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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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Κλεοπάτρα Φιλοπάτωρ/Cleopatra VII Philopator)'''“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지구의 모든 표면은 변했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 테아 네오테라'''(Κλεοπάτρα θεα νεωτερα)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서 남자 통치자들은 전부 프톨레마이오스란 이름을 썼고, 여자 통치자들은 클레오파트라, 베레니케, 아르시노에라는 이름을 돌려썼다. 그러다보니 당대에는 이름 뒤에 붙이는 별칭으로 구분하기도 했는데, 클레오파트라의 별칭 테아 네오테라는 '새로운 여신'이라는 뜻이다.
고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딸. 또한 고대 이집트에서 공식적으로 '파라오'로 즉위한 마지막 인물이다. 이 인물을 끝으로 '독립 국가 이집트의 군주'로서의 파라오는 완전히 명맥이 끊긴다. 이집트를 지배하는 로마 제국의 황제가 이집트에선 파라오의 칭호를 사용하고 이집트의 파라오식 즉위 행사를 행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의미였으며, 이마저도 훗날 동로마 제국이 이집트를 상실함에 따라 명맥이 끊어졌다. 또한 로마 제국 이후 이집트를 다스린 군주들은 파라오 칭호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다.
2. 생애
기원전 51년,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이집트의 당시 전통인 근친 결혼에 따라 18세 나이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미 멸망의 징조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넓게 볼 경우 망조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타국과의 전쟁에서 이겼지만 정작 내치에 부족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여서 측근들의 부정부패를 막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급사하여 어린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정세는 더욱 복잡해져서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외 영토들을 차지하기 시작하는걸 시발점으로 해서 해외 영토들을 야금야금 빼앗긴다.
와중에 로마의 개입과 동맹으로 한숨 돌리나 싶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6세 시절 기원전 170년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에게 다시 패배한 후 로마 덕에 간신히 목숨을 보전하는데 성공했지만 동생 에우에르게테스가 왕위를 주장하며 서로 다투는 통에 또 다시 로마의 개입을 초래했다. 그 결과 이집트에 대한 로마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고, 외세가 자꾸 개입하다보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더욱 막장이 되었다.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왕위를 지켰으나 그도 다른 전투에서 전사한 후 사실상 로마의 보호국 수준으로 전락할 정도였다.[1][2] 거기에 더해 피지배인인 기존 이집트인들이 무려 20여년에 걸친 장기적인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고,[3] 피지배층과 이렇게 지나치게 괴리된 상태에서 지배층 내에서도 암투와 내분이 난무했고 부정부패와 착취도 많았다. 클레오파트라가 태어나기 수십 년 전부터 이 사단이 일어나서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라의 망조가 거의 확실하다시피 해진 것이 다름아닌 클레오파트라의 시대였다.
거기에 더해 그녀의 바로 전대에 왕위에 앉았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역시 선대 왕들이 망쳐먹은 내치를 수습하기는 커녕 악화시켜놓은 암군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자기 시대에서 점점 거세지는 로마의 압력이나 내정의 혼란을 신경쓰지 않고, 태평하게 지냈기 때문에 '피리부는 사람'이라는 뜻의 아울레테스라고 불리며 야유받았다. 물론,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가 정통인 후계자가 아니며 권력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로마의 세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은 고려해봐야 한다.[4] 그런데도 로마에 뇌물을 주거나 많은 공납을 바치는 행위 등은 이집트 사람들의 세금부담을 가증시켰다.[5]
또한 남동생이 통치하던 키프로스의 섬을 로마에 빼앗기는 것을 방치했는데 결국 시민들의 쌓였던 불만이 폭발하여 반란이 일어났다. 왕은 이 와중에 로마로 튀었고, 베레니케 4세[6] 가 잠시 즉위해서 비어버린 본국의 왕좌를 채웠으나 그는 폼페이우스 빽으로 돌아와서 베레니케 4세를 처형이란 방식으로 치워버리고 자기가 다시 왕좌를 찾았으나 크게 한 건 없었다. 그리고 아들(프톨레마이오스 13세)과 딸(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사망했다.
이런 복잡한 상황이 연신 누적된 덕에 나라가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일단 남동생과 함께 왕좌에 올랐으나, '''이후 어린 남동생을 배제하고 전권을 차지하려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정치적 움직임은 큰 반발을 샀다.''' 그 결과 권력 투쟁[7] 에서 패하여 지방으로 쫓겨났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전권을 차지했다.[8]
하지만 기원전 47년에 이집트를 방문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만남으로 클레오파트라 7세는 재기의 발판을 얻었다. 마침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로마의 내전으로 인해 알렉산드리아에 피난 왔던 자신의 정적 폼페이우스를 암살한 것이 "비겁한 행동"이라며 분노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였는데, 클레오파트라 7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만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때 카이사르의 나이는 50대 초반, 클레오파트라 7세는 20대 초반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융단을 선물 받았는데 그 융단을 풀어보니 안에 클레오파트라가 있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의 눈을 속이기 위해 클레오파트라가 잠입한 것이다.[9][10] 그리고 카이사르는 시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의 분쟁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를 지원했다. 이를 알렉산드리아 전쟁이라고 한다.
