회의 성도들 사이에 이론이 나누어져 학파가 생겨 바울로파, 아폴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분열되었다는 것이었다. 경악한 바울로는 편지를 써서 티모데오 편으로 코린토스 교회에 보내니, 이것이 '고린도 전서'다. "한 분이신 예수가 어떻게 넷으로 갈라진단 거냐? 십자가 처형을 예수님이 당했지 내가 당했었냐?"라는, 성도들을 야단침과 동시에 당론이 나뉘어지면서 생긴 성도들의 의문점에 대해 답변을 하는 내용이다.
어쨌든 그 후, 바울로는 에페수스에 2년간 머무르면서 선교활동과 함께 기적으로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도 계속한다. 이번엔 제법 오래 자리잡고 활동한 덕에 그에 대한 소문과 명성이 꽤 멀리 퍼져나갔다. 명성이 퍼지다 못해 바울로의 옷가지를 멋대로 가져가 사용하기까지 했는데 병이 낫고 귀신이 도망치기까는가 하면 마술사들도 바울로의 이름을 팔아 귀신이 들린 사람들에서 귀신을 내쫓아 내는 공연을 했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유대교의 제사장인 스케바의 일곱 아들들이 이 소문을 듣고는 자기들도 민중들에게 인기를 끌어볼 목적으로 그 거리에서 귀신이 들려 골치깨나 썩이던 사람을 데려와서 구경꾼들을 불러모으고는 "바울로가 믿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니 귀신은 당장 나오너라"하고 외쳤다. 그런데 그 귀신이 그 형제들에게 말하길 '''"예수랑 바울로 둘 다 내가 잘 알거든? 니들이 누군데 그 이름을 입에 올리냐?"'''며 일곱 형제들을 깔아뭉개면서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흠씬 두들겨 패고,[24] 그 형제들은 만신창이가 된 채 알몸으로 도망치면서 오히려 망신만 실컷 당한다. 이 사건으로 바울로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게 된 것도 모자라 사람들이 바울로에게 찾아와 회개하는 일까지 생기기도 한다. 또한 마술 등을 생업으로 삼던 사람들도 회개하고는 마술에 대한 책을 모두 모아 불태우기까지 하는데, 기록하기를 태운 책 값이 전부 '''약 5만 드라크마.'''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일당이 1드라크마'''였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라 할 것이다.
바울로는 에페수스에 머문 지 거진 3년이 다 채워져가자 슬슬 에페수스를 떠나 마케도니아, 아카이아,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갈 계획을 세우고 티모데오와 에라스투스 두 사람을 선발대로 삼아 먼저 마케도니아로 보낸다. 그러던 중 또 소동이 벌어지는데, 에페수스의 '데메트리우스'라는 은 장인이 자기 공방 직원들이 바울로에게 전도를 받고 자기가 하는 일이 우상을 섬기는 짓이라며 줄줄이 사표파티를 벌인 것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혔던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대표되듯, 에페수스와 그 근방지역은 그리스 신화의 사상이 팽배하던 때였으므로, 은으로 비싼 신상을 만들어 부를 유지하는 은 장인들에게는 신상 제작을 못하게 되면 먹고 살 길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었다. 이에 화가 난 데메트리우스는 같은 은 장인들을 소집하여 "이 작자 땜시 우리 직장이 하루아침에 개차반 취급당하게 생겼고, 아르테미스 여신의 위엄이 땅에 떨어지게 생겼다."라고 주장한다. 그러자 장인들도 분노하며 그 자리에서 "아르테미스 만세"를 외쳐대기 시작한다.
이내 민중들까지 흥분하여 대국민시위를 방불케하는 일대 소동이 터지고, 이들은 연극장으로 몰려가서 큰 소리로 "아르테미스여!"를 외쳐대며 바울로의 제자인 가이우스와 아리스타르쿠스를 연극장으로 연행한다. 소식을 들은 바울로는 급히 연극장으로 가려 하지만 에페수스의 의원들 몇이 찾아와 "지금 나가시면 선생님 짱돌맞아 죽습니다"라며 바울로를 말리고, 거기 관리 중에 있던 바울로의 친구도 급보를 보내 연극장으로 오면 안된다고 주의하니, 바울로도 하릴없이 기다리게 된다. 한편 그 무렵 연극장은 완전히 혼돈의 카오스라는 표현도 모자랄 정도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거대한 연회장을 꽉꽉 들어채운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할 소리만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니 누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 된 것이었다. 그렇게 소리지르기를 장장 2시간... 서기장이 나타나 사람들을 간신히 진정시킨 후 자초지종을 들은 뒤 사람들에게 연설을 시작한다. '''"제우스와 아르테미스가 우리 최고의 신인 걸 누가 모릅니까. 그리고 이 사람들이 우리 여신을 모욕이라도 했습니까, 뭘 훔치기라도 했습니까? 고발할게 있으면 정식으로 고발을 하고, 다른 원하는게 있으면 의회에 청원을 하세요. 아무 이유도 없이 와서 떠들다가 로마한테 소요죄로 책잡힐 일 있습니까?"'''라는 논리정연한 연설에 민중들은 순식간에 가라앉고 일시에 모두 흩어진다. 덕분에 바울로는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소동이 끝난 후, 바울로는 성도들과 작별을 한 후 계획대로 에페수스를 떠나 마케도니아를 거쳐 드로아에 도착했다. 거기서 1주일을 머물며 선교활동을 한 후,[25] 필리피아로 가서 제자인 티투스를 기다렸는데, 바울로를 찾아온 티투스가 코린토스에서 바울로를 반대하던 사기꾼교사들이 모두 쫓겨나고, 그들에게 속아서 잘못 생활하던 교인들이 신앙을 회복했다는 희소식을 가져온다.[26] 이에 바울로는 뛸 듯이 기뻐하며 다시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고린도 후서'이다. 바울로는 내친김에 아예 다시 한번 더 코린토스로 직접 찾아가 3개월간 교인들을 격려하며 교육을 했다. 그리고 이 근방에서 갈 만한 곳을 다 다녀왔다고 판단한 바울로는 로마로 갈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코린토스에서 로마 교회에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 중에서도 유명한 로마서 되시겠다.
그 후 배를 타고 예루살렘을 경유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이 바울로가 해로를 통해 간다는 정보를 입수해 아예 바다 위에서 그를 죽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온다. 바울로는 할 수 없이 계획을 변경해 육로를 통해 마케도니아로 간 뒤, 드로아를 지나 미틸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잠시 머물며 에페수스의 장로들을 소집하는데, 장로들이 모이자 바울로는 장로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말을 마치고 장로들과 함께 앉아 마지막으로 기도를 올리고는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그 후 잠시 여러 군데를 돌며 작별인사를 하다가 카이사리아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그런데 어느날 유대에서 아가버스라는 선지자가 급히 바울로에게 왔는데, 아가버스가 다짜고짜 바울로의 허리띠를 벗기더니 그 허리띠로 자기 손발을 꽁꽁 묶었다. 그리고 "이 허리띠의 주인을 이렇게 묶어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넘겨주겠다는 성령님의 예언이 있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놀라 바울로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마라고 애원하지만, 바울로는 "자꾸 그러시면 제 마음이 더 아픕니다. 저는 이미 죽을 것도 각오한 몸입니다"라며 뜻을 바꾸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바울로는 배를 타고 떠나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되니, 이것으로 제 3차 선교여행이 막을 내린다.22 이제 나는 성령의 지시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인데 거기에 가면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릅니다.
