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마츠 츠토무

 

[image]
이름
와카마츠 츠토무(若松勉)
생년월일
1947년 4월 17일
출신지
홋카이도 루모이
학력
홋카이 고등학교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좌타
신장
'''168cm''', 76kg
프로입단
1970년 드래프트 3위
소속팀
야쿠르트 아톰즈 - 야쿠르트 스왈로즈 (1971~1989)
지도자 경력
야쿠르트 스왈로즈 1군 타격코치 (1989[1], 1993~1994, 1997~1998)
야쿠르트 스왈로즈 2군 감독 (1995~1996)
야쿠르트 스왈로즈 감독 (1999~2005)
'''1978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선수(MVP)'''
1977년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스왈로즈)'''

1979년
에나츠 유타카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2년 센트럴리그 수위타자'''
1971년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320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아톰즈)'''
'''.329'''

1973년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355
'''1977년 센트럴리그 수위타자'''
1976년
야자와 켄이치
(주니치 드래곤즈)
.355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스왈로즈)'''
'''.358'''

1978년
미즈타니 지츠오
(히로시마 도요 카프)
.348
''''''야쿠르트 스왈로즈''' 역대 감독'''
노무라 카츠야
(1990~1998)

'''와카마츠 츠토무'''
'''(1999~2005)'''

후루타 아쓰야
(2006~2007)
1. 소개
2. 프로입단 이전
3. 현역 시절
4. 지도자 시절


1. 소개


'''작은 대타자(小さな大打者)'''
'''후루타 아쓰야 이전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대표하던 명선수, 미스터 스왈로즈'''
NPB 야쿠르트 스왈로즈 소속 선수, 지도자, 야구해설가, 야구평론가.
프로 선수 경력과 지도자 경력을 전부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지내며 팀의 센트럴리그 -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명선수로,[2]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정교한 배팅 실력을 선보이며 연간 3할 타율 12번[3] 등의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이 덕분에 붙은 별명이 위의 '''작은 대타자'''.
또한 통산 타율 '''.31918'''은 2017년까지 '''NPB 통산 2위'''이자 '''일본인 선수 통산 1위''' 기록이었으나 2018년 5월 2일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후배인 아오키 노리치카가 4000타수를 채워서 NPB 통산타율 1위 자리에 오르면서 각각 3위와 2위로 내려갔다.[4] 다만, 향후 아오키가 은퇴할 때까지의 성적 여하에 따라서 다시 원위치로 복귀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2. 프로입단 이전


홋카이 고등학교 시절 주력 선수로 뛰면서 야구부를 1964, 1965년 2년 연속으로 하계 고시엔으로 이끌었고[5] 졸업후 사회인야구 팀 '''덴덴 홋카이도(電電北海道)'''[6]에 입단했다. 사회인야구 시절엔 주위의 강호 팀들 덕분에 팀은 지역예선에서 번번히 탈락해 도시대항야구대회에 출장하진 못했지만 본인은 뛰어난 실력 덕분에 1967~1970년 4년 연속으로 보강선수로[7] 뽑혀 출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출장해서도 맹활약을 펼치며 그를 임대한 팀을 준결승 진출 등으로 이끌었다.
168cm[8]라는 작은 체구 때문에 본인도 주변 사람들도 프로 입단에 대해 소극적/회의적이었지만, 1970년 시즌오프 야쿠르트 아톰즈[9]의 감독으로 취임한 미하라 오사무와 그의 사위이자 같이 취임한 수석코치 겸 타격코치 나카니시 후토시의 설득을 받아, 처음엔 입단을 싫어했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꿔 결국 그 해 드래프트 3위로 야쿠르트 아톰즈에 입단하게 된다.[10] 이때의 등번호는 '''57'''.