부왕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죽기 전에 '남매의 공동 통치'를 유언으로 남기고, 로마인들에게 유언의 집행을 맡겼다.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현직 집정관으로서 부왕의 유언대로 공동 통치로 되돌아갈 것을 결정한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를 지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게다가 폼페이우스는 패장이었다고는 하나 로마의 전직 집정관이었고, 전직 집정관(프로콘술)은 공화정 로마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는 지도층 인사였다. 이런 사람을 살해한 왕을 동맹국(사실상 속국)의 단독 국왕에 앉혀놓는 것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카이사르의 집행에 앙심을 품은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은 펠루시온에 주둔하고 있던 2만명의 병력과 72척의 갤리선을 활용해 카이사르가 소수 병력만 이끌고 있는 것을 노려 그를 공격했으나, 로마에서의 원군 도착으로 패배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살해당했고, 클레오파트라 7세는 막내 남동생과 재혼하여 그를 명목상의 공동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14세로 세운 뒤 실권을 장악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4세의 나이가 10세에 불과했기에 권력은 완전히 클레오파트라의 것이였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카이사리온[11] 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후 카이사르를 따라 귀빈으로써 로마에 방문하기도 했다. BC46년 카이사르의 개선식에 참석한듯 하며 카이사르는 40마리의 코끼리를 대동하고 카피톨리움 언덕을 내려왔다 한다.[12] 그러나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카이사르의 장례식에도 참석했으나[13] 이집트에서 공동 통치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이집트로 급히 돌아와서 자기 아들 카이사리온을 공동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15세로 세웠다. 또한 로마 내의 카이사르 파와 반 카이사르 파의 내전에도 관여하여 카이사르 파를 지원하려 했지만 폭풍으로 실패하였다.
기원전 41년에는 킬리키아의 타르소스에서 제2차 삼두정의 선두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났으며, 그 역시 클레오파트라 7세와 사랑에 빠졌다. 당시에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에 쓰일 자금을 얻기 위해 만남을 요청했으나, 곧바로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진다. 이후, 둘 사이에서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가 태어났다.
옥타비아누스와 관계가 틀어진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7년,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동방을 다시 방문했고, 아예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하여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를 낳았다.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동방 원정을 지원한 공으로 "알렉산드리아의 기증"을 통해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 자녀들에게 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들을 전부 나눠주었는데, 클레오파트라를 왕 중의 여왕으로 선언하고 카이사리온과 함께 이집트를 공동 통치하도록 했으며, 쌍둥이 중 남자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에게 아르메니아, 메디아, 파르티아를 주었고 쌍둥이 중 여자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에게 크레타와 키레나이카, 막내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에게는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주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달렸고,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 침공을 선포한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맞섰으나 패배하여 도주한 뒤 알렉산드리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최후는 코브라가 자신을 물게 하여 자살했다는 설이 가장 유명한데, 이집트 코브라를 과일 바구니에 숨겨 가져왔다 한다. 다만 이는 후대에 붙인 이야기라는 말이 있는데, 이집트 코브라가 2m나 되어 숨기기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린다고 해서 즉사하는 것도 아니고, 독사한다고 해도 2시간 뒤에나 사망하기에 말이 되지 않는다고. 그외에 음독 자살이라는 설, 안토니우스와 동반 자살했다는 설, 옥타비아누스가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했다는 설 등 다양한 설이 난무하지만 대표적인 떡밥거리다.
사실 옥타비아누스가 개선식 때 꼭 클레오파트라를 내세워야만 했느냐면, 실제로 선전 때 로마를 멸망시키려 한 요부로 포장했으니 엄청난 효과를 낳을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이복 여동생이 끌려왔을 때는 동정받은 바가 있다. 즉, 로마에서는 여자를 이겼다거나 여자를 앞세워서 영광을 얻으려 한다고 여론이 좋지 않게 조성될 수도 있었기에 죽는 것도 나름대로 유리했다는 것이다.
흔히 엄청난 미인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빼어난 미모와 매혹적인 목소리, 재치와 지성을 갖추어 남자를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미모로 로마를 좌지우지하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패하여 독사로 자살했다는 이미지와 오리엔탈리즘이 어우러져 마녀, 색기 넘치는 요부, 팜므파탈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클레오파트라가 한 세기의 연애에 대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연애는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유언장에서도 클레오파트라나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로마에서 단지 구설수에 오르는 정도 이상의 문제는 겪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에서의 정치적 입지가 로마에서의 카이사르와는 달라서 아들 이름을 대놓고 카이사르라고 짓고 카이사르와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열심히 이용했지만, 카이사르 입장에서도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에서의 지위를 안정시키는 것이 유리했으므로 이 관계는 양쪽 모두 정치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이었으며, 카이사르는 언제나 그랬듯이 바람둥이 노릇과 정치가로서의 입장을 잘 조화시켰다.그녀는 금으로 장식된 이동 닫집 아래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누워 있었는데,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마치 그림속의 비너스와 같았다.