23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어느 도시에 들어가든지 투옥과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나에게 일러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4 그러나 내 사명을 완수하고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전하라고 주 예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임무를 다할 수만 있다면 나는 조금도 목숨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25 나는 이제 분명히 압니다. '''여러분은 모두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하느님 나라를 줄곧 선포하였으니ㅡ
- 사도행전 20:22~25 (공동번역)
2.6. 제 4차 선교여행(로마 여행)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교회들에서 기근 탓에 고통받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배려해 내놓은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27] 간 바울로는 교회에 무사히 헌금을 전달한 후 원로들과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에게 그간 세 차례 걸친 선교여행의 결과를 보고한다. 그런데 원로들이 "당신이 모세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걸 유대인들이 눈치챘으니 당신을 보면 죽이려 들 거다. 그러니 형식으로라도 정결 예식을 치러서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게 하자"는 제안을 한다. 바울로도 이를 받아들여 7일간 정결예식을 치른다. 그런데 정결예식을 마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시내로 나갔을 때 유대인들의 충동에 넘어간 사람들의 폭행에 죽을 뻔했다가, 로마군에 넘겨져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유대인들에게 그 자리에서 맞아죽을 뻔한 찰나, 타이밍 좋게 소란을 듣고 달려온 로마 군대의 천부장 클라우디우스 리시아스가 달려와 바울로를 격리시킨다. 그 후 리시아스가 무슨 일인지 물었는데, 사람들이 하도 제 말만 지껄이니 알아들을 수가 없어 일단 바울로를 진영으로 데려가려 했다. 그런데 바울로가 갑자기 리시아스에게 저 사람들에게 말 좀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니 리시아스가 허락을 했다. 그런데 바울로는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 대고 "너희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하느님이 나를 이방인들에게 전도를 하라고 명하셨다"는 어그로성 연설을 했고, 당연히 민중들은 분노하여 더 날뛰기 시작한다. 이에 천부장이 진영 문을 걸어 잠근 뒤 바울로에게 채찍질을 하여 심문하라고 명령한다. 2차 여행 때 실라와 감옥에 갇혔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바울로는 그 때처럼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밝히고 재판도 없이 날 패겠냐고 반박한다. 리시아스도 로마 시민이긴 했지만 그는 태생으로 로마 시민이었던 바울로와 달리 돈을 주고 시민권을 취득한 사람이라 짬밥(?)의 격이 달랐다.[28]
리시아스는 바울로가 고소된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다음 날 의회를 소집하고 바울로를 데려온 뒤, 대사제 아나니아를 비롯한 유대인들을 모두 불렀다. 아나니아가 분기탱천하여 바울로의 입을 때려 닥치게 하라고 길길이 날뛰자 바울로는 "회칠한 담이여,[29] 율법을 어기는 놈이 율법에 따라 날 심판하겠다고? 하느님이 먼저 널 치실 것이다!"라며 저주한다. 그런데 옆에 있던 사람들이 "야 임마 네가 감히 대사제님을 그렇게 욕하냐!"고 항의하자 바울로 왈, "아 대사제이셨어요? 저는 그런 줄도 몰랐네요. 대사제를 존경하라고 성경에도 써 있는데 제가 설마 대사제님을 욕할까봐요?"라며 쌩을 깐다. 바울로가 몰랐을 리는 당연히 없고 대사제씩이나 되는 인간의 행동이 그따구냐 하는 느낌의 조롱에 가깝다.
그런데 바울로의 말 한마디 때문에 별안간 시나고그가 난장판이 되어버린다. "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아들이고, 바리사이파 사람이고, 부활로 인해 심문받는다"[30] 라고 외쳤는데,''' '부활' '''한마디에 자리에 참석했던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저들끼리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인즉슨 사두가이파는 부활을 믿지 않고, 바리사이파는 의인의 부활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부활같은 게 어딨냐 VS 부활은 있다'''의 구도가 이루어진 것이다.[31] 물론 바울로는 시나고그에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가 섞인 걸 알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의도로 한 말이었으나, 이게 너무 크게 번져서 폭력 사태로까지 번진다. 바리사이파 일부가 바울로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건 덤. 결국 소란통에 바울로가 말려들 것을 우려한 리시아스는 의회를 중단하고 바울로를 다시 진영으로 데려간다.
그날 밤, 예수가 환상으로 나타나 "용감해져라. 예루살렘에서 증거했듯이 로마에서도 네가 날 증거해야 한다"고 바울로를 격려하였다. 한편 40여 명의 유대인들은 대사제 아나니아에게 몰려가 바울로를 죽일 때까지 단식투쟁을 벌이겠다 맹세를 하고, 리시아스에게 바울로를 상세히 조사하고 싶으니 보내달라고 말해 길에서 그를 죽이겠다는 음모를 꾸민다. 하지만 바울로의 조카가 그걸 듣고는 즉시 바울로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전한다. 바울로는 간수장에게 부탁해 조카를 리시아스에게 보냈고, 자초지종을 들은 리시아스는 조카에게 엄중히 함구령을 내리고 밤 9시 경, 바울로를 말에 태운 뒤, 보병 200명, 기병 70기, 창병 200명, 총 470명의 대규모 호위부대를 바울로에게 붙여 카이사리아의 총독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펠릭스에게 보낸다. 길목에서 기다리던 유대인들은 덤볐다가 꼬치되고 싶진 않으니 그저 이만 갈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바울로가 안티파트리를 거쳐 카이사리아에 도착해 펠릭스에게 인계되고, 리시아스의 바울로를 변호하는 편지를 받은 펠릭스는 일단 바울로를 관저에 연금시킨다. 5일 후, 대사제 아나니아와 장로들이 변호사 테툴루스를 데리고 찾아오자 펠릭스는 정식으로 청문회를 여는데, 테툴루스는 온갖 아부를 늘어놓은 뒤, "이 자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소동을 일으키는 자이자 나사렛에서 생긴 이단 교파의 우두머리다"라며 바울로를 맹비난한다. 그러자 펠릭스는 바울로에게 변론을 시킨다.[사족]
바울로가 "제가 예루살렘에 있었던 건 고작 12일 밖에 안되니 그 짧은 동안에 선동이고 나발이고를 할 시간도 없을 뿐더러, 저 사람들은 말은 저렇게 하는데 제가 실제로 그러는 걸 본 적도 없으니 증거도 못 낼걸요. 그리고 내가 정결 예식을 드리는 걸 유대인들도 봤으니 제가 뭘 잘못했으면 그 사람들이 앳진작에 와서 고발을 했겠죠. 저 작자들한테 뭐 본 게 있냐고 한번 물어보셔도 좋습니다."라고 완벽하게 변론을 한다. 펠릭스는 리시아스의 편지대로 바울로는 무죄함을 알게 되고, 대신 그냥 놔줬다간 난리날테니 천부장 리시아스가 올 때까지 판결을 미루겠다고 하면서 '''사실상 재판을 무기한 연기한다.''' 당연히 펠릭스는 그 후 리시아스더러 오라고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펠릭스는 바울로에게 자유행동을 허락하고 가끔씩 식사에 초대해 복음과 관련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복음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뇌물을 바라고 한 것이긴 하지만.
