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그린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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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Michael Lewis "Mike"Greenwell
생년월일
1963년 7월 18일 (61세)
국적
[image] 미국
출신지
켄터키 주 루이빌
포지션
좌익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82년 드래프트 3위
소속팀
보스턴 레드삭스(1985~1996)
한신 타이거스(1997)
1. 소개
2. 커리어
2.1. 보스턴 레드삭스
2.2. 한신 타이거스
2.3. 여담
3. 은퇴 이후


1. 소개


미국의 前 프로야구 선수이자 사실상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악의 먹튀 외국인 선수'''.
1980년대 보스턴 레드삭스의 중심타선을 책임지던 좌익수였지만, 한신 타이거스 팬들에게는 에스마일린 카리대, 루크 스캇, 아놀드 레온 급 존재인 인물이다.

2. 커리어



2.1. 보스턴 레드삭스


1982년 드래프트되어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1985년 처음으로 메이저에 콜업되어 17경기를 뛴 후, 조금씩 출전 시간을 늘려 나가더니 80년대 후반부터 포텐이 터지며 짐 라이스의 뒤를 이어 보스턴 레드삭스의 주전 좌익수를 맡았다. 1986년에는 뉴욕 메츠와의 1986년 월드 시리즈 출전 경력도 있었다. 당시 투수 로저 클레멘스의 대타로 나갔으나 삼진을 먹은 적도 있었다. 이는 두고두고 논란거리로 회자되는 선수 기용이기도 하다.
아무튼 전성기에는 평균 20홈런에 가까운 수준의 일발 장타력 외에 선구안도 좋아 볼넷도 잘 골라냈으며 삼진도 잘 당하지 않는 타자였다.[1] 1988년엔 타-출-장 .325-.416-.531의 아름다운 비율 스탯과 함께 22홈런 119타점을 기록, 실버 슬러거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693타석에서 볼넷을 87개 얻어내는 동안 삼진을 38개밖에 당하지 않은 정교함을 보여주며 호세 칸세코와 MVP 대결을 벌이기도 했지만, 결국 칸세코가 역사상 최초의 40-40 클럽 가입을 내세워 MVP를 땄고 그린웰은 MVP 투표 2위에 머물렀다.[2] MLB 올스타전에도 두 차례나 출전했던, 이름값만 놓고 보면 아시아 리그를 찾은 전 메이저리거들 중에서도 최상급의 커리어를 지녔던 타자다.
단 그린 몬스터가 버티고 서있는 펜웨이 파크의 좌익수임을 감안해도 최악의 수비력을 지녔다는 약점이 있었다.[3] 1996년엔 성적이 많이 떨어지게 되었고, 시즌이 끝나자 한신 타이거스가 '''역대 최고급 대우'''를 해주며 모셔 왔다.

2.2. 한신 타이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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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타이거스가 그를 모셔오기 위해서 투자한 금액만 '''연봉 3억 엔'''. 거기에다가 오사카 시내에 고급 아파트를 2채[4]나 제공해 주기까지 하는 등 파격의 연속이었다. 한신이 뭘 해 줬는지는 일단 밑 문단에 후술하기로 하겠다. 이 때만 하더라도 오사카 및 효고현 일대 언론들은 랜디 바스의 재래다 뭐다 하며 그런 역대급 최고 용병이 한신의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라고 신나게 떠들고 다녔다.
그러나 정작 스프링캠프 때부터 허리 통증을 호소하던 그는 결국 개막 엔트리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아니, 개막이고 뭐고 간에, 스프링캠프 때 허리 통증을 이유로 '''이미 미국에 돌아간 상태'''. 그러나 결국 4월 말에 다시 입국하여 일단은 소동이 일단락되나 싶었다. 당시 한신은 4번 타자 후보 자체가 부재해 고생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1997 시즌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카네모토 토모아키는 한신에 오긴 커녕 이제 막 히로시마에서 주전 타자로 도약했던 시기였고, 외국인 선수들은 왔다하면 부진한 성적으로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가 버리든가, 설령 첫 해에 잘해도 그 다음 시즌부터 다시 부진하여 마찬가지로 돌아가버리는 게 일상다반사요,[5] 1985년 우승 당시 주전 타자들은 4번타자 같은 1번타자3연속 백스크린 트리오를 포함한 거의 대다수가 은퇴했던 상황에, 주전이었던 와다 유타카[6], 세키카와 코이치, 쿠지 테루요시는 장타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똑딱이형 선수들이었는지라 아무리 없는 살림이라도 4번을 칠 형편이 안되었다. 그나마 과거 20홈런을 치기도 했던 야기 히로시가 있긴 했지만 이쪽은 1992년 부상 이후 주전 자리를 내주고 출전 기회를 대부분 빼앗긴 건 물론이고 기량을 거의 대부분 잃어버려 결국 1996년 시즌 종료 후 방출 후보까지 오를 정도였기에[7] 4번타자를 맡을 실력은 결코 아니었다. 결국 히야마 신지로신죠 츠요시같은, 장타 포텐은 있지만 컨택이 좋지 않은 선풍기형 타자들이 4번을 번갈아가며 맡고 있었다.
그래서 1997년 5월 3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 첫 출전해 결승타 포함 2안타 2타점을 적립하며 일단은 걱정을 없애는 듯 했다. '''그러나 그 걱정은 얼마 안 가 다시 생기고 만다'''.
5월 1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에서 자신이 친 파울타구에 발목을 맞아 부상을 입은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야구를 더 이상 하지 말라는 의 계시'''라고 말하며 돌연 '''은퇴 선언''' 후 5월 16일에 홀연히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래도 은퇴 선언 자체는 진짜였다. 다른 리그에서 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한신에서 남긴 성적은 '''7경기 26타수 6안타 .231 .310 .346 0홈런 5타점'''[8]. 한신은 '''안타 하나에 5,000만엔을 투자한 셈이었다'''. 당연히 한신 팬들에게 그린웰은 평생까임권을 얻고 일본프로야구에서 먹튀 용병이 등장할 때마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존재가 되었다.
다만 2019년에 일본 언론과 인터뷰를 했는데, 여기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연봉의 40%를 구단에 돌려주었고, 계약금도 구단에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구단주 측에서 정직해서 좋은 사람이라고 그냥 가지라고 했다고 한다(...)

