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피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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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Edwin Peary
로버트 피어리
'''
'''본명'''
로버트 에드윈 피어리
'''출생'''
1856년 5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갤릿친
'''사망'''
1920년 2월 20일 미국 워싱턴 D.C
'''국적'''
미국 [image]
'''직업'''
탐험가, 군인
1. 소개
2. 북극점 도달 논란과 진상
3. 인종차별
3.1. 비운의 탐험가 매튜 헨슨
3.2. 이누이트에 대한 만행
4. 여담


1. 소개


미국탐험가이자 군인. 대중들에겐 탐험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토목 기사이자 미합중국 해군 장교공병소장까지 진급해 제독이 되는 등 군 이력으로도 꽤 성공한 편이다.
펜실베이니아 주(州) 갤릿친 출생으로 1881년 해군 공병병과 장교로 임관, 니카라과 운하의 조사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 후 그린란드를 거쳐 북극을 탐험했고, 1898∼1902년에는 북위 84 °17', 1905∼1906년에는 북위 87 °6'에 도착했으며, 1909년 매튜 헨슨 및 4명의 에스키모인들과 함께 컬럼비아 곶을 떠나 동년 4월 6일 드디어 북극점에 도달하였다고 주장했으나, 훗날 거짓임이 드러났다.
피어리는 얼음 바다를 걸어서 북극점에 도달한 탐험가라고 전해진다

2. 북극점 도달 논란과 진상


그가 북극점 도달에 성공했는지 여부는 그가 탐험에 성공했다고 밝힌 순간부터 논란이 되었다.
뉴욕 헤럴드는 프레데릭 쿡이 북극점에 먼저 갔다고 주장했고, 뉴욕 타임스는 피어리를 편들었으나 결국 다수결 선거 끝에 135대 34로 피어리가 승리했다. 하지만 그 증거가 명확하지 않았다. 그는 북극점에 도달했다는 경도와 방위각을 측정하지 않았고, 또한 그의 항해일지는 너무 깨끗했다. 북극 탐험 때 당연히 씻지도 못하고 기름이 니글니글한 페미컨만 우적우적 먹었기 때문에 일지 자체가 꾀죄죄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그가 당시 공개한 부분은 중요한 부분도 없고 깨끗했다.
또한 단 며칠 사이에 70km를 헤쳐갔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의심도 받았다. 이는 피어리 탐험대가 이전에 하루 3km 이하에서 멈칫거리며 느리게 횡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쿡의 집념어린 반격으로 피어리는 제독이 됐다는 것 빼곤 온갖 소송과 비난에 시달렸으며, 늘그막에는 온갖 위장병으로 고생하다가 생을 마감했는데, 숨지기 며칠 전까지 혼수상태에서 '''"아냐. 난 북극점에 갔단 말이야."'''라고 중얼거릴 정도로 비난에 크게 고생했다.
기존에는 피어리가 약간의 쇼맨십이나 가필을 부렸지만 북극에 간 건 맞는 것으로 보았다. 앞서 말한 없어진 꾀죄죄 노트도 공개되었고, 실제 피어리가 탐험했다는 경로를 피어리 시대의 장비로 탐험한 탐험대가 거기에 써있는 말대로 며칠 사이에 70km를 어렵잖게 가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쿡 자신이 제시한 증거는 피어리의 증거보다도 더 빈약했다. 쿡은 이 사건 이후로 완전히 묻혔고, 그가 이전에 했던 업적 하나도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쿡은 말년에 다른 일로 석유탐사를 했지만 그 보고서마저도 조작 의혹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1996년에 발견된 피어리의 새로운 일지를 검토한 결과, '''북극점에서 40km 못 미친 지점까지만 도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피어리의 탐사를 지원해줬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피어리의 일지를 재검토한 결과 피어리가 북극점에 도착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정황이 발견되었고, 일지에 나오는 기상정보를 통해 피어리의 위치를 다시 계산한 결과 피어리의 최종 도착점은 북극점인 북위 90도가 아닌 북위 89도 57분으로 밝혀졌다.
물론 피어리는 북극점을 항해와 도보로 향했고, 피어리 본인은 자신이 도착한 지점이 진짜로 북극점이라고 믿었으므로 고의로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으며, 당시 기준으로는 가장 북극점에 가까이 도달한 것이 맞다. 하지만 '''북극점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이 때문에 피어리의 북극점 탐험 성공을 대대적으로 기사화했던 뉴욕 타임스는 진상이 밝혀지자 79년 만에 정정보도를 냈다.
게다가 엄밀히 말해서 피어리는 '해당 지점에 도달한 최초의 사람'도 아니었다. 그의 길을 안내해 준 이누이트 안내인들이 먼저 해당지점을 밟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기사나 뉴스, 사전에서도 로버트 피어리를 북극점에 최초로 도달한 인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무튼 이 때문에 이미지가 반전되어, 무수한 소송에 걸려 늘그막에 재판장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비아냥까지 나왔을 지경이었다. 90년대 나온 대중적 역사책에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재조사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아예 피어리가 안 간 걸 사실이라 했던 적도 있다. 공교롭게도 피어리를 괴롭히던 인물이 바로 로알 아문센과 같이 벨지카 호에 탔던 프레드릭 쿡이었는데, 서로가 북극점에 먼저 갔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논란이 거셌다.