이 후 펠릭스는 전근을 가고, 포르키우스 페스투스가 후임 총독으로 부임한다. 페스투스는 부임 후 잠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대제사장 일파가 "쟤 좀 예루살렘으로 이송해주세요"라고 청한다.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에 매복해 있다가 죽이려고 한 것. 하지만 페스투스는 "나 어차피 다시 가야 됨. 정 그러면 니들 중에 오고 싶은 사람들이 따라오면 되고."라며 그들의 요청을 씹는다. 유대인들도 어쩔 수 없이 그에 따라가게 되고, 8일 후 카이사리아에서 다시 재판이 열린다. 그런데 이 재판은 열리자마자 광속으로 끝나버렸는데, 이유인즉 '''시작부터 바울로가 "나는 이 고소죄목들에 대해 무죄하니 재판을 받아야 한다면 로마 황제에게 직접 재판을 받겠다"라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수차례 언급했듯 바울로는 로마 시민이니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는다면 결과는 이미 난 것이나 다름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황제의 판결에 따라 유대인들이 더이상 바울로를 건드리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대제사장 일당은 그 자리에서 전원 뒷목을 잡게 된다. 며칠 뒤, 마침 페스투스의 부임을 축하하기 위해 친구인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가 누나 베르니체와 함께 페스투스를 찾아왔고,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바로 다음 날, 황제에게 상소를 한 바울로의 공청회가 개회된다. 왕이 온 덕분인지 회장을 무지 화려하게 꾸몄으며, 빈객들은 또 얼마나 많이 몰려왔는지 재판장이 무슨 연회장처럼 보일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윽고 바울로의 자기 변론이 시작된다. 바울로는 간단한 주제로,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죽였고, 그 후에 회심하여 예수를 전하게 되었으며, 여기저기를 다니며 선교활동을 하는데, 이 일 때문에 유대인들이 나를 고소했다"라는 취지의 변론을 한다. 그러자 페스투스는 바울로의 자기 신앙이 담긴 변론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네가 네 지식 때문에 미쳤구나"하고 크게 호통을 친다. 하지만 바울로는 이 일들은 헤롯께서도 아시는 일이라며 태연히 반박한다. 이어서 바울로가 아그리파스에게도 "예언자를 믿으시겠지요?" 라고 묻는다. 아그리파스는 "네가 말 몇마디로 날 기독교인으로 만들려고?"라면서 비웃었지만 바울로는 "말이 많든 적든 여기 있는 모든 분이 저처럼 구원받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아, 이렇게 수갑 차는 건 빼구요."라며 재치있게 답변하고, 공청회는 곧 종료된다. 이 후 아그리파스와 베르니체, 페스투스는 셋이 모여서 "아무리 봐도 죄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왜 괜히 황제한테 상소를 해서 일을 질질 끌지?"라며 쑤군댄다.[32]
서기 60년 말, 바울로는 마침내 로마로 가는 배에 오른다. 시돈에서 뱃머리를 폴리데우케스 상으로 장식한 상선 알렉산드리아 호로 환승하여 항해를 계속하던 중, 폭풍으로 인해 배가 더이상 가지 못하게 되어 크레타 섬에 잠시 정박하게 된다. 그런데 정박이 예상 외로 길어지자 바울로가 "이러다가 폭풍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게 될 테니 그냥 여기서 겨울을 마저 보내고 다음에 출항하자"고 제안했지만 백부장 율리오가 이를 거절하고 항해를 강행한다. 하지만 바울로의 우려대로 화창해진 줄 알았던 날씨는 도로 폭풍 '유라굴로'로 인해 사납게 바뀌고, 배는 아주 낙엽처럼 휘날린다. 우여곡절 끝에 폭풍이 멎고 배는 항로를 완전히 상실하여 졸지에 조난신세가 되고 2주간 바다에서 표류하게 된다. 그 와중에도 바울로는 "하느님이 날더러 넌 황제한테 가야지 않겠냐. 내가 나의 항해사를 보내줄 것이라고 하셨다"고 선원들과 탑승자들을 격려하며 생존의지를 잃지 않도록 한다.
이후 육지가 가까워지고 배는 몰타 섬에 상륙한다. 원주민들은 그들에게 불을 피워주는 등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런데 바울로가 장작을 모닥불에 넣자 장작 틈에 있던 독사가 불에 놀라 튀어나와서 바울로를 물었다. 원주민들은 이걸 보고 "살인자인갑다. 정의의 신께서 죽이시나 보네." 하고 쑤군대는데, 바울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독사를 떼어 불에 툭 던져버렸다. 놀랍게도 상처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원주민들은 우디르급 태세전환을 시전하며 "신이신갑다"라고 놀라워한다. 바울로는 석 달간 섬에 머물며 원주민들을 보살피면서 겨울을 보내며 지원을 받은 뒤, 다시 배를 타고 마침내 61년 초, 로마에 입성한다.
바울로는 아직 재판을 받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수갑으로 로마 군인 한 명과 묶인 채 한 민가에 셋방을 얻어 지내게 된다. 말이 재판대기지 사실상 자유행동 상태였다. 이후 소문이 퍼져 바울로가 있는 셋방에 무지막지하게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하고, 바울로는 그들에게도 밤낮없이 바쁘게 설교를 하며 바쁘게 지낸다. 이렇게 해서 바울로의 마지막 선교여행은 최종 목적지인 로마에서 멈추게 되었지만, 바울로는 거기서 죽을 때까지 선교활동을 하며 살게 되었으니, 바울로의 선교사역은 사실상 성공으로 마무리되었다 할 것이다.
셋방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하면서 거기서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썼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로의 이후 행적은 기록으로 상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대체로 추정하건대 바울로가 1차 석방되었던 듯하다. 이후 바울로는 로마 제국에서 선교하다가 서기 64년 로마 대화재 이후에 다시 붙잡혔고 네로 황제에게 그 주범으로 몰려 서기 65년 또는 67년에 참수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화형이나 십자가형이 아닌 이유는, 로마 제국 시민권을 보유했기 때문이라 전해진다. '''바울로 본인은 예수처럼 십자가형을 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오히려 아쉬워했다고.'''
바울로의 마지막 말은 “예수”로 알려져 있다. 처형된 시기를 다룬 의견은 학자마다 다르지만, 서기 62년에서 68년간라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바울로가 참수될 때 그 목이 땅에 떨어지며 세 번에 걸쳐 튀었고 그 자리마다 샘이 솟아났다고 전해진다.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바울로의 참수터에 그를 기리는 트레 폰타네 성당(Chiesa di San Paolo alle Tre Fontane)[33] 이 세워졌다. 성당은 5세기에 세워진 후 16세기에 재건축되었다.
평생을 복음 전파에 바쳤다는 이미지와 달리, 바울로의 선교 여행 기간은 48년에서 60년으로 12년 남짓하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바울로를 중심으로 당대의 선교 운동이 매우 빠르게 이루어졌음을 말해 준다.
생전 바울로는 베드로가 있는 로마 교회를 방문한 후 로마 교회의 후원을 받아 히스파니아(이베리아 반도)를 전교하려고 예정했다. 원래 바울로가 소아시아에서 전교할 때는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파송되어 그곳에서 후원받았지만, 아무래도 로마 교회가 히스파니아에 그나마 조금 더 가까운 데다가 당시 히스파니아는 로마의 곡창지대였기에 로마와 히스파니아 간 교통이 잘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히스파니아로 가고자 한 까닭은 이베리아 반도가 유럽 땅 끝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말 그대로 땅 끝까지 가서 전교하려 했던 것. 결국 바울로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그 꿈은 바울로 대신 사도 야고보가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3. 사상
예수 그리스도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된 야고보와 예수의 직계 제자들인 12사도들은, 주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선교했다.[34] 그러나 바울로는 '''이방인의 사도'''[35] 로서 당대의 코스모폴리 분위기에서 그리스 등 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로마 제국 전역에 선교하여,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다만 바울로도 이방인에게 차별 없이 선교하였을 뿐, 유대인에게 선교 우선권을 두었다. 이것은 유대인이 선택받은 백성인 만큼 복음을 먼저 접할 우선권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 전도할 도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유대인 밀집 지역의 회당으로 가서 전도하고 거절당하면 이방인들을 상대로 전도하기 시작했다. 물론 십중팔구 회당에서는 바울로를 핍박하고 쫓아내기 일쑤였고 결과상으로 이방인 전도자 수가 유대인 전도자 수보다 훨씬 많았다.