3. 현역 시절


[image]
'''야쿠르트의 위대한 작은 대타자'''
[image]
'''와카마츠의 타격 장면'''
입단 후 나카니시 후토시와 맹훈련을 하며 실력을 다진 와카마츠는 입단 첫해인 1971년부터 주전으로 뛰며 비록 규정타석을 달성하진 못했지만 '''112시합 출장 타율 .303''' 을 기록하며 활약했다.(참고로 이해 세리그의 규정타석 만족 3할 타율은 나가시마 시게오 뿐이었다.)
이듬해인 1972년 등번호를 '''1'''로 바꾼 와카마츠는 더더욱 맹활약하며 그해 '''타율 .329/20도루''' 를 기록하며 수위타자를 획득하였고, 이후 계속해서 3할 타율을 11년, 두 자릿수 도루를 7번이나 기록하며 야쿠르트의 주전 외야수로써 활약, 작은 대타자의 명성을 과시했다.
또 1977년 '''158안타/타율 .358'''을 기록, 2번째 수위타자를 획득하기도 했는데[11] 이 해 삼진을 '''503타석 중 단 14번(!!)''' 만 당했을 정도로 뛰어난 선구안을 보였다. 이 해에는 장훈과 수위타자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고 승리했다.
이듬해인 1978년엔 찰리 매뉴얼, 오오스기 카츠오와 클린업 트리오를 이루면서, 개막 후 초반엔 요통, 건초염에 시달리는 바람에 부진했지만 5월 초 3연속 홈런을 기록하며 부활, 맹활약하며 그해 팀을 최초의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끌고 본인도 리그 MVP를 수상했다. 이후 히로오카 다츠로 감독[12] 하에 일본시리즈에서도 4연패를 노리던 초강호팀 한큐 브레이브스를 격침시키는 데 일조하며 본인 최초이자 팀 최초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하고 본인도 우수선수상을 획득했다. 그 후 계속해서 야쿠르트의 주전으로 팀을 지탱하며 미스터 스왈로즈로써의 실력과 인기를 과시했고 1986년엔 타격코치 보좌, 1989년엔 타격코치로 플레잉 코치 직을 맡기도 했다.
이렇게 야쿠르트의 스타였던 그였지만 1987년 부상을 당하면서 그 후유증으로 지병이던 요통이 악화, 수비를 소화하기 힘들어지면서 대타로 전환, 이후 3년간 대타로 나름 멋지게 활약한 후 1989년 현역 생활을 마감한다.
'''현역시절 통산성적은 2062시합 출장 7590타석 2173안타 220홈런 884타점 151도루 574사구 통산타율 .31918'''
'''MVP 1회, 수위타자 2회, 베스트나인 9회, 다이아몬드 글러브 2회, 일본시리즈 우수선수상 1회, 올스타전 MVP 2회 수상.'''
통산 타율인 0.319는 역대 2위이며 1위인 레론 리(롯데)와는 불과 1리 차이이다. 레론 리의 일본프로야구 실가동년수는 11년으로 출장 경기수나 타석 수 모두 리보다 훨씬 많은 와카마츠의 타율을 실질적인 최고 타율로 보는 관계자가 상당히 있다. 와카마츠는 19년간 선수 생활을 하면서 규정 타석에 도달한 것은 14회, 그 중 12회나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
은퇴 후, 와카마츠의 등번호 1은 팬들의 요청도 있고 하여 명예결번으로 지정, 그 등번호를 쓸 만한 뛰어난 성적을 거둔 선수에게만 주도록 되어있다.[13]

