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역사

 



1. 개요
2. 처음 미국 땅을 밟은 사람들
3. 독립전쟁 이전
4. 건국 이후 영토 확장
6. 세계 최강대국으로


1. 개요


미국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폴란드볼로 간략하게 보는 미국의 역사

Vox에서 제작한 '어떻게 미국은 초강대국이 되었을까?'

미국 역사지도 및 영토변화 (국기 & 주 승격 지도)

2. 처음 미국 땅을 밟은 사람들


북아메리카에 처음으로 도래한 사람들은 빙하기 시절 베링 해협[1]을 통해서 북아시아에서 육로로 건너온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이다. 그 시기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으나 많은 역사학자, 고고학자, 고인류학자들은 약 3만 년 전에 처음으로 북미 대륙이 인류에게 발견됐으며, 1만 5천 년~2만 년 전 대규모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마지막 빙기를 필두로 아프로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육로는 완전히 끊어졌고, 곧 아메리카 대륙은 인류가 정복했으며 고대인들은 이후로 다양한 문화와 문명을 꽃피웠다.
북미에는 너무나도 많은 부족과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북미 원주민 문화'라고 퉁치기에는 너무 범위가 광범위해지며, 그렇기에 식민지 시대 이전의 역사는 짧게 정리하기 굉장히 어려워진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이들 문화는 고인디언(Paleo-Indian, 혹은 Paleo-American) 문화에 기반을 두고 발달하였으며, 많은 문화권이 현재 미국과 캐나다 땅에 위치해 있는 그레이트플레인스와 오대호 주변으로 발달하였고, 또한 서부 및 남부의 인접 지역에도 자리잡았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유사한 스토리의 창조 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미시시피 호를 숭상시하던 애니미즘 정서와 관련히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8천 년경에는 나디네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구사하던 사람들이 태평양을 항해해서 북미 태평양 해안에 정착했다. 이들은 후에 아사바스카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그 후에는 아파체와 나바호 족 등으로 분화되었다. 이들의 언어와 문화는 고인디언 문화권을 필두로 생겨난 기존의 북미 원주민의 문화와 판이하게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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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원주민의 민족적/문화적 분류.
서기 9세기 들어서 미시시피 강을 중심으로 해서 소규모 도시 국가들이 형성되었고, 외부와 교역하거나 장대한 건축물을 만들고 인구 수만 규모의 도시도 지니는 등 미시시피 강은 북미에 뿌리내린 수많은 문화권 중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으로 손꼽힌다.
1142년경에는 온타리오 호수를 주변으로 하여 이로쿼이 연맹이 결성된다. 현대에는 프랑스어인 '이로쿼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있지만 이로쿼이 연맹의 사람들은 본인의 부족연맹을 하우데노사우니(긴 집에 함께 사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렀다. 이로쿼이 연맹은 현재의 미국과 캐나다 영토에 걸쳐져 있었으며, 히아와타를 비롯하여 데가나위다(일명 피스메이커, Peacemaker), 지곤사세 등의 평화주의적 지도자들이 비슷한 방언 수준으로 다른 언어를 쓸 뿐인 모호크족, 오네이다족, 오논다가족, 카유가족, 그리고 세네카족이 모두 통일되어 평화로운 이웃사촌으로 살아야 한다며 구성한 일종의 연합부족의 형태였다.[2] 히아와타는 전쟁에 시달리는 이 다섯 부족들의 국민들을 위하여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설득해 나가며 연합을 이뤄냈고, 끝내 전쟁을 통해 공포적인 정치를 하던 모하크족의 지도자 타도다호까지 설득해내는 데 성공해 '대평화율법'을 선포함에 따라 다섯 부족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다. 다섯 부족이 연합되었기에 '오족 연합(Five Nations)'라고도 불리는데, 1722년 투스카로라족이 가입해 잠시 '육족 연합(Six Nations)'가 되었었다. 일종의 연방제이자 양원제로 이루어져 있는 이로쿼이 연맹의 정치 체계는 굉장히 민주적이었으며[3], 수세기 후 벤자민 프랭클린조지 워싱턴은 이들의 후손들에게 직접 이로쿼이 연맹의 정치 체계를 배워 연구하였고, 이는 후에 완성되는 미국 헌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전설에 따르면 모든 부족들이 비무장하고 무기들을 모두 한 소나무 밑에 묻었는데, 흰머리수리 한 마리가 날아와 소나무 위에 앉아 울부짖었고, 이를 본 데가나위다가 "수리가 우리들을 항상 지켜볼 것이며 위험한 상황에서는 소리내 울어서 우리에게 알릴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미국의 상징이 흰머리수리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로쿼이 연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Extra History'라는 역사 전문 애니메이션 유튜브 채널이 제작한 영상이 있으므로 참고 바람. 1편 2편. 한국어 자막도 있으며, 여담이지만 이 채널은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에 관련된 영상도 만들었다.
북미 원주민들은 대부분 남부에 상륙한 콘키스타도르들에 의해 쫓겨나기 시작했고 영국인들이 들어온 동부는 처음엔 공존을 꾀하다 나중에는 영국도 스페인처럼 전부 학살하거나 외진 곳으로 쫓아내기 시작한다. 이것은 미군과의 인디언 전쟁으로 이어진다.