알고 보면, 야고보와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 12명과 달리 바울로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고 유대교 쪽으로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학을 수학하며 외웠고 로마 제국 시민권자로서 당시 그리스(헬라) 철학에도 상당히 능통하였다. 한마디로 타고난 천재. 이렇게 체계 있는 학문을 달달달 외우고 익힌 사람이라서 바울로는 예수를 향한 사상을 정리하는 방식도 달랐다.
무엇보다도 바울로가 다른 제자들과 달랐던 부분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도 예수를 믿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바울로는 여기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느님에게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주장했는데, 당시로선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바울로는 믿음 이외의 다른 것들, 특히 유대인이 중시했던 '혈통'과 '율법'을 중시하기보다는 믿음을 강조했기에, 어느 정도 유대교와의 연속성 내에 있으려고 했던 야고보나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와도 다를 뿐더러 일반 유대인으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었다. 실제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회당에서 식사하다가 유대인들이 들어오니 당황하면서 이리저리 변명한 일에 대하여, 나중에 바울로에게 질타당한 적이 있다. 그만큼 바울로의 사상은 혁명적이었고, 반면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조차 혈통주의에서 완벽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화다.
바울로의 신학 내용 중 최요한 바는, 믿음으로써 의인의 신분을 얻는다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36] 이다. 그 사람은 믿음으로써 의인이 되어 '믿음의 조상'으로 선포된 아브라함의 사례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의로움에 이르려는 그 어떤 인간의 노력에도 비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은혜임을 들어 이것을 입증하였다. 이것은 기독교가 수행과 공덕 같은 의로운 행위를 이용한 구원의 완성을 주장하는 여타 종교와 구분된다고 주장하는 근본이 되는 교리 중 하나이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바울로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유대교의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해 율법 논쟁을 일으켰다. 그는 유대교의 율법에서 중요한 바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과 이웃을 향한 헌신과 사랑이지, 외면에 관계된 율법 행위의 시행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역설했다. 예컨대면 반드시 할례한다거나 안식일과 정결 규정을 반드시 지키는 것 등이 있다.
이것은 예수가 생전에도 바리사이인을 위시한 기성 유대인을 대상으로 비판한 바이기도 하다. 유대교 관점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유대인이고 선민의 표시였기에, 바울로는 유대교의 정체성을 흔드는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한테 공격당했다. 바울로가 이런 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당시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율법행위들을 중시하라고 종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울로의 입장에서는 이런 사람들의 주장을 반대한 것이다. 물론 이것이 율법주의를 고수해 온 유대인 처지에서 고깝게 보일수 밖에 없었다.
4. 바울로 서신
초기 교회 이래로 바울로가 썼다고 알려진 서간 중 신약 정경에 포함된 것만 해도 총 열네 편에 달하며, 이는 단어 기준으로 신약의 28%를 차지하며 네 편의 복음서 다음으로 신약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 중 저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히브리서를 제외한 열세 편을 바울로 서간으로 칭하는 일이 많다. 초기 교회의 교부들부터 현대의 성서비평학에 이르기까지 바울로 서간과 히브리서의 저자가 과연 바울로가 맞는지, 언제 어디서 작성되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어 왔다. 바울로가 저자라고 학계 대부분이 인정하는 서신은 일곱 편이며, 나머지 여섯 편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바울로의 이름을 빌려 다른 누군가가 썼다는 논란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히브리서의 경우 바울로가 저자가 아니라는 것이 학계에서는 거의 확실시된다.
- 교리서신: 로마서, 고린토 첫째 서간, 고린토 둘째 서간, 갈라티아서. 모든 서신들 중 바울로의 저작인 것이 가장 확실시되며 18세기 성서학자 크리스티안 바우어는 이 네 작품만이 위작이 아니라고 주장했다.[37] 다른 서신보다도 기독교 교리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 옥중서신: 바울로가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썼다고 알려진 서신들. 에페소서, 필리피서, 골로사이서, 빌레몬서가 해당된다. 이 중 위작 논란이 유의미하게 존재하는 것은 에페소서와 골로사이서.
- 데살로니카 전서와 후서. 후서에 대해서는 위작 논란이 존재한다.
- 목회서간: 디모데오 전서와 후서, 디도서의 세 편. 바울로의 곁을 떠나 타지에서 교회를 세우고 전도에 임하는 바울로의 제자들에게 목회자로서의 태도를 가르치는 서신이다. 바울로 시대보다 확연히 체계화된 교회 구조가 묘사되며, 학계 대부분이 위작으로 여긴다.
- 히브리서: 문체나 사용된 단어, 신학 등 모든 측면에서 바울로 서신과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현대에는 근본주의 개신교 교단에서조차 히브리서를 바울로의 작품이라 주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38] 애초에 히브리서 본문에서 본서를 바울이 썼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초대 교부들 중 이 서간을 바울이 썼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으나, 초대교회에서조차 바울의 저작이 맞는지 논란이 있었다.
5. 바울로와 예수
사도 바울로가 역사상 예수를 배제하고 예수의 신화상 상징에만 관심했다는 학문상 의견이 있다. 이것을 신화론(Mythicism)이라 부고 많은 학자 간에서 논의되어 왔다. 연원을 따지면 1927년 J.M.Robertson의 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신화론자라고 딱히 무신론자도 아니고 반대론자라고 다 신자도 아니다. 일례로 바트 어만(B.D.Erhman)을 들 수 있는데 그 사람은 복음서를 비판하고 신자도 아니지만 신화론을 반대한다.
출전은 제목과 페이지, 가능하면, 원문까지 실어서 원 저자의 '맥락' 확인이 가능해야 한다. 이글을 찬반으로 나눈다.
5.1. 신화론
신화론의 주장은,
성경에서, 바울로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한 그리스도에게만 관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관심은 전체에 걸쳐 신비한 가르침에 중점을 두는데 바울로는 역사상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고 스스로 분명히 밝힌다. 그 사람은 쓰길, '''"이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내게 계시하신 것입니다."'''[39]
바울로는 예수를 '''역사상 어떤 시대나 장소와 전혀 관련하게 하지 않는다.''' 디모데서에서는 본디오 빌라도를 언급하지만, 데살로니카 제1서 제2장에서는 '유대인'이 예수를 죽였다고만 말할 뿐이다.
바울로는 나자렛을 상대로 삼아서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고 나자렛 예수라는 말조차 쓰지 않는다. 또한 그는 기독교를 세례 종교로 묘사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에서 아폴로에게 예수를 전도할 때 아폴로가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다"는 언급 외에는 접점이 없다.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 특정한 산에서 설교하는 예수, 그 사람의 비유, 바리사이인들과의 논쟁, 로마 제국 관헌과의 충돌도 바울로는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로가 예수를 신화상 아나그램으로서의 상징이 아니라 실제 예수의 생애를 잘 알았다면, 그는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정식으로 당연히 인용했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로은 예수의 생애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예수의 말을 단 한 번만 인용한다. 그 인용문은 현재 로마가톨릭교회와 성공회 미사에서 영성체, 그리고 개신교의 성찬식 때 사용하는 공식 문구다.