플루타르코스 <안토니우스> 25
그녀는 여인의 아름다움이 꽃을 피우고 지성이 힘을 발휘하는 나이에 안토니우스를 향해 갔다.[14]
플루타르코스 <안토니우스>
반면 안토니우스의 경우는 정말로 홀렸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사실 안토니우스도 여색에 빠져 모든 것을 맡기는 한량은 아니었다. 안토니우스가 추진했던 파르티아 정벌을 위해 군자금이 필요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풍부한 경제력을 지원하는 대신 안토니우스의 군사력을 원했던 것이다. 서로 정치적인 계산 하에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런 정치적인 계산만으로 보기에는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에서 너무 많은 것을 퍼주었다. 로마에서만 하게 되어 있는 개선식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열었고, 클레오파트라의 세 아들[15] 이 로마를 분할하여 공동 통치하게 하려는 계획까지 세워서 로마에서 정치적으로 강한 비난을 받게 된다. 게다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였던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도 이혼했고, 유언장에서는 로마가 아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고 하는 등의 행동으로 인해 개인적 인망 역시 크게 잃었다. 더구나 사실상의 마지막 전투가 된 악티움 해전에서의 전개를 보더라도 자신이 전투를 주도하지 못하고, 전쟁 지휘 경험이 없다시피 한 클레오파트라에게 끌려다녔다. 따라서 안토니우스가 처음에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클레오파트라에게 접근했을지 몰라도 정말로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렸다고 할 만하다. 반론으로는 안토니우스가 정치적으로 너무 무능해서 단지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카이사르 생전에 군사적으로만 훌륭했을 뿐 정치적인 면에서는 낮은 평가를 받았으므로 무리는 아니지만,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딱 빠지지 않고서야 그 정도로 무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16]그녀는 언제나 관능적인 쾌락을 새롭게 찾아냈고, 그것으로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으며 잠시도 그가 한눈을 팔지 못하게 했다. 함께 주사위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냥을 했다. 안토니우스가 훈련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늘 함께했다.
플루타르코스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7세는 큰 야심을 가진 정치가였다. 권력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기도 했지만, 그녀 자신의 능력도 출중했다. 이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이 이집트어 배우기를 거부하고 그리스어만 사용했던 반면, 토착 이집트어를 배운 최초이자 최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파라오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여러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여 통역이 필요없을 정도였으며, 정치 수완도 뛰어나 로마의 최고 권력자들을 휘어잡는 한편 이시스의 현신을 자처하며 토착 이집트 백성들로부터도 인기를 모은 엄친딸이었다고 한다.
또한 카이사르파에 가담하여 자칫 내전에 휘말릴수도 있는 처지에서 안토니우스가 권력기반을 공고화하기 위해 파르티아 원정을 나선다는 점을 현명하게 파악하여 직접 타르수스까지 가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안토니우스를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후견인으로 삼은 예리함도 있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첫 만남장면을 보면 클레오파트라가 나름대로 호화롭게 기획한 흔적이 역력하다.[17]
하지만 그런 그녀도 다 망해 가는 막장 나라를 구할 수는 없었다. 고립된 소수 그리스 - 마케도니아인 지배층의 인적 자원이 완전히 고갈되고 부정부패와 권력 암투에 빠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는 나라를 건사하기 위한 기본적인 군사력조차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외세를 이용해 생명연장의 꿈을 노릴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가장 중요한 악티움 해전에서 군사적 무능을 드러내기도 했다.[18][19][20] 막대한 돈을 쟁여놓고 돈과 정치적 술수를 주 무기로 삼으며 혈육도 가차없이 제거하는 냉정한 모습은 전형적인 고대 서아시아 전제 군주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당시 그녀가 처한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모습이라 볼 수 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인물들을 살펴보면 정말 클레오파트라 말고는 답이 없다는 말이 나올 만큼 무능한 인간들 투성이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부왕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내정과 외치 모두를 말아먹다가 반란이 터져 왕위에서 물러나 로마로 망명을 간 적이 있을 만큼 막장이었고, 뒤를 이은 클레오파트라의 언니 베레니케 4세는 한 술 더 떠 지나친 사치를 부리고 내정을 말아먹다가 로마의 지원을 받고 돌아온 아버지에게 패해 처형당한 막장 군주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도 정치적인 능력을 보여준 게 없다는 걸 감안하면 당시 이집트로서는 클레오파트라가 마지막 희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사치스러움을 과시하기 위해 진주를 식초에 녹여먹음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안토니우스와 하루에 20만 세스테르티우스 상당의 돈을 다 써버릴 수 있느냐 없느냐는 내기를 걸어서 진주를 식초에 녹인 다음 원샷으로 승리했다는 일화다. 그런데 사실 진주는 식초 정도의 산도에는 그렇게 빨리 녹지 않고, 강산을 들이부어야 순식간에 녹는다고 한다. '''황산'''이나 '''염산'''을 쌩으로 들이켰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마 거짓과 과장이 상당히 많이 가미된 에피소드일 터이다. 역사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사실 진주를 식초에 녹인 척 하고 그냥 삼켜버렸을 것이며 그 진주는 나중에 '''자연스러운 배출 과정을 통해''' 회수되었을 것이라 한다. 전승에 따라서는 양 귀에 진주 귀걸이를 달고 나와서 연회 끝무렵에 시종에게 식초를 두 잔 가져오게 해 우선 귀걸이 한 쪽을 떼어서 식초에 넣어 마셔버렸다. 그리고 다른 한 쪽도 떼어내려 했는데 놀란 안토니우스가 패배를 인정하고 두 번째 진주를 먹는 것은 제지했다고도 한다.
양귀비가 여지를 좋아한 만큼 클레오파트라는 무화과를 좋아했는데 굉장한 대식가여서 하루에 먹어 치우는 무화과나 식사량이 엄청났다. 그녀가 시원시원하게 먹는 모습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반했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자녀들 중 카이사리온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살해되었고, 안토니우스와의 사이 두 아들도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요절한 것으로 보이지만, 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지금의 리비아인 누미디아의 왕 유바 2세와 혼인하여 자손을 남겼고, 이들의 자손들은 로마 귀족들과 오랫동안 통혼했다고 전한다.