3. 독립전쟁 이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뒤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동해안에 식민지가 건설되었으나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사망했고[4] 1607년 영국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에 건설한 식민지가 현 미국의 모태가 된다. 그 이후 1620년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도달한 청교도[5]들이 건설한 식민지[6]는 변두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이 살아남은 것은 그야말로 운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소상공인들이라서 낚시대 하나 챙겨간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황무지 개척에는 능력이 없었다. 그 결과 제임스타운의 전례를 밟기라도 하듯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12월에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메이플라워호가 다시 영국으로 떠난 이듬해 4월에는 거의 절반인 54명만 살아남아 있었고, 그나마도 절반은 어린아이들이었다. 이들이 살아남은 이유는 순전히 인근에 거주하던 원주민 왐파노와그족들의 호의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나마도 두 번이나 유럽인에게 납치당하고 노예로 팔리는 등의 고생을 하다가 겨우 메이플라워호 도착 1년 전에 돌아왔다가 2년 뒤에 역병으로 사망한 티스콴툼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이 사람만 '''영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표류인들은 티스콴툼이라는 발음도 못 해서 스콴토라고 불렀다.
필그림들은 원주민들을 사탄의 종자라고 불렀다.[7] 하지만 정착민들의 계속되는 확장과 더불어 왐파노와그 부족의 영역에 침범하게되고 결국 필립왕 전쟁 때, 왐파노와그들은 정착민들을 공격해서 양측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정착민들에 의해 왕파노와그 족은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된 평화협정이 맺어진 지 50년도 지나지 않아서 거의 절멸했다. 이 시기를 다룬 글.#
이후 계속된 식민 사업으로 미국 동부 13개 주의 기초가 되는 식민지들이 세워진 상황(1732년)에서 여러 요인들로 인한 본국과의 불화가 생겨난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 재정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영국이 치안 유지비를 식민지들에게 부담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사실 미국에 주재하던 밀수업자들(아직은 미국인 아님)이 영국의 무역 재정 적자를 악화시킨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처음엔 관계 개선을 원하였을 뿐 독립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식민지 출신 온건파들의 주된 입장은 '''"저기요, 그렇게 세금 의무 주시면 권리도 줘야죠."''' 정도로. 프랭클린의 "대표 없는 곳에 세금도 없다."라는 유명한 발언이 이런 의견의 연장선이었다. 다만 실제로는 세금 못 내겠다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식민지 대표들이 영국에 가서 대서양 건너 식민지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은 개소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 실제로 당시 기록을 봐도 정치적 권리를 달라는 것보다 세금 내기 싫다가 훨씬 많다.
여튼 영국 본토는 식민지의 반발을 무시하고 인지세를 걷어서 식민지의 공업성장을 억제하여 식민지를 영국의 시장 정도로 유지하려 들었다. 이에 대해서 영국인들이 식민지인들에게 참정권을 주면 어느 순간엔가 그 세력이 대책없이 커져 버린 식민지가 본토를 누르고 정치-경제적 중심지가 될 것을 우려했다는 설도 있다. 현재 미국과 영국의 내수경제 규모를 생각해보면 일리있는 판단이다. 소규모 권리를 인정해주더라도 실제 정치-경제적 영향력과 행사 가능한 권한의 괴리로 인한 불만은 터져나올 것이며, 결국 독립을 하든지 아니면 본인들의 힘에 걸맞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든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후자가 된다면 본토가 식민지에 먹히게 되는 셈.
그러다가 당시 식민지 주민들이 즐겨마시던 차에 세금을 붙이려고 하자 분노한 보스턴 시민들이 동인도 회사 소유의 차를 바다에 집어던지는 사태가 터지고 분노한 영국은 매사추세츠 식민지 자치정부를 폐지하는 등 초강경 자세로 나간다. 이에 13개 식민지의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서 대륙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하는데 [8] 이미 뉴잉글랜드 일대에서는 현지 민병대의 소요 사태를 억누르기 위해 주둔한 영국군과 자위권을 주장하며 무장한 민병대 간에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고 1775년 4월 19일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본격적으로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여기서 민병대가 덜컥 영국군을 상대로 이겨버리자 화가 난 영국은 말 안 듣는 식민지 놈들한테 혼쭐을 내주기 위해 약 4만여 명의 군대를 대대적으로 파견하게 된다.
결국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선 본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대륙회의는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대륙군(Continental Army)을 결성, 자발적으로 참여한 민병대 등과 함께 독립전쟁에 나선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식민지의 주된 여론은 '국왕 폐하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의회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우리들의 권리를 지키자'는 수준에서 머물고 아예 영국과 관계를 끊고 독립하자는 여론은 주류가 아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독립을 주장하는 급진파가 여론을 장악하게 되었다.[9] 결국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오합지졸 민병대를 박박 긁어모은 대륙군으로 당시 세계 최강국 영국이 식민지를 응징하기 위해 각잡고 파견한 정예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여기에 여러 실책까지 겹쳐 대륙군은 연전연패하고 와해 직전까지 몰렸으나 행운의 여신의 도움[10]과 끝장에 몰린 워싱턴의 도박수가 성공을 거두면서 전황은 지지부진해진다. 이에 프랑스, 스페인와 네덜란드 등이 영국군에 맞서 제법 선전하는 대륙군을 보고 계산기를 두드려본 결과 가능성 있는 게임이라고 판단하여 대륙군 편을 들어 참전하면서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전되었다. 결국 지지부지해진 전황에 막대한 전비 부담까지 가해지던 와중에 새러토가에서 대륙군이 대승리를 거두자 영국은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자'는 기존의 전략에서 '어쩔 수 없이 독립을 인정해야 한다면, 전황을 최대한 유리하게 만들어 뜯어낼 수 있는건 최대한 뜯어내자'는 전략으로 바꾸었으나 그마저 1781년 요크타운 전투의 패배로 실패하면서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영국은 1783년 파리조약을 통해 미국의 독립과 미시시피 강 동쪽의 영유권을 승인하였고, 1787년 미국은 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미국의 국기에 줄이 13개 그려져 있는 이유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미국을 구성한 주체가 바로 이 13개 식민지이기 때문. 참고로 최초로 미국 헌법을 승인하고 연방에 가입한 주는 델라웨어 주로 The First State라고 불린다.

4. 건국 이후 영토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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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1803년 212만㎢에 이르는 프랑스령 루이지애나[11]를 프랑스로부터 헐값에 구입하였다. 당시 유럽에서 전쟁을 하며 재정적으로 악재를 겪던 나폴레옹에게 온 루이지애나 매각 제안은 달갑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 후 'Manifest Destiny(명백한 운명)'이란 사상 아래 1848년에는 멕시코와의 전쟁[12]으로 멕시코 북부를 싸그리 뜯어갔다. 1867년에는 러시아 제국와의 협상으로 알래스카를, 1898년에는 하와이 공화국 합병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100년에 걸쳐 영토를 서쪽으로 마구 넓히게 된다. 이때 금을 찾아다닌 것을 골드 러시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주민과 소위 '인디언'으로 불리던 북미 원주민들 간의 전쟁이 계속된 끝에 원주민들은 거의 멸망하고, 살아남은 일부 후손들은 보호구역(Reservation Area)에 갇혀 사는 꼴로 전락하고 만다. 어느 나라나 어두운 역사가 있지만, 자유와 민주주의의 나라라는 곳에서 벌어진 이런 사태는 현재 미국인들 중에도 반성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꽤 있다. '인디언'이라는 명칭이 좀 더 이들을 존중하는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으로 대체된 것도 그러한 맥락 가운데 하나. 그러나 아직도 인디언이라는 호칭은 매우 많이 쓰인다. 대표적으로 대놓고 인디언이라고 한 야구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나 '레드스킨즈'. 지금도 원주민 보호구역은 유지되고 있고, 미 정부는 그들에게서 어떠한 세금도 걷어가지 않으며 지역에 따라 지원금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약물 중독 문제, 높은 빈곤 수준, 낮은 교육 수준, 미국 사회와 교류가 거의 없는 고립성 등 원주민의 삶의 형편은 대체로 암울하다. 황량한 벌판에 카지노를 세워서 부유하게 된 몇몇 개인이 존재하는 정도이다.