바울로가 이 구절을 인용할 때 그 사람은 예수가 '잡히시던/배반당한 밤에' 그렇게 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느 쪽 번역이든, 그런 번역은 '예수의' 역사성'을 부여하고자 그리스어 원문을 왜곡한 것이다. 원래 그리스어로는 '넘겨지는(delevered up)' 때에 그렇게 말했다. 넘겨진다는 것은 '세상의 죄'를 대속하려고 죽음으로 넘겨지는 자, 곧 파르마코스의 운명을 언급할 때 사용되던 말이다.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토 제1 서 제11 장 제24 절에서 제25 절 (공동번역성서)
자신의 가르침을 지지하고 싶을 때는 사복음의 예수의 말이 아닌 구약성경을 인용한다. 예수의 말을 인용해도 효과가 마찬가지이거나 예수의 말이 훨씬 유효했을 상황에도, '''구약성경만을 인용한다.''' 천국을 목적해 혼인을 포기한 자를 예수가 칭찬한 구절이 있지만, 바오로는 자신의 독신 생활을 변호하고자 그 구절을 인용하지 않는다. 또한 부활할 때 사람의 육체가 변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마가복음 12장 25절).'[40]
또 다른 주장으로는 바울로의 가르침은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와 상충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이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권력자와 세상을 향한 태도다. 예수는 복음서에서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당하겠지만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복음 제16 장 제33 절)'고 언급하여 세상의 권력자나 집권층에 굴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그 자신도 공회나 사제 가야파나 대제사장 안나스의 뜰 안에서 그 사람들의 권세에 굽힌 바가 없다.
물론 바울로가 예수에게 계시받았다고 예수의 생애까지 세세히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예수를 직접 만난 적 없이 사도의 구전과 서간을 이용해 접하였으니 쉽게 언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반대되게 말한다든지 아예 자신이 익숙했을 구약성경에만 의존하는 것은 그냥 넘어가기에는 문제가 많다. 예수의 일생을 자세히 모른다고 해서 예수의 가르침까지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비약하자면 바울로는 예수에 관해 많이 알지 않았고 자신의 뜻을 전파하는 것에 예수의 이름을 도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주류 문헌 비평가들과 성서 연구가들은 이쪽을 지지한다.
예수를 실존한 하나의 윤리에 관계된 인간으로 파악하는 역사상 예수를 다루는 시각에서 보면, 바울로는 철저히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바트 어만[41] 은 <예수 왜곡의 역사>에서, 바울로는 분명히 예수를 실존했던 인물로 믿는다고 말한다. 알고 보면, 이것은 '신화론'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쓰느냐에 따라 다르다. 바트 어만은 바울로가 예수를 실존한 인물인지 실존하지 않은 인물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이미지만을 중시하고 역사상 진짜 예수를 대해서는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예수 왜곡의 역사>에서도 왜 사도 바울로가 '내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온다'고 주장하는지를 다룬 이유도 나와 있다.
사실 신화론이 제시될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들 중 하나는, 신약성경에서 바울로의 신학자로서의 비중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사도로서의 비중이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를 서술하는 신학자로서의 비중으로 국한해서 본다면 이 부문에서 바울로보다 비중이 큰 인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당장에 신약성경 내의 서간문들 중 대다수를 바울로가 작성한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정작 그 바울로 본인은 예수의 공생애를 함께한 인물이 아니고, 역사적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아무리 바울로가 당시 가장 높은 식자층의 일원이었다고 해도 신약성경의 신학적인 부분들이 12사도들이나 아니면 적어도 예수의 공생애를 함께했던 이들이 아니라 분명히 이방인이었던 바울로가 주도하여 서술되었다는 점은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인상을 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5.2. 반대론
위 신화론은 그 근거를 사도 바울로의 전체 행적이 아니라 바울로의 편지에만 한정한다는 문제가 있다. 현재 바울로를 다룬 자료가 사도행전과 그 사람이 쓴 두 가지의 편지 뿐인데, 편지만을 근거로 바울로를 분석 한다면 그 결과는 '바울로' 자체를 다룬 분석이 아니라 바울로의 '편지 쓰는 스타일'을 다룬 분석이 되어 버린다.
위 신화론에서 문헌 연구가들과 성서 비평학자들의 예로서 언급된 바트 어만(B.D. Ehrman)도 자신의 저서 〈예수는 실존했는가?(Did Jesus Exist?)〉 제4 장에서 사도행전에 실린 바울로의 발언들을 중요한 자료로서 취급하고 그 가치를 인정한다.(p.109-113)
위 신화론에서는 갈라디아 편지와 사도행전에 모순이 '장난이 아니다'란 이유로 사도행전을 불신하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위에서 바울로의 저작한 갈라디아서를 보면, "바울로는 예루살렘으로 절대로 가지 않았다고 하지만"이라고 썼는데 바로 다음 줄인 갈라디아서 제1장 제18절에 분명히 "그리고 3년 후에 나는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 사람과 함께 보름 동안을 지냈습니다." 하고 예루살렘 방문 사실이 적혀 있다. 사도행전에도 바울로스가 회심 후 일정 기간 활동하고 그 후에 예루살렘을 방문 한 것으로 나와 있다. 모순이란 두개의 명제가 양립하여 참이 될 수 없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때,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에서의 "서술 관점의 차이" 정도는 양립이 불가능하진 않다. 즉, 모순이라 할 수 없다.
사도신경 및 바울로의 편지의 일부에 따르면, 바울로는 이방인 및 유대인들과 활발히 토의하는 과정에서 나자렛 예수[42] , 예루살렘[43] , 본디오 빌라도[44] , 세례자 요한[45] 을 모두 언급한다.