3. 여담
상기한 이미지와 이집트 벽화, 혹은 서구인들의 "동양 미인"(몽골리안 말고 중동 쪽의 아랍계)에 대한 환상 때문인지 근현대 창작물에 등장하는 클레오파트라들은 대개 "이국적인 동방 섹시녀"라는 컨셉을 가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특징으로 까무잡잡한 피부에 샤프한 이목구비, 짙은 눈화장이 깔린 길고 째진 눈, 윤기 흐르는 직모 흑발[21] , 늘씬한 몸매에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노출도 높은 패션 등이 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집트 파라오의 전통을 따라 철저한 근친혼을 유지했으므로 토착 이집트인의 피가 섞였을 확률은 거의 없다. '''즉, 클레오파트라는 아랍계가 아니라 유럽 백인계이다.'''[22] 물론 그리스인들도 피부가 백인 중에서는 어두운 편이긴 하지만.
펠라치오의 달인이라는 말도 있다. 그당시 이집트에서는 고위 여성이나 무희는 구강성교를 할 줄 알아야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하룻밤새 펠라치오로 100명의 군인들을 보내버렸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일각에서는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여왕이었다는 사실 하나에 흑인이라는 주장을 하지만, 이는 이집트가 아랍인들이 주를 이룬다는 사실이 무시된 주장이다. 아프리카는 사하라 사막을 기준으로 북아프리카와 중남부 아프리카로 나뉘는데 전자를 '''화이트 아프리카''', 후자를 '''블랙 아프리카'''로 부른다. 그 이유는 북아프리카는 백인들이 주류이고 중남부 아프리카는 흑인들이 주류이기 때문이다. 이집트인들 가운데서 흑인이 아주 없는 건 아니고,[23] 남부 지역에 흑인 혼혈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백인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의 가문은 마케도니아 왕국 출신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에게서부터 이어져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다.
상단에 올라온 당대의 주화 사진이나 두상 따위에서 묘사된 모습을 보면 뽀글뽀글 곱슬머리에 우뚝 솟은 우람한 매부리코, 푹 들어간 눈두덩이 등 유감 없는 그리스적 외모를 뽐내고 있다. 물론 그런 물건들에서 군주를 묘사할 때는 어느 정도 정형화된 기법이 사용되거나 당대 미 의식에 입각한 보정이 들어가게 마련이니, 그걸 또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이집트 방식으로 묘사된 클레오파트라 유물을 보면 생김새가 또 딴판이지만, 고대 이집트의 인물 묘사는 정형화의 극치를 보여주기로 유명하니 별 의미는 없다.
어쨌든 현대 대중 문화에서 그려지는 클레오파트라의 모습들은 실물과는 완전히 딴판일 가능성이 높다. 실사물의 경우 고증을 따진다면 중동계(특히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계) 배우보다는 그리스계 배우가 클레오파트라 7세를 연기하는 게 가장 고증에 부합하는 캐스팅일 것이다.
사실 현대보다 더 이전에 그려진 서양화 속의 클레오파트라들은 보통 전형적인 중근세 유럽계 백인 왕족의 모습과[24] 현대에서 상상하는 오리엔탈리즘 스타일 화[[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c/c3/Cleopatra_and_Caesar_by_Jean-Leon-Gerome.jpg|풍]]으로 그려놨다. 그런데 공통점이라면 현대와 다르게 무조건 흰 피부로 묘사해놨다.
클레오파트라가 식초에 녹여마셨다는 진주 일화에서 쓰인 식초는 와인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25] 그 중에서도 마레오틱 와인(mareotic wine)이란 고대 이집트산 화이트 와인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26][27] 이외에 그녀가 와인 목욕을 했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헛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남녀 태아의 발육에 속도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여자 노예 여럿을 임신시킨 뒤 산 채로 배를 갈라 아이의 발육 정도를 확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막 갖다붙이는 '폭군의 악행' 내러티브의 스테레오타입이라 믿을만한 출처가 없는 한 걸러 듣는 것이 좋다. 중국 상나라의 제신과 달기,[28] 일본사의 부레츠 덴노, 그리고 더 고대의 파라오,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 등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붙어있다.
이미지로만 본다면 고대 이집트 문명 출신처럼 생각되고 또 그렇게 묘사되지만, 기원전 69년 출신으로 시대적으로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지어졌던 기원전 2560년보다 오히려 현대에 더 가까운 인물이며, 고대 이집트 문명보다 나중에 생겨났던 고대 그리스 문명보다도 더욱 나중에 생겨난 고대 로마 문명(지중해권 완전 통일 이전)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굳이 말하자면 고대 이집트 말기의 인물이라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4. 매체에서
이미 생존해 있을 때부터 고대 서양사에서 제일 유명한 여성이었고, 수도 없이 많은 전설과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되었다.
초선, 양귀비럼 시대와 국가를 대표하는 미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미인, 이국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마케팅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당장 '클레오파트라가 먹은', '클레오파트라 화장품' 키워드로 검색하면 클레오파트라가 사용했다고 알려진 음식과 화장품 재료가 나온다. 물론 까마득한 먼 옛날 유명 사람이 사용한 재료라고 해서 그것이 그 재료가 좋다고 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29] 연예인이 광고하는 물건이라고 그 물건의 품질을 연예인이 보증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
4.1. 영화
많은 영화들이 있지만 미국에서만 4편을 찍었다. 그중에서 유명한 것은 세실 B. 데밀의 클레오파트라(1934년작). 클로데르 콜베르(Claudette Colbert)가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했다.