3. 인종차별


로버트 피어리의 명성이 크게 실추된 것은 그가 북극점에 실제로 도달하지 못했던 데다가 심각한 인종차별주의자였기 때문이다.

3.1. 비운의 탐험가 매튜 헨슨


그동안 그가 북극점에 갔다고 써논 위인전이 많아서 개정이 안 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가 북위 89도 57분까지만 도달했다고 명시한 기사에도 그가 북극점에 최초로 간 사람이라고 적어놓는 경우도 있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로버트 피어리는 북극점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북극점에 가까이 갔을 뿐이다.'''
게다가 미국 국적으로 아주 가까이 간 것도 그보다 더 먼저인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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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바로 '''매튜 헨슨'''(Matthew Henson, 1866~1955)이었다. 흑인인 그는 어릴 적부터 마차 및 개썰매 조종에 뛰어났고 이누이트어와 사냥도 잘했다. 피어리의 조수로서 활약하면서 당시 1시간이나 먼저 북극점에 도달했음에도, 이걸 질투한 피어리가 숨기고 자신이 먼저 갔다고 조작했다. 나중에 피어리는 "헨슨이 먼저 간 것"이라고 하던 쿡에게 "그가 흑인이라 잘 몰라 북극점에 가지 못했다."고 했다.
흑인이라서 인종차별을 당하고, 모든 공로를 부정당했으며, 그냥 조수로서 도왔다고 알려진 그는, 빈민굴에서 어렵게 살아가다가 세상을 떠났다. 물론 흑인들에게는 피어리보다도 헨슨이 진정한 위인이라고 존경받았으며 빈민굴 속에서도 그는 우대받았다고 한다. 세월이 훨씬 지나서야 그의 시신은 1988년 알링턴 국립묘지로 옮겨졌다. 피어리를 후원하던 내셔널 지오그래픽도 진정한 북극점 도달자임을 인정해 2000년 영예의 메달을 피어리가 아닌 그에게 사후 수여했다.
비록 생전의 헨슨은 업적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빈민굴에서 어렵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지만, 나중에라도 그의 업적이 발굴되고 정식으로 인정받음은 불행 중 다행이다. 또한 그에 대한 만화나 위인전, 영화, 다큐멘터리도 90년대 와서 쏟아지면서 위인으로 재평가중이다.
정작 그를 조수로 부리고 업적을 부정한 건 물론이며 기록까지 자기에게 유리하게 조작했던 피어리는 사후 북극점에 도달하지도 못했고, 겸사겸사 인종차별주의자에 조수인 헨슨의 공로까지 부정한 것 등 온갖 안 좋은 진상들이 밝혀져 입지가 추락했으니 그야말로 격세지감...
그러므로 '''현 시점에서 최초로 북극점을 밟았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로알 아문센이다.'''
피어리는 북극점 탐험 성과가 무효가 되었고, 공중항로로 북극점에 최초로 도달했다고 주장한 리처드 버드는 일지의 기록이 지워졌으며, 육분의 측정결과가 공식 기록과 일지의 기록에서 다른 점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로알 아문센이 남극점에 도전한 이유가 원래 꿈이었던 북극점 정복을 피어리에게 뺏겼기 때문임을 생각하면 미국에 2번이나 엿을 먹인 셈이다.