바울로가 주기도문을 직접 인용한 적이 없는 점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에서 토의의 대상이었다. 명확한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46] 로마서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라는 고백이 '주기도문도 모른다'에 바로 연결되기에는 비약이 심하다. 여기서 주장하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는, 전체 문맥으로 볼 때 구원에 대한 내용이다. 반면 마태오 복음서 6장에 언급된 주기도문은 일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구할 때 가져야 하는 자세와 함께 언급되었다. 자신을 경건하다고 드러내면서, 또는 마음이 담기지 않거나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울로의 편지에 자신에 대한 사적인 복음의 내용이 없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반신화론다운 여러 학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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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예수와 역사》개정판, 가톨릭출판사 2012, 80-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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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유다계 그리스도교 집단들이 내세우는 예수, 그들이 회상하는 이 예수의 말씀과 동작들이 혹시 바오로의 그리스도 그리고 그가 선택한 선교관과 그 실천적인 방법을 직접적으로 문제시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와 같은 예수의 모습은, 교회 내의 여러 가지 갈등과 모순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한데 모아 놓고 있는 복음서의 본문에까지 반영되어 있다. 그 한 가지 예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전하는 마태오 복음서 5장 18절을 들 수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역사"라고 하는 것이 바오로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물론 바오로는 십자가에 못 박인 예수의 살을 거부하는 것이 아닐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한 '제시'는 기본적이었다. 역사란 시간이 밀어 주는 압력으로 비로소 개막된다. 바오로에게는 십자가가 바로 이 시간의 압력이다. 바오로의 선포가 '무시간' 속에 가라앉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도 파스카의 통과라는 사건 이전의 역사는 그에게 결정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역사는 바오로의 복음과는 다른 어떤 복음을 '육에 따라' 정당화할 수 있으리만큼 조작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오로가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마태 10,5)와 같은 예수의 말씀을 자신의 친서에 인용할 수 있었으리라고는 한순간도 생각해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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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 8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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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바울로》, 분도출판사 2008, 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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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로 사도의 선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나아가 바울로는 결정적 구원 사건들, 특히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집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이 성취한 구원은 서로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바울로 서간들을 일별하며 해당 진술들을 찾아보면, 사도가 기존 전승에 많이 의존하고 있음이 눈길을 끈다. 물론 직접적인 예수 전승, 즉 공관복음서 전승은 크게 밀려나 있다. 여기 속하는 것으로는 주님의 성찬 전승(1고린 11,23-25; 참조: 루가 22,19-20)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주님의 말씀들(1고린 7,10-11; 9,14; 1데살 4,15)[48] 을 들 수 있다. 공관복음서 전승의 후퇴는 바울로가 뒤늦게 사도로 불리었고, 열두 제자처럼 지상 예수와 함께 다니지 않았으며, 팔레스티나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들과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
>-같은 책, 338쪽
바울로는 가현설과는 정반대로 복음 선포를 역사성에 뿌리박게 하였다. 서간에서 예수를 적게 언급한다는 것이 곧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무시는 아니며, 서간에서 예수의 역사적 행적을 적게 언급하는건 충분히 납득가능하다. 바울로의 활동기에는 지금과 같은 복음서 체계가 완비되지 않았다. 현재 기독교의 성경을 시대상으로 배열할때 마가복음을 비롯한 4복음서가 사도 바울의 편지보다 먼저 쓰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의 편지가 더 먼저였다. 즉,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 예수의 어록과 행적을 정리하고 연구하여 신학을 전개하는 동안, 다른 방향에서 예수의 어록과 행적을 정리한[49] 또한 공관 복음서 중 가장 늦게 작성된 요한복음은 바울로가 죽고 30년 정도가 더 지나서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서기 40~6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바울로가 복음서를 충분히 습득했을 가능성이 적다. 그리고 바울로는 랍비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구약 구절들이 당연히 더 익숙했을 것이다. 바울로가 활동 당시는 12명의 사도를 비롯하여 "예수를 직접 접했던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었던 시기였고, 이런 사람들의 증언이 후대의 "문서화된 복음서"를 대신하여 "살아있는 복음"으로 쓰였다.
- 바울로가 예수의 말이라고 명시하지 않은 부분에서도 예수의 발언이 인용되었을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예를들면, 사도행전 20장 35절에서 바울로가 예수를 인용하지만, 정작 그 구절은 4복음서에서 누락되어 있다. 이와 같이 복음서에 누락된 예수의 몇몇 발언들을 '아그라파(Agrapha)'라고 부른다.
-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의 말을 굳이 회의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예수와 공생활에서 함께하지도 않았고 한동안 신자들을 박해했던 바울로가, 지상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예수와 직접 만나고 얘기했을 성도들이 있는 교회들에 편지를 보내며 예수의 일화를 다수 인용하는건 일종의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일에 불과할 것이다. 공생애를 함께한 것이 아니라 후에 개인적 체험으로[50] 예수를 접한 바오로 입장에서는, 그런 사실이 뻔히 다 알려져 있는 교회에게 '자기가 직접 경험하지도 않아 정확하게 알리가 없는 사건을 자세히 언급'하는게 훨씬 어려울 뿐더러 할 이유가 없다. 심지어 자칫하면 그의 설교가 당시의 기독교 신자들에게서 신뢰성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 시기는 아직 예수와 공생애를 함께한 증인들이 남아 있는 시기였으므로 굳이 바오로가 예수의 생애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역할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었다. 위에서 발췌한 그닐카와 페로의 글도[51] 이러한 의미와 연결해서 보자면, 바울로 입장에서 예수의 역사적 행적을 자세히 언급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으리라는 추정은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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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신약성경신학》, 분도출판사 2014, 33쪽
παραδιδόαναι는 신학적 어조가 있을 순 있어도 본디 법정 용어다.
- 비 기독교 문서로 기독교가 언급된 예는 수에토니우스, 플리니, 타키투스, 요세푸스 4건인데, 그 중 타키투스의 글이 가장 자세하고 후세 삽입 시비도 없다. 타키투스는 네로 치하의 로마 제국에 퍼지고 있는 기독교가, 유대에서 본시오 빌라도에게 죽은 어떤 이에게서 시작되었음을 적고 있다. 그게 1세기 중후반 로마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 정도였다. 한편 요세푸스의 기록은 후대에 가필 시비가 있지만, 엄격한 문헌비판을 거치고 남은 부분만으로도 예수의 실존을 시사한다. 바트 어만도 이 부분을 인정했다(Did Jesus Exist, 60-61페이지). 예수/역사 문서 참조.
로마서 13장을 쭉 읽어보면 이후에는 예수의 말 중 하나인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마르코 복음서 12장 17절)'와 유사한 '여러분은 그들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국세를 바쳐야 할 사람에게는 국세를 바치고, 관세를 바쳐야 할 사람에게는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십시오(로마서 13장 7절).'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지배층을 하느님의 사자로까지 묘사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또, 바울로가 예수의 언행을 인용한 고린도 11장 23-24절의 경우, 위의 신화론에서는 "잡히시던/배반당하시던" 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어휘가 "넘겨지다(handed over[52] )"라는 추상적, 상징적 의미를 가지므로 역사적 사건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신화적 상징이라면, 그 "넘겨짐" 사건이 발생한 게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11장23절은 예수가 '밤'에 성찬에 대해 언급했음을 분명히 한다. 이것은 바오로가 최후의 만찬과 그 후의 '넘겨짐'을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바울로가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한 사례는 다음 예시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예수의 위 가르침은 바울로도 역시 따라한다.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7,1-5
그러므로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진리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 2,1-2
찬성론에 B.D.Ehrman이 전거로 언급된 것은 다소 의외인데, 이 양반은 단순히 '바오로가 예수의 실존을 믿었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고, '''바오로의 편지들을 근거로 역사적 예수의 실존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인물이기 때문. <예수는 실존했는가> 130 페이지를 보자.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4
어떤 사람 A가 자기가 본 적도 없는 다른 어떤 사람 B의 출생, 가계, 가족, 행적, 죽음에 대해 알고 있고 언급했는데, A가 B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면 논리적 무리가 따른다. 위의 신화론에서 "바트 어만은 바오로가 예수가 실존인물인가 허구의 인물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이미지만을 중시하고 진짜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자세한 출전을 밝히지 않아서 확인이 불가능하다."- 바오로의 발언들은, 그가 예수를 몇 년 전에 살았던 역사적 (historical) 인물로 믿고 있었음을 분명히 한다(makes it very clear). 바오로는 예수의 탄생,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다윗 왕에서 이어지는 가계, 형제의 존재(그 중 하나의 이름이 야고보인 것), 유대에서의 활동, 12명의 사도, 스승으로서의 역할, 죽음을 예지함, 최후의 만찬, 유대인에 획책된 죽음, 십자가형에 대해 언급했고, 가끔, 그 가르침도 언급했다."
'''바울로가 자신만의 사상 표출을 위해 예수를 이용했다고 하는 상당한 억지 주장이 만약 존재한다면,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거룩한 전승(Sancta Traditio)의 필터링에 걸렸을 것이기에 지금까지 성인으로 공경 받아오기에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53] 간단히 말해, 예수의 가르침을 직접 보고 들은 초대교회의 제자들이 사도바울에게 '''그거 예수님이 가르친거 아닌데?''' 이렇게 한 마디만 하면 끝났을 문제라는 거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들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서간을 인정한 것이다. [54]
이상은 신화론에 대한 대략적인 반박이다.