조셉 L. 맨키위즈(Joseph L. Mankiewicz)가 제작한 1963년작 클레오파트라도 유명한데, 주연으로 리처드 버튼이 안토니우스, 렉스 해리슨이 카이사르, 그리고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했다. 다만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 실패했다.[30][31]
2010년경 소니 픽쳐스에서 새로운 클레오파트라 영화를 만들 예정이란 소식이 나왔다. 소니는 클레오파트라가 자기들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될 거라며 큰소리치며 안젤리나 졸리를 캐스팅해서 에픽물을 만들려고 프로젝트를 개발 중이었으나, 현재까지도 개발 단계를 못 벗어나고 있다. 거쳐간 감독만 해도 폴 그린그래스, 제임스 카메론, 이안, 데이비드 핀처, 드니 빌뇌브 등 내로라하는 거물급 감독만 무려 다섯 명. 결국 2019년 안젤리나 졸리도 본인의 나이 문제로 더이상 클레오파트라를 맡긴 힘들다며 프로젝트를 떠났다. 그러다가 2020년 10월. 갤 가돗, 패티 젠킨스 연출, 파라마운트 제작을 맡는다.#
그런데, '''유대인'''[32] 인 갤 가돗이 클레오파트라 역을 맡는다고 하자 아랍권이 격분하기 시작했다.# 사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리스계 백인이고 갤 가돗은 백인계 혈통 유대인이므로 고증상으로는 그럭저럭 넘어갈 정도이지만, 이집트를 포함한 아랍인들이 증오해 마지않는 유대인이라는 거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 게다가 갤 가돗의 경우 2014년 7월 가자지구 분쟁 당시 SNS에서의 발언 논란을 일으킨 바 있기에 단순히 유대인 혈통만으로 논란이 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4.2.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최초 언급은 어쌔신 크리드 2. 고대의 암살자 아무네트가 독사로 암살했다고 언급되며 따라서 템플 기사단으로 추측됐다. 이후 이집트를 배경으로 하는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성우는 Zora Bishop. 일본판 성우는 아마미야 소라.
선왕의 사망 이후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권력에 타락한 동생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 그녀는 왕위를 빼앗기고 추방당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신세로 등장. 따라서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 큰 원한을 가진 바예크와 아야에게 고대 결사단의 정체를 알려주고 후원자 겸 동맹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들어서며 명맥이 끊긴 메자이 전통을 다시 부활시켜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배후인 고대 결사단의 척살을 명령하며, 처음에는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패배하여 이집트로 넘어오려던 폼페이우스와 동맹을 맺고자 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결사단의 공격으로 전사하며, 대신 바예크와 아야의 도움을 받아 알렉산드리아의 왕궁에 잠입하여 카이사르와 만날 수 있었고 이후 카이사르의 힘을 등에 업고 골육상쟁 끝에 파라오가 되는 데 성공한다.
아야에게 여신으로 숭배될 정도로 지지 받았으나 카이사르와 함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하 무덤 석실로 들아간 후 거의 궤멸한 결사단과 거래, 고대 결사단을 측근으로 받아들이면서 바예크와 아야를 배신한다. 이후 카이사르를 따라 로마에 왔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이후 이도저도 아닌 입장이 되어 로마에서 사생아였던 카이사리온을 키우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고 이틀 후 아야가 나타나 아폴로도로스는 당신을 위해 죽었는데 당신은 로마의 앞잡이가 되었고 백성들도 당신을 로마의 창녀가 되었다고 비난한다면서 당신은 이제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이니 민중들에게 폭정을 저지르면 다시 목숨을 거두러 찾아올 것이라며 협박한다.
카이사리온을 데리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갔으며 한동안은 나라를 풍요롭게 다스였지만 여전히 권력의 욕망에 사로잡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고 내전에 개입하였다가 역사대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하며 몰락하게 된다. 그리고 약속대로 아무네트가 알렉산드리아의 궁전으로 다시 찾아오자 운명이 끝났음을 인정한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아무네트에게 카이사리온을 숨겨줄 것을 요청했고, 그 대가로 감추어진 존재로 데려가는 것을 받아들였다. 알려진 것과 다르게 최후는 아무네트가 건내준 독약을 받아들이고 그녀와 아들이 떠나자 마시고 자살한다.
본 편에선 시종일관 왕족의 권위적이고 교만한 모습을 보이며 본인의 세력이 위기의 상황에 몰려도 임무를 던져놓고 직접 나서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스토리 중간에 융단에 싸여 잠입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극약처방의 상황이 있는데, 그 잠입하는 잠깐의 시간을 못견뎌 도착하지 않았냐고 재촉한다. 등장부터 나와 잠자리를 하자는 대사를 칠 정도로 색욕을 밝히는 모습을 보인다.
4.3. 여신전생 시리즈
4.4. 기타 작품
- 헨델의 오페라 줄리오 체자레에서도 나온다. 음역은 소프라노. 허나 여기서는 실제 역사의 인물과는 거의 별개에 가까우며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 데즈카 오사무의 아니메라마 3부작 중 클레오파트라가 존재한다. 여기서는 처음엔 못생긴 얼굴로 나오다가 갑자기 미인이 된다. 중간에 카이사르를 만나는 장면에서는 위의 융단 일화를 반영해서 클레오파트라를 데려다주는 할멈 캐릭터가 클레오파트라를 직접 자루처럼 생긴 융단에 포장하는데.... 알몸의 클레오파트라를 오밀조밀하게 공처럼 만들어 타이트하게 융단에 밀봉하고(...) 하여튼 둥글둥글한 클레오파트라가 들어가있는 융단을 바치는데 융단 속에서 클레오파트라가 몸을 풀면서 나오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애니 자체는 성인 취향으로 제작되었지만, 개그와 진지함의 조화가 되어있지 않아 흥행 성적이 썩 좋지 않아서 개봉 후 곧바로 잊혀졌다.