5. 남북전쟁


미국 정부는 주 여럿이 힘을 합쳐 연방정부를 구성하는 연방주의(federalism)를 기초로 한다. 식민지들로부터 계승된 첫 13주를 시작으로 차츰 북아메리카의 영토가 다양한 형식으로 주로 변형되어 흡수한다.
미국에서는 이런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힘싸움이 항상 있어왔다. 건국 초기에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연방주의를 주축으로 강한 연방정부로 조금 더 유럽적인 국가체재를 갖추려고 했지만 토마스 제퍼슨의 견제로 지방자치는 그 형태를 유지한다. 각 주들은 연방정부에 동등한 권한을 요구하고 심지어 "여차하면 탈퇴해서 다른 나라에 붙는다?"는 위협도 서슴치 않았는데. 이것이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 참혹한 전쟁을 겪은 그 다음이었다.
노예제로 인한 갈등은 남부가 CSA(Confederate States of America;남부 연합)로 독립하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결국 전쟁(1861.4~1864.4)이 터지고 만다. 초기에는 로버트 E. 리가 지휘하는 남군이 여러 가지 열세에도 불구하고 계속 승리를 거둬 독립을 쟁취할 것처럼 보였지만 율리시스 S. 그랜트와 매클래런 등이 앤티덤 전투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북진하는 남부군을 물리치면서 전세는 역전되어 승리는 북부에게로 돌아갔다.

6. 세계 최강대국으로


이후 에이브러햄 링컨부터 공화당그로버 클리블랜드민주당 8년을(그나마도 연이어진 게 아니었다) 제외하고 44년을 해먹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영토는 해가 갈수록 팽창했고,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였던 탓에 이민자들에게 비교적 관대해 아일랜드나 다른 유럽 국가 등으로부터 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이니 인구도 날로 증가했다. 그 세력이 나날이 강대해졌다. 토머스 에디슨, 니콜라 테슬라 등의 발명가가 활약한 곳도 모두 미국이었다. 이렇게 꾸준한 발달로 19세기 즈음에는 고립주의 성향으로 정치적 영향력만 없다뿐이지... 이 당시의 사회상은 마크 트웨인의 풍자소설 '도금 시대' 등에도 잘 나타나 있고, 특히 이 즈음부터 에디슨의 제너럴 일렉트릭이나 웨스팅하우스 등 지금도 잘 알려진 기술발전의 상징들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유럽은 이렇게 성장한 미국을 의식하지 않거나 애써 무시하고[13] 자기들끼리의 싸움에만 열중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자유방임주의가 극한으로 치닫는 시기이기도 했다. 거대 기업집단(트러스트)의 등장으로 앤드루 카네기, 존 데이비슨 록펠러,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존 피어폰트 모건 등의 유명한 강도 귀족들이 나타난 것도 이때였다. 이미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도 전에 '''100층이 넘는 고층빌딩'''들을 세우고 했던 것을 보면 그 국력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은 꽤나 악명이 높아서[14] "사회주의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발현할 것이다" 라고 많은 이들이 예견했으나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국민정서나 기존 정당들의 간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사실 이 때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가 노동자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수준이라(...) 다른 나라에 비교해 보면 그렇게 나쁜 근무 환경도 아니었고 때에 맞춰 적절한 개선이 있어줬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미국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영국프랑스가 세계 각지를 식민지화하는 꼴을 보더니 위기감을 느끼고 제국주의를 발동하여 갓 독립한 필리핀을 대통령이 받은 '신의 계시'로 식민지화하고, 하와이를 합병해버리고, 청나라[15]일본을 영국과 같이 군함을 몰고 가서 개국시켜버린다. 신미양요도 남북전쟁 직후에 일어났다.
필리핀을 합병하게 된 계기인 미국-스페인 전쟁은 미국의 팽창노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전쟁이었으며, 스페인의 식민지 지역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대신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미국의 대외 팽창이 짧은 시간에 급속도로 이루어진 원인은 미국의 빠른 해군력 증강과 영국의 대서양 철수에 있다. 영국은 신생 독일 제국을 강하게 의식해서, 노골적으로 광역 어그로를 끄는 빌헬름 2세의 팽창을 막기 위해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대서양 해군 전력들을 독일을 포위하려고 차출해 버렸다. 영국이 대서양 해군을 유럽으로 철수시키면서, 라틴아메리카는 완전히 미국의 소유가 되었다.
19세기 내내 미국은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문제 불간섭(먼로 독트린)과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 식민지화 대신 통상 위주의 외교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러 '서부개척'이 완료되어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더 이상 확보할 땅이 없게 되자 곧 180도 태도를 바꾸어 태평양 너머의 하와이를, 미국-스페인 전쟁을 통해 1898년 필리핀푸에르토 리코를 집어 삼켰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카츠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명시한 중재 조항을 엿바꿔 먹으며 조선일본에 넘기는 데 일조했다.
이미 차차 무너져가고 있었던 고립주의 노선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조지 워싱턴이 유럽에서의 전쟁에는 휘말리지 말라고 하던 유언도 어기고 끌려나온다.[16] 허나 마음에도 없던 감투라고 윌슨 대통령이 고생해서 차린 UN의 전신격인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참가를 의회에서 부결해버리고 다시 국제무대에서 버로우 탄다.
그리고 시어도어 루스벨트로부터 촉발된 공화당의 분열로 잠시 8년간 정권을 잡았던 민주당은 1920년 대선에서 공화당 워런 G. 하딩이 승리하면서 우드로 윌슨의 민주당 8년 정권이 끝나고 대공황까지 12년간 공화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가 미국의 제1차 황금기인 이른바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이다. 이 시기에 금주법이 실행되어, 불법 주점 등으로 갱단과 마피아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벌게 해주는 등 삽질을 하던 적이 있었으나, 사회적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 특수로 비약한 생산력을 내수에 쏟아부으며 중산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들 중산층의 삶을 윤택하게 한 것은 이른바 '할부 판매'로 당시로서는 고가의 도구였던 세탁기[17], 라디오[18], 자동차를 쉽게 장만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미국은 1920년대에 중산층들이 자가용 한 대와 라디오 1대를 마련할 수 있는 나라라는 위엄을 달성하게 된다.[19] 하지만 빈부격차 등 문제점도 많았으며 무엇보다 이러한 호황 자체가 대규모 감세에 따른 자산시장 호황이 큰 역할을 했다. 쉽게 말하자면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와 비슷한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것이다.