4. 지도자 시절


[image]
감독 시절의 와카마츠.
'''명선수, 외야수는 훌륭한 감독이 될 수 없다는 말의 훌륭한 반례'''
은퇴 이후 야구해설가/평론가로 일하다 1993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1군 타격코치로 복귀, 이후 2군감독 등을 맡은 후 1998년 시즌오프 노무라 카츠야의 후임으로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감독으로 취임한다.
재임 후 슬로건으로 '''데이터 + 스피드 + 파워''' 를 외치며 시즌을 시작한 와카마츠는 재임 후 2년간은 똑같은 성적으로(...)[14] B클래스였지만, 2001년 주력선수였던 가와사키 겐지로FA주니치 드래곤즈에 이적, 제이슨 제이컴이 퇴단, 이토 도모히토, 야마베 후토시가 부상으로 전력이탈하면서 불안하게 시작했으나, 베테랑 후루타 아츠야, 주력 거포타자 로베르토 페타지니, 이해 최다승을 획득한 후지이 슈고 등의 맹활약으로 '''팀방어율 3.41'''에 '''76승 58패 6무 승률 .567''' 의 성적으로 감독으로써 첫 센트럴리그 우승을 거둔다. 그 후 일본시리즈에서도 '''이테마에[15] 타선(いてまえ打線)'''을 앞세우며[16] 비원의 첫 일본제일을 바라던 나시다 마사타카 감독의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를 4승 1패로 개발살내고 감독 사상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거둔다. 이것이 긴테쓰의 마지막 일본시리즈 진출이 되면서 긴테쓰를 영원한 콩라인으로 만들어버린 건 덤(...) 그리고 이 해 NPB 최고 권위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도 수상한다.
[image]
2001년 일본시리즈 우승 후 헹가래를 받는 와카마츠. [17]
이후로도 야쿠르트를 계속해서 지휘하며 팀을 사상 첫 4년연속 리그 A클래스로 이끌기도 한 와카마츠는, 2005년 시즌 종료 후 후루타 아츠야에게 감독직을 넘겨주고 물러나게 된다. 본인은 감독보다 타격코치가 적격임을 항상 말하고 있다.
'''감독으로써의 통산성적은 975시합 496승 461패 18무 승률 .509/리그 우승 1회, 일본시리즈 우승 1회, 리그 A클래스 4번-B클래스 3번.'''
감독직 퇴임 후인 2009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1] 1986~1988년은 보좌, 1989년은 플레잉코치[2] 이렇게 한 팀에서만 선수/지도자로서 리그-포스트시즌 우승을 달성하는 건 정말정말 희귀한 사례다.[3] 이 기록은 NPB 역대 3위.(카와카미 테츠하루와 공동)[4] 참고로 아오키 이전의 통산타율 1위는 롯데 오리온즈에서 활약한 용병 레론 리('''.320''')가 가지고 있었으며, 장훈은 와카마츠에게 딱 '''.00003''' 밀려서 4위이다. 스즈키 이치로NPB에서 규정타수(4000) 미달이라서 통산타율 순위에 들어있지 않다.[5] 그러나 1964년에 본인은 병으로 고시엔에 출장하지 못했다(...)[6] 현재는 '''NTT 홋카이도(NTT北海道)''' 로 팀명 변경.[7] 도시대항야구대회 본선진출팀이 지역예선 탈락팀의 에이스 3명을 본선기간 동안 임대선수로 쓰는 제도. 올림픽의 와일드 카드제 생각하면 이해가 갈듯 싶다.[8] 공식적인 신장이지만 실제로는 166cm라고 본인이 고백한 바 있다.[9] 1974년부터 '''스왈로즈'''로 팀명 변경.[10] 다만 지명 이후에도 본인은 영 그것을 믿지 못했다고(...)[11] 최다안타는 이 당시 타이틀이 아니었다.[12] 식생활까지 엄격하게 관리하는 지도자로, 오랫동안 플레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히로오카 감독 덕분이라고 나중에 감사했다.[13] 이후 이케야마 타카히로아오키 노리치카가 달았고, 현재는 야마다 테츠토가 1번을 달고 맹활약하고 있다.[14] 66승 69패 승률 .489 순위 4위였다.. 단 2000년엔 1무 포함.[15] 오사카 사투리로 박살내라 라는 뜻의 속어.[16] 이해 팀 타선이 무려 '''211홈런, 타율 .280'''으로 리그 1위를 기록했으며 세부 성적을 보면 '''20홈런 이상이 4명, 특히 3번 로즈와 4번 나카무라 단 두 명이서 101홈런, 263타점을 합작'''해냈으며 5번 이소베는 '''홈런은 17개였지만 95타점을 뽑아냈다.''' 3번부터 6번까지 모두 '''타율 .315'''를 넘겼으며 7번타자인 요시오카가 '''26홈런을 쳐낼 정도였다.''' 반면 이해 팀 투수진은 그야말로 폭망이어서 '''팀 ERA가 4.98이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게 리그 우승팀의 ERA이다.''' 그것도 '''거의 시즌 내내 5점대를 유지하다가 시즌 막판 분전으로 간신히 4점대로 끌어내린 ERA'''이다. 선발 로테이션을 담당한 6명의 투수 중에 '''션 버그만 한명을 제외한 5명이 전부 ERA 4.90을 넘어갔으며''' 로테이션 투수 중 '''3명이 5점대 ERA을 기록'''했다. 특히 '''카도쿠라 켄은 6.48의 ERA로 로테이션의 제3선발 역할을 했다(...)''' 이 해의 긴테쓰는 78승 2무 60패의 성적이었지만 피타고라스 승률은 고작 71승 67패에 지나지 않을 정도였다. 타선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를 뒷받침하는 증거. 다만 이 극단적인 타력/투수력이 원인이 되어 일본시리즈에선 야쿠르트의 투수진에게 그 강력한 타선이 가로막히고(승리한 2차전을 제외하곤 패배한 경기마다 전부 2득점 이상을 넘기지 못했다.) 투수진은 도쿄돔에 서식하는 토끼떼들을 능가하는 센트럴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핵타선에 두들겨 쳐맞으면서 4승1패로 너무 무기력하게 패배. 결국 긴테쓰는 3년 후 비원의 일본제일을 이루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17] 선수들이 체구가 작은 와카마츠를 있는 힘껏 공중으로 띄웠는데 본인이 워낙 가벼웠던 데다 힘의 밸런스가 맞지 않아서 공중에서 한바퀴를 도는 공중'''제비'''(...)가 되고 말았다. 덕분에 기자들에게는 좋은 사진 거리를 남겼지만 본인은 지병이던 허리디스크가 도져서 고생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