- 단테스 인페르노에서는 2층 육욕의 원에서 안토니우스와 함께 보스로 등장. 육욕의 원에 도달할 때부터 열심히 단테를 도발하다가 최상층에서 안토니우스와 함께 단테와 싸운다.[33] 안토니우스가 쓰러진 뒤에는 단테를 유혹(버튼 액션이다)하지만 결국 낫에 찔려 사망한다.
- 시드 마이어의 문명에서는 문명 3까지 이집트 문명 여군주였으나 문명 4에서 하트셉수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34] 그리고 문명 온라인에서도 하트셉수트가 이집트 지도자로 등장하면서 계속해서 밀려났지만 문명 6에서 간만에 이집트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 태고의 달인 - 동과 카츠의 시공대모험 (태고의 달인 - 쿵딱쿵딱 시공대모험)에 클레오파트라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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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피바디와 셔먼 쇼에도 등장. 근데 예상과 달리 첫 등장은 상당히 거칠고 경박스럽고 예의없게 등장한다. 피바디의 교육에 의해 우리가 알고 있는 클레오파트라로 변하나 시저의 취향이 과격한 것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본래의 성격으로 돌아온다.
-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비담이 염종한테 "여자가 왕이 된 경우가 있냐"라고 물어보자 염종이 "서현국(이집트)에 하나 있긴 했다던데 그 대에서 나라 망했다"라고 간접적으로 까인다... 신라에는 바로 옆나라에 여자가 천황이 된 경우가 있었다.[35]
- 타임보칸 24에서는 날씬한 남편 클레오와 뚱뚱한 아내 파트라가 나오는 흑역사가 나온다.
- 메탈슬러그 어택에서는 PHARAOH REBIRTH 엑옵 사전구매 유닛으로 등장했다.
- Fate/Grand Order에서는 어새신으로 나온다. 클레오파트라(Fate 시리즈)문서 참조.
- 도미네이션즈에서 영웅으로 등장한다.
- 클레오파트라 인 스페이스라는 작품에서는 클레오파트라가 친구들과 놀다가 3000년 후로 가는 포탈에 휩쓸려 미래에서 모험하게 된다. 현재 만화 원작으로 드림웍스가 TV 애니화를 해서 방영 중이다.[36]
[1] 이렇게 된 데에는 군사력이 급속도로 축소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그리스-마케도니아 군인들에게 각지의 땅을 주어 정착시켜서 예비 군사력으로 삼았다. 셀레우코스 왕조 항목에도 나오지만 이런 정착 군인들을 카토이코이(Katoikoi) 혹은 클레루코이(Klerouchoi)라고 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군대의 주력인 팔랑기타이로 복무했다. 그리스의 유입 인구가 줄어들자 그 대신 갈라티아의 켈트 병사들과 같은 여러 용병들을 적극 유치, 정착시켰다. 클레루코이들과 마찬가지로 땅을 주어 정착시켰는데, 그 땅(파윰 분지)엔 아직도 켈트 혈통의 후손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를 위한 재원은 이집트 농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충당했다.[2] 하지만 왕조에 유입되는 그리스인 인구가 거의 단절되고 용병 고용에도 한계가 찾아오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군사력은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 거기에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시도때도 없는 전쟁은 그 한정된 병력 자원마저 빠르게 소모시켰다. 나중에는 도저히 군사력을 유지하지 못하여 라피아 전투 때처럼 이집트 병사들을 대거 훈련시키거나 이집트인들을 클레루코이에 받아들이는 등의 시도도 있었지만, 이미 불신과 반발심이 팽배하여 그다지 좋은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만약 승리한다면 승리에 공을 세운 이집트 병사들이 그 대가를 요구하고, 이를 그냥 받아들여 주면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의 배타적 권력 독점에 차질이 생긴다. 그러다보니 지배층은 공을 세운 피지배층인 이집트인 병사들의 요구에 불성실하게 응하게 되었으며 자연히 피지배층인 이집트 원주민들의 불만도 누적되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각주 뒤에 나온 20년의 이집트인들의 반란이 튀어나오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이런 구조로 일이 진행되다보니 자기 영토 내에서 자국민들(피지배층인 이집트인들)과의 화합부터 안 되서 자국 내에서 자기들만의 군대를 만들고 강력하게 유지시키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으며 자연히 이는 군대의 기하급수적인 축소로 이어지게 되었다. 당연히 국력도 이에 맞춰서 축소되었다.[3] 앞 각주에서 언급된 피지배층인 이집트인들이 공을 세워도 처우를 제대로 안 했던게 문제였다. 게다가 이들의 요구사항도 지배층 입장에선 들어줄 수 없는 난제였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4세 무렵 라피아 전투에서 팔랑크스의 주력이 된 이집트 병사들이 분전하여 승리를 거뒀지만, 승전 후 독립을 주장했는데, 저 독립이 누구에게서 독립을 원하는건지 생각해보면 왜 수용되지 않았고 반란으로 이어졌는지 알 수 있다.[4]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경우 선대인 프톨레마이오스 11세의 직계자손이 아니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아들인데 프톨레마이오스 10세 혹은 프톨레마이오스 11세가 되지 못했었다. 이유는 그의 아버지였던 프톨레마이오스 9세 다음엔 9세의 남동생 겸 아울레테스의 작은아버지가 프톨레마이오스 10세로 즉위했고 그 다음엔 자신의 사촌이 프톨레마이오스 11세로 즉위했다. 계보상 그는 방계여서 정통성이 부족했지만, 먼저 왕위에 앉은 사촌인 프톨레마이오스 11세가 제대로 자기 후계에게 왕위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고 딱히 즉위시킬만한 사람도 없자 왕위에 앉게 된 것이었는데 여기엔 로마의 영향이 컸다.