7. 대공황뉴딜정책


결국 1920년대 후반부터 악성재고가 늘어나는 등 조짐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더니 결국 1929년에 주식시장의 거품이 붕괴됨으로써 대공황을 맞게 된다. 항목 참조.
이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으로 대공황을 빠르게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고 흔히 여겨진다. 하지만 이건 일반적인 인식이고, 최근에는 그 효과가 과연 있었는가 하는 반론이 제기되는 등, 여러 가지 이론이 대두되고 있다.[20] 여튼 1930년대 초반은 미국 역사에서 드물게 고통스러운 시기였으며, 이 시기에야 비로소 현재 미국의 상징 중 하나인 '사회 보장 제도'가 도입되었다(1933년). 농민들의 경우는 도시의 노동자들보다 좀 더 긴 시간을 고통 속에 보내야 했는데, 하필이면 이 시기 중서부를 휩쓴 몇 년간의 가뭄이 오클라호마를 중심으로 한 중서부 평원 전체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이 시기의 황무지를 특별히 황진지대(Dust bowl)라고 부른다) 수많은 농민이 빈민이 되어 그나마 날씨 좋은 서부 해안으로 새 삶을 찾아 떠났다.[21] 이 시기를 배경으로 다룬 소설로 분노의 포도가 유명하다. 한편 1930년대 후반을 거치며 가뭄도 잦아들고 경제는 상당히 회복되었는데, 이후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불길이 치솟자 미국 경제에는 다시 호경기가 찾아오게 된다.
물론 이때 호경기가 왔다는 게 꼭 전쟁 덕분이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오히려 전쟁은 시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많은 비극을 낳는다. 실제로 전쟁 때문에 통계상의 경제 수치가 좋아지긴 했어도, 그게 실제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였던 것은 아니었다.[22] 병사 징집으로 인해 실업률이 하락하고, 전쟁을 위한 정부지출의 증가로 GDP가 증가한 것이다.
그리고 외교적으로 미국은 다시 한번 고립주의와 간섭주의 양쪽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결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유럽에서 대혼란이 일어나면 결국 미국에도 악영향이 온다"라고 강력히 주장하여, 영국을 돕기 위해 막대한 물자를 수송해 줬으나 미 의회의 강력한 견제로 이때만 해도 본격적으로 전선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태평양 너머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열강 대열에 합류한 일본제국주의 야망과 이로 인한 무분별한 영토 확장을 위해 대동아공영권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이에 열받은 미국은 석유 수출을 끊어버리겠다고 일본을 협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미국을 한번 세게 치고 협상테이블에 불러오려고 진주만 공습을 실행하여 미국 상대로 전쟁을 걸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의 최대의 성공작이자, 이후 패망의 확실한 기초를 다진 이 사건으로 미국인들은 크게 격분했으며, '''그 분노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것'''임을 일본은 끝끝내 몰랐다.

8. 제2차 세계 대전


미국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매우 '모순적인' 전쟁을 치렀다. 미국은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에 모두 개입하면서 글자 그대로 '세계적 차원의' 전쟁을 치른 유일한 참전국이었다. 하지만 전쟁 수행을 위한 국가적 동원의 정도에 있어서는 동맹국이나 적국의 '총력전' 수준에 한참 모자랐다.[23]

- Dennis Showalter, "Global Yet Not Total : The U.S. War Effort and Its Consequences", Roger Chickering, Stig Förster and Bernd Greiner(Ed.), ''A World at Total War : Global Conflict and the Politics of Destruction, 1937-1945''(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p.109

미국이 엄청나게 분노한 건 당연한 현상이다. 해군 기지가 하나 제대로 얻어터지고,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당했으니'''[24] 당연하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과 국민들은 대대적으로 전시체제에 들어가 유럽과 태평양 '''양쪽에서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으며, 더 많은 양의 물자와 더 많은 양의 무기를 동맹국에 제공했다. 진주만 침공 소식을 들은 윈스턴 처칠은 이제 전쟁에서 이겼다며 씨익 웃었다고 한다.
불과 2~3년 사이에 각종 항공기와 차량을 '''수십만 대'''씩 뽑아내는 기염을 토하며 폭격기를 한시간에 한대꼴, 심지어 리버티쉽이라 불리는 양산형 수송선의 경우 '''하루에 두 척씩''' 만들어졌다는 믿지 못할 통계마저 있다.[25] 뉴딜 정책이 약발이 점차 떨어져 가던 마당에, 무한정 소비를 보장하는 이런 전시체제는 미국에게 한 줄기 구원의 빛과 같았다.
또한 렌드리스 계획으로 피폐한 동맹국에게 물자를 제공하기도 했다. 대전 기간동안 같은 물량대국으로 평가되는 소련도, 전차나 야포와 같은 전투병기에 예산을 쏟을 수 있었던 이유 또한 미국의 렌드리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병사의 피복이나 식량은 미국의 렌드리스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고, 소련의 제파식 전술의 기반이 되었던 군트럭도 미국에게 지원받은 트럭이었으며 대부분의 화차 또한 미국제였다. 전차나 항공기 등도 지원받았으며, 우방국 영국 또한 미국의 렌드리스가 없었다면 전쟁수행에 어려움이 많았을 만큼 연합 우방국으로서의 미국의 위치는 매우 컸다. 그러면서도 자기 것은 다 챙긴 것을 보면...
결국 전쟁은 대승리였으며, 이때 유럽 열강들이 전쟁의 피해로 초토화된 것을 계기로 이후 '''세계의 맹주로 급부상한다.''' 그러나 베링 해협 너머로 공산주의 사상을 앞세워 주변국들에 사회주의 정권을 하나하나씩 세우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소련이 미국에게 도전장을 던지기 시작하였으니...