6. 평가와 오해
초기 기독교의 확산에 기여하고 기독교의 체계적인 사상을 수립한 바울로였지만, 생전에도, 그리고 사후 수천 년이 이르도록 갖가지 논쟁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바울로는 사후에 기독교의 중요 인물로서 존경을 받았지만,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논쟁의 수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바울로와 성 아우구스티노의 영향을 받은 마르틴 루터는, 바울로 서간에서 이신칭의와 같은 종교개혁 사상의 원천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믿음'과 함께 '행위'를 중시하는 가톨릭과 달리[55] '믿음'을 강조하는 개신교에서는 바울로의 이신칭의 사상이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오래된 오해임을 다시 한 번 밝혀두는 바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러 개신교에서도 '''진실한 믿음에는 그 실천이 따른다'''는 선언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을 "온갖 악행을 다 해도 믿음만 있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라는 식으로 엉뚱하게 해석하는 인간들이 있기 때문에 잡음이 생길수 밖에 없다.[56]
이로 인해서 가톨릭 교회에서는 한때 바울로에 대한 연구를 제한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에서 바울로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굉장히 높은 그리스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신학을 정리한 최초의 인물이며, 성경에서의 비중에서 보듯 유대 폭동(유대 반란, 유대-로마 전쟁) 이후 살아남은 기독교 집단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갖고 있었다.
수 천년 동안 여러 가지로 서양 사상사에 영향을 크게 끼친 인물답게 갖가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당시 바울로의 사도성은 매우 크게 수용되었다. 사도 바울로는 사도 베드로, 사도 요한, 야고보 등을 만나서 그들에게 자신의 신적 권위를 인정받고, 때로는 그들의 잘못을 대담하게 훈계하기도 했으며, 그의 서신들은 여러 교회에서 읽혀지며 대량으로 필사하곤 했는데, 이는 바울로에 대한 인식이 매우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로가 쓴 편지(=서신, 서간)들에서, 유독 자신이 사도이며 사도로서 임명한 존재가 바로 예수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런 이유에서였다. 사도행전에서는 첫 머리에서 사도의 조건을 나름대로 정의하는데, 이 조건에 따르면 바울로는 도저히 사도라 할 수가 없다. 하지만 1세기 기독교 문서를 살펴보면, 넓은 의미에서 사도라 부르는 용법도 있었던 듯하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도그마) 상에서 예수는 부활했으며, 승천을 하여 지상에서 모습은 감추었지만 그 영향력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얼마든지 지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나타나는 것도 가능하다. 따라서 바울로는 예수의 음성을 들었다는 가능성을 기독교 교리 내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영적으로 예수를 직접 만나는 체험을 겪었다는 사람은 바울로이후에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말한 것 때문에[57] 돈 벌 능력이 없는 약자들에게 가혹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기독교 우파에서 복지제도,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근거 구절로 인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문구는 주로 사회에 생산적인 공헌은 하지 않으면서 실제로 힘들게 일해서 재화를 생산하는 사람들을 착취해서 호의호식하는 특권계급과, 일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를 비판하는 데 사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일할 능력이 없어 일하지 못하는 약자를 박해하는데 사용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성경 본문에서는 일하지 않고 오히려 일만 벌이는 데살로니가 공동체 내의 경향을 비판하는 문맥에서 쓰였으며 아울러 그가 활동한 로마 제국 시대에는 현대보다도 훨씬 비생산적인 특권(귀족) 계급의 병폐가 심했고, 초기 기독교가 일종의 급진주의적 공동체 역할을 하면서 도시 빈민들 사이에서 급속히 세를 불려나갔음을 생각하면 이건 좀 지나치게 나간 비약이다.
일부에서는 바울로가 예수의 가르침을 종교로 만들기 위해 고의적으로 왜곡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프리드리히 니체 등 몇몇 철학자들과 일부 이슬람 및 유대교 신학자들. 이것은 기독교 내 일부 급진 진보파(예: 문동환 목사)도 마찬가지라서, 그들은 바울로를 정통 사도가 아닌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한 사이비로 보는 경우도 있다.바오로가 로마가 예수 공동체를 왜곡시키기 위해 투입한 프락치라는 주장[58] 하지만 만약 바오로를 거짓 사도로 취급한다면, 신약성경 중 절반 가량이 위경으로 규정되어야 하며, 로마가 당시 이스라엘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결론이 나오므로 용납되기 어렵다. 바오로는 가말리엘의 수제자, 즉 당시 이스라엘의 온건 바리사이파의 수장의 수제자 급의 인물로 철저한 종교 엘리트 계층이었으며, 로마의 지배에 대해서 중도적 입장이었다. 이런 사람이 로마의 프락치라면 이스라엘은 완전히 로마에 종속되어 문화적 다양성을 상실하고, 폭동 등이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 게다가 루카 복음서를 쓴 루카가 쓴 사도행전에서도 바울로의 행적이 자주 언급되기 때문에 사도로서 바울로의 자격을 부정하기는 곤란하다. 사실 초기 교회 시대에도 바울로의 사도 자격에 대한 논란이 어느 정도 있었던 듯, 신약성경의 바울로 서신에서도 이를 의식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6.1. 바울로와 반유대주의
바울로의 생전에도 그 시각이 지배적이어서 그는 예루살렘에서 난동에 휘말리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그를 반유대주의의 선구자로 보는 시각이 남아 있어서 유대교 학자들 중에는 "기독교와 대화해도 바울로에 대해선 논하기 싫다"고 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한다.그 유다인들은 주님이신 예수와 예언자들들 죽이고 우리를 몰아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고 모든 사람의 원수가 되었습니다.[59]
또 그들은 우리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을 얻게 해주는 일까지 방해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죄는 극도에 달해서 마침내 하느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내리게 되었습니다.
공동번역성서,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2장 15~16절.
그러나 바울로는 로마서에서 '내 동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차라리 내가 지옥에 가겠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위에서도 서술했지만 그는 타지에서 선교를 시작할 때 유태인이 먼저 복음을 접할 우선권이 있다고 보고 반드시 유태인 회당에서 유태인을 상대로 먼저 복음을 전했다.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
로마서 9장 3절.
6.2. 바울로의 이성관
고린토1서 11장 2절 : 모든 사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남자가 기도를 하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할 때에 머리에 무엇을 쓰면 그것은 자기 머리, 곧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기도를 하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할 때에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 머리, 곧 자기 남편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머리를 민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만일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된다면 머리를 깎아버려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니 무엇으로든지 머리를 가리십시오. 남자는 하느님의 모습과 영광을 지니고 있으니 머리를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여자에게서 남자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서 여자가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자가 여자를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보고 있으니 여자는 자기가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는 표시로 머리를 가려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세계에서는 여자나 남자나 다 같이 상대방에게 서로 속해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에게서 창조되었지만 남자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은 채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여러분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자연 그 자체가 가르쳐주는 대로 남자가 머리를 길게 기르면 수치가 되지만 여자의 긴 머리는 오히려 자랑이 되지 않습니까? 여자의 긴 머리카락은 그 머리를 가려주는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딴소리를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런 풍습은 우리에게도 하느님의 교회에도 없습니다.
고린토1서 14장 32~35절 :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심령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무질서가 아니고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모든 교회가 하고 있는 대로 여자들은 교회 집회에서 말할 권리가 없으니 말을 하지 마십시오. 율법에도 있듯이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 돌아가서 남편들에게 물어보도록 하십시오. 여자가 교회 집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수치가 됩니다.