[5] 그리고 이런 피지배층에 대한 착취성 정치는 이미 전 세대 왕들이 꾸준히 누적시켜오고 있었다.[6] 클레오파트라 7세와 똑같이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딸로, 즉 자매다. 다만 어머니가 달라 이복자매다.[7]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클레오파트라 7세의 염문설을 퍼뜨려 쫓아냈다고 설명하였다.[8] 참고로 이런 지배층간의 정치적 내분은 앞서 언급되었듯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연신 반복되는 고질적인 문제점들 중 하나였다.[9] 참고로 이는 전설일 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집트의 더운 날씨에 오랜 시간 동안 융단 안에 들어가 있었으면 열사병으로 죽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실제로 클레오파트라가 융단 속에 숨었었면 나왔을 때는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으로, 그렇기에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부하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들 '설마 미쳤다고 저 안에 숨었겠냐'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리고 이 일화를 다룬 옛날 서양 그림들을 보면 클레오파트라를 나체로 그린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감상자의 눈요기를 위한 것이지만 화가들은 열기 때문에 옷을 다 벗은거라고 핑계를 대기는 했다.[10] 이 시기를 다룬 게임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에서는 현실성을 위해서인지 새벽에 궁으로 들어간다. 실제 양탄자에 들어가 있던 기간도 그리 길지 않고.[11] 작은 카이사르라는 뜻. 풀 네임은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였다.[12] 그러나 당시 로마의 여론은 클레오파트라에 우호적이지 않았다한다. 특히 키케로의 경우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하기사 카이사르는 이미 12년전 혼인한 정부인 칼푸르니아가 있었으니...훗날 안토니우스도 정적으로부터 비슷한 비판을 받았다.[13] 카이사르 사후 유산을 기대했던 듯하지만 카이사르는 카이사리온에 대해 유언장에 단 한 마디도 적어놓지 않았고 클레오파트라는 급 실망했다고 한다.[14] 당시 클레오파트라의 나이는 28세였다.[15] 1명은 카이사르의, 2명은 안토니우스의 아들이었다.[16] 애시당초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사후 카이사르 파와 원로원 파를 조정해서 로마의 내전을 막는 등 정치가로서 나름 능력을 보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상관 카이사르의 정적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투쟁에서는 상당히 무능한 모습을 보였던 건 사실이다. 상술한 대로 로마 내전을 막긴 했지만 키케로의 술책과 원로원파의 공작으로 인해 로마의 적으로 찍혔을 정도니 말이다.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적잘한 시기 원로원파를 배신하고 안토니우스를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안토니우스는 로마와 전쟁을 벌였을 수도 있었다.[17]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묘사했다 ."금으로 장식된 뱃머리, 은으로 된 노를 갖춘 호화로운 선박에 비너스처럼 장식한 그녀는 금으로 장식된 별실에 누워있었다. 그녀의 주위는 큐피드신을 닮은 아이들이 부채질을 하며 서 있었다. 바다의 요정 네레이드처럼 꾸민 시녀들은 키와 돛줄을 잡아 배를 몰았다. 이 배에서부터 풍겨나는 야릇한 향기는 강기슭까지 퍼져 나갔다. 클레오파트라가 도착하자 안토니우스는 그녀를 초대했지만 오히려 그녀는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배를 방문해줄것을 요구했다. 안토니우스를 맞이하기 위해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도 성대한 준비를 했다. 안토니우스를 놀라게 한 것은 엄청나게 밝은 실내였다. 천장에 매달린것, 가지각색의 방식으로 벽면에 비스듬이 세운 것,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것 등 사방 가득 등불이 놓여있었다."[18]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가 탑승했던 선박이 아직 전투가 어느 한 쪽의 판정승으로 흘러가기도 전에 중도탈주해버린 것이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 세력이 패배한 원흉이기도 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선박은 후미에 위치해있어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황에서 다른 배들의 해전과 그 판도를 모두 관망할 수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그런 선박이 튈 경우, 지휘관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우리 세력이 지는건가? 생각해서 튀기 마련이고 안토니우스 역시 클레오파트라의 오판을 그대로 따라가버렸다. 그런데 정작 클레오파트라가 튈 당시의 악티움 해전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중 어느 쪽도 크게 유리할 것은 없는 상황이었다는게 후대 역사가들의 분석이며, 클레오파트라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급하게 뱃머리를 돌려 튀어버린건 그냥 전쟁이 익숙치 않아서 그 상황을 오래 견디지 못했기에 성급하게 행동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애초에 클레오파트라는 암투에는 능했지만 전쟁을 직접적으로 현장에서 경험한건 악티움 해전이 처음이었다.[19] 반면 안토니우스의 경우 카이사르 밑에서부터 유능한 2인자이자 군인이긴 했으나 그 역시 악티움 해전에선 너무나도 큰 오판을 두 개나 저질렀다. 