9. 냉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국은 자본주의(자유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국가로, 소련은 공산주의(사회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국가로서 서로 양분됐고, 미국과 소련을 지지하는 국가들이 서로 줄을 서면서 냉전의 서막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리스에서 공산파 게릴라와 정부 간의 내전이 발발한 것을 보고 미군이 직접 개입해 공산 게릴라와 싸운 직후, 미국에서는 공산 세력이 득세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UN에서 적극 항의하고 UN군 결성과 파병을 건의한다. 때마침 중국과 대만 중 누가 상임이사국이 되느냐로 싸우다가 소련이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을 거부한 상태라 소련을 제외한 전 상임이사국들이 찬성하여 기적적으로 UN군 파병이 이뤄진다.[26]
참전 초기에는 스미스 특임대가 오산에서 관광먹고 24사단이 대전에서 패배하는 등 고전했지만 인천 상륙작전으로 결국 전세를 역전시키고, 이후에도 공산군과의 교전에서 주력 역할을 하는 한편 한국에 대한 막대한 물자 지원으로 한국전쟁 승전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이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해리 S. 트루먼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20년 정권은 슬슬 고인 물은 썩는다고 부정부패가 이어졌다. 결국 한국 전쟁을 끝내겠다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승리로 민주당 20년은 종식되고 만다.
여하간 이 민주당 20년이 끝난 이후 미국 경제는 1차 대전이 끝나자 대공황이 일어나듯이 추락할 것 같았지만 의외로 계속 성장, 미국의 쇠퇴와 그에 따른 소련의 독주를 기대하고 있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예상을 가차없이 깨버린다. (이미 사망했지만) 동시에 미국은 마셜 플랜이라는 막대한 경제 원조로 서유럽 경제를 되살리고 아시아권 반공 국가들(대표적으로 필리핀, 대만, 일본, 한국 등)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엄청난 전후 호황기를 누리던 미국 시장은 그야말로 상품의 블랙홀이었고 전후 빈곤에 허덕이던 서방 국가들은 대미 수출길이 열리며 부흥을 이루게 된다. 이 시기가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이다. 1950년대 미국 중산층의 삶의 질 수준은 대단히 높은 편으로 고등학생들도 자가용을 끌고 다닐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사정은 1960년대에 들어가서 달라지게 되는데, 밖으로는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날리고, 니키타 흐루쇼프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니마니 하면서 맞먹으려고 들게 된다. 이에 존 F. 케네디린든 존슨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행정부는 아폴로 계획을 세우고,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등 공세적으로 나섰으나 도리어 점차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내부적으로는 천민 자본주의적 소비문화 범람에 반발, 도덕주의가 득세하며 히피를 비롯한 뉴웨이브 운동이 득세했고, 미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전쟁 범죄 등의 소식이 본토에 알려지면서 반전주의가 확산되어 전쟁에 대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것은 리처드 닉슨 때의 일로(아폴로 계획의 결실인 달 착륙도 이때 따 먹었다), 동시에 소련과 각을 세우던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가지는 데탕트를 앞세우고 재선에도 성공하지만 그 직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게 된다. 이후 승계한 포드 대통령을 거쳐 인권 외교를 표방한 지미 카터의 민주당 행정부가 들어섰지만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해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게 정권을 내주게 된다.
로널드 레이건의 공화당 행정부는 "레이거노믹스"라고 일컬어지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스타워즈"로 대비되는 군비경쟁을 펼치면서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영국과 함께 보수주의 시대를 연다. 우연인지, 아니면 군비경쟁 정책의 결실인지 조지 H. W. 부시 행정부 들어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와 미국의 아성에 도전하던 일본 경제의 몰락으로 인해 미국은 이제 그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명실상부한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10. 우리는 극복하리라(We shall overcome)



1960년대를 비롯한 미국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바로 민권(Civil rights) 운동이다. 비록 50년대가 경제호황에 힘입어 미국인들, 특히나 백인 미국인들에게는 최전성기였다고는 하지만, 에릭 포너에 의하면 90년대 이전까지 중산층과 상위층 교외에는 90% 이상이 백인이었으며, 유색인종은 1%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여성 인권 또한 시궁창으로, 낙태는 당연히 합법화되지 않았으며 비록 사문화된 법이긴 했지만 1959년까지 미국에서는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이 불법이었다.[27] 성소수자의 인권은 뭐... 말할 필요도 없겠다. 때문에 이들 사이에서는 자유를 향한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즉 미국 흑인들의 민권운동은 지금의 미국 민주주의의 기틀을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현대적인 개념의 시민 불복종 운동의 형태, 즉 정의롭지 못한 법에 공개적으로 불응하며 법적인 처벌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마틴 루터 킹의 철학 아래의 흑인 민권 운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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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색인종 전용 급수대에서 물을 마시는 남자
흑인민권운동이 시작된 배경은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들이 해방된 19세기까지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노예들이 해방되고 수많은 흑인들이 자유의 몸이 되자 노예들에게 위탁되던 남부의 경제는 휘청이기 시작했는데, 수정헌법 13조는 노예들을 해방시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범죄자들의 노동은 예외로 한다'라는 예외사항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 흑인들을 체포해서 노예나 다름없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부량죄', '쓰레기 투기죄' 등의 사소한 것들로 트집을 잡혀 감옥에 갇힌 흑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는 어린이들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 또한 KKK가 기승을 부려 범죄를 저질렀다고 의심되는 흑인들, 심지어는 그냥 길을 걷던 흑인 행인들까지도 백인 군중에게 구타당하고 목매달리고 화형당했으며, 이런 말도 안되는 학살이 '자경 행위'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곧 남부 외의 주들의 지탄과 세계적인 비난이 미국에 가해지자, 이러한 물리적인 흑인에 대한 폭력은 조금씩 사그러들었고, 대신 '합법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흑백 분리(Segregation)의 시작이었다. 소위 짐 크로(Jim Crow)[28] 법안이라 불리는 말도 안되는 법안들이 상하원을 통과했으며, 이는 '흑인들은 영원히 백인들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 믿음 아래 생긴 것들이었다. 식당, 극장, 해수욕장, 학교, 심지어는 급수대까지도 백인 용과 유색인종 용으로 나눔과 동시에 흑인들의 민권(民權), 즉 민주시민으로서 목소리를 낼 권리들인 투표권, 집회권, 시위권 등을 박탈하기 시작했다. 이를 어기거나 반발하는 흑인에게는 백인들의 손가락질, 발길질, 몽둥이질이 이어졌고, 그렇게 미국의 흑인들은 숨죽이며 억울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955년, 로자 파크스라는 한 흑인 여성이 퇴근길에 버스에 탔다. 그녀가 살던 앨라배마주는 흑백 분리가 일상화된 지역이었고, 버스에서도 앞줄인 백인 전용 좌석과 맨 뒷칸인 흑인 전용 좌석이 분리되어 있었다. 로자가 탄 버스에 백인들이 많이 타면서 버스기사는 유색인 전용 표시를 로자가 탄 좌석 뒤편으로 밀어버린 후 로자를 비롯한 네 명의 흑인 승객들에게 뒤편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세 명의 흑인 승객은 뒤로 이동했지만 로자는 이를 거부했다. 버스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로자는 흑백 분리에 관한 몽고메리시 조례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녀는 비록 같은 날 훈방 조치 되었지만, 이같은 차별에 분노한 그녀는 몽고메리 전역에 이 사실과 버스를 보이콧하자는 내용의 유인물을 돌렸고, 흑인 교회를 중심으로 몽고메리 전역의 흑인들은 이 소식을 알고 분노해 보이콧 운동에 동참했다. 앨라배마 주는 이런 사태에 당황했고 버스 보이콧 운동을 주도하는 인사들을 체포하고 참가자들을 탄압하며 강경하게 나섰다. 그러나 흑인들은 보이콧 운동을 이어나갔고, 버스의 주 이용객들이 가난한 흑인들인지라 몽고메리의 버스회사들은 무려 65%에 달하는 손실을 입기에 이르렀다. 결국 1956년, 연방대법원은 "버스에서의 흑백 분리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또한 엄청난 손실을 입은 몽고메리 버스회사들의 아우성에 결국 앨라배마주는 백기를 들기에 이르렀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흑인민권운동의 방아쇠를 당긴 사건이었고 이후 흑인민권운동은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버스 보이콧 운동을 시작으로 민권 운동가들은 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함께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시위했고, 백인 폭도들의 폭력과 협박에도 흑인 학생들을 백인 학교에 편입시키는데 앞장섰다. 또한 백인 전용 식당, 영화관 등에 앉아서 아무말 하지 않고 앉아있는 연좌농성인 '싯인(Sit-in)' 또한 시작되었다. 마틴 루터 킹의 평화적인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을 추구하던 운동가들과 말콤 X를 필두로한 과격 노선의 무장 투쟁 운동가들이 대립하였으나, 결과적으로 '평등'이라는 지향하는 목표는 같았기에 서로 연대하기도 했다. 흑인민권운동이 절정에 이르른 것은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행진으로, 워싱턴에서 총 집결한 흑인과 이 운동에 동조하는 백인들이 에이브러햄 링컨 동상에 도착해 모였고 그 수는 무려 25만 명이나 되었으며, 여기에서 킹 목사의 그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이 미국 전역에 생중계 된다. 그 이후 1965년에도 최루가스에도 굴하지 않고 행진을 이었던 셀마 운동 또한 기폭제가 되었고, 결국 같은 해에 린든 B. 존슨은 그 어떤 이유로든 투표권을 제한하는 것을 금지하는 연방 투표권법에 사인한다. 이 법 서명식에는 킹 목사도 참여하였다.
흑인민권운동은 흑인들의 투표권을 보장하는 의의를 낳았으며 흑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을 완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물론 완전히 인종 갈등이 가라앉지는 않아서 이후에도 LA 폭동을 비롯한 인종 갈등이 계속 생겼고, 현재까지도 미국 경찰의 흑인에 대한 과잉진압을 규탄하는 Black Lives Matter(흑인들의 목숨은 소중하다) 등의 인권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11. 팍스 아메리카나테러와의 전쟁