고린토1서 11장의 구절 때문에 생긴 풍습이 미사보이다. 신약 성경 내내 예수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하던 바울로가 고린토서에서 갑자기 전형적인 당시 남자들처럼 가부장적인 발언을 한다. 디모테오서는 저자에 관해 논쟁이 있지만 고린토서는 대다수 신학자가 바울로를 저자로 생각한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를 읽고 '와 바울로는 2천년 전 사람이 맞나? 어떻게 현대에 와서나 가능한 주장을 했지?'라고 감탄했다가 고린토서의 성차별 내용을 읽으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디모테오1서 2장 11~15절 : 여자는 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먼저 아담이 창조되었고 하와는 그 다음에 창조된 것입니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하와가 속아서 죄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믿음과 사랑과 순결로써 단정한 생활을 계속하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바울로의 본 마음이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울로의 평생 삶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고린토서에서 말이 꼬여서 자기가 전에 했던 말과 전혀 다른 소리를 했는지 해석이 필요하다. 대다수 신학자가 갈라디아서가 고린토서보다 먼저 쓰여졌다고 생각한다.
-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에서 여자들도 설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유대교에서 여자가 설교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당시 그리스와 로마 문화는 가부장적 분위기가 강력했다. 사회에서 발언을 제한당했던 여자들이 고린토 교회에서 발언권을 얻자 갑자기 폭발하듯 여러 발언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바울로의 결정은 당시 남자 신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파격적이었을 것이다. 특히 일상에서 항상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생활해야했던 고린토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천을 벗어버리고 맨 얼굴로 설교했다. 여자가 천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고린토에서 성적으로 문란한 복장이었기 때문에 남자 신자들이 에베소에 있는 바울로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문의했다. 바울로가 이 상황을 교통정리하는 과정에서 자기도 논리가 꼬여 자신의 예전 발언과 반대되는 성차별 발언을 하게 된 것이다.
- 바울로가 여성 동료를 존중하고 인정했다는 흔적이 바울로의 서신들에서 보인다. 로마서를 로마 교회에 전달한 것으로 여겨지는 '포이베라'는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던 당시에 바울로가 자신의 서간을 여성에게 맡겨 전달하게 한 것에 의미가 있다. 서신의 전달자는 교회 사람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으고 바울로의 대리자로서 서신을 낭독하기 때문이다.
- 바울로가 자신을 도운 동료들을 언급하면서 성녀 프리실라와 성 아퀼라 부부를 언급하는데, 통상 고대에서 부부를 언급할 때는 남편의 이름을 먼저 언급하고 그 다음에 아내의 이름을 언급하는 게 일반적다. 하지만 바오로는 아내 프리실라를 먼저 언급하고 남편 아퀼라를 그 다음에 언급했다.
- 여성의 침묵을 명하고 있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장 34-35절의 경우에는, 후대의 필사가 고쳐 썼다는 입장보다는 바울로가 반론하기 위해 인용했다는 반박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한국어 번역 성경에서 생략되어 있지만, 여성에 대한 침묵을 명령한 35절과 이후의 36절 사이에는 이접적 접속사 e가 포함되어 있으며 36절의 비판 대상인 '유일한 자들(monous)'는 남성 복수형 대명사라는 것이 그 근거이다. 특히 반박설의 경우에는 34절-35절의 여성에 대한 침묵 명령을 교회 내의 남성 예언자 그룹의 권력 독점을 위한 주장으로, 36-38절의 예언의 독점에 대한 비판을 저러한 남성 예언자 그룹의 여성 탄압에 대한 바울로의 반론으로 해석하면 전개가 매우 자연스러워진다는 장점이 있다.[60] [61] 반박설을 수용한다면 바울로는 교회 내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 예언자 그룹의 억압을 비판하며, 여성들도 얼마든지 교회에서 예언을 할 수 있으며, 이를 억압하는 자들은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즉, 바울로는 교회 내에서 여성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도한 인물이 된다. 다만 일부 고대 사본들은 고린토1서 14장 34~35절을 40절 뒤에 두었는데, 이 순서로 읽으면 위와 같은 재해석의 여지가 없다. 39절을 재해석의 근거로 삼는 경우도 있는데, 39절의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이라는 부분은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나의 형제들'이다. 이 사실 역시 위의 반박설의 재해석과 모순된다.
7. 현실 권력에 대한 복종
바울로는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이니 복종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여성관 못지 않게 현대에도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물론 바울로가 로마 황제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내용을 쓴 것은 아니다. 그의 생각엔 어차피 그리스도가 재림하면 이 세상 체제는 끝날 테고, 그러기까지 얼마 안되는 시기 동안 현실 권력에 불필요하게 맞서기보단 가능한한 순응하며 복음을 최대한 널리 전파하는게 맞다고 보았기 때문이다.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입니다.(로마서 13장 1절)
바울로에게 재림은 임박한 현실이었고 자신의 사후로도 1000년이 훌쩍 지나 아돌프 히틀러 같은 지도자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친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로마서 13장에 기술된 지도자에 대한 복종 구절은 마르틴 루터가 독일 농민 전쟁 당시 제후 편에 서는 근거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수백 년 뒤에는 나치 독일에 동조하는(소극적 순응부터 적극적 부역까지 전부 포함해서)기독교인들의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대통령의 정치성향에 따라 이 부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해석이 밥먹듯 바뀌며, 한 사람이 대선 결과에 따라 로마서 13장에 대한 말을 바꾸는 것도 쉽게 볼 수 있다.
7.1. 노예제 옹호 논란
바울로는 특별히 노예제를 옹호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그가 남긴 서간 가운데 배경 이해 없이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오해의 여지가 있는 내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필레몬서에서는 필레몬에게서 도망친 노예를 회심시킨 뒤 '이제 형제처럼 대해주라'면서 도로 돌려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도망쳤다 도로 잡힌 노예는 심한 경우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필레몬의 인성과 자신의 사도로서의 끗발을 맏고 벌인 모험에 가까웠다.
당시 로마에서 노예제 폐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국체를 무너뜨리는 수준의 발상이었고 바울로 역시 이생의 불완전한 체제에 저항하기보단 복음전파와 기독교식 사해공동체주의를 선택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바울로의 생각엔 이 세상의 체제는 곧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올 것이므로 그때까진 노예주나 노예나 서로 형제처럼 지내자는 것이 낫다고 보았을 거란 견해다. 그러나 그의 생각보다 이 세상의 체제는 훨씬 오래 갔고, 근대에 오면 노예를 소유한 기독교인들이 바울로가 쓴 내용을 핑계삼아 노예제를 옹호하는 일이 빈번했다. 노예제가 폐지된 현대에서는 이 문제를 시대적 한계로 해석하고 좋게 넘어간다.
8. 문화에서
이마고 데이(Imago dei) - 하느님의 모상: 한국 가톨릭에서 2008년 제작한 뮤지컬이다.
9. 매체에서
2018년 3월 23일, 부활절을 앞두고 영화 <바울로, 그리스도의 사도(Paul, Apostle of Christ)>가 개봉했다. 바울로가 로마에서 잡힌 후 처형당하기까지의 모습을 그렸다. 제임스 포크너가 바울로 역을, 짐 커비즐[62] 이 루카 역을 맡았다. 한국에서는 2018년 10월 31일 개봉했다.
영화 "사도 바울로(Apostle Paul)" - 워너 브라더스에서 제작 중인 영화. 사도 바울로 역에 휴 잭맨의 캐스팅이 확정되었고 그 외에 벤 애플렉, 맷 데이먼이 공동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는데 직접 배역 출연의 가능성도 있다.
개신교 연예인과 성우들이 열연한 드라마 바이블에서는 성우 설영범이 바울로 역을 맡았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