하나는 후미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배가 튀는걸 본 후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이 졌다고 판단해서 철수하기 시작한 것. 노련한 군인인만큼 그의 입장에선 후미의 배가 먼저 튄다면 경험이 경험인만큼 상황이 나빠졌다고 계산할법도 했지만 정작 상황은 정반대로 아직 대치구도가 이어지고 있었으며 승부를 보다 강하게 봐서 이기기를 각오하며 싸웠을게 더 나았으리라는 부분이 최대의 함정.[20] 또한 안토니우스는 이 해전이 중요한 전쟁이 아니라 생각해서 좀 져도 나중에 만회하면 그만이라고 판단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옥타비아누스 쪽이 보다 견고한 지지를 얻고 승리의 기반을 닦는데 너무나도 큰 도움을 주고 말았으며 안토니우스는 두 번 다시 악티움 해전에서 말아먹은 부분을 만회시키지 못하고 죽고 만다. 사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막대한 재산과 경험많은 군대를 쟁여두고 있어서 설령 해전 한번 졌다고 해도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듯하지만 세상에서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은 그 둘 뿐이었고 그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악티움은 결전의 전장이었던 것이다. 당장 안토니우스군의 병사들은 원래 로마인이므로 그들은 안토니우스의 군에 소속된 것만으로 반역자들이며 이집트의 여왕에게 충성을 바칠 의리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와해되지 않은 것은 이집트의 부와 안토니우스 개인의 능력이었고 결국 안토니우스는 상어가 물속에서 움직임을 멈추면 죽듯이 단 한번이라도 패배하는 경우 그의 휘하의 군대는 순식간에 와해되어 로마에 항복할 것이 불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로마와 이집트 사이에 낀 그리스 계열 도시들도 이전 카이사르의 내전 때 경솔하게 폼페이우스 편을 들었다가 학살을 경험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그들의 입장을 애매하게 두었다가 승자에게 붙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래서 이들에게 악티움 해전은 자신의 미래와 생명까지 결정할 중요한 방향키였고 여기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하지 미련없이 그를 버렸던 것이다.[21] 높은 확률로 단발로 묘사된다[22] 다만 이집트의 살인적인 땡볕 덕에 피부가 까무잡잡했을 것이라는 상상은 얼추 맞을 듯.[23] 고대 이집트 역사에 누비아계 흑인 왕조가 들어선 적도 있다! 당연히 파라오도 흑인.[24] 옷을 보면 알 수 있다. 소위 상상하는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 스타일이 아니다.[25] 그런데 이 시절 와인들은 죄다 유통기한이 길지를 못해서 1년만 넘겨도 와인 상태를 유지한다면 상등품으로 취급받았다. 왜냐하면 고대 시절 많은 와인들은 기껏 만들어놔도 1년도 못 넘기고 상하거나 식초가 되거나 둘 중 하나였기 때문. 저장기술과 숙성기술 등이 발전한 현대는 10년 이상 묵힌 와인도 판매되고 있다는거랑은 천지차이.[26] 현재 이 고대 와인의 이름을 따온 마레오틱 와인이란 현대 이집트산 와인이 생산되고 있고 재배지도 두 와인의 이름 유래가 된 마레오틱 호수 주변이라는게 공통적이다. 다만 당시의 재배 환경이나 포도 품종 등이 현대와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아서 맛이 같진 않을거라고.[27] 그녀가 와인을 마셨다면 그 와인은 달았을 가능성이 높으리라고 현대 사람들은 추측하고 있다. # 클레오파트라가 살던 고대 시절엔 어떻게든 당도를 높이고 알콜도수도 높인 와인들이 고급으로 취급받았으며, 당도를 높이겠답시고 끓인 포도즙과 꿀을 넣는 건 물론 납을 써서 포도주의 단맛을 올리려는 시도까지 했다. 납으로 된 잔을 쓰거나 납 용기에다 포도주를 끓이거나 아예 납을 직접 넣어버리기도 했다고. 이 때 납이 동원된 이유는 포도주 속 아세트산과 납이 반응할 경우 아세트산 납이 만들어지는데 이게 단맛이 나기 때문. 그리고 납은 일단 방부제 역할도 해서 넣었던걸로 보인다. 당연히 납 중독의 위험이 따라다녔지만.[28] 주왕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상나라 마지막 군주 제신과 그의 아내 달기에 관련된 흉악한 기록들은 주나라가 크게 과장했다라는 설이 현재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여기서 소개되는 클레오파트라의 악행들도 이와 비슷한 사정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토록 망국의 군주들에 관한 고대의 기록들은 왜곡되거나 과장되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29] 알다시피 중금속인 납을 얼굴에 바르면 건강에 매우 해롭다. 옛날에 했던 일들을 현대에 그대로 따라하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30] 박스 오피스 성적만 보면 북미에서만 5780만 달러를 벌어들인 그해 최고 흥행작이었다. 그러나 제작 과정에서 난항으로 제작비가 4400만 달러(2020년 기준 '''3억 7094만 달러''')까지 치솟았고, 극장 수익에서 2배는 벌어야 하는 걸 생각하면 망했어요. 이 영화로 위기에 몰린 20세기 폭스를 구원한 작품이 사운드 오브 뮤직.[31]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엑스트라 동원에, 소품에 지금 봐도 우와 소리가 나올 정도로 스케일이 크다. 제작진도 이거 분명 손해 볼 거라고 생각했지만 제작을 강행했다고...[32] 그냥 유대인도 아니고 출생지 자체가 이스라엘이다.[33] ...사실 단테와 피터지게 싸우는 건 안토니우스뿐이다. 클레오파트라 본인은 간간히 나타나서 안토니우스를 회복시켜주는 게 전부. 그나마도 손을 열심히 때려주면 추락해서 한동안 회복시켜주지 못한다.[34] 참고로 문명 5에서 이집트의 지도자로 등장하는 인물은 람세스 2세이다.[35] 히미코 항목에서 보듯이 히미코는 상당히 논쟁거리가 많은 인물이다.[36] 사무라이 잭이 생각나는 플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