We have had a globe-straddling empire and a very intrusive foreign policy for decades that incites a lot of hatred and resentment toward us.

우리는 전세계를 아우르는 제국을 가졌으며, 굉장히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수십 년간 유지해왔고, '''결과적으로 우리를 향한 엄청난 증오와 원한을 사게되었습니다.'''

- 론 폴

1991년에 사담 후세인이 일으킨 전쟁인 걸프 전쟁에 미국이 참전하였고,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조지 H. W. 부시는 엄청난 지지도 상승을 이루지만 점차 레이거노믹스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결국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economy', stupid!)'''를 구호로 내세운 빌 클린턴의 민주당이 정권을 잡게 된다. 하지만 일본이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고 이후 1991년 소련까지 붕괴하면서 미국은 넘사벽의 극초강대국에 등극한다.
조지 W. 부시 재임 내내 부시 행정부의 무능함이 만천하에 떨쳐짐에 따라 자연히 공화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9.11 테러로 시작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크 전쟁의 연이은 폭정으로 부시 행정부는 전 세계적인 반미감정을 초래했으며, 그럼에도 계속 일방주의로 나가다가 벼락을 맞고 만다. 특히나 반미감정이 극심했던 중동 지역에서는 이슬람 극단주의에 기반한 테러리스트 단체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에 테러 활동을 끊임없이 일으키면서 미군을 시종일관 괴롭히기 시작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전까지 최근 10년간 서브프라임으로 세계의 돈을 주워 모아서 자국 서민들에게 '잠시 동안' 집을 마련해 주었지만, 부시 정권과 금융당국의 호흡이 맞지 않아 금리를 올리는 바람에 대량의 수금 불가 상태의 대출이 발생했고 동시에 부동산 값도 내려가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 전 세계적 금융 위기를 불러올 것으로 우려되었으나 현재는 어느 정도 진정세를 보이고 있다. 폴 크루그먼 가라사대, "재정 적자가 대공황의 벼랑 끝에서 세계를 구했다." 물론 근본적인 해결이 되었는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당시 공화당은 존 매케인세라 페일린을 후보로 내세우면서 부시의 이미지를 지우려고 안달했지만 이 사건이 결정적 타격이 되었다. 결국 2008년 11월 4일,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29]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공화당은 부시의 족적이 워낙 큰지라 큰 위기에 밀렸으나 색깔론과 건강보험을 바탕으로 다시 지지율을 높이고 있는 형편이다.
2012년에는 버락 오바마가 큰 차이로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밋 롬니에게 승리하였다. 접전주에서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고 지난번 대선에서 이겼다가 이번에 진 주는 노스캐롤라이나밖에 없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회복된 경제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30] 민주당은 그러나 하원을 공화당에 내주고 오바마도 힘겹게 임기를 시작하였다. 2기의 업적은 이란 핵 협상과 호경기도 있겠다. 2015년에는 거품을 걱정해야될 정도로 경기가 호전되었고, 경제 공황은 최소한 면했다. 또한 임기 중 오바마케어 실시, 최저임금제 개선, 동성결혼 합법화 등 복지•사회 정책으로 지지율 상승의 효과를 보기도 했다.
2016년에는 버락 오바마가 8년 만에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뒤 '''정치 경력이 전혀 없는''' 공화당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어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나 'America First(미국 먼저)' 등의 슬로건에서 드러나듯, 미국은 레이건 정부를 방불케 할 정도로 미국우선주의를 천명했고, 이민자 문제나 무역 문제에 있어서는 극히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또한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이 많은 미국 보수층을 의식하고, 트럼프 본인도 트위터에서 "지구 온난화는 중국이 만들어낸 거짓말"(...)이라는 발언을 하거나, 2018년 기록적인 한파를 언급하며 "날씨가 이렇게 추우니 우리는 지구온난화가 오히려 필요하다"(...)이라고 주장한 바 있듯, 트럼프 정부는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체결된 파리협정을 탈퇴하는 초강수를 둬 미국은 전세계 유일의 파리협정 미가입국이 되었다. 더욱이 오바마 케어의 폐지를 전격 실행에 옮기고 있으며, 2019년 현재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도 실제로 건축하는 것을 논의 중에 있다. 외교적으로는 오바마 정부의 스탠스에서 방향을 틀어 중국을 경계하고 러시아에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김정은 국방위원장과 여러 차례 회담을 갖는 등 북미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남북관계와 한미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여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트럼프 정부의 과격한 언행과 행보에 좌우간, 성별간, 인종간, 세대간 대립이 극심해지고 있으며, 대안 우파가 고개를 드는 등 미국은 정치적으로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타임지가 도널드 트럼프를 '미 분단국(Divided States)의 대통령'으로 묘사하며 2016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였듯,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에게 국민 통합은 큰 숙제로 남았다. 그러나 러시아 게이트로 인해 탄핵 정국을 맞이하였고, 현지 날짜 2019년 12월 18일 미 하원이 탄핵안을 가결함에 따라 닉슨, 클린턴에 이어 미국사상 세 번째로 탄핵까지 간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12. 코로나 바이러스 국면