3.2. 이누이트에 대한 만행


로버트 피어리는 그냥 북극에 갔다오기만 한 게 아니라 가서 이누이트를 가혹하게 부려먹고, 심지어 그들을 속여서 미국으로 데려와 전시하면서 입장비를 챙겼다. 피어리에게 속아서 미국까지 와 자연사박물관에서 '살아있는 야만인'이라는 표본으로 전시되었던 이누이트 부자도 있었다. 그 아버지가 일찍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자연사박물관이 시신까지도 해부해서 박제했다. 그 아들 미닉은 영어를 배우고 나서야 피어리에게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차가운 대답만 돌아왔다. 되려 피어리는 그 박제 관련 수익을 자신에게도 내놓으라고 자연사박물관에 소송을 제기하는 추태까지 벌였다가 패소했다.
미닉은 어릴 적부터 미국에서 살다보니 전통적인 이누이트 생활방식을 잊어버려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미국에서도 인종차별로 고생하며 나무꾼으로 근근히 살다가 1918년 28살 나이로 병사했다. 마지막으로 극소수의 친구들에게 "제발 아버지의 시신과 같이 내 유골을 고향으로 보내달라." 고 한 맺힌 유언을 남겼다. 박제된 그의 아버지는 1997년에서야 미닉의 유골과 같이 고향에 돌아가 묻힐 수 있었다. 이마저도 박물관 측이 알아서 보내준 게 아니라, 이누이트계 지식인들과 여러 미국 역사학자, 지식인들이 동참하여 미닉의 아버지를 고향으로 보내주자고 오랫동안 항의와 시위와 설득을 거쳐 수십여 년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자연사박물관은 재산이라는 소리를 거쳐 변명하다가 엄청난 비난을 들었다.
국내에도 나온 바 있던 뉴욕 에스키모 미닉의 일생에서 이걸 자세히 다룬 바 있다.
그리고 피어리는 14세(!)인 이누이트 소녀와 동침해서 '''아이까지 얻은 전력'''이 있다.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스캔들이었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면 그의 인생뿐 아니라 북극탐험 스폰서가 대거이탈할 우려가 있어 탐험업계에서 묻어버렸기 때문에,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대중은 모르는''' 전설이 되었다.
이런 면모가 알려지면서 1990년대 중반부터 국내의 어린이 위인전에선 그가 사라졌다. 최근 등장하는 위인전을 보면 북극을 탐험한 노르웨이프리드쇼프 난센이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 심지어 영국로버트 스콧 해군 대령어니스트 섀클턴까지 자주 등장하나 유독 그만은 언급이 없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전에 출간된 숱한 학습용 위인전에는 피어리가 빠짐없이 실려서, 위인전 열풍 속에서 자라난 1970~80년생들은 아직도 피어리를 영웅적인 탐험가로 아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1990년대 초반 국내 중학교 영어 교과서에서까지 피어리를 위대한 탐험가로 묘사했다. 물론 세월 속에 이런 것들이 드러나 이젠 위인전으로 다시 그가 찬양될 일은 없어 보인다.

4. 여담


  • 북극점은 바다에 있다는 것을 밝히고, 이누이트 족의 생활을 꼼꼼하게 기록해 이누이트 족의 문화와 생활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많이 남긴 업적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마저도 헨슨이 공로자로 이누이트어로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생활을 꼼꼼하게 적었기 때문이다.
  • 피어리는 북극점이라 생각했던 지점에 국기를 꽂으면서 북극점을 미국 영토로 선포하는 만행을 벌였다. 그리고 훗날 소련은 북극 1호를 이용해 최초로 북극점을 비행기로 도달했고, 러시아 는 북극해 해저에 위치한 북극점에 도착해 티타늄으로 만든 자국의 국기를 박았다. 단, 잠수함으로 도달한 건 미국이 최초로, 티타늄 국기 사건은 미국의 자존심을 건드려 북극해에서 양 측의 병림픽이 격렬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
  • 미합중국 해군에서도 그의 이름을 딴 군함들이 여럿 진수되었지만, 그의 이런 추악한 면모가 드러난 뒤에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현역 함정 중에도 벌크선인 USNS Robert E. Peary가 있고, 제2차 세계대전리버티선 SS Robert E. Peary가 4일 15시간 30분만에 건조부터 진수까지 마무리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해서 현역 벌크선이 퇴역하더라도 비전투함 명칭으로 오랫동안 우려먹을 것 같다. 헨슨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미 해군은 USNS Henson을 취역시켜 그를 기리고 있다.
  • 조세핀이라는 아내가 있었으며 이 사람도 탐험가였다. 로버트가 북극 탐험에 갔을 당시 조세핀도 남편을 찾아 북극 탐험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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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가지고 2015년 프랑스, 불가리아, 에스파냐 합작으로 라는 영화가 제작되었다. 이 영화에서 조세핀 피어리는 줄리엣 비노쉬가 맡았다. 평가는 그냥 그랬고 흥행도 실패해 묻혔다.
  • 미스터 피바디와 셔먼쇼에도 나왔으며 그냥 전형적인 장난꾸러기로 나왔다. 어렸을 때 산타에게 장난을 쳤다는 사실을 안 산타가, 그에게 장난감 만드는 일을 하게 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