2.3. 여담


한신은 그에게 아파트를 '''2채'''나 제공해 줬다. 원래는 아파트도 한 채만 제공해 줬으나, 그린웰이 '''방이 작다'''고 징징대는 바람에 '''옆 집을 매입해서 사이즈를 2배로 키우는 공사를 해줬다'''. 그러나 정작 그린웰이 살았던 시기는 '''한 달도 안 됐다.''' 결국 구단은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만 살았던 그린웰을 위해 '''멀쩡한 집을 두 채나 개조하고 그걸 원상복구하는 비용까지 써야 했다'''.
그 외에도 몸값 비싼 용병이다 보니 여러 특혜라든지 서비스를 충실히 해 줬으나, 정작 그는 개막 두 달도 안돼서 먹튀가 되면서 한신을 떠나 버렸다. 심지어는 한신의 철천지 원수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팬들, 아니, 요미우리를 넘어 '''일본프로야구''' 12개팀 전체 팬들에게 그는 사기꾼으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나중에 빡친 한신 측에서 계약 불이행을 이유로 그린웰에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걸기도 했을 정도.
당시 한신 감독이었던 요시다 요시오"폭풍처럼 왔다가 폭풍처럼 가버린 선수"라 평했다. 그리고 한신의 전설적인 외국인 타자였던 랜디 바스는 그린웰에 대해서 "애초에 제대로 뛸 생각이 없었던 선수" 라는 혹평을 남겼다. 또한 당시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이던 호시노 센이치의 증언에 따르면, 주니치에서도 그린웰 영입을 검토했으나 호시노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미국 소식통이 "그는 그저 일본에서 골프를 치고 싶을 뿐이다."라고 평한 뒤 영입전에서 깨끗이 손을 뗐다고 한다.
뭐 이상한 사람이라 그렇지, 후일 자발적으로 연봉을 반납한 데다가 계약금까지 반납하겠다고 할 정도로 정직하고 착한 사람이긴 했다. 이후 자기 돈으로 가족공원도 짓는 등 지역사회에 봉사도 많이 하고 독실한 기독교도 생활을 이어간 좋은 아저씨. 다만 한신에게만 먹튀였을 뿐...(...)

3. 은퇴 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플로리다 주 포트 마이어스에 자기 이름을 딴 '''마이크 그린웰 패밀리 펀 파크'''라는 공원을 운영하기도 하고[9], NASCAR 경주에 출전하기도 하며 살고 있다.
[1] 통산 460볼넷(79 고의사구) 364삼진으로 메이저 통산 통산 BB/K가 1.26이다[2] 여기에 한이 맺혔는지, 그린웰은 칸세코의 금지약물 복용 사실이 드러난 이후 칸세코의 MVP 박탈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3] 그린웰이 보스턴에 있던 시절 댄 듀켓 단장을 보좌하던 아마추어 세이버메트리션 마이크 김블은 그린웰의 좌익수 수비력을 '재앙'이라고 회고한 적이 있고, 일본으로 왔을 당시 한신의 주전 유격수이던 쿠지 테루요시는 "외야에서의 송구가 체인지업으로 날아왔다"는 증언을 남겼다. 이 쿠지는 나중에 주니치로 트레이드된 뒤 이종범을 외야로 밀어낸 장본인이기도 했다.[4] 정확히 말하자면 1채를 계약했는데,좁다고 징징대서 옆집을 산뒤 벽을 허물어서 2채다.[5] 그나마 토마스 오말리 같은 예외도 있는데 이쪽은 홈런이 적다는 이유로 한신 구단에서 내쳐버리는 바보같은 짓을 저질렀고 결국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가서 1995년 야쿠르트의 우승에 공헌하면서 한신이 땅을 치게 만들었다.[6] 해당 시즌에 개막전부터 연속경기안타 기록을 24경기로 갱신했다. 기존 기록은 래리 레인즈가 40여년 전에 세웠던 20경기였다.[7] 당시 재취임한 요시다 요시오 덕에 방출은 면했고, 이후 대타로 각성하여 다시 부활에 성공해 맹활약하긴 했다.[8] 6안타 중 2루타는 1개, 3루타가 1개였다. 3루타를 친 뒤 대주자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요시다 감독이 직접 격려차 3루까지 나가는 등 극진하게 대접했지만...[9] 이 공원은 훗날 200만 달러 가까이 되는 돈에 팔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