2019년 12월 경부터 중국에서부터 발현되어 그 강한 전염성으로 인해 판데믹으로 발전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는 2020년 1월에 미국에 처음 들여지게 되었는데, 2020년 2월 29일(2월의 마지막 날)에 첫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후 3월 말부터 6월 중반에 이르기까지 미국 내에서 그 감염자와 사망자[31]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사망자 수가 어느 정도 줄어들게 된 6월 말 이후에도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900명 이상, 1000명 이상의 신규 사망자가 평일마다[32] 꾸준하게 증가하게 되어, 결국 2020년 10월 20일을 기준으로 확진자 수는 '''820만 명 이상, 사망자 수 22만 명''', 그리고 2021년 2월 1일을 기준으로는 ''' 확진자 2600만 명, 사망자 45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는 전세계 코로나19 사망자의 5.5분의 1[34] 에 해당하는 수치이며, 이로 인해 2020년 코로나19 사태는 남북전쟁, 스페인 독감, 제2차 세계 대전 다음으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명 피해를 불러온 사건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게다가 트럼프는 이러한 코로나19 범유행 기간 중 이를 본인의 재선을 막으려는 음모론, 가짜 뉴스, 혹은 중국발 거짓말로 치부하거나, 말라리아 치료제(클로로퀸), 자외선 치료, 그리고 살균제 주사(!) 등을 치료법으로 제안하여 피해자가 발생하는 등 대처에 안일한 모습을 보여 국내외적 비판을 받았으며, 이는 미국이 코로나19의 주 감염지역이 되어버리게 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방역을 위해 필수 직종을 제외한 노동자들이 휴직 및 원격근무에 들어갔고 수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실직했고, 학교의 휴교 및 수많은 문화 행사들이 취소됨에 따라 경제적·문화적 타격으로 이어졌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타격은 대공황대침체를 이은 세번째 미국발 경제위기로 이어질 것으로 추측되어 우려를 낳고 있다.
2020년 5월 25일, 위조지폐 혐의로 체포된 비무장, 비저항 상태의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백인 경찰관이 무릎으로 압박하여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며 전국민적 분노를 일으키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인종차별 반대 시위인 '''Black Lives Matter''' 운동의 열기가 다시금 재점화되었고, 미국 사회의 고질적인 인종차별, 사회적 불평등, 그리고 코로나19의 정부 대처와 경제 침체 등으로 인한 불만이 폭발하면서 모든 50개 주에서 시위가 일어나 1960년대 이후 최대 규모의 민권 운동 시위로 이어졌다. 이를 강경 진압하는 경찰들에 대한 저항권 발동 및 빈부격차와 치안 불안정이 극심한 지역 위주로 약탈과 방화가 일어나는 등 폭력 사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위대를 '폭도', '깡패', '극좌 테러리스트'로 칭하며 강하게 비난하였으며, LA 폭동 이후 처음으로 국내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주방위군을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트윗으로 "약탈이 시작되면 사격도 시작된다"라는 1960년대 민권 시위대들을 향한 인종차별적 문구를 인용하거나, 경찰에게 밀려 넘어져 머리를 크게 다친 노인 시위대의 동영상을 극좌 음모론으로 치부하는 등의 언동을 보여 폭력을 선동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해당 시위로 인해 미국 내의 제도적 인종차별주의(institutional racism), 경찰 폭력, 그리고 역사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 등 많은 사회적 쟁점이 공론화되었다.

[1] 지금은 해수면이 높아져 육로가 잠겨있지만 약 1만 년 전 빙하기 때만 해도 육로로 연결되어 있어 아시아에 사는 생물과 아메리카에 사는 생물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2] 캐나다의 국명은 이들의 언어에서 비롯되었는데, '마을'이라는 뜻의 '카나타(Kanata)'에서 가져온 이름이다.[3] 현 정치학자들은 이들의 정치 체계를 아나르코공산주의, 혹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로 분류하기도 한다.[4] 미국스페인령은 남부 플로리다텍사스, 루이지애나, 오클라호마 그리고 서부 캘리포니아애리조나, 뉴멕시코였다. 남부는 쿠바 부왕령의 일부였다.[5] Puritan인데, 이들을 청교도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많다. 영국역사에서 청교도는 국교회에 대항해서 개혁운동을 벌인 이들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들처럼 영국국교회를 버리고 이탈한 이들에 대해서는 분리주의자Separatist라고 부른다.[6] 제임스타운에서 북쪽으로 수백km 떨어진 곳에 위치[7] '영어를 할 줄 아는 스콴토'는 자신들의 정착을 돕는 하느님의 사자였다.[8] 대륙회의에 참석한 뉴욕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같은 경우 '보스턴 놈들이 멋대로 저지른 일에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까지 휘말려야 함?'이러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각 식민지들은 서로를 하나의 국가의 일부가 아닌 별개의 존재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9] 이 과정에서 토마스 페인의 팜플릿 '상식(Common Sense)'이 큰 역할을 했다.[10] 특히 워싱턴의 뉴욕 공략이 실패하고 오히려 영국군에게 쫓겨 롱아일랜드에 고립되었을 때 여러가지 행운이 기가 막히게 겹치면서 가까스로 본토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것은 과장해서 신화에나 나올 법한 영웅담 수준이었다.[11] 연결된 문서인 현재의 루이지애나 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 루이지애나 주의 일부만 포함한다.) 지도상 가운데에 나온, 현 미국 중부의 대영토를 말한다. (미국 본토 면적의 4분의 1이다)[12] 전쟁이라기보다는 거의 땅따먹기 수준이었다. 멕시코는 이때 국토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다. 전쟁을 지휘하던 율리시스 S. 그랜트마저도 옳지 못한 전쟁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나마 미국 내부에 양심적인 사람들이 "이 전쟁은 미국에게 두고두고 좋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는데, 과연 오늘날 멕시코 등 남미 히스패닉계들이 미국의 남부로 대거 이주하고 있다.[13] 예컨대 코난 도일셜록 홈즈 시리즈에는 미국이 의외로 자주 등장하는데, 신흥 부자가 된 신도시 깡촌쯤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14] 하루 12시간 근무에 점심시간 30분만 휴식, 그나마 지급되는 것은 빵 두 조각에 사과 반 알 정도였다고 한다.[15] 청나라의 경우는 영국과 미국, 프랑스, 러시아가 같이 합세해서 불평등조약을 맺었다[16] 하지만 경제에서는 전혀 달랐는데,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전에 전쟁 당사국들에게 자국의 무기를 팔면서 전쟁국들이 발행하는 국채를 사는 등 실속은 다 챙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1차 대전 종전 직전에 영국의 최대 채권국은 미국이 되었다.[17] 지금도 여러 가지 발명 중 주부의 삶에 가장 혁명적인 것이었다고 평가된다.[18] 현재의 TV의 위상과 맞먹으며, 대단히 고가의 물건이었다. 특히 채널 돌리기가 쉽지 않아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지하실에 4개의 라디오를 동시에 갖다 놓고 각각의 방송에 채널을 맞추어두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19] 참고로 한국에서 라디오가 대중화된 것은 1960년대의 일이고 자가용이 대중화된 것은 1980년대 후반~1990년대의 일이다.[20] 참고[21]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이들이 어디에서 왔건 무조건 오키(Oki)라고 불렀는데, 오클라호마 출신 뜨내기란 뜻.[22] 참고[23] 이걸 쉽게 해석하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의 그런 미쳐버린 사기적 물량도 미국의 전체 국력과 비교해 보면 별로 크질 않았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별로 힘 빼고 싸우면서도 다 이긴 것.[24] 당시 일본 해군 사령관인 야마모토 제독은 선전포고를 제대로 하고 나서 공격하려 했으나, 선전포고문을 담은 암호 해독이 늦어져 선전 포고문을 전달했을 때 이미 진주만이 공격당한 뒤였고, 이에 야마모토 제독도 엄청나게 분노했다고 한다. 그러나 원문도 빙빙 돌려 말할 뿐, 전쟁이 있을 거라는 내용은 없었으며 당시 진행 중이던 협상이 결렬됐다는 내용으로 해석되기 쉬웠다.[25] 독일의 U보트로 대표되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이거다. 결국 독일은 전쟁 말기에도 교환비율을 1대1까지 찍어내면서 분전했지만, 미국의 물량은 그 정도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26] 그런데 계속된 연구로 밝혀진 그 당시 기록에 따르면, 소련의 불참은 전쟁 발발의 책임을 회피하고, 미국이 한반도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에 국력 회복 및 유럽에서의 공산화 작업을 위해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한다. 미국도 저게 안 통하면 다른 방식으로 파병을 할 방안을 강구해놓았으므로 어찌되었든 파병은 진행되었을 것이다.[27] 단, 운동이나 노동을 해야할 경우에는 바지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할리우드 여성 배우들이 1940년대부터 와이드팬츠를 자주 입기 시작하자 다른 여성들 사이에서도 유행이 될 조짐이 보였다. 그러나 관습상 밖에서 바지를 입는 것은 기성세대와 사회의 눈초리를 받기 십상이었기에 보편적으로는 치마를 애용하였다.[28] 한 백인 코미디언의 캐릭터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짐 크로는 백인 코미디언이 얼굴에 검은칠을 한 '블랙페이스(Blackface)' 분장을 하고 우스꽝스럽게 흑인들을 비하하는 행동을 하는 캐릭터였다.[29] 케냐 흑인 아버지와 미국 백인 어머니에게서 난 혼혈인이기 때문에 흑인이라고 하기엔 애매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실제로 미국 흑인들 중 백인 피가 섞여있는 경우는 아주 흔하다. 하버드대 헨리 루이스 게이츠 교수에 의하면 자신이 흑인이라고 응답한 미국인의 약 58%가 12.5% 이상의 백인 피가 섞여 있으며, 약 1%가 50% 이상의 백인 피가 섞여 있다고 한다. 그 1% 역시 약 38만 9천 명 정도로 적지 않은 숫자다. 사실 흑인이라고 치더라도 오바마는 혈통이 일반적인 흑인과 크게 다르다. 미국 흑인은 조상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대부분 서아프리카 출신이지만 오바마는 동아프리카니까. 부계로 치면 이민 2세밖에 안 되기도 하고.[30] 사실 가장 최근 있던 세 번의 재선선거에서는 현역 대통령이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31] 이러한 1차 판데믹 시기에는 코로나19의 치사율은 매우 높은 편이어서 사망자가 하루에만 2000명 이상은 우습게 나오는 날들이 많았으며, 6월 중반에 들어서 사망자 수가 점차 하루 평균 400 ~ 1200명 대로 줄어들게 된다. 다만 6월 23일 정도부터 하루 평균 확진자가 4만 명 이상을 찍기 시작하면서 2차 펜데믹(2020년 6월 말 ~ 2020년 10월 초를 기점으로 본다.)이 시작된다. 1차 판데믹 시기엔 사망자 수가 미국의 북동부 주들('''뉴욕''', 뉴저지, 메사추세츠 등)을 기점으로 일일 평균 사망자 수가 하루에 2천 명 이상씩 자주 나왔을 정도로 전염병의 치사율이 매우 높았다는 특징이 있으며, 2차 판데믹 시기에는 1차 판데믹 시기보다는 일일 평균 사망자 수는 절반 가량 줄어들긴 하였으나, 대신 바이러스 자체가 전염성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변이하게 되어 1차 판데믹 시기에는 하루 평균 2만 명 가량의 인구만 확진 판정을 받았던 반면 2차 판데믹 시기에는 하루 평균 확진자가 최소 4만 명 이상, 7월초 ~ 8월 초에 들어선 6만 명 이상, 7만 명 이상까지 가게 되고 8월 중기부터 다시 4만 명 대로 내려오는 등 확진자 수가 매우 많아지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한 1차 시기에 미국의 북동부 주들이 큰 피해를 본 반면에, 2차 판데믹 시기에는 주로 미국의 남동부, 남서부의 인구가 많은 주들(캘리포니아, 텍사스, 플로리다, 애리조나 등)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32] 주말에는 검사량이 많이 적어져서인지 하루 평균 사망자가 평일에 비해 2~3분의 1 정도 수준으로 낮아진다.[33] 초기에는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의 유럽국가들에서 사망자 수가 매우 많이 나왔으나, 현재는 주로 남아메리카의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페루, 남아시아의 인도 등에서 꾸준히 사망자가 많이 나오고 있는 편이다.[34] 5월 중기까지만 해도 10분의 3이었으며, 그 이후에도 전세계 사망자 비율의 4분의 1을 차지하기도 하였으나, 세계 여러 국가[33]에서 사망자 수가 계속해서 증가하는 만큼 미국의 이러한 비율은 조금씩 줄어들어 결국 이와 같은 상태로 좁혀지게 되었다.